백인섭씨와 5년 여에 걸친 온라인 상의 논쟁이였던 1968년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100m 폭 초등자가 백인섭인가?? 를 놓고 실로 많은 시간을 허비 하였다
5년여의 논쟁 끝에 백인섭자신이 1968년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100M 폭 초등자는 1971년 요델산악회 고 송준호에 의하여 초등이 되였음을 실토하였다.
아래의 글은 백인섭의 불로그에서 퍼온 글로서 5년여의 논쟁을 벌이며 백인섭의 산악관과 나의 심경을 밝히고저 한다
2012/03/16 12:34 http://paikinsup.blog.me/120155165169 <정비사유 및 배경 > 그동안 경봉의 거센 시비 그리고 나의 해명이 반복되면서 아주 볼상 사나운 꼴로 빠져버렸다. 이제는 이성을 잃은 감정 싸움이 되어 버렸고 감정은 날로 격화되면서 서로가 상대를 죽여버릴 작정으로 상대를 무차별 비난하는 단계로 되어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를 죽여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도 없는 딜렘마적 상황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악몽같은 딜렘마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 왜 그리고 어떻게 시작되어서 이 지경에 빠져 버렸는지를 다시 한번 차분하게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 시간을 거슬러 오르면서 관련 글들을 모조리 뒤져 보게되었다. 그래서 이제야 처음으로 그의 블로그에서 그가 쓴 초기 단계의 글들까지 읽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소 놀랐다. 초기에 쓴 그의 글들은 논리정연하고 바르고 멋진 글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챙피스럽게 생각했던 후배가 아니라 사실은 자랑스러운 후배가 아니었던가 라고 내 생각이 바뀔 정도였다. 갈등의 시작은 이미 2007년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노루목 관리문제와 요델바트레스 개척자 미상 문제로 클럽전체와 충돌이 시작되었고, 그리고 나와의 충돌은 당시 그가 주도해 벌렸던 소위 요델 부흥운동의 행태와 등반학교 설립문제에 대한 나의 반대로 격화되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러던 중 2008.5 요델 45주기 기념등반 때 산장에서 그의 나에 대한 공격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뜻 밖에도 비난 주제가 설악산 100미폭 빙벽초등건으로 비화했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비난에 나는 너무 화가 나 거의 이성을 잃어 버렸었고 결과적으로 요델 모임은 밤 새도록 개판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수치스러워 후배들 볼 낯이 없게 되었고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당시 그를 추스림했던 희구한테 까지도 싸잡아서 정이 떨어져 버리게 된 것이다. 그 직후에 그 나름대로 쓴 동계 설악산 자즌바위골 개척등반기(2008.6)를 그의 블로그 올렸고 거기서 본격적으로 나를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글이 있었던 것 조차 여태까지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겨우 찾아 읽어보게 된 것이다. 그의 글을 보니 당시 빙벽 하단부 공격을 내가 자신에게 하라해서 시도하다가 한 20미터 정도를 오른면서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지자 나의 하산지시에 따라 포기하고 내려와서 본대가 오른 우측암벽으로 올라왔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참조-2>
당사자의 기억이니 내 기억보다는 정확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100폭 빙벽 하단부 등반에 대한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은 분명 착각이었고 따라서 당시에는 초등되지 않았고 상단부만 초등된 것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제야 당시 내 기억 속의 혼란이 갈피가 잡힌다. 당시 등반목표가 100미폭 빙벽초등이 아니라 자즌바위골을 관통해서 공용능을 타고 넘어 봉정암에 이르는 새롭고 어렵고 위험한 복합등반로를 초등개척하는 것으로 장장 9일(실제로 10일)에 걸친 대 등반이 었다. 따라서 등반일정이 매우 중요사안이고 그 일정을 지키려면 100폭 빙폭을 2일에 돌파해야 했었다. 하단부에서 하루 그리고 중간 단부에서 비박하고 상단부를 하루에 올라야 했다. 더구나 대원이 8명이고 각자 30~40Kg 의 대형 배낭과 함께 거대 빙폭을 올라야 되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등반시간 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단부는 60~70미터이고 상단부는 그 보다 좀 짧아 40미터 정도였고 또한 상단부는 암벽으로 우회가 매우 어렵고 하단부는 우측암벽에 잡목과 턱이 많아 우회가 비교적 용이한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100미폭 암벽을 모두 올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단부 공격조가 전진해서 하단부를 끝내려면 하로 종일 걸릴 판이라 기다렸다가 그 날 중으로 모두 빙벽으로 오른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머지 대원을 우측벽으로 올리고 그리고 8개의 무거운 대형 기스링을 70미터 빙벽위로 끌어 올리는 작업을 서둘러야 했을 것이다. 본대 전체가 70미터의 암벽을 등반하는 것도 그렇고 더우기 40Kg정도의 대형 기스링 8개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들고 위험한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쥬마같은 것이 전혀 없어 맨손으로 드레박질 하듯 끌어올려야 했으니 그것도 불안하고 위험한 위치에서 무려 70미터 길이를 . 다만 그 때 그 일을 미리 예상하고 나는 조그만 도르레 한개를 준비하고 있었다. 움직도르레를 사용하면 무게가 절반으로 주는 효과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래서 나는 중단부 양쪽 바위에 여러지점 확보하켄들을 설치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나머지 대원들이 번갈아 가면서 안전하게 밑에서 무거운 기스링을 끌어 올릴 수 있도록 작업환경을 마련해야 했고 그리고는 여러 시간에 걸쳐 그 작업을 감독했을 것이다. 워낙 불안하고 위험한 지역에서의 작업이기 때문에 대원들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나는 여러가지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이 완료된 후에는 중단부의 경사면 얼음을 픽켈로 까내서 8명이 안전하게 비박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했고 그리고 어둡기 전에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게 해야 했었다. 그 모든 것을 지휘하느라 나는 하단부 빙벽공격조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별 생각없이 그냥 공격조가 원래 내가 기대했던 대로 빙벽을 끝낸 걸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몇 년 후 1971 겨울 나는 준호에게 내가 계획했던 토왕성빙폭초등 재도전을 위해서 내가 고안한 새로운 등반기술을 실험하고 훈련하도록 주문했었다. 그 과정에서 보다 세련된 빙벽등반장비를 갖춘 송준호와 오세진이 100미폭 빙벽 하단부를 사실상 초등했고 상단부까지를 완등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전에 내가 이미 한 걸로 되어 있으니 후배로서 항의도 못하고 그대로 묻어왔던 모양이다. 도봉산장에서 늑대(경희)가 경봉에게 한 말 "아니 장본인들이 가만 있는데 왜 형이 이제와서 야단이유?"라고 했을 때 나는 그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의아했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리고 한 참의 세월이 흘러간 후 준호의 절친한 친구 경봉이가 갑자기 죽은 친구를 위해서 나 때문에 묻혀진 그들의 명예로운 업적을 되찾아 주겠다고 용감하게 나섰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의 항변을 그냥 묵살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이미 나에 대한 여러가지 불화로 화가 나 있던 경봉이가 드디어 나를 맹비난하면서 뒤에서 나에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고 또 그의 그런 행동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늑대와 요델 후배들과도 충돌하게 되어 심각한 갈등이 빚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런일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도봉산장에서 희구의 추스림을 받으면서 경봉이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 나는 너무나 놀랍고 섭섭하고 수치스러워서 이성을 잃을 정도였고 또 그 때부터 희구한테까지 정이 떨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산장에서 후배들 앞에서 벌린 일이 너무나 수치로워서 후배들을 볼 낯을 잃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은 그 깟 100미폭 빙벽초등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경봉이가 그렇게 죽자고 내게 달겨드는 것인지 였다. 내가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그 깟 것에 연연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경봉의 행동을 곡해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때는 물론 지금까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내 블로그에서 오래전에 수집해 두었던 설악산 등반사가 있어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었다. 몰론 요델의 초등/개척 기록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였다. 몇 가지 누락된 것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 있었다. 그러다가 토왕성폭포에 대한 초등기록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1974년에 토왕폭 암벽이 초등되었고 그리고 빙폭은 1976년 초에 하단부가 동국대에 의해서 초등되었고 그해 12월 크로니의 박영배에 의해서 상단부가 초등되었고 동시에 전체 완등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다. 즉 기록상으로 보면 이 땅에서 거대 빙벽초등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점이 1976년이었고 대상이 토왕성 폭포인 것이다. 그러자 문득 한 의문이 내 뇌리를 스쳤다. 그렇다면 이 보다 8년전 그리고 5년전에 이루어진 자즌바위골 100미폭 암벽과 빙벽 초등은 토왕성과 비교해 볼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나는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생각해 보니 바로 100폭 빙벽 초등반이야말로 바로 이 땅에서 빙벽등반의 문을 연 효시적 등반이라고 판단되었다. 그리고 두 빙폭이 비록 높이에서는 2배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토왕성의 긴 중단부를 생략하면) 그 형상이 매우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빙벽등반장비 수준에서의 엄청난 열악성을 감안해 보면, 8년전과 5년전의 100미폭 빙벽초등이 토왕성 빙벽초등과 등반성 차원에서 비교해 볼때 결코 뒤지지 않는 이 땅에서의 등반기록이라고 판단되었다. 따라서 토왕성 빙벽 초등이 대단한 대단한 등반기록인 만큼 100미폭 빙벽초등도 재 평가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100미 빙폭초등이 왜 설악산 등반사에서 빠져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건 완전히 나의 실수였다. 그 동안 나는 100미폭 빙벽에 대한 초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그 등반을 별도화 하지 않고 그냥 68동계 자즌바위골-공용능-봉정암 코스 개척기 속에 불명확한 상태로 가볍게 묻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내 자신 스스로 한국 등반사적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하고 큰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취급해 버리는 우를 범한 것이고 그리고 그로인해서 후배의 기록이 묻혀버리게 된 것 이었다. 그래서 경봉이가 죽자고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제 그 동안 혼란스러웠던 모든 것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이 갈등이 언제 어디서 왜 시작되었고 그리고 어떻게 격화되었는지. 그래서 이제라도 100미폭 빙벽 초등에 대한 불명확한 기록을 정정하고 그리고 별도의 등반기록화를 통해서 바로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다. <반성> 희구 말마따나 내가 너무 하늘에만 있었나 보다. 아니 독선의 늪에 빠져 있었나 보다. 땅의 잡초더미 속에서도 경의를 표할만한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 나의 잘못이었다. 나의 후배들 중 준호와 세진이가 그런 훌륭한 등반을 한 걸 몰랐고 또 경봉이의 나에 대한 시비가 친구의 명예를 찾아 주려는 숭고한 마음에서 출발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피고 있었다는 걸 몰랐으니 말이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표한다. 그 동안 내가 후배들에게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고 너무 독선에 빠져 있었던 걸. 특히 이 일로 해서 도매금으로 내게 매도당한 희구와 경봉에게, 그리고 이 일로 해서 꽤 오랜 세월 난처한 지경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우리 곁은 떠나 버린 늑대에게, 그리고 아직도 그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괴로워하고 있을 홍식, 구영, 한경, 영섭, 등 후배들에게,
<나의 실수>68년 설악산 개척등반기에서 100미 빙폭 초등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머지 그냥 대충 가볍게 정리해 버린 것. 그래서 사실상 초등이 묻혀 버리게 된점. 주) 그동안 나는 내 스스로 해낸 초등/개척 중에서도 100폭 빙벽 뿐만이 아니라 권금성직벽 동계초등, 노적봉 암능초등, 울산바위 동쪽 코스개척, 등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음. 어쨋거나 결과적으로 볼 때 경봉의 말이 맞는 꼴이 되어 버린 것을 인정한다: 내가 후배의 업적을 도적질한 사기꾼이 된 것을. 그러나 원래 그럴 뜻은 전혀 없었다는 걸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따라서 요델의 개척등반 기록에 다음 사항이 정정되어야 하고 그리고 추가 되어야 한다. <정정 사항> 1968.2 동계 자즌바위골-공용능-봉정암 개척기록 정정(100미 빙폭 등반 부분) - 당시 100폭 빙벽 상단부만 초등되었고 하단부는 우측 암벽으로 올랐음. 따라서 100미폭 빙벽 절반의 초등이 였음. <요델기록 추가 사항-1> 1968.2 100미폭 빙벽 상단부 초등: 백인섭 등 <요델기록 추가 사항-2> 1971년 100미폭 빙벽 하단부 초등 & 최초완등 : 송준호 & 오세진. <결심> 이번 일을 기화로 해서 그 동안 대충 써 왔던 나의 모든 개척등반 기록들을 재 정비할 것을 다짐한다. 오류는 고치고 빠진 것은 추가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남의 평가가 아니라 개척과 초등의 주체였던 나 자신이 나의 잣대를 가지고 그 의미를 평가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후대에 남기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 로 개척해 내어야 할 또 다른 어려운 산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나는 이번 갈등을 통해서 이 걸 깨닫게 된 것이니 갈등을 빚어 준 경봉에게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다. <후배들에게 당부> 이제 모든 것이 밣혀 졌으니 우리 모두 예전의 요델 마음으로 하루 빨리 돌아 갈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그 동안 받은 상처가 깊어 아물려면 다소 시간은 걸리 겠지만 모두 애써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참고-1> 경봉의 기록 중 100폭 빙벽에 해당 분(1998.6) 장비 점검을 끝내고 있을 즈음 ....... 야 경봉이 너 top나가......... 등반대장이였던 백인섭씨의 지시가 나의 머리를 혼돈스럽게 만든다. 당시로서는 빙벽훈련이라고는 해본적이 없을 뿐더러 오로지 투지와 인내로 돌파해 나갈수박에 없는 상황 이였다. 요즈음에도 모든등반대가 그러하듯 등반대장의 지시에 따를뿐 반론을 제기하는 어떤대원도 없었다. 그러나 의견을 제시 할수는 있어도 철저히 등반대장의 의견에 따르는것이 당시로서는 철칙이였고 원칙을 지켰다. 50m폭포를 오르며 stept cutting이 어떤것인줄 알었을뿐 준비된 빙벽의 도전은 결코 아니였다 준비를 하며 엄홍석이의 일제 top픽켈을 건네받고 준비된 아이스하켄을 지참하고 100m폭을 오르기 시작하며 힘겨운 stept cutting이 시작되여 얼마를 올랐을까? 서서히 팔에 펌핑이 오기 시작을 한다. stept cutting을 하며 몆번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오르는데............ 휘두르는 픽켈이 얼음을 만나면 튕겨저 나오기를 몆번 계속되면서 나의 팔은 그저 무의식적으로 휘두를 뿐 그이상도 아니였다. 얼마를 올랐을까? 온몸이 펌핑이나고 팔은 그저 픽켈을 휘두를뿐 튕겨져 나오는 픽켈의 힘마저도 감당키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때 보조쟈일에 올려 보내진 따근한 커피한잔의 힘을 빌려 다시금 시도를 하여보지만 역부족임을 실감하면서 망설일때 하산 지시가 떨어져 빽을 하고 나니 이미 100m폭을 포기하고 바위길로 우회를 하여 100m폭의 중간 테라스에 오르는 길을 택하였고 대원들은 바위길을 오르고 있었으며 나자신의 한계를 실감하면서 얼마나 올랐을까..........그것도 몆시간을 헤메인 빙벽인데...... 따근한 커피한잔에 몸을 추스리며 올려다보니 실로 허망하기까지 하였고 나자신의 무력함을 깨달아야만 하는 그것이 전부였다 겨우 20여m를 오르려 몆번의 방향전환을 하며 고생을 하였던것이 전부이다 <참고-2> 설악산 등반 기록 중 토왕성 초등기록 [한국산서회 2004년 회지] 1974.8.2~11 에코클럽 김종욱 외3명 토왕성 폭포 우측벽 개척 1975.5.25 부산청봉산악회 김두영 외2명 토왕성폭포 좌측벽 개척 1976.1.15 동국대 신인섭 외3명 초등 토왕성폭포 하단 1976.12.29~77.1.14 크로니 산악회 박영배 외 7 초등 토왕성폭포 상하단 완등 [출처] 설악산 자즌바위골 100폭 빙벽 초등기록 정비.|작성자 백인섭 Paik In sup 위의 글은 백인섭씨가 쓴글로 전체의 내용으로 보아 그간의 심경과 함게 사과의 글,실수와 결심,그리고 후배에게 당부하는 글을 올리므로 일일히 답변할 사항은 아니기에 문제점만을 답변코저 한다 백인섭씨는 나와의 갈등을 노루목 관리와 요델바트레스 개척자 미상으로 요델 전체와의 충돌을 이야기 하는데 대한 나의 소견을 밝히므로서 그간의 억측을 잠재우고저 한다. 1.(노루목 관리 문제로 인한 갈등 문제) 에 대한 나경봉의 답변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나 갈등의 모든 문제를 이야기하므로 어떤 도움이 될지는 예상키 어려울 것 같다 송준호가 우리의 곁을 떠나고 백인섭씨와 첮 만남에서 "어떻케 된거요????" "무모한 짖이였어" 모든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귀가를 맴도는 그의 답변을 듣고 침묵으로 일관하였고 비석 건립 문제를 놓고 의견을 물으니 "니들이 알아서해" 역시 침묵으로 일관하며 많은 시간이 흐른후 2006년 동해안 산불이 극심할때 나자신 매년찾던 4월19일 찾지를 몾하여 설악을 찾았을때 노루목엔 30여년을 지탱하여준 삼동지묘의 석축이 브이 형태의 함몰이 시작되여 다시금 요델산악회 모임에서 전면 보수의 필요성을 이야기 하였으나 답변은 "너희 2기들이 알아서해" 이러한 답변을 들으려 그 어려운 시절 쟈일을 함게 묵으며 순수함과 열정을 불태우며 설악을 찾았던가???? 이제는 요델의 식구들이 알아야 만 되고 곱씹어 보아야 할 사안이기에.... 송준호를 가장 사랑하였고 가장 아꼈다고 스스럼 없이이야기 하였던 사람들..... 설악의 노루목 삼동지묘의 비석의 배면과 충혼탑의 배면에 왜 요델산악회원의 이름 석자가 하나도 없습니까??? 실로 무관심과 냉대로 일관하여온 요델의 식구들은 다시금 곱씹어 보아야 되지 않을까???? 끝으로 2006년 노루목 삼동지묘를 보수함에 있어 많은 도움을 주고간 故홍경의에게 감사를 표한다. 2.(요델 바트레스 개척자 미상으로 요델 회원과의 충돌로 갈등이 시작되였다???) 나경봉의 답변. 나의 blog에 "준호 버트레스에서 요델버트레스로 명칭이 비뀐 까닭은??? " (2008년 2월15일) 이란 포스팅에서 설명이 되였는데 부족하다면 다음을 부연한다 산악인 체육대회에 (상문고등학교) 손재식기자가 참석하여 요델바트레스코스를 취재를 하려는데 개척 초등자가 누구인가 라고 늑대에게 묻자 그게 미상이라고 답변을 하는 것을 듣고 나서 한동안 머리를 정리하여야 만 하였다 언제인가 박인식기자와 "설악에 살다"를 취재 할 때늑대와 함게 코리아나 호텔커피숍에서 마지막부분에서 박인식기자로부터 바트레스는 누가 개척을 하였습니까???란 질문을 받고 나는 즉시 송준호가 개척을 하였다고 이야기 하였고 그때부터 바트레스는 준호바트레스라 불리웠고 나자신은 함구로 일관하였고 아마도 손재식기자가 늑대에게 물었을때 개척자는 송준호였다라고 이야기가 되였다면 나자신은 영원히 함구로 일관 하였을 것이다 손재식기자로부터 바트레스취재를 하겠다는 요청이 들어와 나자신이 전면에 나서게 되였으며 바트레스를 개척자 미상으로 둘것인가???를 놓고 많은 고심 끝에 밝히게 된것이며 2008년인가 백인섭씨의 불로그에 "요델산악회 백인섭 죽이기에 대한 해명"이란 글의 말미에 요델 바트레스는 나경봉이 개척한 것이 맞다 라고 글을 올리자 요델산악회일을 잘 보라고 완장하나 채워 줬더니 가관이다. 68년 당시에는 입회도 하지 않은 넘이 개척자가 나경봉이 아니라는데요??? 이것이 요델산악회의 현주소이고 지금것 유지되고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요델산악회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몾하면서 완장차고 하는 짖을 보면 가관이다. 5년여의 논쟁의 중심이였던 자즌바위골 100미폭 초등에 관한 내용은 분명히 집고 넘어야만 할 것이다. 백인섭씨와의 논쟁이 길어진 사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솔직 단백하고 진솔함만 이야기가 되였다면 간단히 마감 할 수 있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섭 자신의 합리화와 독선이 낳은 결과이다. 그의 동계등반중 남긴 빙벽사진은 아래의 2장 이외에는 없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섭 자신이 100미폭 초등자라며 올린 사진은 많은 산악인들을 우롱하고 수많은 네티즌을 상대로 자신의 합리화와 존재감을 내세우려 한 것은 아닌지????
위의 2장의 사진은 1968년 자즌바위골 상단부를 오르는 백인섭씨가 남긴 2장의 사진 전부이다. 헌데 어느날 백인섭씨의 불로그에 100미폭을 오르는 사진이라며 하단 사진을 올려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어느 누가 이사진을 보고 8발 아이젠을 착용하고 스텝커팅으로 오른 사진이라고 믿겠는가??? 12발 후론트포인팅 아이젠에 바일로 오른 자욱이 선명한데 위의 사진으로 수많은 산악인과 네티즌을 상대로 허위 사실을 유포한 대표적인 사진으로 위의 복장과 하단의복장을 확대해 보면 분명해 진다. 더욱이 백인섭씨의 개척등반의 목적은 상황에 따라 그 목적을 달리한다 이것은 자신의 합리화를 위하여 언제던지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68년 자즌바위골 개척등반의 목적을 달리하고있다. 2007년 10월16일 작성한 그의 blog에 등반목적을 "이번에는 그속에 숨겨져있는 50/100미폭을 초등하고"라고 명시하고 2009년 2월15일 등반목적을 "자즌바위골을 거쳐 공용능선을 넘어 봉정암에 이르는 신루트를 개척함이지 50/100미폭빙벽을 오르는것이 목적이 아니였다"라고 기술하고있다. 어느 blog의 말이 맞는가????? 어찌되였건 그나마 다행인 것은 뒤늣게라도백인섭 자신의 잘몾을 인정하고 (반성)의 글과 함게 "후배들에게 정중히 사과를 표한다"는 말과 (나의 실수)(결심)그리고 (후배들에게 당부의 글)등으로 마무리됨이 천만다행이다. 우리들이 초등자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초등자의 순수성과 정직성을 전제로하기 때문에 산사람으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됨을 우리는 잊어서는 않될 중요한 점중의 하나이다 더욱이 자즌바위골 100미폭의 초등자를 밝히는데 5년여를 끌어오면서 백인섭자신의 합리화를 위해서는 직계 후배인 고송준호의 영혼마저도 무참히 짖밟은 행태는 백인섭 자신은 영원히 짊어 지고 갈 업보일 것이다. 나자신 백인섭씨로 부터 "사기꾼"이란 누명을 쓰고 3년여 끝에 2012년 사람과 산 3월호의 PEOPLE 란에 "나는 석주길을 개척하지 않았다"란 기사가 실리고 나서야 백인섭은 석주길관련 나의 기사를 삭제하였지만 그동안 나경봉을 폄하하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동원하여 사기꾼으로 몰아 온라인상에서 올린 글들은 참으로 표현키 어려운 말들로 폄하 하였다. 이제는 백인섭의 말데로 예전의 요델산악회로 모든 회원들이 하나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하여 보지만 그동안 쌓인 100미폭 초등자 문제와 사람과 산의 석주길 오보로 인한 나의 마음 한구석에 숫덩이처럼 검게 그을린 나의 마음이 그리 쉽게 풀리진 아니 할 것이나 다시한번 마음을 굳게 다지며 그동안 꼭 쓰고 싶었던 석주길 개척등반과 범봉연봉 개척 등반, 칠형제봉 연봉 개척 등반을 쓰고저한다 이제라도 정정 하여야 할 것이 있다면 정정을 하고 삭제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삭제를 하여 또 다시 타의에 의하여 삭제되거나 정정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한다
이제는 왜 60년대의 개척 등반사가 진위의 논란에 올라야 하는가????
모든 개척 등반사는 초등자의 순수성과 정직성에서 출발함을 그 시작으로 하기에 초등자들이 산사람으로 부터 선망의 대상이 됨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1.60년대 개척등반사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가장큰 이유중의 하나가 초등자의 순수성과 정직성의 결여를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지난 60년대의 자료부족으로 인하여 초등자의 입만 처다본 결과이며
3.연맹및 유명 산악잡지사 역시 초등자의 입에만 의존 하였지 그 진위여부를 확인 하려는 기자로서 또는 연맹의 실무자들 역시 그 책무를 게을리 한것도 한 몱을 하였다고 보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연맹 또는 유명산악 잡지사의 대한민국 산악사의 정립과 역사성을 등한시 하였다고 감히 말하고싶다. 이것으로 5년여를 온라인상에서 백인섭씨와의 논쟁을 마감코저하며 다음 글에 100미폭 상단 초등에 관하여 과연 상단 초등자란 용어가 적합 한지를 쓰고저 하며 백인섭씨는 아직도 자신의 불로그에 적시한 " 백인섭 회고록 :설악산 석주길 개척 초등"의 말미에 "에피소드 1과 덧글을 삭제하여 줄 것을 청구하며" 삭제치 몾할 경우 그 사유를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2012년 4월 2일 요델산악회 나경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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