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절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이시며, 또한 교제적인 중보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의 중보만 믿고 교제적인 중보를 잘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없앨 때는 하나님의 친 백성과 하나님의 권속을 만들려고
하셨는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 받은 것은 아는데 하나님과 교제가 없기
때문에 큰 기쁨의 복을 얻지 못합니다. 결국 사랑의 사람이 안 되고 맙니다.
입으로만 말하고 전혀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중풍병자와 같은 신자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을
인정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을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시네’ 라는 찬송은 매우 좋은 찬양입니다. 성령 받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심을 믿는 겁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믿어지면 믿음으로
사는 체질의 사람들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아 못 믿는 체질입니다.
이건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계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믿어질 것이고 아직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성령님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고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주 예수 사랑 기쁨 내 마음 속에 라는 찬송처럼 됩니다.
요즘 bond of Love라는 말과 같이 사랑 안에서 본드로 붙여 버리듯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때에 서로 기쁨으로 교제하고, 사랑으로 교제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항상 엄숙합니다. 그의 영성은 부처를 닮아갑니다.
성령 없이 거룩하게 살긴 해야 되니까요.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항상 생동감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사람을 향해 밖으로 나갑니다. 실수를 하든지 말든지 계속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는 겁니다. 온유와 겸손의 사람으로 바뀌는 겁니다.
이것은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되는 경건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존중히 여깁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도 성령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척 보면 압니다.
부처처럼 엄숙한 사람은 거의가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사람은 그 얼굴에
잔잔한 생동감이 있고 자비의 감정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들쑥날쑥하다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높은 산은 낮아지고 깊은 골은 메워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딜 가나 점잔을 뺍니다. 나중에 욕심을 챙길 때는 다른 사람보다 더 챙깁니다.
성경공부하고 난 다음에 뷔페식당에 가면 가면을 다 벗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 달이면 밑천이 바닥나서 속이 훤하게 드러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이 계시네 성령이 계시네’하고 부르고 있는 이 성령님을 알아야 됩니다.
다시 한 번 26절 읽겠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약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27절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약점이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면 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역사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28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율법은 약점이 있는 제사장을 계속해서 세웠지만 맹세의
말씀으로 율법과 관계가 없는 한 대제사장을 따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온전하게 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우리도 온전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우리도 그 분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구원은 바로 이겁니다.
그런데 이건 참 애매모호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먼저 지고 가셨으니
우리는 따라가면 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여 참 막연할 때가 있습니다. 희미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점진적으로 조금씩 서서히 그리고 점점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조급한 마음에 이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이 무슨 소용이 있어.
십일조, 안식일이 무슨 소용이 있어 다 없어진 것. 십자가로 다 폐했지.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말은 참 듣기 좋은 것 같으나 그런 것들을 십자가로 폐한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신 겁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율법
아래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우리의 낮은 육체를 대신해서 자신이
율법의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를 율법에 대해서 그와 함께 죽게
하시고 다시 사시므로 율법과 상관없는 다른 믿음의 의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들과 상관이 없도록 하신 겁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고 율법과 제사법만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아닙니다. 비록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생명과 능력과 지혜가 되게 하심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말씀대로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남편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율법의 남편에서 떼어내서 그 안에서 주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시므로 이제는 율법의 남편이 아니라 다른 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란 남편을 만나서 하나님을 위하여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셨습니다.
새 창조의 열매를 맺히게 하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우리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그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의 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사로잡아서 자기 안에 두시고 또 그분이
우리 안에 항상 계셔서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친히 간구하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맹세하신 그대로 이루어가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부족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미 맹세하신 그대로 반드시
우리에게 이루어 가실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고 있는 것입니다(빌1:6) 할렐루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 염려는 제가 해 드려야지요!!
할렐루야! 진리의 말씀을 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