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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소박한 방 한 칸의 꿈
섬에서 군산으로 돌아오는 배에서도 인야는 내내 갑판 위에 서 있었다.
글 한 덩어리를 완성해 섬을 나가는 것은 분명 보람찬 일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앞날이 더 걱정스러웠다.
이제는 그 원고를 가지고 어떻게든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당장 머물 곳마저도 없던 그에겐 책을 만드는 일 외에도 어떻게든 한국에서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등, 시급을 다투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군산 형님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제 혼자 일어나시는 것은 물론 아무런 부축 없이 스스로 화장실에 가실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어 있었다.
병원에서 형 집으로 옮긴 뒤, 인야가 보름 여 하루 24시간 동안 어머니 곁에 붙어 간병을 도맡았었다. 어머니를 화장실 앞까지 모셔다 드리면 본인 힘으로 용변을 보실 수 있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섬으로 떠났던 건데, 그때와 비교하면 감개가 무량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식사 양도 제법 늘어 있는 걸 보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이제는 정말 괜찮으시구나.'
인야는 안도하며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어머니의 호전에 마음을 놓은 인야는 그날 밤 어머니 곁에 누워 잠을 청했다.
몸이 피곤한데다 추위까지 겹쳤지만 잠 자체는 잘 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배가 슬슬 아파왔다.
섬에 있는 동안에는 내내 잠잠하여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배의 통증이 다시 자신을 괴롭힐 모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어머니께서 형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해......"
물론, 큰 형님의 '상평' 시골집에서 혼자 자유롭게 지내실 때에 비하면 여간 불편하시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어머니의 간절한 꿈이, 옛날 인야가 스페인에 가기 전처럼 아들(인야)과 함께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인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드렸을 뿐이었다.
기쁨도 잠시,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서도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들며 암울해지는 것이었다.
어쨌든 행동에 나서야만 했다.
인야는 곧바로 '익산'으로 가 Ch 선생님을 찾아 뵙고 섬에서 작업한 원고를 전해드렸다. 일단 글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런 단계를 거쳐야 출판사를 찾든, 혹은 깨끗이 포기하든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오랜만에 만난 선생님은 인야를 유심히 바라보며 물으셨다.
"인야, 그렇게 자유롭게 살면 작품 생활엔 좋겠지만, 외롭진 않겠냐?"
그 질문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인야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선생님, 지금의 저에겐 외로움이란 단어는 그저 사치일 뿐입니다. 어머니를 모실 일이 최우선인데요."
자신 없는 어투로 얼버머렸을 뿐이다.
독일에서 겨우 몸만 빠져나와 귀국한 인야였다. 그 즉시 어머니가 계시던 병원에 달려갔고, 며칠 뒤 어머니를 형님 집에 모셔다 놓고는 2주 넘게 간병한 다음, 글을 쓰겠답시고 관리도 섬에 들어가 겨우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무슨 돈이 있겠는가.
현실의 인야는 교통비조차 없는 빈털터리였다.
'어떻게든 서울에 올라가 살길을 찾아봐야 하는데, 내가 자리를 비우면... 어머니는 군산의 형님 집에서 어떻게 지내실까? 그렇다고 마냥 군산에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글만 써가지고 나오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희망을 품고 섬에 들어갔었다. 결국 '어느 화가의 그림이 있는 이야기'는 써가지고 나왔지만, 어찌 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암울한 상태였다.
며칠 뒤, 인야는 결국 산본 누님의 집으로 향했다.
우선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확인해 보았으나, 2년째 끌고 있던 책 '멕시코 벽화 운동'의 출간 작업은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그동안 인야가 한국을 비웠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화가 치밀었다. 모든 일이 다 그런 식으로 꼬여만 갔다.
한국에 머물며 인야를 가장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형제들과 그 가족들로부터 느껴지는 불신의 눈초리였다.
어릴 적부터 명석하여 중고교를 장학생으로 다녔고, 대학마저 서울로 진학해 형제 중 가장 방대한 공부를 했던 그는 집안의 희망이자 자랑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는 동안,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실질적인 성과를 보여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흔이 넘도록 외국을 떠돌아 무일푼으로 돌아와, 자신의 한 몸 뉘일 공간조차 없어 형제들의 신세를 지고 있는 무능력자가 처한 체면이란 말이 아니었다.
그들이 인야에게 가졌던 기대와 희망이 헛된 것이었음을 이미 확인했을 터였고, 이제 그들에게 인야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모르시는 순박한 어머니만이 일구월심 인야가 잘 되기만을 빌고 계실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이 인야를 다시 우울하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처량하고 비참하게 느끼도록 몰아세우고도 있었다.
산본에 온 김에 친구 J의 한의원에 들렀다가 그의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요즘 IMF 사태 여파로 비어있는 건물 사무실이 많으니, 관리비만 내고 사용할 수 있는 사무실을 얻어 작업실 겸 화실을 열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 방편으로 삼으라는, 아주 현실적이고 좋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인야는 자신이 없었다. 언제까지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을 섣불리 시작했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확실한 대답을 유보한 채, 그는 서울로 향했다.
그런 뒤 서울에서 귀국 후 처음으로 P를 만났다.
독일에서 돌아올 때 김포공항에서 잠깐 얼굴을 본 뒤, 군산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뵈러 곧장 내려가야 했기에... 한 달 만의 재회였다.
인야가 독일에 있을 때부터 그는 인야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책 관련 업무를 맡아주던 친구였기에, 두 사람은 그동안 산재해 있던 일들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곤 일산에 있는 그의 집으로 이동해 여러 의견을 조율한 뒤, 그곳에서 밤을 보냈다.
섬에서 원고를 들고나온 이래, 인야는 주위 사람들에게 글을 보여주며 의견을 구하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실효성과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데다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르는 일이다 보니, 스스로 보기에도 뜬구름을 잡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매달려야 하는 시급한 줄방망이기도 했다.
요즘 신문을 보면 대학 교수 임용 광고가 제법 눈에 띄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고 지나치기엔 지금 인야의 사정이 너무도 절박했다.
스페인에서 돌아온 이래 몇 차례 임용에 도전해 보았으나 단 한 번의 면접 기회도 없이 서류 심사에서 고배를 마셨던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두어 군데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 며칠간 그 일에 온 정성을 쏟았다.
'어쨌든 하는 데까지 해 보자, 그러고도 안 되면 또 하늘을 원망하자. 나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은가.' 하는 심정이었다.
어머니께 날마다 전화를 걸 때마다 어머니는 물으셨다.
"너 하는 일은 잘 되냐?"
인야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머니, 그게... 하루 아침에 결과가 나오는 일이 아니라서요......' 하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시는 어머니 앞에 인야는 그저 면목이 없을 따름이었다.
출판사에 들러 '멕시코 벽화 운동'의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
출간이 내년으로 밀렸다는 통보를 받았지만, 이제 정말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 그나마 긍정적인 마음으로 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집장은 예전의 차가운 태도와는 달리, 오늘따라 인야의 처지를 걱정해 주며,
"이 인야 선생님은, 참신한 작품에 실력까지 겸비하고 계시니, 언젠가는 빛을 볼 거예요."
언제나 사무적이고 찬바람이 쌩쌩 돌던 여자에게서 그런 인간적인 얘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우면서도...
'별 일이다!' 싶긴 했다.
어쨌든 출판사에 온 김에 인야는, 지금 구상 중인 책 '어느 화가의 그림이 있는 이야기'에 대한 운을 띄워보았다.
편집장 역시 살짝 관심을 갖는 것 같긴 했다. 그렇지만 이내 말을 흐렸다.
"우리 출판사에서는 요즘 다른 책들을 만드느라 여유가 없어요."
제대로 제안조차 꺼내지 못한 꼴이 된 인야는,
'이 출판사하고는 얘기가 안 되겠구나......' 하고 풀이 죽은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멍하니 지하털을 타고 신촌 작업실에 갔다가 J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이 저녁을 사 주셔서, 인야의 근황과 섬에 들어가 글 작업을 했다는 얘기도 하자,
"아니, 이 선생. 그림에 조각에, 근데 글까지 쓰신다고요?" 하고 놀라기에,
"제가 주제넘게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써왔고, 어릴 적엔 소설이랍시고 글을 써서 상도 받았던 전력도 있구요." 했더니,
"정말이에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야, 이 선생은 참 재주가 많은 예술가네요!" 거듭 놀라는 것이었다.
"글쎄요, 그보다는 지금 당장 제 그림으론 돈을 만들 수가 없을 것 같아, 임시방편이자 궁여지책으로, 제가 스페인에 가서 겪었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글로 엮어봤는데요, 그걸 책으로 만들게 되면 과연 사람들에게 먹힐지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런 고백이었다. 그러자 J 선생님은 의외로 힘을 북돋워 주었다.
"이 선생은 미술 쪽에도 그렇게 재주가 많으신 분인데, 글도 틀림없이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잘 해 보세요. 그리고 그 글, 나에게도 한 번 보여줄 수 있어요? 내가 출판사 하는 사람도 하나 아는데, 나도 한 번 나서보게요."
"정말이십니까? 그래주시면 너무 감사하지요!"
반색을 하며 식당을 나서는데, 선생님이 갑자기 인야에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이 선생, 이거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다니면서 교통비라도 쓰세요."
깜짝 놀랐지만 인야는 그 돈을 받을 이유가 없어서 극구 사양했으나,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그 돈을 인야의 호주머니에 쑤셔넣어주기까지 하시기에, 어정쩡하게 그 돈을 받고 말았다.
인야가 외국에서 갑자기 귀국하여 돈벌이도 없이 추레하게 다니는 게 그분의 눈에 밟혔을 수도 있었겠는데,
어쩌면... 작년에 인야가 독일로 떠나기 전에, 그 분의 전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에 따른 뒤늦은 답례일 수도 있기에...
커다란 부담을 갖지 않기로 했다.
사실 인야가 타인에게 자신의 글재주를 입으로 꺼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평생 처음 있는 일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변에게 밝혀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무조건적인 겸손만이 미덕이 아니라는, 현실적인 입장 변화에 따른 반응이기도 했던 것이다.
인야에게 글쓰기의 시초는 어릴 적 일기쓰기였다. 학교 숙제로 일기를 써 갈 때마다, 선생님들은 인야의 일기를 아이들 앞에 소리 내어 읽어주곤 하셨다.
"일기는 이 인야처럼 이렇게 꾸밈없이 써야 한단다."라는 칭찬을 상찬처럼 들으며 자란 덕에,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무언가를 글로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이 저리 잡았던 것 같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손에 익은 일기 쓰기는 군대 시절을 포함한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그 여정 속에는 두어 차례의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입시생들이 즐겨읽던 '합격생'이란 잡지의 문예란에 인야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글을 투고하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귀가하니 인야에겐 웬 노란 서류봉투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봉투를 뜯어 보니 바로 '합격생' 잡지 한 권이 들어있었다.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잡지사에 원고를 보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인야는 책장을 넘기다 경악하고 말았다.
'군산 0중학교 3년 이 인야'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거 아닌가.
난생처음 공식적인 인쇄물에 활자화된 자신의 이름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게다가 심사평에는, '원고지 쓰는 법도 몰라 대학 노트 열 장을 찢어 앞뒤로 빡빡하게 써 보낸 글이라, 당선작으로 뽑기가 망설여졌지만, 글이 워낙 훌륭하여 뽑지 않을 수 없었다'는 평이 실려 있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한 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억은 인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학창시절엔 이런저런 백일장 대회에 나가 몇 차례 상을 타기도 했지만,
두 번째 큰 사건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 교지 발간을 책임지던 문예반 친구가 헐레벌떡 인야에게 찾아와 다짜고짜, '너 소설 한 편을 써야겠다'고 반협박조로 매달렸다. 당시 교지의 소설란에 실을 작품이 필요한데 아무도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며, 인야가 아니면 안 된다고 떼를 썼던 것이다.
결국 담임 선생님의 특별 허락을 받아 다음 날 다른 수업을 모두 빠진 채, 미술반실에서 홀로 작업을 할 수 있게끔 조치를 받았고, 전광석화처럼 단 하루... 그것도 낮 시간 동안 매달린 끝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완성해 냈다.
그렇게 탄생해 교지에 실린 작품이 바로 '안부 없는 편지'였다.
며칠 뒤, 서울에서 열리는 미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교무실에 보고를 드리러 갔다가 나오는데, 국어 교사이자 시인이셨던, 그리고 교지 지도교사이기도 했던 Ch 선생님이 인야를 불러 세우셨다.
"이 인야, 이놈아! 미술은 무슨 미술, 소설이나 쓰지!"
선생님은 인야가 미술실에서 급하게 써낸 소설을 이미 읽으신 뒤였다.
"야, 니가 쓴 소설 아주 좋드라. 구성도 독특하고, 특히 결말을 아주 잘 썼어. 번뜩이는 것 같았거든."
그 순간에는 그저 어리둥절했을 뿐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찬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로 남았다.
그날 인야는 구름에 뜬 기분으로 서울행 기차를 탔고, 어떻게 대회장에 도착했는지도 모를 만큼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때 인야는 마음을 굳혔다.
'나는 소설을 써야 할 사람이다'라고.
그 기억은 지금까지도 그가 글을 쓰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버팀목이었다.
교수 임용 서류를 두 군데 접수하고 나니, 이제 정말 하늘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신경을 과도하게 쓴 탓인지 속도 쓰리고 온몸이 무거워... 몸이 상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현실의 과제들이 인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늘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법이었다.
교수 임용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온 힘을 쏟아부었지만, 사실 인야는 임용 사회의 은밀한 속성을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그 판국마저도 돈이 필요하고 흔히 말하는 배경(빽)이 든든해야 유효한 싸움터라는 것을... 떠돌이 무일푼인 인야는 까많게 모른 채 순진하게 정성만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비리와 불공정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세상인가 싶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혼자만의 생각일 뿐... 비정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회전톱에는 그 어떤 개인의 울분도, 정의로움도 먹혀들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