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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경등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김기태
산악인 탐험 - 김형주
>세월의 냄새를 맡는 '바위의 배가본드'
◇ "클라이밍은 예술"이라고 말하는 김형주. 그는 산행 40여년 간 알피니즘을 좇는 '바위의 배가본드'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바위의 배가본드'는 줄곧 "등반은 예술"이라는 말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누구도 등반이 예술이라고 하는데 대해 이의를 달지 않았으며, 예술가의 고고한 정신세계와 등반가의 치열함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등반과 예술의 공통점이란 지난 세기동안 수많은 등반가, 예술가의 행위와 그들이 이룩한 역사에 의해 증명되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배가 고픈 일 중의 하나이며, 설령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유명작가의 소설이나 화가의 그림일지라도, 그곳에 다다르는 일은 어쩌면 평생을 지친 걸음으로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두려움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얼마 전 고흐의 그림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가에 팔린다는 소식은 세상 사람들에게 화젯거리가 될 테지만, 정작 무덤 속의 쓸쓸한 고흐는 생전 단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예지 쿠크츠카는 위대한 8000m 14좌를 올랐을지언정, 그는 마지막 등반이 된 로체 남벽을 위해 폴란드에서 만든 우모복을 카트만두까지 가져와 다른 원정대에게 팔아야만 했으니까.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지향점은 메스너의 대저택이 아니라 그와 같은 체험일 테다. 그래서 김형주는 말한다.
"산은 내게 고고한 행위의 예술이다!"
◇ 현재 서울등산학교 대표강사를 맡고 있는 김형주는 등산 교육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산에서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내게 클라이밍은 곧 예술이다"
우이령 건너편, 그러니까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기준으로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어디 즈음에 그는 살고 있다. 퇴근 후 구파발에서 송추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었다. 나는 배가본드의 거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시내 어딘가에서나 주말 북적거리는 인수봉에서보다는 그게 훨씬 나을 듯 했다. 평소 입버릇 같던 "오봉까지 15분이면 된다"는 그의 말은, 사뭇 기대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개발의 바람이 덜 분 송추계곡 부근은 그나마 온전한 모습의 도봉산이 남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대문은 없었다. 코스모스 꽃길 사이로 걸어 들어갔을 때 기자를 반긴 사람은 산 그림을 그리는 화가 정명숙씨였다. 그는 산악인 김형주와 한솥밥 먹는 사이다. 요 앞에 잠시 나갔다가 곧 돌아올 것이라 해서 기다리는 사이, 컹컹 개가 짖고 어스름도 짙어만 갔다.
화덕에 번개탄이 피워 오르고, 잘 익은 삼겹살에 숲에서 따온 민들레 잎을 싸먹는 저녁, 소주 한잔이 빠질 수는 없었다. 순배는 돌고, 탁자 가운데 솟은 밤나무 가지에 매달린, 패러글라이더용 안장으로 만든 그네도 따라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히말라야에 가서 라인 하나 잡아 올라가는 것을 생각해 봐요. 최고의 예술이지. 산에 올라가는 것이나 이 사람 그림 그리는 것이나, 당신 글 쓰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클라이밍이 '아트'임을 강조하는 그의 말이 줄곧 소주를 넘기는데 안주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이런 생각이 결코 즉흥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아트 클라이밍(Art Climbing)'이라는 업체를 운영하며 등산장비를 수입했었고, 97년 종로 5가에 문을 열었던 인공암장의 이름 또한 아트 클라이밍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등반을 통해 모든 것을 말해왔고, 표현해 왔노라고 자부하는 것이었다.
1956년생인 그가 처음 산에 입문한 것은 1969년, 까까머리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산으로 간 까닭이야 무엇이든, 또 40년 가까운 지난 기억을 되살려 낸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냐 마는, 김형주는 "어려서부터 '까불이'였고, 그 무렵 산에 다니던 사촌형을 따라 전국 무전여행을 했고, 완고한 집안 분위기보다는 산의 자유에 끌렸노라"고 읊었다.
영정산악회를 거쳐 은정산악회에서 활동한 그는 1975년 한국등산학교를 3기로 졸업하며 보다 체계적인 등반기술을 배워나간다. 습작시절을 거쳐 데뷔전을 갖는 화가처럼, 1976년에는 선배들과 함께 선인봉 정양길을 개척하기도 한다.
"선배들이 돈을 주며 '가서 배워오라'고 했어요. 그때 등산학교 입학금이 1500원 정도 한 것 같아요. 누나가 송림 크레타 슈즈를 선물하기도 했죠."
그는 지금까지 산에 다니며 단 한 번도 지리산에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시야가 편협한 사람'이랄 수도 있겠으나, 그가 지금까지 원정등반에서 네팔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것처럼 설악과 지리를 파키스탄과 네팔로 구분해 이야기하는 데는 일리가 있었다.
"지리산을 가본 적이 없지만 너무 잘 알아요. 왜냐면 술자리에서 많이 들었기 때문이죠. 어릴 적부터 바위만 하다 보니 산에 바위가 없으면 눈에 차지 않는 것은 사실이에요. 설악산은 클라이머의 산이죠. 파키스탄과 네팔의 차이처럼."
그가 말하는 차이란 높이와 위험이 아니라 거친 자연과 그를 극복해야 하는 클라이머의 태도에 관한 것이다. 8000m급 고산이 몰려있어 히말라야의 중심으로 불리는 곳이 네팔이기는 하지만, 카라반 내내 편한 로지에서 머물며 셰르파가 이끄는 로프를 따라 정상에 오르는 것은 바라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갔던 히말라야가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였고, 이후로도 마셔브룸, 라카포시, 작년 차라쿠사 지역까지 둘러보며 더욱 더 '클라이머라면 가야 할 곳이 파키스탄'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척박한 먼지와 진한 바위냄새를 사랑했던 배가본드는 환갑이 되면 지리산에 가볼 것이라고 했다. 폭설이 쏟아지는 날, 스키를 신고서.
이야기가 무르익는 사이 어둠을 가르며 환한 자동차 불빛이 마당을 비췄다. 난데없는 손님들은 그가 코오롱등산학교에서 지도했던 동문산악회 '하이락' 회원들이었다. 얼마 전 그는 하이락 회원들이 포함된 원정대를 꾸려 유럽알프스를 등반하고 왔다. 이름하여 '알피니즘의 발자취를 찾는' 원정대였다.
알피니즘의 근원 찾고자 원정대 꾸려
"알피니즘을 찾아서라는 명제로 간 만큼, 우리가 산에 다니는 뿌리가 무엇인지 묻고 싶었어요. 가령, 등산학교를 막 졸업한 사람들이 아직 제가 가보지 않은 히말라야에 가는 경우도 있는데, 다녀와서 하는 말이 '별거 아니던데요'라면서 몽블랑이나 다른 알피니즘의 역사를 장식한 봉우리가 마치 남산보다도 낮은 것처럼 여기곤 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마치 인수봉을 가며 매번 고독의 길만 올라왔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몽블랑도 아직 우리가 오르지 못한 남벽이 있고 동벽이 있는데 말이죠."
40여 일간의 등반은 궂은 날씨 탓에 계획했던 봉우리를 전부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가 행하던 예술의 일면을 확고히 하고 왔다. 그는 이미 그전에도 뜻 맞는 사람들끼리 팀을 꾸려 서너 차례 알프스 등반을 했었다.
"등산은 기술이 아니에요. 거기에 무슨 기술이 있습니까. 알피니즘은 곧 '파이널 십', 즉 희생정신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을 희생하며 팀을 살려나간 소수의 사람들, 그 1퍼센트가 알피니즘을 이어왔어요."
그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젠가 마터호른을 오르며 만난 한 늙은 가이드의 모습 때문이었다.
"백발의 가이드가 초보자 손님 3명과 함께 하산하며, 피톤도 없고 확보점도 없는 곳에서는 자신의 몸에 로프를 묶고 젊은 손님들은 거기에 하강기를 걸고 내려가더라고요. 고통을 참는 그의 얼굴이 바로 산이었어요."
그는 지금까지 코오롱등산학교와 육군사관학교, 홍콩 경찰청 등에서 등산을 강의해왔고, 지금은 서울등산학교 대표강사와 서울스포츠대학원 등산 전임강사로 교육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등산교육을 하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산에서의 자유'다.
"초보자에게 어려운 길을 갈 때는 정 힘들면 볼트를 잡으라. 하지만 나중에는 잡지 않으려고 노력하라고 말해요. 하루는, 아주 더운 날에 설악산 장군봉에서 교육이 있었어요. 등반할 수도 있었지만, 너무 더워서 다들 힘들어했죠. 그래서 다래도 따먹고, 가재도 잡으며 나무그늘에서 실컷 놀았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등산교육이 아니라고는 생각 안 해요. 그렇죠 여러분?"
갑자기 늘어난 손님들로 왁자지껄한 가운데서도 그는 좌중을 리드해갔다. 그는 "장강의 앞 물결은 뒷 물결이 미는 법"이라는 말을 새기고 산다고 했다. 지천명의 그가 무엇이든 허물없이 배우려 하는 이유다.
1976년 첫 사회생활로 쌍용양회에 입사한 그가 했던 일은 플랜트 설계와 관련한 기계, 전기 분야였다. 천성인지 이것저것 만들기를 좋아한 탓에 한때 집에 컴퓨터가 10여대나 있을 정도로 '컴퓨터광'이었다. 컴퓨터를 처음 접한 것은 70년대 말, 그가 회사 업무차 독일 출장을 가서이지만, 이후로는 산을 위해 컴퓨터에 빠져들었다. 그는 한동안 등산잡지에 해외 산악사이트를 소개하는 기사를 연재하기도 했다.
여전히 전원생활을 하며 집안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그는 얼마 전 길게 연못을 만들어 물이 흐르도록 펌프를 설치해 꾸미기도 했다며 사람들을 데리고 가 구경시켰다.
◇ 알피니즘을 말하는 김형주는 때로 엄숙하다.
80년대 중반, 직장을 그만둔 그는 '리더스 상사'라는 회사를 만들어 외국 등반장비와 스키 등을 수입해 들여오는 일을 했다. 88년 낭가파르바트 원정을 꾸리며 홍콩의 '그레이드6'이라는 장비점에서 등반장비를 구입한 것이 인연이 돼 2년여 홍콩에서 '어드벤처 익스트림' 장비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스투바이, 캐신, 그레고리, 마운틴하드웨어, 아크테릭스 등 현재 인기 있는 브랜드를 처음 한국에 소개했던 사람도 그였다.
한바탕 술자리가 파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나는 그의 창고를 둘러보러 갔다. 무릎까지 자란 수풀이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길이었다. 어둠 속에 더듬거리며 찾아간 끝에는 환한 보물창고가 있었다.
잔뜩 녹슬고 삭은 옛 장비부터 최신 장비, 재봉틀과 그라인더, 쇠망치까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인공등반을 할 때 쓰는 하켄이나 여간한 장비는 직접 만들어도 쓰고, 수선도 한다고 했다. 원정을 갈 때면 창고에 들어와 살고, 마음이 적적할 때도 이곳에 오면 열중할 수 있어 좋다는 그는 환율파동 이후 장비수입을 접었지만, 재고가 많이 남아 찾아오는 후배들마다 하나씩 집어줬는데도 아직 한 가득이다.
"15년 전 쯤 인수봉 빌라길을 갔는데, 대학산악부 후배들이 그때까지 크레타 슈즈를 신고 등반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떨어지면서도 계속 자유등반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아, 저 녀석들한테 좋은 장비만 있으면 얼마나 멋진 등반을 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장비 욕심이 많지만, 후배들에게 막 퍼주게 된 거죠."
1989년 수원에 지금과 같은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를 이용한 인공암벽을 일본 클라이머들의 도움을 받아 한국 최초로 만들기도 했던 그는 이후로도 직접 인공홀드를 만들고 인공암벽 시공도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등반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암벽을 통해 번 돈도 대부분 아트 클라이밍 암장을 운영하며 쏟아 부었다.
"한 달 암장 이용료 6만원 받고 매일 같이 후배들과 한잔 했으니까."
'푼수'가 팀을 위한 비타민이 된다면
산바람이 불어오는 송추계곡은 제법 쌀쌀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나는 대문이 싫다"고 이야기 했는데,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창문으로 들어가면 계단을 지나 마루가 나왔다.
시간이 깊고, 술도 어지간했지만 감탄 끝에 먼저 "한 잔 더"를 제안한 건 나다. 마지막 소주 두 병을 내오고, 오징어를 굽기 시작했다.
그에게 낭가파르바트는 여전한 한탄이다. 1991년 한국과 홍콩 합동원정대를 꾸려 등반했던 낭가파르바트에서 돌아와 그는 "등정은 성공했지만 등반은 실패했다"는 말을 했었다. 대장이던 그는 디아미르 벽으로 등정에 성공했지만, 밤이었고 뚜렷한 등정 증거를 내보이지 못해 한동안 의혹에 쌓였었다. 대원들조차 정상에 섰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건 마음에 깊은 상처가 됐다.
"그 뒤로 2년 정도 산을 떠났어요. 이후로 대규모 원정대를 꾸린 적이 없어요. 마음 맞는 몇 명이서 여행 가듯 가는 등반이 좋아요. 평소에 말이 많고 팀에서 '푼수'처럼 구는게 어떻게 보면 본모습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그게 좋아요. '푼수'가 팀에서는 더 큰 비타민이 될 수도 있거든요."
따라 들어간 그의 방에는 '푼수'가 읽기에는 너무 많은 양의 책이 너저분하게 꽂혀있었다. 전부 산과 관련된 것 뿐이었다.
"요 앞에 강호기 선배가 묻혀있어요. 가끔 둘러봐요. 등산은 '이즘'이죠. 행위가 아니라 종교와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알피니즘의 접근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정신부터라는 걸 옛 선배들로부터 들어왔어요. 예전에 비해 문명은 발달했는데 문화는 그대로인건 분명 잘못이죠."
고개를 꾸벅거리는 나를 일순 깨웠던 건 창문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아니었다. 시간은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쳐다본 그의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바위의 배가본드'가 보았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