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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흥식 | |
문서명 | 조사보고서 | |
조사보고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적 平安南道 龍岡郡 龍岡面 玉桃里 387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387)
현주소 서울市 鍾路區 嘉會洞 177번지 (서울 종로구 가회동 177번지) 피의자 박흥식 단기 4235년[1902] 8월 6일생 당년 48세 직업 상업 右者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4조 제7항 及 제10, 11항에 해당한 반민행위의 죄적이 현저함으로 법령 제176호 제3조 7항에 의하여 구속하고 반민족행위처벌법 제14조에 의거하여 左와 如히 조사서를 작성 보고함. 단기 4282년[1949] 1월 일 조사관 이덕근[李德根] 조사관 김용희[金容熙] 서기관 박희상[朴喜祥] 一. 피의자의 출생과 경력 피의자 박흥식은 단기 4235년[1902]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군 용강면 옥도리 387번지에서 그다지 궁색치 않은 소농의 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본시 단 두 형제로 자라나다가 장남이 요절하니 그제서는 부모가 獨子(독자)를 도시에 보내기 싫어하여 피의자 박흥식은 고향에서 소학을 마쳤을 뿐 이렇다 할 학력을 갖지 못하였다. 피의자 박흥식이 離鄕(이향)을 뜻한 것은 17세 時이니 소농 몰락과정에 처한 가정 형편을 돌볼 때 상업으로 起家(기가)하려는 야심이 들기 시작하였던 탓이다. 피의자 박흥식은 近鄕 鎭南浦 (근향 진남포(평안도))로 나와 鎭南浦商工學校(진남포상공학교)에 수학하였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였던지 학업을 廢(폐)하고, 오로지 상업에 종사 서기 1919년 2월부터 獨力(독력)으로 진남포 碑石里(비석리)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다가 실패하고, 그후 名啣舖(명함포)를 경영하다가 小(소) 규모의 인쇄소도 해보았으나 그도 亦 여의치 못하게 되니, 그때 고향 龍岡(용강)에 있는 몇 마지기 농토를 방매하고 所營(소영)하던 名啣店舖(명함점포)도 정리한 후 서기 1923년 鮮光堂印刷所(선광당인쇄소)를 경영, 서기 1924년에 이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박흥식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서기 1925년 상경하여 鮮一紙物株式會社(선일지물주식회사)를 창립, 사장이 되면서 당시 朝鮮總督府(조선총독부) 외사과장 전중무웅[田中武雄](日人)과 친교를 맺음으로 해서 일본 각 제지회사와 특약하고 比律賓 「마니라」에서 「卷取紙」(군취지(두루마리 종이)를 직수입하는 특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에서 발간하는 東亞日報(동아일보) 朝鮮日報(조선일보) 中央日報(중앙일보)와 전속 구매계약을 체결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1개월이 못되어 세계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諸 물가 폭락은 紙物(지물-종이)에도 영향되어 폭락되었으나 前記 (전기) 3신문사는 계약 관계상 어쩔 수 없이 계약 당시 紙價(지가)에 의하여 구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박흥식의 鮮一紙物株式會社(선일지물주식회사)만이 세계 경제공황도 모르는 채 홀로 순조로운 영업을 해나갈 수 있었다. 이러는 한편 종로 네거리에 金銀美術兼吳服雜貨店(금은미술겸오복잡화점)을 신태화[申泰和]와 공동 경영하던 것도 매수하여 서기 1931년 9월에 주식회사로 만들어 박흥식이 사장이 되었다.
知性(지성)에 欠陷(흠함)이 있는 박흥식은 阿謁(아알)과 贈賄(증회)에 능한 재능이 있었으니 한국 침략 착취의 總本據 朝鮮銀行(총본거 조선은행)과 朝鮮殖産銀行(조선식산은행)에서 70만원의 신용 대부를 얻게 된 것도 까닭없는 일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피의자 박흥식은 한국 유일의 실업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서기 1935년 9월에는 토지 건물의 경영 及 此種(급 차종) 금융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公稱 (공칭)200만 원의 大同興業株式會社(대동흥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사장에 취임 區區(구구)히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한국 침략의 아성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유일한 착취기관인 일본국책회사 東洋拓植株式會社(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주로 감사가 된 것은 奇特(기특)한 일이다. 이럴 즈음 百貨店 和信 (백화점 화신)은 경영방법의 拙劣(졸렬)로 난관에 봉착하게 되니 이 때는 다시 일본자본주의 침략자들과 결탁하여 합리적 소비경제와 생활양식의 一新 生面 (일신 생면)을 타개한다는 표목을 내걸고 한국 각처 지방에 토착 자본주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연쇄점을 준다 하여 토지를 저당케 하여 그 거액의 저당금 대출을 이용하여서 백화점 화신의 활로를 열어 줄 수 있는 和信連鎖店株式會社(화신연쇄점주식회사)를 창립하고 그 사장이 되었다. 피의자 박흥식은 화신연쇄점주식회사와 백화점 화신의 兩刀(양도)를 잘 조종하면서 일본 大阪(대판)에 영업소를 설치하고 일본 상품의 수입을 힘껏 했으니 이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일본의 상품시장화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던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동년 4월에는 和信貿易株式會社(화신무역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사장이 되었다.
서기 1941년에는 화신무역주식회사 화신연쇄점주식회사 及 선일지물주식회사의 3사를 합병하여 和信商事株式會社(화신상사주식회사)로 하고 同社(동사)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동월 株式會社 和信(주식회사 화신)과 대동흥업주식회사를 합병하여 株式會社 和信(주식회사 화신)으로 만들어 역시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간 해방까지 피의자 박흥식의 각종 회사의 중역 及 諸種 공직은 다음과 같다. 前記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를 역임하여 화신상사주식회사 取締役 사장 주식회사 화신 취체역 사장 京城紡績株式會社 취체역 北鮮製紙化學株式會社 취체역 朝鮮石油株式會社 취체역 濟州道興業株式會社 취체역 朝鮮生命保險株式會社 취체역 朝鮮勸業株式會社 취체역 朝鮮工業株式會社 취체역 大興貿易株式會社 취체역 南滿紡績株式會社 취체역 東光生絲株式會社 취체역 朝鮮洋紙配給株式會社 취체역 京仁企業株式會社 취체역 株式會社每日新報社 감사역 공직관계 朝鮮總督府物價委員會 (조선총독부물가 위원회) 위원 朝鮮中央賃金委員會 위원 朝鮮總督府保護觀察所 촉탁 보호사 國民總力朝鮮聯盟 이사 練成部 연성위원 國民總力京畿道聯盟 참여 國民總力京城府聯盟 이사 大和同盟 심의원 興亞報國團 상임위원 京城司法保護委員會 참여 朝鮮貿易協會 이사 朝鮮工業協會 常絡理事 帝國發明協會 朝鮮本部 이사 財團法人 私立新光商業學校 이사장 朝鮮輸出工業協會 이사 朝鮮實業俱樂部 부회장 財團法人 機械化國防協會 朝鮮本部 이사 食糧協會 朝鮮本部 평의원 被服協會 朝鮮支部 이사 東亞經濟懇談會 朝鮮委員會 위원 이 中 식량협회와 피복협회는 조선軍 관계 그리고 피의자 박흥식이 日帝에 가장 충실하여 그 공적에 따라 공로상을 받은 것 중에 가장 주요한 것을 보면 如左하다. 서기 1940년 10월 帝國敎育協會長으로부터 일본교육사업 진흥에 공헌했다 하여 공로상을 받은 것을 위시하여 서기 1940년 9월 조선 총독으로부터 항공사업 발전에 공헌한 공적에 의하여 공로상을 受함. 서기 1940년 10월 조선 총독으로부터 조선개발 진전에 盡瘁하여 총독 施政上 기여한 공적으로 총독 시정 30년 기념에 當하여 공로상 수여. 서기 1942년 12월 15일 일본 총리대신(일본 최고 전범자 동조영기[東條英機])의 초청을 받아 全日本産業經濟代表者戰力增强懇談會에 참석하여 피의자 박흥식의 말을 빌건대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 배알의 광영에 洽하였다. 이어서 서기 1943년 6월에는 海軍協會로부터 공로장을 받음으로써부터 더 한결 至誠으로 日帝에 봉공하여 일본제국 신민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와 貫祿을 갖추게 되었다. 二. 피의자의 가정상황 피의자 박흥식은 현주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77번지에 광대한 주택에서 처 한인하[韓仁河](33세), 그의 母 김선[金善](84세), 장녀 봉숙[鳳淑](8세)과 동거하며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밑에 식모 2명, 傭人 3명, 수위 2명, 火夫 1명 그리고 처의 母와 처제가 기거하고 있다.
피의자 박흥식은 일찍이 初娶에서 1녀를 출생( 박병숙[朴炳淑] 婿 장병찬[張丙贊])하였으나 이혼하고, 두 번째 桂 姓의 女와 결혼 1남 2녀(장자 병석[炳奭], 장녀 영숙[英淑], 차녀 경숙[慶淑])를 출산한 후 이혼, 현재 처는 제3번이다. 피의자 박흥식은 이와 같이 단조롭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던 중에도 혹은 紅裙의 치마폭에 싸이기도 하고, 혹은 令孃을 꾀이기도 하여 항간에 염문의 화제를 자지케 하였다. 三. 죄적(범죄보고서) (가)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한 사실 피의자 박흥식은 소위 대동아전쟁이 결전 단계에 이르렀을 소화 19년 2월(서기 1944년) 일본의 항공 戰力을 확대하므로 일본 필승의 신념 밑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코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기획의 趣意를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내각총리대신에게 피력 즉시 欣諾을 얻어 회사 창설의 지령에 接하였다. 以來 피의자는 수차에 □하여 일본 東京에 가서 일본정부 당국과 절충한 결과 자본금 5,000만원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 내락을 받았으므로 소화 19년(서기 1944년) 7월 박흥식이 발기인이 되어 설립 趣意書를 내걸고 주식을 공모하였다. 그래서 소화 19년(서기 1944년) 10월 4일 박흥식이 대표 취체역이 되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를 설립 등기를 마치고 동년 10월 30일 조선총독 아부신행[阿部信行]에서 항공기 제조사업 허가를 받았으며 동년 12월 8일 육군대신으로부터 군수회사로 지정 동년 12월 19일에 생산 책임자로 취임하면서 대표 취체역의 자격 상실 등기를 了하였다.(證 1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비행기주식회사 설립 취의서에서 이르기를 『조선은 총독 시정 이래 三十有五年 반도 2,500만 민중은 한 가지 皇恩에 浴하여 이미 물심양면으로 戰力에 응분 공헌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疆內에 항공기 생산기관으로 보잘 것이 없음은 유감이다. 이에 우리들은 하루라도 속히 우리들의 땀과 피로써 된 비행기로 戰場에 보내기가 주야 염원이던 바 더욱이 금년은 징병 실시의 기념할 해(年)이고 보니 지원병 學兵에 연이어 忠勇한 반도 장정은 전원이 들어 皇軍精强에 새로운 위력을 더할 때라. 이 때 敵 격멸의 제일 무기인 정예한 비행기를 우리 손으로 제작하여 결전장으로 보내어 우리 皇軍이 이를 구사함으로써 東亞의 숙적을 격멸하는 날 그 감격을 어디에다 비할 것인가』 하였다.(證 제2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은 이 회사에 자기 명의로 2만株 주식회사 화신 명의로 14만株를 들였으며 이에 찬동한 주주들은 백낙승[白樂承], 박춘금[朴春琴], 김연수[金䄵洙] 등을 위시하여 日本國際空港, 滿洲飛行機, 朝鮮殖産銀行 등이었다.(證 제3 及 11 참조)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의 풍부한 電力과 絢爛한 광산자원은 항공기 공업에 최상의 입지적 조건을 구비한 것을 알았으며, 綽綽한 인적 자원은 일본 戰力에 큰 힘이 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그의 말 맞다나 불손한 적이 제국 본토에 대하여 공습의 도가 점점 증대하는 정세에서 국토 방위의 확고를 기하기 위하여서는 동포들의 순국 정신을 體한 반도의 넋을 담을 비행기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못배기었다. 한편 이 비행기 제조사업이 군수공업 중에 超 중점적 사업인 것을 깨달았을 때 일본정부 당국에 숨김없는 忠意를 보임으로 해서 深厚한 관심과 막대한 후원을 얻어 자재 及 기술 획득에 십분 成算을 가지고 난관을 돌파할 것을 확신하였던 것이다.(證 제2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朝鮮軍과 총독부 지도 하에 제작하려던 항공기는 「キ七九丙」種의 비행기니 당시 조업 중의 조선 有數의 人絹織物工場으로 여공 약 1,000명을 擁하는 朝鮮織物株式會社와 東洋紡績株式會社 安養공장을 개수 전용하여 제1사업 연도 중에 항공기 제조에 필요한 건설과 部分品 가공을 실시하고, 제2사업기에 만주비행기주식회사의 협력을 얻어 前記 「キ七九丙」種 機의 작업을 일관적으로 실시하여 月産 60기 이상, 제3사업 년도부터 月産 120기 이상의 생산을 계획하였다.(證 제4호 허가신청서 참조) 이와 같이 거대한 사업 기획 하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착착 운영을 진척하였으니 조선군과 총독부의 절대 지지 하의 조선 내의 소위 유휴자재라는 자재는 모조리 공출 전용하면서도 자금 5천만 원 拂込 2,500만원으로는 부족하여 사업 예산은 무려 1억8백만원에 달하였으니 불입 자본금에서 부족액 8,300만원을 획득하기 위하여 戰時金融金庫로부터 융자의 내락을 얻게 되었음은 그의 殉國 至誠이 조선총독부에 感하였다고 할까. 그는 곧 조선총독부에 임시자금조정법에 의하여 인가 신청을 제출하였다. 그래서 이 戰金 차입금을 받기까지 일시 繫資金으로 조선식산은행에서 2,000만원을 차용하였다.(證 제5호 참조) ((소화 19년(서기 1944년) 6월 10일 현재 자산 부채상황(證 제12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 기획하기까지는 如左하였거니와 그의 운영 방침은 어떠하였던가. 그는 다음과 같은 방침을 내걸고 솔선수범 진두지휘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一. 급속 생산에 돌진할 것. 二. 생산 책임자 이하 간부는 솔선수범 진두지휘에 撤할 것. 三. 入魂의 비행기를 제작함에 정신 지도의 철저를 기할 것. 四. 대륙항공기 공업의 자급태세 확립을 促할 것. 五. 조선 기술 勞務 등 인적 자원 활용을 꾀할 것 등등이다. 피의자 박흥식은 前記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 8일 군수회사법에 의하여 생산책임자로 선임되면서 日本軍需省에 의뢰하여 日人 암기안미[岩崎安美]라는 일본 군인의 기사를 데려다 앉혀 놓고 점차 인원 충실을 해나가는데 소화 20년(서기 1944년[편집자주 -1945의 오기]) 6월 현재로 직원 650명 工員 약 1,700명 해방 직전에는 2,800명에 달하였다.(證 제5호 현황보고서 及 피의자신문조서 참조) 그리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종업원은 소화 20년(서기 1945년) 2월 22일과 6월 8일 2회에 걸쳐 徵用令書의 교부를 얻고,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에 생산 內示를 받아 소화 20년(서기 1945년) 3월 상반기의 생산 명령을 받고, 소화 20년[1945](서기 1945년) 1월 日本航空本部 주최 하에 만주비행기회사에서 轉換會議가 개최되었을 때 기술과 자재 등 각종 면에 만주비행기회사의 원조를 얻어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 以降 약 600명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직원과 공원을 파견하여 初號機 제작에 노력하여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 이를 완성하였다. 한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은 소화 19년(서기 1944년) 5월 시운전, 동년 6월부터 일부 작업을 개시하였다.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이 일부 작업을 개시하기까지에는 朝鮮軍司令部와 총독부의 힘을 빌어 前記 조선직물회사 及 동양방적회사 안양공장을 접수한 것은 물론 건설에 있어서 공장과 비행장의 설계를 끝내고 정비조립공장 공사에 착수 一面 지하공장의 계획을 진척 중이었으니 이 지하공장은 공장과 창고 2천여 평을 부근 山形을 이용하여 실시코자 한 것이며,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 초순에 공사에 착수하여 11월경에 완료할 예정이었던 것이다. 이 지하공장이 완성될 때는 중요 기계를 疏散하여 여하한 空爆에도 2분지 1의 작업을 실시할 수 있다 하였으니 그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끝끝내 투지는 오늘날 한번 비웃어 버리기에는 지나친 悲壯한 바가 있다 하겠다. 피의자 박흥식이 말하는 숙적 美英을 격멸하기 위하여 하루라도 속히 비행기를 제작하려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기계와 물자 調辨을 하기에 얼마나 날뛰었던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생산 책임자 박흥식은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 막료를 거느리고 몸소 상해에 출장(證 제5호 p34참조) 당시 무적부대를 壯言하던 上海登部隊를 위시하여 關東軍과 절충한 끝에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까지에 기계 531대를 확보, 그 중 400여 대를 수입 각 공장에 据付 완료하였으니 이만한 기계를 구입하는데 국내 국민의 직접 혹은 간접 희생이 얼마나 했을까 보라. 상해 구입 기계 공구 대가 2십 수억 불은 「바-타」에 의하여 결제되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까지에 벌써 14억 불에 상당한 인삼, 해산물, 직물 기타 雜品 등이 상해로 송부 완료된 것이다. 그리고 잔액 약 10억 불도 조선총독부 원조 하에 이미 확보 노력 중에 있었다.(證 제5호 p41 참조) 이 뿐이랴. 비행기 제작에는 피의자 박흥식이 생각하던 것과 같이 魂과 넋과 순국의 정신만으로는 되지 않아서 많은 기계와 물자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물자를 구하는데 국내의 다른 산업이나 개인 산업을 돌볼 여지조차 없는 것이었다.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군사령부 병기부에 읍소하였다. 그래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사원이면 전용자재를 취득하기 위하여 조선군사령부 병기부를 대행하는 증명서 교부를 받았다.(證 제6호 참조) 조선군 병기부를 대행할 수 있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책임 경영자 박흥식의 명을 받는대로 全鮮 각지를 물샐 틈 없이 쫓아다니며 전동기 고압기 등을 조사 물색하여 심지어 정미소 두부집 아이스케잌집까지를 징발하였으니 조선군 병기부 대행기관의 서슬 앞에 울며 바친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證 제7호 참조) 참고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所要한 기계 수량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취득한 수량을 보면 다음과 같다.(證 제5호 참조)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 현재 기계 소요 수량 1,083대 취득 수량 700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一綿 皇軍 장병의 피를 토하는 듯 절규하는 비행기를 제작하는 데는 국내에 如何한 산업도 경제도 안중에 없었으니 鋼, 木才, 硝子, 刃物, 시멘트 무엇이고 닥치는 대로 모아들였다. 일본항공본부로부터 할당 배급받은 600屯의 보통 鋼은 그의 불붙은 생산의욕 앞에 태부족을 告하니 이제는 조선 만주에서 물색할 수밖에 없다 하여 만주에서 유휴 건물이라고 해체한 것 100屯의 廢鋼을 취득한 外 충청남도 金馬鑛山 採金船까지를 매수 해체하여 보충하였다. 목재가 쓰일 때는 서울시의 疏開 건물을 불하받아 목재, 기와(瓦), 석재, 建具, 疊까지 휩쓸어 갔다.(證 제5호 p46 참조) 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책임 경영자로 비행기 제작, 기계 자재 등 調辨에 吸吸한 끝에 획득한 기계와 資料는 前記 상해로부터 수입한 400여 대 일본항공본부로부터 鋼材 600屯 외에 硅素 강판 37屯 鋼 27屯의 배급을 받았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목재, 시멘트, 못 등을 할당받고, 前記 만주비행기회사로부터 생산자재 50機分(부분품 10기분 재료 40기분)의 양도를 받았던 것이다.(證 제5호 참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이만한 기계와 자재를 갖추어 놓은 한편에 공원들 작업과 훈련은 어떠하였나. 급속 생산을 위하여 회사가 설립되기도 기다리기 어려웠던지 소화 19년(서기 1944년) 8월에 벌써 제1회 지도 공원을 모집하였으니 지원자 數 二千명에서 179명을 제1회로 채용하였다. 이 때의 형편을 보건대 지원자는 당시 일본 北海道, 南洋 등지에 징용이 우심한 때라, 그래도 국내에 있기를 희망하고 다수 지원하였던 것이다. 6대 1의 경쟁률에서 낙오된 자가 많은 것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가 공원을 선발함에 일본정신에 투철하고 멸사봉공 盡忠報國의 황국신민만을 엄선한 탓임에 틀림없다. 그리하기를 소화 19년(서기 1944년) 11월에 일반공 1,118명, 소화 20년(서기 1945년) 1월에 일반공 300명, 소화 20년(서기 1945년) 2월에 지도공 120명을 모집하여 4회에 걸쳐 1,717명을 모집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3월에는 공원 5,000명 계획이 서있었다.(證 제5호 참조) 이들은 물론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새로운 칙령 제316조로 국가총동원법 제4조에 의하여 징용된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다. 이렇게 징용된 소위 공원들은 入魂의 비행기를 製出하는데 정신 지도에 철저를 기한다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社是에 따라 廣州 육군연습장 廠舍에 수용하고 조선군의 지도 밑에 기본 훈련을 1개월씩 받게 했다. 그 후는 다시 일본 名古屋과 만주로 보내어 실습케 하였으니 소화 19년(서기 1944년) 12월부터 소화 20년(서기 1945년) 8월까지 1,734명이 실습했다. 일본 名古屋 三菱工場과 平壤航空廠 仁川造兵廠에서 실습한 공원들은 1개월 내지 4개월 만에 돌아와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에서 從業하였고, 만주비행기회사에 간 513명은 실습을 마치자 만주비행기회사 밑에 협력공장에서 비행기 생산에 종사케 하였다.(證 제5호 p49 참조) 前記 만주비행기회사는 소화 20년(서기 1945년) 일본항공본부 주최 하의 轉換會議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만주비행기회사에서 기술과 자재의 원조를 받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서는 인적 자원을 제공하여 비행기 조속 제작의 협약이 있었던 것이다.(證 10 及 5 참조) 그리하여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공원이 만주비행기회사와 기타 협력회사에 배치 종사한 것은 이 所以이다. 참고로 이들 협력공장의 생산품과 작업상황은 如左하다. 만주비행기회사가 설계 製圖 검사 발동기 架釖金 부품 10기분, 艤裝 조립 정비 4기분, 滿洲航空平台 風防 5기분, 滿洲航機 主翼析 脚支持金具 10기분, 大林航空機 主翼切組 4기분, 主翼小骨 補助翼 의자 泥除 10기분, 內材製作所 安定板 舵翼 10기분, 滿洲自動車 下翼 탱크覆 10기분, 北信製作所 동체골격 방화벽 脚金具 배기관 尼瑞覆 10기분, 鳥井製作所 胴體整形 4기분, 宮田製作所 發動機覆 흡입관 탱크 10기분, 東亞精工 脚柱 10기분. 이와 같이 각 부분을 分坦한 협력공장에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공원은 생산에 從業하여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에는 제1호기의 主翼 동체를 위시한 대부분이 작업을 끝내고 동년 8월에 試飛行을 실시하였으며, 제2호기 제3호기 이하도 부분품 제작 중에 있어 소화 20년(서기 1945년) 9월 말에는 작업 완료를 기대했던 것이다.(證 제5호 p50 참조) 이럴 즈음에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안양공장에서는 소화 20년(서기 1945년) 6월 현재 기계 부분품 7종 35점을 작업하였다.(證 제5호 참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공원은 누구나 국민학교 졸업자로서 연령은 20세 미만자가 반수 20세 台가 반수를 점한 상황이었는데 조선에 있어서의 공원 소질로서 최고 수준에 가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에 소질이라 함은 사상적으로 無地하여 일본정신을 담아 넣어주기에 적당하고 체력이 건장하여 苦役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말함이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4월 평양항공창에 파견된 실습 상황을 보건대 기계공장 정비공장에서 비행기 수리 관계 작업을 시켰으며, 소화 20년(서기 1945년) 5월 5일 이래 평양 第三中學校에서 분산공장 건설을 위한 기초공사를 하였을 때 斷崖切崩 작업 중 高 약 3米, 폭 10米의 赤土가 斷崖에서 붕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공원 광촌종영[廣村鍾英] 외 3명이 매몰된 사실이 있다.(證 제8호 참조) 그뿐 아니라 廠舍 불결과 과로로 말미암아 환자가 속출 전염 만연되는 形況이었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5월 10일부터 동년 5월 24일 사이에 疥癬 환자 삼정구영[三井求永] 외 16명을 算하였다.(證 제9호 참조) 한편 피의자 박흥식을 책임 경영자로 하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는 滅私盡忠 책임감에 撤하여 참된 내선일체 簡素 强力 精兵主義의 社風 확립에 銳意 노력하였으니 군대에 준한 통솔태세를 갖추고 一切를 국가에 奉還하여 항공기 생산 一途에 정진하였다.(證 제5호 p26 참) 1,000평의 神社 건립을 계획한 것도 그의 裏心을 斟酌할 수 있다. 또 피의자 박흥식은 그가 경영주로 관계하는 光新商業學校를 朝鮮飛行機工業學校로 전환하여 前途有爲한 청소년을 조선비행기공장에서 실습시키며 학교 과정을 마치도록 하여 우수한 비행기 기술공을 대량 양성하려 하였으니 소화 20년(서기 1945년) 4월 20일 附 광신상업학교는 공업학교로 인가되어 동시 항공과 기계과 각 2학급에 240명을 입학 허가 항공기 공업을 수업하게 하였다.(證 제5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이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책임 경영한 사실은 이상과 같거니와 피의자 박흥식이 굳게 믿었던 일본 필승은 연합군의 깃발 아래 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을 고하게 되었으니 走狗 박흥식이 그의 주인 조선군 참모장을 찾아가서 슬픈 苦杯를 같이 마신 것이 동년 8월 16일의 일이다. 그래서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군으로부터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拂込株金 2,800만원과 식산은행의 차입금 2,000만원을 받아들고 나와 1,200만원을 주주에게 나눠주고 1,600만원과 2,000만원 합 3,600만원을 착복하였으니(피의자신문조서 참조 及 證 10 참조) 그가 일제를 위하여 멸사봉공한 보람이라 할까. 조선군에서 비행기를 내줄테니 모국 일본으로 가자는 것을 보류한 내심 또 奈邊에 있었는지. 피의자 박흥식이 일제의 공로금을 받은 3,500만원이 해방 후 우리 商界를 얼마나 혼란시켰는지. (나) 일본 國策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 본부의 수뇌 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사실. 피의자 박흥식은 前記 경력에도 있는 바와 같이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를 위시하여 수많은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의 수뇌 간부였으니 원래 동양척식주식회사만 하도라도 한국 침략의 아성으로 서기 1908년 소위 「통감부시대」부터 倭人을 한국에 移民하기 위하여 설립된 일본제국주의 국책이었던 것이다. 즉 이 회사는 서기 1910년에 「朝鮮移民規則」을 제정하고, 서기 1911년으로부터 서기 1927년까지 17회 동안 매년 倭人을 1천 戶씩 이민하여 왔으며 이민의 방법으로는 한인의 토지를 강제로 염가로 매수하며 나머지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토지수용령을 내려 한인의 농토를 매수하여 그 소유권을 동양척식회사가 차지하고 한국 자주경제권을 이 동양척식회사가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同 회사는 한국 경제 착취의 유일한 기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皇國國土膨脹計劃」에 있어서 유일한 실천기관이었다. 즉 일본은 한국의 경제 주권이 한국 인구 8할 이상을 점령하고 있는 농민에게 있음을 知悉하고 한국의 경제 동맥을 일본국책회사인 동양척식회사가 장악한 후 한국의 치열한 독립운동을 좌절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 회사가 보호조약 갱신 후 설립된 회사라면 더 설명을 필요치 않은 것이다. 피의자 박흥식은 여기에 대주주로 감사의 자리를 가졌다. 이리하여 일본의 침략적 제국주의 경제 착취에 협력해 온 피의자 박흥식은 소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亨生한 자로 응분의 그 誠을 竭할 것을 굳게 결의하고 蹶然活躍하였으니 서기 1941년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興亞報國團을 결성하려 함에 피의자 박흥식은 결성 준비위원의 한 사람이었으며, 결국은 조병상[曺秉相], 정교원[鄭僑源]과 같이 상임위원이 되었다. 다시 서기 1941년 10월 9일에는 京城府民舘에서 臨戰報國團을 결성함에 준비위원이 되었고 동년 10월 13일에는 고원훈[高元勳]과 같이 평양에서 皇道 宣揚을 遊說하였다. 이 임전보국단이라 함은 정신적 물질적 勞務的으로 전력을 기울여 銃後奉公에 일층 철저하여 충렬한 일본 장병의 분투에 대응하고 무한한 皇恩의 萬一을 奉報하자는 취지에서 황국 신민으로서 皇道 정신을 선양하고 사상의 통일을 기할 것. 국가 우선의 정신에 基하여 國債의 消化, 저축의 勵行, 물자의 공출에 邁進을 기할 것. 국방 사상의 보급을 圖하는 동시에 一朝有事로 秋에 義勇 방위의 實을 거두기를 기할 것 등등을 강령으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령을 실천할 것을 목적하고 勤勞報國 道場 설치, 禊道場 설치를 위하여 20만 원을 기부한 것을 보면 피의자 박흥식은 일본 국책을 추진하는 데 挺身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감행한 것이다. 피의자 박흥식이 일본의 전쟁 완수를 적극 추진시키기 위한 관제 국민운동기관 소위 「 國民總力朝鮮聯盟」의 이사로 鍊成部 연성위원이었다는 것은 前記한 바이다. 또 피의자 박흥식은 大和同盟의 심의원이었으니 대화동맹은 소위 대동아전쟁 말엽에 그 운동목표가 一. 내선일체 촉진 二. 必勝 태세 확립 三. 황민화의 鍊成 四. 증산 공출 책임의 완수였다. (다) 사회문화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 지도한 사실. 피의자 박흥식은 前記 소화 17년(서기 1942년) 12월 15일 일본 총리대신( 東條英機)의 초청으로 全日本産業經濟代表者 戰力增强懇談會에 참석하여 일본 천황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익년 12월 16일 每日新報에 「지성으로 봉공하겠다」라는 題下 그 심정을 발표하기를 「작년 今月 今日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浴하였는데, 지척에서 龍顔을 奉拜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 산업경제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 황공하옵신 大御心에 奉副코자 더욱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제 결전의 양상은 나날이 심각 가열해서 戰力의 증강은 刻刻으로 급무가 되고 있는데 지금의 一砲一機는 明白의 十砲十機보다 나은 戰力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安閑히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戰場에 있는 사람은 직접 戰力化되고 아니 되는 것을 불문하고 오직 증강에만 용기를 내며 최후의 승리를 얻기까지 매진하여야만 됩니다. 대동아전쟁 이래 우리 반도 2,500만의 赤子가 얼마나 皇民됨에 자각을 높여 얼마나 聖業 翼贊을 위해서 지성을 다해 왔느냐 하는 데 대하여 나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內地 동포와 같이 참다운 일체가 되어 대동아전쟁의 필승과 더불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전체를 바치고 있다는 것은 명백히 단언할 수 있어 그것을 경축하는 바입니다」 라고 게재하였다. 서기 1942년 5월 30일 매일신보에 발표한 담화 「영원히 못잊을 慈父」라는 題에서 당시 조선총독부 南次郞을 자기의 祖父같이 말한 것은 그의 정신과 신념이 반민족적이라는 것은 證하고 남음이 있다.(證 제14호 참조) 피의자 박흥식은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됨에 담화를 발표한 것과 조국 아닌 倭國에다 충성을 다하는 것이 황국 신민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학병을 종용하였으니 서기 1943년 11월 10일 매일신보에 「이 戰果를 생각하고 학병의 분기를 바란다」라는 題下 「특별지원제 발표로 반도 2,500만 동포가 기쁨의 絶項에 달하여 있을 때 거듭하여 이런 大戰果를 접한 것을 皇軍 장병들에 대하여 진심으로부터 감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존귀한 노고에 보답을 할까 하고 적지 않은 큰 부담을 느끼는 바입니다. 아무리 생산력이 풍부함을 자랑하는 敵 米英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우리 황군 앞에 굴복하리라고 확신한다. 이런 때를 당하여 반도 청년 학도들은 일층 자신의 숭엄한 임무를 깨달아 오는 20일 지원병 모집기한까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지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으니 피의자 박흥식은 일제하 거대한 존재로서 언론 기타 방법을 통하여 십분 지도적 역할을 결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