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3.31. 언어의 배치와 뜻의 고집
언어의 배열을 바꾸면 뜻이 바뀐다. 예를 들어 개가 사람을 물었다라는 문장의 주어와 목적어를 바꿔보자. 사람이 개를 물었다가 된다. 인터넷 실시간 검색 순위 상위권이다.
하지만 어떤 뜻을 고정시켜놓고 이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다양하게 만들어 질 수 있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나 사람이 개에게 물렸다 혹은 사람을 문 개가 있다. 개에게 물린 사람이 있다라는 4개의 문장은 하나의 사건을 고정해 놓고 다양하게 표현한 것이다. 문장이 다르지만, 뜻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개를 물었다라는 충격은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고집스런 뜻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일까? 언어의 배열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뜻이 변경되는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경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쪽에서는 인간을 죽이겠다고 덤비는데, 성경을 읽는 인간 쪽에서는 무조건 살아남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쪽에서는 언어의 배열과 상관없이 추방과 사망을 배경으로 깔고 교회라는 한 몸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사랑 사건만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무대 한 가운데 배치시키신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의 배열을 중요시 하고 그 배열의 달라짐에 따라 혹여 의미도 달라질까 하여 자신의 영생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타진해 보는 것이다. 언어없이 인간은 사고할 수 없으며, 그 언어는 생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생각의 창조자인 셈이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아담은 말씀안에서 소통하였다. 한 몸이었기에 언어가 필요 없었다. 말씀 안에서 창조주와 피조물은 언어의 도움이 필요 없다. 욕구가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말하는 주체와 주체가 서로 분리되어 있을 때 서로의 욕망을 확인하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저지르는 기만전략이다.
예수 안은 한 몸이다. 한 몸은 나와 너가 없다. 그러므로 욕망도 같다. 머리의 욕망만 남는다. 예수님의 욕망은 무엇인가?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저주할 자는 저주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0장은 예수님께서 저주할 자로 만든 자들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육체대로 행하는 자
- 모든 이론
-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짐
- 모든 생각
- 외모만 보는 것
이런 자들이 7절 말씀처럼 생각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찐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자, 위 말씀은 이런 뜻이다. 육체대로 행하는 자가 자기를 그리스도에 속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앞에 바울이 있다. 바울이 적은 편지도 있고, 대면하여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육체대로 행하는 자들이고 외모만 보고 모든 이론을 동원하고 모든 생각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므로 바울의 편지나 말도 그렇게 판단한다. 결국 10절처럼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육체대로 행하는 자의 눈에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육체와 외모가 만들어낸 이론과 생각으로 판단한 결과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그들을 주님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밖에 있다, 그가 사도이다, 아니다라는 판단은 여전히 그들이 육체대로 행한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3절, 4절처럼 적고 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것이다. 왜? 육체에 있기에 육체에 따라 판단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의 싸우는 무기는 다름 아닌 그 육체의 모든 결과물을 파하는 것이다. 완전히 박살내는 것이다.
흔히 성도는 성도를 알아본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가 복음을 아는 자인지 모르는 자인지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도는 그 판단자체가 육체의 소산물이라고 생각하여 박살나고 파하고 산산히 부서져야 할 것임을 안다.
이 상황에서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복종이다. 파해져야 함에 자신의 육체적 판단이 복종되어야 한다. 순순히 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에서 박살내는 것이다. 6절에 등장하는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란 나는 주님에게 복종되었노라는 선언 자체가 외모만 보고 판단한 정형적인 육체의 행한 결과라는 사실이 십자가 앞에서 처참하게 찢기는 상태를 말한다.
개의 눈에는 개만 보인다고 한다. 개가 어떤 사람을 보고 참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개가 생각한 사람이기에 여전히 개다. 개는 죽어도 참 사람을 알아볼 수 없다. 그 개가 십자가의 모든 이론을 알고 모든 생각을 받아들였다 하여도 그 개는 여전히 개이며, 그 개가 깨닫게 알게 된 [예수 안]은 사실 [개 집안]인 것이다.
내가 알게 된 예수, 내가 알게 된 복음이 개 밥그릇 안에 놓여진 찬밥인 사실은 십자가 지신 주님께서 그 개밥 그릇을 뻥 차버리시고, 개를 잡으시면서, 그 개를 사랑하실지, 저주하실지 로만 결정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여전히 자신의 복종상태를 자랑하며, 소중히 생각하며 연습하며 체계화하여 교육하고 전도하여 양산해 낸다. 유통시키고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한다. 내일 보신탕집으로 팔려갈 서커스단의 똥개가 여전히 곡예를 연습하는 꼴과 같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지만, 뜻은 같다.
12절 하반절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결국 분량의 한계(13절)를 인정하고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한다. 복음은 모든 한계를 넘어 전파된다.
그래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십자가만 자랑하도록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고 사랑하신 그 순간 구원이 결정된다.
언어의 한계 안에서만 맴맴 돌고 있다가 그 나열과 상관없이 등장하는 십자가는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는 방법으로만 육체를 상대하신다. 그것이 성경을 기록하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다.
첫댓글 말씀이 저에게는 아직 어렵네요
설명을 조금 더 해 주십시요
1.타락전에 한몸이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됩니다
창조전의 선택은 이해가 쉽지만 창조후 즉 피조물이 된 후
타락 전까지 한 몸이라는 것이...
2.창조주의 말씀도 언어라면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저지르는 기만전략이라는 표현은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행하는 어떤 것(행위,수단,..적당한 표현을 찾지못했습니다)이라
해야하는 것은 아닌지요
1번과 2번을 함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언어는 서로 원수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죽이고자 하고 인간은 살고자 합니다. 살고자하는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타락 전 한 몸이었다고 쓴 이유는 창조하신 그 말씀 안에서 아담이 자기 스스로 살아남고자 생존 본능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담은 선악과 명령 속에서 그 명령을 자신의 언어로 거부하고 살고자 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뜻은 대체로 이해가 되는데 완전히 동의가 되지 않는 것은 제 사고체계가 아직 확립이 되지 못해서인듯 싶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 새로운 피조물이라면 옛 창조의 아담은 하나님 절대 의존적 존재이긴하지만
한 몸이란 표현은 역시 거부감이 드네요 그리고 성령께서도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신다는 의미에서는 기만전략이란
표현도 선뜻 내키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편에서의 해석은 항상 아전인수입니다만...
반대하기 위함이 아니고 아직 온전한 이해가 미진한 제 마음상태의 표현인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르는 것 수시로 질문 여쭙겠습니다
타락 전 한 몸이란 우리 존재의 '없음'을 뜻하는 것 아닐까요? 예를들어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없음이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심 안에서는 눈으로는 보는 것과 달리 이미 존재하는 거죠. 탯줄을 끊고 나오기 전과 후는 있음과 없음의 거리가 발생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