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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2016년 4월 28일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요한 15,9-11)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ove.
말씀의 초대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의 할례 문제로 논란을 벌인 끝에 베드로는,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우지 말고, 다만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게 하자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이웃에게 생활로써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에게 관심을 두고 그를 인정해 주는 자세가 먼저 필요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나보다 더 훌륭해서도 아니고, 더욱이 그를 사귐으로써 어떠한 이익이 있어서도 아니지요. 우리 모두를 참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약점과 결점을 그 사람만의 약점이나 결점으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약점을 나의 약점으로 받아들이는 넓은 포용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가운데, 상대방을 이해하며, 부족한 점은 서로 보완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남을 인정하고 섬기는, 그러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미움과 무관심만 있게 마련이지요. 무관심과 미움은 우리를 서로 갈라놓고, 끝내 영적으로 눈멀게 합니다.
그러므로 한번쯤, 나의 가정과 직장, 이웃을 살펴보고, 그들에게 어떠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누지 않을 때, 하느님의 사랑도 우리와 함께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반영억신부-
무 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가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인식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할 수 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실제적으로도 이웃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받은 사랑에 감사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지역의 특산물은 복숭아입니다. 복숭아는 나무 가지에 달립니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나무 자체가 튼실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가 튼튼하고 그 뿌리를 통해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농부의 손에 의해 가지치기를 하고 적과를 하며 다듬어져 더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햇빛과 비가 적기에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더더욱 나무가 심겨진 땅은 이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한 알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서로 간에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리해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요한13,35).
우 리 옛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되어야 자식이 반 효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내리사랑 안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도 같은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는 아홉 자식이 있을 곳이 있지만, 아홉 자식의 어느 집에도 아버지가 있을 곳은 없다.”는 격언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 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 받는 존재가 됩니다”(작 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기쁘게 지키시기 바랍니다. ‘말로나 혀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며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요한15,9)
-김대열신부-
사랑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상대의 표현도, 그것의 진위를 파악하는 우리의 감각도 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사랑을 구하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해 힘들어 합니다.
더욱이 사랑하는 쪽의 입장이라면 그 안타까움은 더 합니다.
연인 관계라면 상대의 사랑을 끝없이 확인하려는 작업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랑하는 데 쓰는 에너지보다, 사랑을 확인하려는 데 쓰는 에너지가 더 강해집니다.
우리는 왜 사랑에 확신을 가질 수 없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사랑은 왜 변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을 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우리이기에 우리의 사랑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자기 중심이 되어버리고 마는 우리의 모자람은 사랑을 힘들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 고백은 늘 확신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한결 같은 사랑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또한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기에 가능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답을 구해봅니다.
사랑의 확신은 상대에게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은 내 이기심이 크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가 움직이고 있지 않는다는 발상 자체가 사랑과는 거리를 가집니다.
불완전한 우리는 상대의 반응에 사랑의 의미를 두고자 합니다.
이런 발상은 사랑을 소유의 개념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사랑의 방향은 항상 내 쪽으로부터 흘러가야 합니다.
일방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서로 지켜야 할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사랑을 할 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의 배반 앞에서도, 당신이 마셔야만 했던 죽음의 잔 앞에서도,
당신께서는 진정 사랑했기에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은 자기가 그린 그림 안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상대를 향한 것이 사랑인줄 알면서도 모든 것이 자신을 향하기를 욕망합니다.
사랑에 확신을 갖고자 합니까?
그렇다면 사랑 받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상과 활동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이수철신부-
어제 상담을 공부하려는 어느 분에 대한 충고가 생각납니다.
"상담가의 우선적 자질은 공감의 사랑입니다. 이런 기본적 자질인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이듯이
사람을 대하는 상담 역시 테크닉이 아니라 공감의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사랑뿐이듯 상담을 잘하는 비결도 사랑뿐입니다.
진정 사랑할 때 알고 보임으로 올바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관상과 활동 역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관상에서 흘러나온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인 것이 사랑의 관상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역시 제가 자주 써드리는 고백성사 처방전의 보속 말씀입니다.
어제의 '내 안에 머물러라.'에서 구체적으로 '사랑'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샘, 관상의 샘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
예수님의 샘솟는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근거였음을 봅니다.
진정한 사랑, 순수한 사랑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지금도 주님을 통해 끊임없이 제공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바로 이게 관상의 사랑, 관상의 행복, 관상의 기쁨입니다.
우리 모두의 소명은 '사랑의 관상가'임을 깨닫습니다.
사실 눈 만 열리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 존재임을 봅니다.
이를 실감나게 묵상할 수 있는 사랑의 관상시간이 성전에서의 미사, 기도, 묵상시간입니다.
아니 어느 자리에서든 이런 사랑의 관상 훈련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살 때 비로소 해결되는 영적 배고픔이여 목마름입니다.
10일 간의 피정지도라 하지만 오히려 제가 피정하고 온 느낌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지내다 온 기간이었습니다.
추상적인 주님 사랑이 아니라 수녀님들의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역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와 성무일도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며 주님 사랑 안에 머물렀던 시간입니다.
"얼굴이 환하고 밝습니다.“
피정이 끝나는 점심 시간, 총원장 수녀님의 말씀에,
"저요?“
"신부님도 그렇고 수녀님들도 그렇습니다.“
잠시 멋쩍은 느낌이었지만,
그 말씀을 듣고 수녀님들을 보니 하나하나가 태양처럼 환히 밝게 빛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총원장 수녀님은 앞에 보일 듯 말 듯 연초록 바탕에 연노랑 돗나물 꽃과 마가렛꽃 세 송이가
소박하게 꽃꽂이 된 모습을 보며 무엇을 뜻하는 가 저에게 물어봤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신망애 삼덕의 하느님의 겸손한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참 소박하고 겸손한 하느님의 사랑을 상징하는 듯 한, 작은 유리컵의 꽃꽂이 였습니다.
말씀의 성보영보 수녀회 총원장 수녀님이나 공동체의 영성을 상징하는 듯 했습니다.
이 또한 관상의 표현, 사랑의 표현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른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 것이다.“
정태적 관상이 아니라 역동적 관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관상 따로 활동 따로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상은 사랑 계명의 실천을 통해 그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사랑의 미사는 하루의 사랑의 삶으로 확산되어야 하고
하루의 사랑의 삶은 사랑의 미사로 수렴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비로소 온전한 미사, 온전한 관상, 성체성사적 삶의 실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관상, 사랑의 활동에서 샘솟는 순수한 기쁨,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기쁨의 선물입니다.
사랑을 통한 관상과 활동의 일치가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관상과 활동의 사랑의 일치가 분별의 잣대입니다.
주님을 닮은 분별력의 대가, 사랑의 대가가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웅변이 감동입니다.
사도의 탁월한 분별력의 지혜가 분위기를 압도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시어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시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 예수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백번 지당한 사랑의 분별입니다.
베드로와 바르나바, 바오로의 의견을 충분히 고려한 후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주님은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당신 사랑과 기쁨, 분별력의 지혜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