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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청소년 역사교류의 두번째 편을 게재한다. 첫째 글은 공생을 위한 역사 여행이다. 둘째 글 역시 부산 동래고등학교의 강철호 선생이 보내주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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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기원비를 건립하다.
우리가 교류하는 고치현 하타 지역은 우리나라로 치면 동강이 있는 영월과 느낌이 비슷하다. 아름다운 시만토(四萬十) 강이 흐르고 있고, 그 주변의 산세는 험하게 솟아 올라 있다.
이 시만토 강의 상류 쪽에 전쟁 말기 일제는 부족한 전력을 충당하기 위해 댐을 건설하게 된다. 댐의 이름은 츠가댐(津賀ダム). 전쟁 말기 이 험한 공사를 급하게 진행하기 위해 수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고 당연히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조선인 징용자들에게 맡겨 졌다.
공사 과정에서 희생자는 속출할 수 밖에 없었고, 희생자는 대부분 야산에 버려졌다. 버려진 희생자들을 매장한 것은 작업 현장의 동료들이었다.(동료라는 것은 조선인만이 아니다. 일본인도 있었다고 한다. 민족을 넘은 계급의 연대(?)가 아니었을까?) 매장한 곳 근처에는 돌들을 세워 거기에 사람이 묻혀 있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하타 세미나의 청소년들은 1990년부터 츠가댐 희생자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 당시의 호적 관련 장부와 근처 학교의 재적 명부를 뒤지면서 기록된 이름에서 조선식 이름이나 창씨 개명의 흔적이 나타나는 사람들을 찾으며 자신들의 선조가 과거에 했던 일을 되돌아 보았다.
우리와의 교류에서 츠가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이후 두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2009년 ‘츠가댐 평화기념비’(津賀ダム平和祈念碑)가 세워졌다.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있다.
“고향인 조선반도에 돌아갈 수 없었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이 땅이 국경을 넘어 우정과 평화가 널리 펼쳐지는 장소가 되기를 기원하며”
비 앞에는 3개의 돌부처가 조각되어 있다. 가운데 돌부처는 1942년 츠가댐 공사 과정에서 징용자의 딸 한명이 사망하는데 그 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돌부처를 평화비 앞으로 옮겨와 다시는 역사에 의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 위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돌부처는 일본식이고, 왼쪽의 돌부처는 한국식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 두 돌부처는 두 나라 학생들이 각기 과거의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앞으로는 두 나라가 평화와 공생의 길을 가기를 기원하며 만들어진 것이다.
원래는 일본식 돌부처는 일본 학생들이, 한국식 돌부처는 한국 학생들이 제작할 계획이었는데, 통관 문제에 부딪혀 두 부처상 모두 일본쪽에서 제작하게 되었다.
비의 형태는 제주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방사탑(防邪塔)’의 형태를 빌려서 만들었다. 지난 2007년 교류는 제주의 일제시대 관련 유적지 답사와 함께 열렸는데, 이 때 비의 기본 디자인도 함께 탐색하여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위의 사진은 이 평화비에 대한 설명을 담은 해설판이다. 해설판에 대한 디자인과 관련 내용은 모두 두 나라 학생들이 그동안 조사한 사항을 정리해서 기록한 것이다. 위에는 일본어로 아래에는 한국어로 설명이 되어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중일전쟁이 교착상태에 들어선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어 군용목적으로 전력을 국가가 관리하고 국책회사인 ‘일본발송전주식회사’가 이 ‘츠가댐’을 건설하였다.
츠가댐 공사는 1941년에 시작되었으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한반도 각지에서 약 200명의 사람들이 모여졌다. 츠가댐 본체의 돌자갈은 산을 넘어서 옮겨졌고, 츠가댐은 산 중간에 5663미터의 터널을 만들어, 96미터 낙차가 있는 수력발전소를 건설했다.
주야교대로 행해진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공사였던 터널 공사에서의 사고로 인한 사망이나 강에서의 익사, 운반 차량에 의해 희생된 어린이를 포함한 다수의 희생자가 이 지역 공동묘지나 산중의 무연고 무덤에 매장되어 있다.
1990년부터 <하타 고교생 평화세미나>에서 조사를 시작하였고, 지역의 협력을 얻어서 실태를 밝히는 중에 조선 고급학교나 한국의 고교생이 이 땅을 방문하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이나 관계기관의 협력 · 모금 활동으로 추도와 평화기원비의 건설을 호소했다.
기원비는 터널공사 중에 나온 돌을 모아서 제작하였다.
방사탑 위에 있는 자연석은 한국의 국조 ‘까치’를 나타내고, 악귀를 먹어 없앤다는 뜻을 가진다. 지장보살상은 한국과 일본의 고교생이 협력해서 만들었다. ‘솟대’라고 불리는 나무탑은 지역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으로, 꼭대기에 있는 나무로 만든 새는 ‘오리’를 나타내며 혼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평화로운 미래를 만들어, 사람들의 따스한 정이 있는 교류가 계속되기를 기원하며.
-2009년 8월 9일 츠가댐 평화기원비 건설위원회
이 비석 하나가 세워지는데 6년을 준비하였다. 2003년부터 큰 틀의 위령비 건립이 의논되었다. 2005년에는 당시 공사 현장에 있었던 신해철 할아버지와 여행을 함께 하며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2006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설득하기 위해 교류회 과정에서 두 나라 청소년들이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런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을 보통의 일본인은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나라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듣고 지역민들은 우리의 사업에 동참을 해주었다. (이 지역이 도시가 아닌 시골인 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조건이었으리라 추측한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사람의 정이 넘치는 곳은 시골이니까…)
2007년에는 위령비 건립의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제주를 방문하였다. 제주에서 일제 관련 전적지를 보기도 하고 민속 박물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전시물들을 보며 위령비의 기본 디자인인 방사탑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2008년에는 교류를 하지 않고 위령비 건립을 위한 재원 마련에 골몰하였다.
일본측에서는 행정 기관과 전력회사(츠가댐 관련)를 설득해 비용을 마련하였고, 지역 주민의 성금을 모으는 일을 하였다. 한국측에서는 전교조 부산지부의 적극적 후원 속에서 일정한 비용을 마련했고, 학생들이 직접 천연염색을 한 스카프를 판매(정확히는 강매)하면서 비용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부산 민예총에 협조를 구해서 위령제를 지낼 준비를 하였다.
다시 한번 이 때 여러 가지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다. 잘 만들어지지 않은 스카프를 구매해 준 많은 분들, 무료로 위령제를 진행해서 훌륭한 행사를 만들어 준 부산 민예총 선생님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일. 하타 세미나의 조사 활동 과정에서 댐 주변의 터널(주 터널 하나를 파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보조 터널이 만들어져야한다.)에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낙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와 관련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특고신문(特高新聞)』(특고는 특별고등경찰의 준말이다.)에서 당시 파업을 선동하다 체포된 한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노동자의 이름은 ‘박정수’.
조사 과정에서 박정수 씨의 아드님(박동하)와 연락이 되었다. 박동하 씨는 이미 여러해 전부터 아버님을 독립운동 유공자로 지정받기위해 보훈처에 신청을 계속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보훈처에서는 ‘증거미비’로 계속 반려하는 상황이었다.
우연히 우리와 연결된 박동하 씨는 증거가 될만한 자료를 물으셨고, 하타 세미나측에서 수감 관련 기록과 『특고신문』등을 제공해줘서 2008년 드디어 독립유공자로 보훈처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아래는 츠가댐 관련 학생 보고서 글 중의 일부이다.
버스를 타고 츠가댐으로 향했다. 그날 날씨가 무진장 추웠지만 신해철 할아버지의 증언은 추위마저 잊게 만들었던 것 같다. 맨앞에 서서 열심히 듣고 적던 나는 할아버지가 “당신들은 몰라~ 그때 그 비참했던 상황을…” 이러면서 눈물 흘리실때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울컥하고 올라옴을 느꼈다.
사실 그렇다. 우리들은 모른다. 그때 그 상황을 어찌 말로 다 하실수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편한 시대에 태어나 우리 밖에 모르고 오늘날의 바탕이 되어주신 우리 조상님들에 대해, 이 머나먼 이국 땅에 눈물로 징용을 끌려오신 그분들 삶에 그 동안 너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인데 그 동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징용 문제를 다뤄 왔나? 높고 단단한 콘크리트 댐을 보며 날씨 못지 않은 가슴속 휑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댐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자꾸 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활동이 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이런 아픈 역사를 절대 외면하지 말아야 겠다고. 또 다시는 저런 불행한 역사가 절대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꼭 그래야만 된다고.. 츠가댐을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한국인 원폭2세 환우 문제
하타 세미나는 지역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그 문제 의식을 확대해나가며 활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교육과는 접근 방법이 달랐다. 우리는 큰 문제와 그 문제의 정답을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건 교사인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우리교육이 문제가 많다고 항상 말하는 나 이지만 근본에서는 우리 교육의 일방적 주입식 교육과 다른게 없다는 자각이었다. 다르다면 교과서의 공식적 지식에서 벗어난 약간의 지식을 주입하는 것에 불과한…
청소년이 자발적으로 문제를 탐구하고 그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교사는 철저히 도움을 주는 사람의 역할만 하는 일본 교사들의 모습은 확실히 우리보다는 나은 점이 있었다. (일본 교사들은 교사라고 하지 않고 항상 고문(顧問)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하나까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지역의 문제를 무엇에 접근할까 하다가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형률’. 김형률은 197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날 때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동생은 생후 1년 6개월만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김형률의 특징은 허약함이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키 163cm, 몸무게 37kg에 불과하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로 고생하여 졸업할 때까지 1학기에 한 달 이상은 꼭 병으로 학교를 가지 못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급성 폐렴이 발병하여 병원에 입원한 이후 줄곧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그의 쌍둥이 동생을 앗아갔던 그 병이었다.
26세가 되던 1995년 한 해 동안 폐렴으로 세 번이나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때 행한 특수 피검사로 처음으로 자신의 정확한 병명을 알게 된다.
‘면역 글로불린 M의 증가가 동반된 면역 글로불린 결핍증’
주치의는 면역결핍은 모체로부터 선천적으로 영향 받은 것이며, 그 원인은 원폭피해자인 어머니와 관련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의 어머니 이곡지 씨는 1940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1945년 6살 때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지금도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후 김형률은 원폭 피해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수집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자신이 원폭2세 환우임을 자각하고 세상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만나기 시작한다. 원폭2세 환우의 문제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김형률은 원폭 2세와 환우를 구분한다. 모든 피폭 2세가 병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를 조사하던 중 김형률 씨를 알게 되었다. 그가 제기한 원폭 2세 환우 문제에 대해 학습을 하였다. 그리고 2005년 두 나라 청소년들의 교류에 김형률 씨가 직접 와서 한국인 원폭 피해자와 환우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형률의 몸은 그의 운동을 버텨주지 못하였다. 정상인의 30%만 기능하는 폐를 가지고 모든 것과 맞설수는 없었다. 세상의 편견(“당신, 보상금 노리는 것 아니냐?”), 무지(“원폭피해가 유전되는 것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무시(이 문제를 알고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 될까?)
2005년 5월 29일 오전 9시 5분경. 그는 부산시 동구 수정아파트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형률 씨가 살아 있을 때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입에 올렸다고 한다. 그는 살기 위해 운동을 하였다. 아프다는 사실이야말로 그가 운동을 하는 이유였다. 아픔을 종식시키는 것이 그 운동의 목표였다. 그는 자신의 운동을 ‘인권회복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헌법 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이는 인간의 ‘사회적 기본권(생존권)’인데 여기에는 사회보장수급권, 교육권, 근로권, 환경권, 보건권 등이 포함된다. 형률 씨는 이보다 우선되어야 할 기본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 없이는 사회적 기본권도 유명무실할 뿐인 가장 기본적인 기본권, 그것은 다름 아닌 ‘생명권’이었다. 그는 생명권은 세계인권선언 제3조의 “자기 생명을 지킬 권리”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운동이 다른 무엇보다 생명권을 수호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든 사회적 차별의 철폐와 평화의 앞날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형률의 뜻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해 교류에서 김형률 본인은 오지 못했지만 부모님이 오셔서 김형률의 삶과 운동의 의미를 이야기해주셨다.
2005년 이후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으로 청소년들과 함께 4번의 여행을 갔다. 일본 청소년과는 2번, 우리끼리 간 것이 2번이다.
이런 우리의 활동은 지난 2011년 8월 9일 나가사키에서 열린 전국(일본) 고교생 평화 집회에서 한국인 원폭2세 환우의 문제를 발표하게 되었다. 2012년 에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를 견학하고 핵발전의 문제에 대해 같이 탐구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특히 이 자리에는 후쿠시마에서 온 교사 1명과 청소년 3명이 후쿠시마 핵발전소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 후쿠시마 지역의 문제를 소개함으로 핵의 문제를 더욱 깊게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래는 학생 보고서 중의 한 구절이다.
… 원폭회관 안으로 이동한 우리들은 곧 원폭피해를 입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 뵐 수 있었다. 그동안 머릿속으로 상상해왔던 것과는 달리 다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저 내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실제로 그 분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더 슬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나의 나태한 마음은 그곳에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모자이크를 하면서 와장창 깨져버렸다.
어울리는 색깔을 찾아 잡지를 이리저리 뒤적거리던 중 내 옆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그림에 나비를 부치셨다. 내가 그 영문을 몰라 할머니를 바라보자 할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폭이 터지는데 그 와중에 나비가 날더라구. 불길 속에서 나비가 훨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시며 그 말씀을 하시는 할머니를 보자 나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시며 하시는 건지. 그게 더 마음이 아파 내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내가 울상을 짓자 오히려 그런 나를 위로해 주시던 할머니. 할머니가 불길 속의 나비를 잊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그 할머니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나비 할머니 말고도 내 마음을 아프게 했던 할머니는 그림 속에 사람을 부치며 다른 할머니들에게 “더 새까만 사람으로 붙혀! 거기 있는 사람들은 다 타서 죽었어.”라고 말씀하신 분이었다.
더한 것은 그런 할머니의 말에 다들 재미 있다는듯 웃으셨다는 것. 패션잡지 속의 모델들도 여기 계시는 할머니들에게는 단지 그 난리 속에 죽어간 사람들로 보이시는 것인지… 웃고 있는 그 분들과 함께 나도 따라 웃으며, 그림속에 새까만 사람들을 붙혀나갔다. 속으로는 아주 아주 많이 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