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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들께 부탁드립니다.
회원 모두가 함께 만드는 20년사입니다.
편집 윈원님, 그외 모든 회원님들은 특별한 회고 담이 있는 분 (6 하원칙에 따르는 형식-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 )은 글을 써서
회고담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수필창작 수업과 연관 된 내용
( 명예에 손상가는 이야기는 가능한 제외하고, 써도 될만한 내용( 창작교실, 문학회 활동의 사실, 오해 다양하되 발자취임, 훗날 돌이켜 온고지신이 되게 하는 글이 좋겠지요.)
불편한 내용은 성명을 실명, 아니면 ㄱ. ㄴ. A. B의 간접 표현으로 하여주기 바랍니다.)
* 김홍은 지도교수에 대한 강의, 속상했던 추억담, 오해했던 내용. 수업시간의 분위기(사건), 재밌던 일, 슬픔( 함께 공부하던 동료의 슬픈 소식) 등......
8월 25일까지 직접 이방에 올리셔요.
늦으면 책을 펴낼 수가 없습니다.
< 회원들의 회고담 삽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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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운을 입고 평생교육원 수료식하던 추억(김미정)
어떤 인연
인연
김미정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청주에 사는 문우의 반가운 전화하다. 우리는 가끔 안부 전화를 주고, 받으며 지낸다. 푸른 솔문학회가 20주년이라며 특집 글을 싣는 다는 것이다.
푸른 솔 문학을 떠난 지가 10년이 넘었다. 잊지 않고 전화를 해준 문우님이 너무 고맙다. 그리고 김 홍은교수님을 잊고 살아온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김 홍은 교수님과의 인연은 괴산문학회백일장에서 처음으로 뵈었다. 벌써20년이 넘었다.
옛 생각이 떠오른다. 수필공부를 할 때다. 교수님께서 글을 쓸 때는 산에 있는 소나무가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 찬찬히 들어보라고 하셨던 말과 소나무의 줄기에 켜켜이 붙어있는 껍질의 층은 인고의 날을 말하는 듯 잎은 왜 푸른지를 연구해 가며 글을 쓰라는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교수님께서는 수업시간에“자 옆 창문을 보세요, 푸르른 자연을 보고 그대로 나의 느낌과 감정을 글로 표현 해 보세요.”라고 하셨다.
그때의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고독할 때나 슬플 때 그리고 산뜻한 기분이나 즐거울 때도 자연을 보며 그 들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 소리와 감정을 놓치지 않고 한편의 수필을 쓴다. 다정다감한 친구인 동시에 나의 분신이기도한 문학으로 위로받는다. 나에게 수필은 진정 내가 아닌 또 하나의 나를 나도 모르게 발견하게 되며 창조해 내는 나의 영혼 같은 것이라고 할까.
글을 쓰며 멀리 떨어져 있던 옛 친구를 만나 밤새워 오순도순 옛이야기를 하던 때가 그리웠고 다정한 벗에게만은 자연스럽게 속내 털어놓고 싶은, 털어놓지 않으면 못 견딜 본능적인 표현의 욕구에서 고백하던 것. 거기에는 우정 속에 피어나는 신뢰와 인간미가 있고, 함께 문학기행을 다녔던 애틋한 정으로 인하여 마음과 마음의 이어졌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수필공부의 인연으로 10여 년 전 단양으로 이사를 와서도 문학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단양으로 이사 오던 그 다음해에 푸른 솔 문학회가 도담 삼봉으로 문학 기행을 왔다. 우리 회원들이 배를 타고 즐기던 그 추억이 벌써 10년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 한다고 했던가.
푸른 솔 문학이 개나리, 진달래처럼 봄꽃으로 필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스무 살 이란다. 새싹이 자라 성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이제야 아는 기분이다.
나는 푸른 솔 문학에서 싹을 틔워 지금은 단양문학회 지부장을 역임 하고 있다. 지난날 청주에서의 아름다웠던 교수님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푸른 솔문학회를 잊지 않고 있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푸른솔문학회는 내 문학의 뿌리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고향처럼 언제나 정겹고 포근하며 친구나 가족처럼 다정한 푸른솔 문학회다.
나에게 수필을 쓸 수 있게 해준 교수님과 푸른 솔 문학회와의 인연하나 만으로도 무한한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푸른 솔문학회가 벌써 20주년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나에게 푸른 솔문학회는 저 깊은 동굴 속과 같은 곳에서 은은히 울려오는 메아리 같다.
수필을 통하여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게 해준 김 홍은 교수님 감사 합니다. 건강하세요.
모임득
언제 ?, 사직동 지역사회협의회 사무실에 모여 김홍은 충북대학교 교수님의 강의로 수필이 무엇이지 아는 과정이 이어졌다. 어린아이 손을 잡고 오는 이도 있었고, 가정주부로 있다가 글에 대한 갈증이 있어서 오는 분도 있었다. 우린 일상에서 만난 사람들과 소소한 풍경이 전하는 크고 작은 깨달음을 쓴 글을 발표하고 합평하며 울고 웃었다. 그때 ‘그리움의 노래’ 공저도 출간했고 선배들은 ‘새이웃문학회’도 창립하였다.
충북대학교에 평생교육원이 1997년 3월에 개설되면서 지역사회 사무실에서 충북대로 강의가 옮겨졌다. 충북대학교 내에 위치해 있어 시설이 좋아졌고 인원도 늘었다. 공부가 끝나면 종갓집 식당에 모여 문학토론도 이어졌고, 방울토마토 농장을 하는 분은 농장으로 초대도 하였다. 만나면 헤어지기 싫을 만큼 정이 담뿍 들었다.
어떻게 보면 충북에서 글을 쓴다는 작가들은 거의가 충북대학교를 거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김홍은 교수님께 수필을 배운 제자들은 각계각층으로 퍼져나가 수필의 씨앗을 퍼트리고 열매 맺고 있다. (어떤 인연에서 발췌)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교실에서의 애환
김 교수님은 여인들을 너무도 많이 울리셨다. 거의 해마다 30여 명이 넘는 수강생을
수시로 눈물을 질질 흘리게 만드셨다. 그때 적 수강생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루는 내 이름을 거명하며 “김*자 선생님, 자가용 타지 말고, 택시 타지 말고 걸어서
오세요. 그리고 며칠은 날 잡아 논둑길을 걸으며 농부들 고생하는 것 좀 보세요.
그래야 깊이 있는 수필이 나오는 겁니다.” 그날은 수강생들 앞에서 내가 쓴 수필 때문에
타켓이 되어 거의 수업 시간을 소비하였던 기억이다. 수업 시간 끝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줄행랑을 쳤던 내 모습이 지금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충북에서 문학 여성으로 길들이는 산실은 오로지 충북대 수필창작교실이었다. (k 수강생의 회고담)
어둠에서 꽃찾기
한옥자
이십여 년 전만 해도 일과를 마치고 책상에 앉을 수 있던 시간은 밤 11시. 어느 날은 한두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했고 또 어느 날은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특히 매주 수요일 밤은 의례 밤을 밝혀야만 했으니 다음날이 수필창작 교실 강의가 있는 날이어서였다.
속리산으로 야외수업을 하러 가는 날이었다. A반과 B반 원생이 강의실에 모였다. A반은 내가 소속한 반이라 매주 한 번씩 만나는 사이였지만 B반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어서 자리가 어색했다. 그 와중에 아주 반가운 사람이 보였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처음 보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먼저 말을 걸었다.
“선생님의 글을 신문에서 감명 깊게 읽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큼 쓸 수 있어요.”
잘못 들었을까? 내 귀를 의심했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봐도 글을 잘 읽었다는 독자에게 열심히 공부하면 그만큼 잘 쓸 수 있다는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날, 평소보다 나는 호들갑스러웠고 목소리 톤도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꼭 그날만이 아니고 공부를 하러 가는 날이면 눈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되고 눈꺼풀이 무거웠어도 마치 소풍을 하러 가듯 매번 마음이 설레었다. 더구나 선배들과 함께 가는 야외 첫 수업이어서 하늘의 별을 쥐고 있는 것만큼이나 든든하고 들떴다.
그 무렵은 낯선 고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향 쪽만 바라보며 살다가 문학의 끈을 잡았을 때였다. 잠시도 손에서 일을 놓을 수가 없고 금전적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 번인 강의조차 가지 못할 만큼 아등바등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우연히 동네 어귀 약국 유리창에서 충북 여성백일장 포스터를 보았고 백일장에 참가하여 문학회 회원 자격을 얻었다. 간신히 문학의 끈을 잡긴 했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하지만 모처럼 잡은 끈이 나를 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동아줄 잡듯 움켜잡았다. 절박했다. 이왕 입문했으니 수필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3년이나 타지에서 살고 있어도 정을 주질 못했다. 숨을 쉬니 사는 거지 이것이 사람이 사는 길인가,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 묻고 물을수록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만약 그때 문학이라는 거대한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떠내려갔거나 허구한 날 사는 게 왜 이리 힘드냐고 푸념이나 하면서 지금도 부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요일과 시간이 알맞아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수강을 신청했다. 첫 강의 날, 지도 교수님은 원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셨다. 글을 쓰기 이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말씀도 가슴 깊이 남아 생생하다. 지금도 그 말씀의 깊이를 제대로 모른다. 다만 내가 쓴 글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세상을 곱게 보려고 노력했다. (어둠에서 꽃찾기 중에서 발췌 )
2003. 9. 4. 기분 좋게 맑은 날
오계자
하늘도 내 맘을 알아주는 날이다.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입학식. 평생학습이다.
한 시간 미리 가서 대학생들이 들락거리는 교내 문구점엘 들렸다. 우선 파일을 하나 고른 후 수첩과 노트, 샤프연필, 디스켙 등 있지만 또 샀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숲이 우거진 쪽으로 가 본다. 캠퍼스가 참 좋다. 옛날 생각이 자꾸만 헤집고 나오려 하지만 쑥쑥 밀어 넣으면서 걸었다. 43년 전, 처음 대학교 뺏지 가슴에 달던 날, 그날도 이렇게 설렘이 있었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힘없이 터덜거리면 지나는 학생들이 이 꼴을 보고 '청소 아줌마가 무슨 파일을 끼고 다니냐' 할 것 같아서 손가방 어깨에 메고 왼 팔로 파일을 가슴에 안았다. 최대한 엉덩이를 뒤로 빼면 아랫배는 따라 들어간다. 적당히 가슴을 내밀면서 걸었다. 머리카락 흔들림이 발과 박자가 맞도록 씩씩하게 리듬을 염두에 두고 빠른 박자로 걸었다. 그이가 이런 꼴을 보면 무어라 할까. 딸 핑계 대지 뭐. 그래도 미안하긴 마찬가지다. 사십구제가 닷새 남았다. 그이 보낸 지 44일 되는 날, 이래도 되는 것은 아니지.
심연을 헤집는 허설, 뇌에 꽂히는 시선들과 도저히 한 통속이 될 수 없어 묵살하려고 애를 쓰도 평범한 여자일 뿐임을 통탄 하면서 혼자 아파야 한다.
다 사라졌다. 붙잡고 있던 것들 다 사라지고 망망 대세大世에 빠졌다. 어느 쪽을 바라볼까, 보이는 것도 없다. 어느 쪽으로 헤엄쳐야 등대가 있을까. 슬픔보다 먼저 심장을 꼭꼭 찌르는 말 말 말, 그리고 소외. 어쩌란 말인가. 하늘을 향해 소리쳐 봤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왜 나를 못살게 굽니까? 속으로, 속으로 삼키는 고통을 당신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즐기고 있나요? 그렇게 당신은 잔인한가요?"
다들 여름이라는 계절에 내 가슴에는 모진 세상의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가을의 문을 열었지만 황량하긴 마찬가지다. 어느 시인은 추운 세상을 견뎌 내려면 겨울 마음을 가진 눈사람이 되라고 했다. 따뜻한 심장, 열정 어린 가슴도 버려야 존재의 비참함을 잊는다고.
우리 딸이 내 맘을 눈치 챘는지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반과 심리 상담학을 등록하고는 내게 무조건 다니라고 강요를 했다. 그냥 있으면 우리 엄마의 건강한 정신마저 병들고 말겠단다. 이미 건강을 잃어가고 있는 정신, 등대를 찾을 용기조차 잃은 내게 등대가 찾아 온 것 같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 숨구멍이 뻥 뚫렸다. 이래서 자식 낳으려고 하나보다.
얼마나 엉덩이를 빼고 걸었는지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마침 시간도 된 것 같아 입학 식장으로 가서 중간쯤에 앉았다. 누가 누군지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담을 생각은 않고 벌써 작가의 꿈으로 가슴이 부푼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 나보다 나은 사람들이다. '그래 지금은 내 꼴이 자신감도 없고, 현실 도피를 위해 왔지만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 바로 문학이다. ‘두고 봐라’ 고개를 약간 삐딱하게 하면서 턱을 치켜 올렸다. '나는 나다'
조금은 잘난 체 하자. (촌닭이니까)
조금은 건방지자. (내 세울 게 없으니까)
강한 척도 해야지. (여려빠진 속 감추려면)
세 곱으로 노력하자.(단순한 탈출구로 전락 될까봐, 사실 탈출용이었으니까.)
입술 지그시 깨물며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는데 식이 끝났나보다.
옆자리에 환자 태우고 격일로 오가든 보청가도(보은 청주간 도로). 이 길 위에 뿌린 눈물과 아픈 기억들 언젠가는 꼭 걷어서 굳건한 나만의 성을 지으리라고 자리 보존한 환자 옆에 태우고 막연하게 다짐하던 길, 그 길을 오늘 새 꿈이 이뤄지기라도 한 것처럼 달려왔다.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 창작반에서 아픈 현실을 문학으로 쏟으리라.
영원히 잊지 못할 2,003년 9월 4일, 내 삶의 길이 선택 된 날, 평생학습의 입학식을 했다. 가슴 벅참과 설렘, 희망과 걱정, 그이에게 미안함, 만감이 교차하는 밤이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다시 일어났다. 여보, 당신 없는 빈자리에 온갖 허무맹랑한 말들이 난무하지만 수필 창작 반에서 다 소화시킬 게요.
* * *
남편 보내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압박감은 허설虛說들이었다. 같이 가래서 다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심하게 맘 고통 받을 때 딸이 충북대 평생교육원 수필 반에 등록을 해줬다. 나는 이런 곳이 있는 것조차 몰랐다.
「좋은 글이란, 첫째 감동, 아니면 공감대를 형성하라, 독자가 얻는 게 있어야 하니 정보 또는 지식을 주라, 이것도 저것도 없으면 재미가 있어야 된다. 서둘지 마세요 예술은 기초가 10년이다.」
첫 날 교수님의 말씀 중 이 부분은 지금도 나를 찾아오는 문하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수필 창작 반은 나의 제2인생의 길을 열어준 문이었다.
목요일의 행복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님.”
“그기 공부해서 돈 버는 거냐?”
“네, 어머님.”
우선 긍정적인 대답이 필요하다. 무조건 “네.” 어머님 밭일 하시는데 공부하러 간다고 나서는 걸음이 어찌 가벼우랴.
벗어요/ 정명숙 ???
“벗어, 벗어야지 벗지 않고는 수박 겉핥기야,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
좋아서 왔지만 몇 번이나 만났다고 황당한 요구를 하시는가. 벗을 것은 옷 밖에 없는데 자꾸 벗으라고 한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게지고 가슴이 쿵쾅거렸다. 처음에는 따뜻한 눈빛으로 다정하게 타이르시더니 시간이 지나도 벗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러 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마땅치 않은 표정을 나타내신다.
어떻게 벗는단 말인가. 티 없이 매끈하다면 왜 망설이겠는가. 발가벗겨지면 옹이처럼 튀어나온 흉한 흔적들과 아물지 않아 진물이 나는 상처들이 모두 드러날 터, 그걸 감추려고 기미가 얼굴을 덮도록 끌어안고 있는데 벗으란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나를 조이고 있던 갑옷 같은 옷을 조금씩 벗기 시작했다. 숨통이 트였다. 얼굴에서 기미가 사라지고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벗으므로 치유되는 상처, 문우들이 공감해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래서 그만 벗어도 되는 줄 알았다.
“아직 멀었어, 더 벗어야 돼”
야속했다. 남은 옷은 좀 천천히 벗어도 될 것 같은데 기다려 주질 않으셨다. 내게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은 만족해하지 않으셨다.
지금은 나신이다. 솔직해졌다. 글감이 생겨도 가리고 덮을 일 없어 힘이 덜 들었다. 수필은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자유를 주었다. 무거웠던 마음의 옷을 일찍 벗게 해주신 덕에 가벼워졌다.
아이는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한다. 1인1책 강사로 활동하면서 나도 교수님과 똑 같이 하고 있다.
“벗어요, 벗지 않고는 수박 겉핥기입니다.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습니다.”
벗으란 말이 평생 따라다닐 것 같다.
아품을 그리워 하며
이원찬
지금으로부터 벌써 16년 전 아득한 기억인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에 다닐 때 일이 생각난다. 야외수업 겸 친목도모로 충남 서천 마량리 동백숲을 비롯하여 춘장대 등을 가게 되었다. 40여 명이 넘는 남녀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출발하면서부터 성인 유머를 시작으로 각자의 장기자랑을 뽐내면서 모두 흥겨운 여행길에 들떠 있었다.
섬이었던 동백섬을 육지와 연결하여 관광지로 개발한 이곳은 수백년 전 동백나무 100여 그루를 심어 조성한 선각자의 선견지명이 서린 곳이었다. 나도 동백정에 올라 시 한 수를 지었다. “묻이 된 동백섬” 화력발전소 옆 조막만한 섬동산에/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더라/ 동백나무 몇 그루 있는 곳이라고/ 관광지로 지정하여 주차장 더 크다/ 본래 있던 마량당사는 굳게 걸어 잠그고/ 높다랗게 새로 지은 동백정/여기서 보나 저기서 보나 그 바다/ 동백꽃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지쳐 있는가/ 꽃 색깔 예전 같이 않아/ 내 마음이 따라 변했을까.../ 그래도 푸른 바다는/ 예나 이제나 파도가 철썩인다/ 편치 않은 속마음 들킨 바에야/ 바닷물에 양치하고 파도에 실려 보낸다. 이곳은 일출과 일몰을 같은 곳에서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명소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점심에는 쭈꾸미 탕에 소주 한잔 기울인 맛은 지금도 생생하여 입맛을 다시게 된다. 바닷가에 내려앉은 수많은 철새들을 보며 향한 곳은 신송리 갈대밭이었으니 그 날의 비극적 사건이 발생될 곳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성했던 갈대밭이 이른 초봄이라 모두 마른 상태로 바람에 부딪히면서 서걱대는 소리는 인생무상(人生無常)의 스산함을 보는 듯 쓸쓸한 감이 없지 않았다.
몇몇의 일행들과 갈대밭 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바닷물이 들어오는 협곡을 만나게 되어 되돌아 나와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교수님과 여학생들이 장난삼아 갈대밭에 서로 밀어 넘어뜨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꼭 유도 선수가 뒤치기로 상대를 제압하듯이 교수님이 허공에 거꾸로 갈대밭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져 정신을 잃은 듯 일어나지를 못하는 것 이었다. 유도를 한 것처럼 보이는 여학생이 축구 골대 앞에서 바나나킥을 할 때의 폼 그대로 한 폭의 그림 같은 뒤치기에 나가 떨어진 것이었다.
하나 둘 몰려든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교수님은 말도 잘 못하고 목을 다쳐 고개를 쳐 들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흥겹고 들뜬 분위기는 삽시간에 모두 가라앉아 걱정스런 표정들로 맥없이 버스에 타고 급히 청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오는 차 안에서 계속 주무르고 구호 조치를 하여 보았지만 큰 차도는 없었다.
세상일이 호사다마라 언제나 좋은 일에는 꼭 나쁜 일도 섞이기 마련이지만, 그때 교수님은 한 동안 목이 아파 고생을 하셨던 것 같았다. 그래도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서로 격려하며 한결같이 빠른 쾌유를 비는 마음이 너무도 좋았다. 신송리를 뒤로하고 지은시 “잃어버린 고목”이 노트에 남아 있다.
“청둥오리 내려앉은 바닷가/ 오리와 나는 서로를 본다/ 2003년 2월 27일 오후 세 시에/ 어색하게 서로를 구경한다/ 4차선대로에 많은 차와 구경꾼/ 바다는 말없이 오리를 받아주고/ 하늘과 바람을 모두에게/ 걸림없이 사는 길을 보여준다/ 신송리 갈대밭을 보러 오는 마음/ 흔들거리는 갈대처럼 스산한데/ 보는 마음 보여주는 마음 안쓰러워/ 먼 하늘을 쳐다본다/ 길 없는 갈대밭에/ 길을 내어가니 바다를 만나/ 수 많은 오리 떼를 또 만났으면/ 얼마나 놀랍고 즐거웠으리.”
그날의 아픔과 아쉬움이 벌써 많은 세월이 흘러도 써놓은 글이 있어서 추억을 새롭게 하는데, 그래도 산수가 되신 교수님이 건재하심이 늘 보기가 좋다.
수필반의 추억
수필반의 추억
김용례
내 나이 마흔다섯, 작가에 대한 막연한 꿈을 꾸고 있었다. 혼자 속앓이만 하고 있을 때 김미정작가를 알게 되었다. 미정씨가 충대 수필반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수필반에 들어가 또 한 번 기가 꺾였다. 선생님들의 글을 보고 나는 도저히 글을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 년 넘게 글을 쓰지 못했다. 빈 가방만 들고 다니는 나에게 교수님은 “김용례선생님는 왜 수필교실에 오는 거유?” 내 대답은 “교수님 뵈러 와유.” “밥 먹으러 와유”하면서 웃었지만 용기가 없어 못쓴다는 말은 뒤로 감추었다. 선생님들 글속에는 돌아가신 어머님이 계시고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이 있어 울고 웃었다.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들과 늘 점심을 함께했다. 수필 공부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점심을 먹으며 선배님들의 인생사를 들을 수 있어 그 또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빈 가방만 들고 일 년이 다 지나 갈 무렵 어렵게 글 한 편을 발표했다. 교수님은 글속에서 내가 얼마나 끙끙거렸는지 아셨던 것 같다. 열 달 다 채워서 낳으려 하지 말고 미숙아라도 낳아야 어디가 미숙한지 어디가 예쁜지 알 수가 있는 거라며 많이 낳는 것이 좋은 글을 쓰는 방도라고 하셨다. 지금 나도 후배들이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고민을 하면 산고를 많이 격어야 좋은 글이 탄생하는 거라고 말해준다.
등단에 대한 꿈
글을 쓰는 사람에게 등단이란 꿈이다. 수필반에서 공부할 때 선배님들의 등단식에 참석하면서 선배님들이 하늘같이 높아 보였다. 나는 감히 꿈도 못 꿀 일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양수남선배님 등단식을 보면서 나도 등단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청주 관광호텔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양수남선배님, 식장 가득 메운 축하객, 세 자녀들이 기타를 치며 엄마의 등단을 축하해 주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등단하면 생각나는 선배님이다.
나는 양수남 선배님 등단식을 보고 그래 나도 저 무대에서 멋진 등단 식을 해보자는 다짐했다. 그 후 글을 잘 써야겠다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책을 열심히 읽으며 교수님이 많이 써보는 것이 방도라는 말씀을 잊지 않고 몇 줄의 글이라도 매일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종 백일장에 입상을 하면서 자신감도 얻었다. 그리고 충청일보 지면에 4년 동안 글을 쓰면서 드디어 그 부러웠던 등단을 2007년에 했다.
참 웃음께도 작가에 대한 생각보다는 등단 식에 더 관심이 있지 않았나싶다. 작가로서의 그 무거운 책무는 모르고 화려한 무대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지, 그래도 철없던 그 열정이 그립다.
푸른솔 문학회 20주년에
최 경자
10년전 어느 날! 지인에게서 그때는 스마트폰이 아닌 핸드폰 문자를 받았다. 안부정도내용이었지만 나는 다시 한자 한자 눈동자를 굴리며 몇 번을 읽었다. 강낭콩 꼬투리를 홑이불속에 함께 누워있는 형제에 친밀함으로 표현한 문장이다. 예사로 볼 수 있는 식물에 부분을 바라보는 정서와 안목을 극찬하여 주었다.
지인이 들려주는 말, 저도 조금은 그렇게 생각이 된다며 긍정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삶이 바쁘다 보니 꿈도 꾸지 못하였는데 충북대 평생교육원수필 창작 반에서 공부한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런 곳이 있느냐고 확인 하였다. 나도 갈 수 있는지를 반문하고 소개하여 달라고 하였다.
* 수필창작교실 등록
나 또한 평생 전업주부로 예축을 불허한 때 문학이란 미명 아래 수필반에 첫 발을 내디딘다. 인간이 연령대를 몇 구분 나누어 논하고들 있지요. 고희를 맞은 내가 무슨 용기였을까?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삶의 여정에 희로애락을 거쳐 살아 왔음에 기억을 더듬어 본다 .
(수업, 작품 발표 그때의 상황 삽입 )
내가 수업시간에 첫 걸음을 띤 발표한 수필이 수필창작 작품집 “웃음꽃 피는 마을”이 책 표지 제목으로 선정되어 용기를 가졌었다.
* 야외 수업
교수님께서 야외 수업 일환으로 수필반 문우님들에게, 초정 율리에 위치한 밭을 한 고랑씩주어 고구마를 심게 하였다. 처음 농사에 경험이다. 뿌리도 없는 한 뼘 남짓한 식물을 검정 비닐 덮은 땅에 꼬자 심었다. 고구마를 캐는 날 한줄기에 많이는 평균 아홉 열개씩 달려 나온다.
나는 상상외로 많은 수학을 얻어 놀랐다! 아마도 토양과 일조량이 합쳐진 산물이라 싶다. 각자 깻잎 고추가지 토마토도 몇 구루씩 취미대로 심었다. 문우님들과 야외 수업이 있는 날에는 농사지은 풋고추와 깻잎에 싸서 삼겸살을 구워 먹으며 즐거웠다. 이웃에 농부아저씨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교수님이지만, 문학에는 엄격한 교시비평에 회초리를 내리시곤 하셨다. 장성한 문우님이라도 스승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 전에 뒤돌아 서운함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 수필특강
매주 수필반 수업이 끝난 후 학교 앞 스트라하우스 커피숍에서 교수님을 모시고 홍재석 선생님 염동원 선생님과 우리는 생소한 관계에서 자주 만남으로 오래된 인연처럼 편하여졌다. 때로는 문의 청남대 위치한 호수그릴 카페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소종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값지게 활용하여 수필집을 모여서 내라고 제안 하셨다. 최명환, 노순희, 장난순, 세분 선생님들도 함께 의견에 참석하게 되었다.
공부할 장소를 찾던 중 태성추어탕 집에서 방을 빌리기로 하였다. 아침부터 모임이 시작되어 작품을 읽고 수정하였다. 점심에 추어탕, 늦게 까지 수업을 하고 저녁도 추어탕으로 식사를 하였다. 백 오십 시간 열정으로 지도하여 주신 교수님! 어느 날에는 몸살로 누우신 적도 있었다.
책 표지 명을 각자 지어 오라고 하셨다. 제목을 모은 것을 들고 학교 교정에서 남녀 학생들에게, 길거리 나가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 식당에 들어가서도 여러 사람들 의견에 적합한 책명을 얻으려고 발이 부르틈도 모르고 다녔다. 우리는 마음을 모은 결과 「그 뜰엔 멈추지 않은 사랑이 있네.」 7인집공저를 발간하는 기쁨의 기회를 얻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나는 수필창작교실 회장으로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제1회 동아리로 축제를 제안하여, 라인댄스반과 함께였다. 이날 7인집 공저 출판기념식도 가졌다
* 버드나무축제
문학행사로 문의면 장자골에서, 제 1회 버드나무 축제를 문우님들과 차의 향을 음미하며 정담도 나누었다. 제2회 버드나무 축제 때는 ‘향연과 소통’의 주제로 청주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국악인들을 초청하여 공연도 가졌다. 이들은 나와 오래전부터 친목을 가지고 지내든 지인들이었다.
귀한 인연에 멋진 문우님들을 만남도 매사 우연은 없으므로 하나님이 주신 행운이었다고 믿는다.
* 문학기행
회장으로서 추진------
문학기행 가던 날에는 차속에서 흘러간 노래 가곡 가요를 흥겨이 부르던 작가님도 회고하며 가끔 그때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푸른솔문학 명칭을 누가 지었을 가! 뜻 말은 어떤 의미로 지었는지는 알아보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느낌의 문학명의 상징성으로 엄동설한에도 사시사철 푸름과 솔향기 그윽함에 취하여본다. 지인들을 통해 몇 권의 타 지역 수필집을 받아 본적이 있다.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져도 손색이 없으라싶다. 그들 내용을 비교 논할 수준을 가진 나는 아니지만, 손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설처럼 최고의 푸른솔문학 공동체로 여겨진다.
푸른솔문학이 이십 주년을 맞이하였다기에,
나와 같은 자격 미달에 문화생도 간혹 끼여 있고, 최고 학부와 사회 저명인사도 함께 어울려 주셨다.
김 홍은 교수님의 남다른 문학의 열정과 애향심이고, 엄격한 사도의 가르침이 좋은 토양과 일조량 역할을 공급해 주셨기에 오늘에 활기찬 ‘푸른솔문학회’가 20세 청년으로 성장하였음을 단연코 부인하는 이들이 없으리라 여겨진다. 푸른 솔향기에 그늘 밑에서 산수(傘壽)를 맞으며 잘 선택한 삶에 한축을 그은 시기로 반추하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자리를 비로소 교수님의 헌신을 존경하며 감사를 드린다. 우리사회는 나날이 옛 우리조상의 문화와는 상반되는 현실이 되었다고 느낌이 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하지만 많은 이념과 괴리감으로 대결하는 현 시대 정서 속에서도, 푸른솔 작가님들의 품격과 아름다운 건필과 푸른솔문학회가 영원하길 기원한다.
수필교실과 싱그러운 농장
염동원
잊을 수 없는 일들은 누구나 여러 개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청주에 잠시 머물렀을 때, 충북 대 수필 교실을 다니며 좋은 스승님과 지인을 사귀게 된 것도 감사할 일이며 마음으로 쓴 수필 작품을 교수님의 지도하에 책으로 펼쳐내게 된 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나는 처음 수업에 참석한 날, 아는 지인도 없고 청주 지역도 잘 모르는 외톨이 감정에 입을 꼭 담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은 후에 꼭 땡 벌 같이 누구를 톡 쏠 것 같이 보였다고 나의 평을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수님의 열정에 나도 노력하게 되고 소박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여러 지인들을 만나 어울리다 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었다. (생 략)
하늘은 그때의 하늘처럼 말없이 맑기만하다. 약간 굽은 허리에 배레모를 자주 쓰셨던 노신사분, 그 어른(일곡이재부선생님)이 오늘은 더욱 그립다. 2011년 평생교육원 첫수업때 일이다. 빈자리에 앉았는데 운이 좋게도 그분의 바로 앞자리였다. 몇 번의 수업을 받고 시화전이 있다며 시 한 편씩을 내고 있었다. 서툴은 몇 구절을 쓰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귀를 일곡 선생님께 내밀었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렇게 하면 된다 시며 문학의 초년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다.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일곡선생님은 흥을 보태서 창도, 노래도 아닌 듯한데 구성지게 권주가(勸酒歌)를 읊으셨다. 식사자리의 마무리로 커피에 소주를 타서 드셨던 선생님.
2017년 2월 수곡동 흥사단건물에서 수필특강에 수필에 대해 수업을 해주시고 힘에 부치신 듯 긴 한숨을 쉬고 계단을 쉬엄쉬엄 내려가시며 저녁 문학회 모임에는 나가기 힘들겠다던 선생님은 그날도 힘겹게 오셨다. 그날이 일곡선생님과는 마지막 자리였다. 선생님을 생각하며 문학은 그렇게 생(生)의 끝자락까지 함께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생님의 그리움을 바람의 언어를 펼치며 달래본다.
웃고 울었던 수필창작 강의실 15년
2019 8 11 조순희
15년 간 문턱을 넘나들은 수필창작 강의실을 돌아본다.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가방끈이 짧았다. 내 세울 수 없는 학벌 때문에 늘 서럽고 가슴 아팠다. 먹구름이 지나면 햇빛이 나오 듯 시대문화가 발전되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TV나 신문 광고로 충북대학교평생교육원에 여러 프로그램이 개설되어 남녀노소 없이 누구나 나이제한 없이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꿈인지 생시인지 비몽사몽으로 망설이지 않고 즉시 행정실로 전화를 걸어 내 나이를 밝히며 등록하여 배울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연세가 더 많은 분도 있다고 환영하는 게 아닌가? 마르던 샘물 물고 터지 듯 인생 다시 태여 나는 것처럼 감회가 새로웠다. 그 토록 그리워하고 원하던. 책가방을 들고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소원을 이뤘다. 노년생활로 도구되어 꿈을 이룰 수 있다니 좀 늦었던 감뿐이다. 그 당시는 충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의실이 충북대학교 약대건물 옆이었다. 용이 승천하는 듯 갑신년 선물인양 2004년 3월 4일 이순의 나이로 용기를 내어 배움의 터 충북대학교평생교육원에 등록하고 학생 명분으로 등교했다. 첫 강의시간에 무척 행복했고 뿌듯했다.
교수님께서 수업 진도에 대한 과정을 말씀하신다. 칠판에 써 놓고 지우며 배우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갔더니 의외로 배우는 과정이 전혀 달라 당황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쓸 수 있으니 ‘문장만 배우면 되겠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배워보겠다는 도전정신은 강했지만 모르는 게 태반이라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내 수준으로 수필을 쓰기에는 자격미달이었다. 기대했던 꿈이 어긋나니 정신적 충격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품상이었다. 심각한 고민 끝에 그래도 한글 스물 넉자 읽고 쓸 수 있으니 천만 다행이 아닌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배우면 되겠지 설마 못쓰랴!
선생님들이 다양하게 글을 써오신다. 대체적으로 인생 삶의 대하여 체험한 글이다. 읽어보고 감상하니 나도 이정도야 쓸 수 있다 자신 감이 불 이러나듯 용솟음친다. 남편 교통사고 후 혼자되어 빈손에서 알몸하나로 대학교 재학생 3남매 공부도 가르쳤는데 아무리 맹 초인들 그 까짓것 글쓰기 정도야 왜 못하랴!
글이 되거나 말거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작품을 써 갔다. 교수님께서 작품을 보시고 실망을 하시는 눈치다. 승 맥 같이 말귀도 못 알아듣고 바보천상스타일로 개근상 대상 감으로 다다르니 얼마나 답답하신지 교수님께서 특강처럼 글을 잘 쓰도록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책과 남이 쓴 작품을 많이 읽어보고 국어사전을 공부하라고 소귀에 정 읽듯 하신다. 초안을 잡지 못하던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간간히 어려운 낮말을 토하신다. 말씀하시는 저 낮말이 무슨 뜻을 해석하는 걸까 숙제로 도구삼아 필기도구에 적어놓는다. 귀가하면 열 일 제치고 국어사전을 펴놓고 적어 온 낮말을 찾아보고 모르던 문장까지 배웠다. 내 손을 휘감는 국어사전이 너덜너덜 고물처럼 헌책으로 배우는 과정의 지원군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다양하게 글을 써오신다. 학벌이 좋은 선생님들은 지적을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적을 받을 때도 있다. 학력이 부족한 나는 지적은 당연지사다. 써오신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감을 잡았다. 비참하게 살아온 사연들이 가랑잎 쌓이듯 가슴을 메우고 있으니 토해 내놓으면 소재의 작품이 될 듯싶었다. 남이 쓰는 글 왜 못쓰랴 이를 깨물고 글이 되나 마나 콩죽 쓰듯 썼다.
어느 날 운이 좋았는지 교수님께서 『한국문인』에 등단할 작품 2편을 내달라고 생소한 말씀으로 부탁하신다. 세상이 바꾸어지는 듯 감동에 취했다. 지방을 붙이며. 감이 있는 풍경 두 작품을 올렸다. 당선이 되었다. 노력 끝에 한국문인으로 성취하니 뿌듯한 심정 감출 수 없어 아무도 없는 거실 내부를 돌며 나도 이젠 한국문인 작가라고 만세를 노래하듯 불렀다.
2008년 4월 5일 『한국문인』으로 신인상을 받으려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교수님을 비롯한 문우들을 모시고 서울 행사장으로 상경했다. 행사장으로 몰려온 친족 자식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국문인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후 2008년 7월 26일 사직동거구장 3층에서 푸른솔문인협회 문인으로 등단식을 하고 행사장은 한바탕 노래와 춤으로 한층 더 즐거웠다. 나는 보잘 것 없고 내세울 것은 없지만 미꾸라지가 용으로 승천하듯 당당하게 문인이 되었다. 인생 우여곡절이 많았던 체험을 표현하기로 피나는 눈물로 신전을 다 하며 작품준비에 몰두했다. 썼다 지웠다 글쓰기는 강의실에서는 웃고 집에 서는 큰소리로 초상난 집 상주처럼 울었다. 글은 감히 아무나 쓸 수 없다는 것을 뼈 절이도록 뉘우치고 깨달았다. 모아진 작품들은 내 인생 삶의 굴레를 증명하는 뼈가되고 살이 된 작품이다. 각양각색 이모저모 눈물겹도록 쓴 작품 「엄마의 뜨락」으로 선정했다. 2016년 11월 27일 강서 리호 관광호텔에서 교수님을 비롯한 여러 문우님들 그리고 지인들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출판행사를 진행했다. 나의 인생과 가슴 속에 한(恨으)로만 숨어 있던 사연을 글로 엮어낸 것이다. 김홍은 교수님의 가르침과 배려로 빛나는 문장 활자로 뽑아져 나온 것이다. 긴 세월을 연연하지 않고 도전한 결과 나의 꿈을 이루었다. 어머니 아버지만 쓰던 글이었지만 하늘과 땅이 인정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자랑스럽게도 책을 검어지고 출간하니 끝자락인생이 달라졌다. 한을 풀고 원을 풀고 강의실 발자취는 금년 15년째 세월이다. 끝까지 살펴주시고 음으로 양으로 보듬어 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일곡선생님을 추모하며
윤현수
하늘은 그때의 하늘처럼 말없이 맑기만하다. 약간 굽은 허리에 배레모를 자주 쓰셨던 노신사분, 그 어른(일곡이재부선생님)이 오늘은 더욱 그립다. 2011년 평생교육원 첫수업때 일이다. 빈자리에 앉았는데 운이 좋게도 그분의 바로 앞자리였다. 몇 번의 수업을 받고 시화전이 있다며 시 한 편씩을 내고 있었다. 서툴은 몇 구절을 쓰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귀를 일곡 선생님께 내밀었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그렇게 하면 된다 시며 문학의 초년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다.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일곡선생님은 흥을 보태서 창도, 노래도 아닌 듯한데 구성지게 권주가(勸酒歌)를 읊으셨다. 식사자리의 마무리로 커피에 소주를 타서 드셨던 선생님.
2017년 2월 수곡동 흥사단건물에서 수필특강에 수필에 대해 수업을 해주시고 힘에 부치신 듯 긴 한숨을 쉬고 계단을 쉬엄쉬엄 내려가시며 저녁 문학회 모임에는 나가기 힘들겠다던 선생님은 그날도 힘겹게 오셨다. 그날이 일곡선생님과는 마지막 자리였다. 선생님을 생각하며 문학은 그렇게 생(生)의 끝자락까지 함께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선생님의 그리움을 바람의 언어를 펼치며 달래본다.
내 인생의 푸른 솔
원지헌(노순희)
옛일이 생각나 눈을 감으면 5월 녹음의 충북대 교정을 거니는 내 모습이 보인다. 젊은 날도 아니건만 걸핏하면 떠올라 추억에 잠기게 하는 그 시절과 동료 문우들. 그 인연은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2008년 겨울 끄트머리. 아직 산수유 꽃망울도 터지지 않은 2월이었다. 쌀랑한 바람에 옷깃을 여민 나는 충무로 소재의 –정은 출판- 을 찾아 나선다. 민들레 홀씨 같은 연약한 내 문학의 입자가 날아올라 푸른 솔에 내려앉는 계기가 된 바로 그날, 작은 거인 김홍은 교수와 상면한 날이다. 미미한 우연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련한 첫사랑과도 같은 수필문학의 세계로 진입하게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삼월이 되자 그가 충북대행 첫길에 동행했다. 수필교실 입문 사전답사였다. 돌배기 외손녀와 함께 —마을 버스— 전철- 시외버스- 택시—를 타고 내려 3시간여 만에 충북대 강의실을 찾아왔다.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이렇게 오면 되겠네.’
한숨 섞인 그의 한마디 말에 나의 자발적 고생문이 덜컥 열리고 말았다. 동시에 운명처럼 문학이 내게로 휘몰아쳐왔다. 지하 단칸방에 쏟아지는 햇살의 폭포수같이 눈이 부신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날로 문학은 나의 생애에 확고부동한 꿈과 현실이 되었다. 갑년을 넘긴 나이에, 가족들의 건재에도 불구하고 삶의 좌표를 잃은 인생처럼 방황하던 내가 정좌하여 종일을 매달려도 피곤한 줄 몰랐다. 읽고 탐구하고 뜨겁게 고민했다. 매서운 눈초리로 내 어설픈 묵정글밭에 첫 쟁기를 드신 분이 김홍은 교수다.
‘주제가 안 서요 주제가……’
‘사람을 닮아서 글이 냉정해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다.
이듬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잦았다. 우리는 등단과 동시에 7인 공저의 첫 책을 출간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만만찮은 여정이었다. 새벽에 서울을 떠나와 사람도 자동차도 드문 눈 쌓인 청주거리에 홀로서면 그 아침이 어찌하여 그토록 새롭고 신선하던지. 나는 마치 낯선 동네에 처음 당도한 사람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꼼짝도 않고 거리를 둘러보곤 했다. 문학을 향한 목마름 하나로 하늘을 나는 듯한 기쁨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던 날들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희열은 일용할 양식인양 나를 살게 하는 힘이 되었다. 강행군 수업 내내 진땀을 흘리면서도 다음 수업을 이어갈 힘을 얻곤 했으니 지도 교수의 노고와 스승으로서의 역량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오후 여섯시엔 기어이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 탑승해야만 했던 허구한 작별의 순간들. 아쉬운 맘이 너무도 무거워 좀처럼 떨이지지 않던 발길. 저물도록 그들과 함께 남아있고만 싶던 그 마음 지금도 여전한데……. 그 인연의 소중함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지난한 과정을 어깨동무하고 넘은 우리들( 최경자 염동원 장난순 최명환 문우) 은 2010년도 봄 號에 등단의 꽃으로 피어났다. 원정경기에서 메달이라도 따낸 선수에게 퍼부을 만한 과분한 축하와 환영을 받아 안은 날.내 생애 아름다운 날로 영영 잊히지 않는 일이다.
당시엔 전혀 몰랐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고도 아까운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는지를. 그렇다. 귀하고 소중한 것일수록 지난 후에야 깨달으니 그 또한 삶의 신비라고나 해야할까보다. 봄꽃 날리는 대청호반을 산책하며 진지 한 고민 속에 수필문학에 매료되었던 그날들. 되돌려보는 추억의 영상은 천국의 풍경화다. 서로 아껴주고 토닥이며 공부하던 우리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워 눈물나는 지난날이다.
닉네임 ‘수우’ 로 활동한 조문자선생은 청평에 거주하던 카페 회원이었다. 김홍은 교수를 처음 뵙는 자리에 원고뭉치를 한아름 들고 와 열성으로 지도 받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초급자가 넘볼 수 없는 치열한 작가정신을 목격하고 감동한 날이었다. 그녀는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한 교수님과의 첫 대면을 주선한 인물로 2012년도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기염을 발휘하며 신춘작가의 명함을 획득했다. 부족한 내가 2017년도에 매일 시니어문학상 대상을 얻은 것도 지도교수의 격려에 힘입은 결과임을 인정한다.
<<푸른 솔 문학>>은 가난한 내 문학의 원류다. 아직도 발돋움 중인 부끄러운 내 수필의 본향이다. 푸른 솔의 일원으로써 걸어온 내 삶의 행로 한 구간은 문우들의 소박한 인정과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풍요로운 한 시대였다. 기념할만한 많은 추억들이 그 무렵에 몰려 있다. 생각만으로도 그리움이 툭툭 묻어나는 도시 청주.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반. 죽는 날까지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이다.
꿋꿋이 성장한 스무 살 청년 푸른 솔을 우러르며광활한 수필문학의 영토에 불멸의 노거수가 될 것을 믿고 또 믿는다. 덧붙여 부풀어 폭발할 듯한 그리움을 함께 공부하던 문우들에게 깡그리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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