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전신의 대중화와 노벨상
몇몇 극적인 사건들도 마르코니의 무선전신이 각광받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에 매우 인기가 높았던 요트 경기의 결과가 무선전신에 의해 재빨리 보도되는가 하면
영국 왕실의 세자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역시 무전으로 신속히 전해졌다.
무선전신 덕분에 살인범을 체포하는 사건도 있었다.
크리펜이라는 악명 높은 살인자가 증기선을 타고 벨기에에서 캐나다로 몰래 도망하는 중이었는데,
살인자를 수배한다는 소식을 무선전신으로 받은 선장이 영국 경찰에게 역시 무선전신으로 연락을 취했다.
경찰은 캐나다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다가 크리펜을 체포했고, 그는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극적인 성과를 거듭하면서 무선전신은 소식을 빠르게 전달하는 수단이자
인류에게 도움을 주는 기술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1909년에 마르코니는 무선전신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후에 마르코니는 여러 나라에서 훈장이나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마르코니의 세계적인 명성과 관련하여 <동아일보>나 <과학조선>과 같은 우리나라의 언론도
1933년 11월에 마르코니 부부가 서울에서 8일간 머물렀던 것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마르코니는 1937년 7월 20일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마르코니에게 가장 합당한 송별식을 해준 사람들은 그를 처음으로 인정해 준 영국 사람들이었다.
7월 22일 오후 6시에 영국의 라디오 방송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2분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치 마르코니가 무선전신을 발명하기 전에 세상이 조용했듯이 말이다.
물리학적 직관, 공학적 기술, 상업적인 날카로움을 겸비한 마르코니는
지금도 무선전신의 아버지로 널리 기억되고 있다.
이탈리아 볼로냐 근교의 폰테기오에는 마르코니 마을이 있다.
그곳 언덕 위에는 마르코니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지금도 마르코니는 그의 옛집을 쳐다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