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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언론인)
원주는 예로부터 세계 최고 품질의 옻칠이 생산되는 도시로 명성이 나 있다. 옻의 성지로 불린다. 북한에선 평북 태천이고 남한에선 원주를 꼽는다. 1957년 1월 지역인사 7명은 원주옻칠을 지역의 성장 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태장동에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치악산 관설동과 금대리 일대 124ha에 옻나무를 재배하면서 생산된 옻칠을 활용하기 위해 1968년 대한민국 최초의 옻칠공예 분야 국가무형문화재 나전장 제10호 일사 김봉룡 선생(1902~1994)을 모셨다.
일사 선생이 원주에 오기 전까지 원주는 뛰어난 품질의 옻칠 생산지였을 뿐이다. 옻칠기공예와는 인연이 없었다. 일사 선생이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 칠공예부장으로 초빙돼 오면서 원주는 최고 품질의 옻칠 생산도시에서 옻칠기공예까지 갖춘 도시가 됐다. 일사 선생을 따라 심부길, 천상원, 홍순태 등 대한민국의 간판급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일약 옻칠기공예문화도시로 품격이 달라졌다.
그러나 일사 선생이 원주에 뿌리를 내린대에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한 분이 있었다. 생명사상가 무위당 장일순 선생(1928~1994)이다. 일사 선생이 원주에서 일하던 첫해에 칠공예주식회사에 4개월 동안에 불이 두 번이나 나 그 책임을 지고 회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선생을 따라 원주를 찾아왔던 장인들은 모두 떠났고 일사 선생도 흔들렸다. 그때 선생을 붙잡아 안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 무위당 선생이다. 무위당 선생은 일사 선생을 모시고 신협을 찾아 당시 5백만원을 대출 받도록 도와드렸다. 이후 일사 선생은 원주에 정착해 안정적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됐다.
무위당 선생은 일사 선생의 활동에 지성으로 도와드리며 정신적인 교류를 하였다. 전통문화와 예술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던 무위당 선생에게 일사 선생은 고마운 분이었다. 그의 뛰어난 재능과 고귀한 예술 정신에 늘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일사 선생과 무위당 선생의 아름다운 교류는 일사 선생의 제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사 이형만 선생(무형문화재 나전장10호)과 칠화칠기 명인 소하 양유전 선생이 그 인연의 산 증인들이다. 작품 활동은 물론 어려운 생활에도 물심양면의 도움이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 5월 서울 인사동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무위당과 일사의 제자인 우사 이형만 선생(국가 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의 서화전이다.
김민기 선생이 한살림의 기금 마련을 위해 기획했으며 무위당 선생의 서화를 나전 옻칠 작품으로 준비한 국내 첫 전시였다.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이 거의 다 팔려 기금을 마련하고도 돈이 남았을 정도였다. 또 당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유력 인사들이 대거 전시장을 찾으면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원주는 전국적으로 옻칠기공예문화의 고장으로 도시 브랜드를 심어주었다.
일사 선생은 생전에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전시회를 여러 차례 가졌는데 장소 사용료를 받지 않았다. 당연히 무위당 선생과 지학순 주교님의 뜻이었다. 지역 인사들에게 일사 선생의 작품을 팔아 주면서 작품 활동과 생활에 도움을 준 일은 지역 사회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원주는 오늘날 많은 장인들이 활동하는 대한민국 대표 옻칠기공예문화의 도시가 되지 못했다. 옻칠만 유명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일사와 무위당 선생은 1994년 같은 해에 작고 했다. 천생연분의 인연이다. 원주옻칠기공예관은 4월 18일 개관 20주년과 리모델링 완공을 기념해 두 분의 교칠지교(膠漆之交) 같은 인연을 돌아보는 전시회를 마련했다. 일사 선생은 23세 약관의 나이에 프랑스 만국박람회에서 <대화병>으로 은상을 수상하는 등 옻칠공예를 현대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고 100여명의 제자를 길러내 한국의 현대 옻칠기공예의 맥을 이어준 분이다.
두 분은 원주는 물론 대한민국의 국보다. 온 세상이 부러워하는 두 분을 원주만이 갖고 있으니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원주의 미래를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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