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1호선’ 2000회 공연] ‘90년대 자화상’ 싣고 계속 달린다

한국 뮤지컬의 고전 ‘지하철 1호선’이 2003년 11월 9일 서울 대학로 학전 그린 극장에서 2000회 공연을 맞는다.
94년 5월 14일 첫 출발신호를 울린 ‘지하철 1호선’은 86년 독일의 그립스 극단이 서베를린에서 초연한 동명 뮤지컬 레뷰(뮤지컬의 전단계 형식으로 음악을 곁들인 풍자극)를 우리나라 문화운동의 1세대 기수인 김민기씨가 번안한 것. 통일전 순박한 동독 소녀가 록커와 사랑에 빠져 베를린으로 상경한 뒤 경험하는 대도시의 편린을 그린 원작을 조선족 처녀가 서울에 와서 겪는 밑바닥 이야기로 바꾸었다.
김씨가 이끄는 극단 학전은 2000회 공연을 기념해 독일 그립스 극단의 원작을 초청,11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한다. 또 8일 공연이 끝난 후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와 김씨가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이다.
# ‘지하철 1호선’ 2000회의 의미와 기록들

이미 2000회를 넘긴 ‘난타’ ‘넌센스 시리즈’ 그리고 1000회를 넘긴 ‘용띠 위의 개띠’ ‘라이어’ 등 기존 장기공연들이 대부분 5인 이하의 적은 인원이 출연하는 소품이나 퍼포먼스인 것해 비해 ‘지하철 1호선’처럼 출연자만 16명에 이르는 본격적인 뮤지컬 작품이 2000회를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배우 사관학교라는 별명처럼 이 작품을 거쳐간 배우는 총 104명. 94년 초연 출연진중 설경구,방은진은 이제 영화계의 스타로 자리잡았고 당시 선녀(초연 당시 배역명은 ‘연순’) 역으로 찬사를 받았던 나윤선은 재즈 가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이외에도 황정민 오지혜 장현성 조승우 배해선 권형준 등 영화,TV,뮤지컬계에서 각광받고 있는 배우들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배우 외에 연주자 33명,조연출 무대감독 등 스태프 100여명이 이 작품에 참여했다.
‘지하철 1호선’은 뮤지컬에서 라이브 음악을 본격화하는 계기를 이뤄낸 작품. ‘모스키토’ ‘의형제’ 등 서라운드 입체음향 시스템으로 무장한 학전 라이브 뮤지컬은 플레이백 음악을 퇴출시킨 일등공신이다. 또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일방적으로 수입해 환상과 현실 도피를 부추겼던 여타 작품과 달리 우리의 밑바닥 삶을 생생하게 표현,‘뮤지컬 리얼리즘’의 길을 텄다. 이와 함께 스타에 의존하기보다 무명배우나 신인들을 키우는 무대를 지향하고 출연진에게 러닝개런티 및 최소개런티를 보장하는 서면 계약 시스템 등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 한국과 독일의 ‘지하철 1호선’
우리나라 ‘지하철 1호선’이 관객 45만 2000여명(11월 9일 기준 예상)이 들 정도로 한국에서 유명한 작품인 것처럼 독일 ‘지하철 1호선’도 독일에서 청년기를 보낸 사람치고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만큼 권위있는 작품. 86년 초연된 독일 ‘1호선’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미국 인도 등 세계 각지에서 번안 공연하며 300여만명이 관람했다.
이번 독일 ‘지하철 1호선’의 내한공연은 2001년 4월 그립스 극단이 자국 1000회를 공연을 기념해 한국 ‘지하철 1호선’을 초청한 것에 대한 답례. 그립스 극단과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는 또 2000년 한국의 ‘지하철 1호선’ 공연 1000회를 기념해 저작권료를 면제해주고 있어서 극단 학전으로서는 이번 초청이 보은의 의미가 크다. 원작인 그립스 극단의 1000회가 국내보다 늦은 것은 레퍼토리 시스템으로 운영,1년에 30여회만 공연하기 때문.
그립스 극단이 한국 작품을 사실상 새로운 작품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두 ‘지하철 1호선’은 뼈대를 제외하고 너무 다르다. 독일 작품이 통일전 베를린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단편적으로 스케치하듯 그려나가면서 정치적 풍자를 담은 것에 비해 스토리가 좀더 완결성을 띠는 한국 작품은 주인공 선녀가 지하철에서 만나는 회사원 소매치기 노숙자 창녀 수녀 청소부 잡상인 단속반 삐끼 혼혈아 복부인 등을 통해 90년대 한국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번 독일팀의 공연은 68세의 최고령 배우 크리스티안 파이트와 63세의 디트리히 레만 등 중후하고 연륜있는 배우들이 포진,젊은 배우가 중심인 우리 작품과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 김민기가 보는 ‘지하철 1호선’
폴커 루드비히가 김민기를 “영혼의 친구”라고 부르며 지하철 1호선의 작품성을 높이 평가할 만큼 한국 ‘지하철 1호선’과 김씨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김씨는 이 작품에 우리나라 현실을 반영해 새롭게 변형시켰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 내용을 수정했다.
94년 초연 당시 ‘군바리 정권’을 비판하며 주인공 ‘안경’을 진짜 운동권 학생으로 그렸던 것이 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가짜 운동권 학생으로 바꿨다. 군사정권에서 민간정부로 바뀌는 광정에서 지식층이 이전까지 가졌던 명확한 공격목표가 사라지면서 겪는 극심한 정신적 공황상태를 반영한 것. 또 우루과이 라운드,IMF 등 사회경제적인 대변동에 따라 실직자 문제나 구조조정 등 여러 경제적인 부분이 작품 기저에 깔린 것도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김씨의 시각을 대변해준다.
‘한국 뮤지컬의 고전’ ‘원작보다 뛰어난 리메이크’라는 평가에 대해 김씨는 “지하철 1호선은 공부를 한다는 자세로 시작한 작품인데 고전이라니 당치 않다”며 “우리 작품이 원작의 철학적 깊이가 번안하면서 없어지고 신파만 남은 것 같다”며 세간의 찬사에 쑥스러워했다.
그는 이 작품을 21세기를 담은 ‘지하철 1호선’으로 고치는 것에 대해서 “90년대라는 시간이 한국사회에서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며 “그 자체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한만큼 더이상의 개작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공연이 분단의 역사를 공유한 두 나라의 역사가 이 소극장 뮤지컬 ‘지하철 1호선’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비교·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02-763-8223).
장지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