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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 趙光祖 | |
출생 | 1482년 음력 8월 10일 조선 경기도 용인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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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19년 음력 12월 20일 (38세) 조선 전라도 능성현에서 사사(사형) |
필명 | 호 정암(靜庵) 자 효직(孝直) 시호 문정(文正) |
직업 | 문신, 사상가, 도학자, 정치가, 시인, 작가, 저술가 |
국적 | 조선 |
학력 | 1515년 알성문과 급제 |
활동기간 | 1515년 ~ 1519년 |
장르 | 한시 시조 유교 성리학 저술 |
부모 | 조원강(부) 여흥 민씨 부인(모) |
친지 | 조영조(형), 조숭조(아우) |
배우자 | 한산 이씨 부인 |
자녀 | 조정(장남), 조용(차남) |
종교 | 유교(성리학) |
유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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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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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趙光祖, 1482년 8월 23일/음력 8월 10일 ~ 1520년 1월 10일/1519년 음력 12월 20일)는 조선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사림파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성리학1519년 반정공신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사헌부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 역시 김종직백인걸을 통해 율곡 이이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는 훈구파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
조광조는 1482년 경기도 용인군태조 이성계의 생질인 양절공 조온의 4대손으로, 고조부 조온은 조선조선의 개국공신의 가문인 훈구 가문이었으나 김굉필
어려서부터 아버지 조원강으로부터 엄격한 훈육을 받고 자라났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의 뜻이 컸으며, 고서적과 옛 학문을 좋아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면서 학문의 뜻은 출세에 있는 것은 아니라며 과거보기 위한 글은 하지 않았는데, 부형(父兄)과 친척들로부터 세속과 어긋나게 행동하여 남의 비방을 산다고 꾸짖음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문욕은 꺾을수 없었다.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한 아버지 조원강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당시 유배 중이던 한훤당 김굉필김굉필
14세 때 성리학자 김굉필평안도(平安道) 희천(熙川)에 귀양 가 있는 김굉필[1] 학문은 《소학(小學)》, 《근사록(近思錄)》을 받들어 이를 토대로 하여 경전(經傳) 연구에 응용했으며, 평소에도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언행도 옛 가르침을 따라 절제가 있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을 한번도 만나본 적은 없었으나, 김굉필로부터 그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김종직의 제자이자 스승 김굉필의 친구들 중에는 남곤도 있었는데, 남곤
이후 김굉필의 배소가 옮겨지게 되면서 그와 이별, 김굉필은 1504년 갑자사화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이어 터진 직후라 김굉필의 제자이고 김종직의 말씀과 성리학에 빠진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기피하였으며, 그가 공부에 독실함을 보고 '광인'(狂人)이라며 조롱하거나 '화태'(禍胎, 화를 잉태한 이[2])라며 조롱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러한 비난과 비아냥, 조롱에 굴하지 않고 성리학성리학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
모르는 점이 있으면 답을 얻을 때까지 연구·독서하였고, 저명한 학자들을 찾아가서 묻거나 선배 사림인사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과거에 급제하기 전의 조광조는 선배 사림 인사들을 찾아다녔는데, 그 중에는 남곤[3] 청년기의 남곤은 같은 김종직남곤
"젊은 사람은 젊은이답게 살아야 된다. 아름다운 처녀가 있는데 젊은 장부의 마음이 어찌 잠잠하겠느냐? 아무런 감정이 없다면 나무나 돌 같은 사람이다. 네가 처녀들에게 한 눈 판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철이 들면 분별할 때가 반드시 있다. 남곤은 목석 같은 사람이라 젊은이의 피가 끓지않는 차가운 사람이다. 겉으로 보면 인격적으로 수양이 된 것처럼 보이겠으나 속으로는 그도 처녀들에게 쏠렸을 것이다. 그것을 속으로도 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남곤은 한눈 하나 팔지 않았다면 얼마나 차갑고 모진 사람인가? 훗날 남곤이 정치를 한다면 인정 사정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약한 정, 미운 정을 헤아리지 않는 판단을 내릴 것이다. 인간이 살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는데 남의 윗사람이 된 자는 너그러움이 있어야 된다. 죄지은 사람을 다음에 잘 하라고 용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곤은 그런 아량이 적어 많은 사람을 피흘리게 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내가 너를 어찌 그런 사람과 사귀게 하겠는가?"
이후 조광조의 어머니 민씨는 아들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충고했고, 아들이 남곤
19세에 부친을 여의고 3년상을 마쳤다. 부친을 일찍 여의었으나 홀어머니 민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한번도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식견을 넓히고자 김종직남곤의 인물됨됨이를 우려스럽게 본 그의 모친은 집을 멀리 이사하여 남곤1507년(중종 1년) 윤1월 박경(朴耕)과 문서귀 등이 반정공신인 유자광(柳子光), 박원종
1510년(중종 5) 소과인 진사시에 장원 중 2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 성균관성균관에 유숭조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중, 1511년 성균관 사경(司經) 황여헌
성균관에서 강의하던 도학정치가 유숭조는 한때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으며, 정여창사림파유숭조 등의 적극 추천이 있었으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고,
1515년(중종 10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직에 낙점되었으나, 그해 6월 이조판서 안당(安瑭), 남곤조지서8월 22일
세상에는 성함과 쇠함이 있으나 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예로서 사람들의 뜻을 이끌고 즐거움으로 사람들의 기운을 순화시킨 다음, 바른 정치로 그것을 행한다면 정치와 교화가 크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천지가 밝아질 것이며 천지의 기와 어울려 하나가 돼 음양의 기운을 뿜어 대니 모든 초목이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4]
성인이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기만 하는 곳의 사람들도 그 덕에 감화되는데 성인이 머무는 곳에서 사람들이 입는 감화는 측량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그 도를 얻으면 기강이란 힘써 세우지 않아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게 되며 애써 법도를 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듣지도 못하는 사이에 정해지는 것이다.[4]
“ |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서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 데 있지 않는 것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 마음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2] | ” |
그해 바로 1515년 8월 성균관1515년(중종 10년) 11월 사간원사간원[5] 왕에게 자신을 파직하던가 사헌부, 사간원 관리 모두를 파직시킬 것을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편 두 신하를 벌하는 것이 잘못됐고, 또 그들을 벌하라는 하는 관리들도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중종[5]
이 논란은 3개월이나 계속되어 1516년 2월[5] 이후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된다.
1516년 3월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다가 바로 수찬이 되었으며, 그해 5월11월 이조와 예조11월 29일 홍문관
이후 5년만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5] 연산군을 몰아낸 반정이후 개혁을 꿈꾸던 중종[5]
1517년 2월 홍문관사간원 정언(正言), 호조, 예조, 공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사간원 정언·홍문관의 교리(敎理)·응교(應敎) 등을 거쳐 1517년 8월홍문관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황해도 관찰사12월
이후 승지(承旨)를 거쳐 부제학이 되어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규정, 소격서1518년 음력 11월 사헌부 대사헌
조선 정부는 조광조 등의 계청으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추천에 의해 재행(材行)을 겸비한 사림의 선비 120명 중에서 1519년(중종 14) 음력 4월 중종이 친히 장령(掌令) 김식
또한 성균관의 유생 정원을 증원하고 강독의 시간을 늘려 사림파
그러나 신진의 청년들이라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慶筵) 때마다 간언하는 바른 소리가 그치지 않아 중종도 차츰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하여 벽지로 좌천되어 있던 남곤(南袞)·심정성리학적 도의정치 실현을 당면 과제로 생각했지만, 남곤남곤
중종 때 이여가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청했다. 중종은 이여의 건의와 유생의 상소에 따라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했다.[6]
그 후에 조강에서 태학생(太學生)들이 정몽주와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고 상소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임금이 제안했을 때, 정광필은 자신의 자제가 김굉필[7]
당시 시강관 조광조가 종사를 발의하고 기준(奇遵)이 종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정몽주가 도학의 연원을 열었으며, 정몽주가 길재를, 길재는 (여러 대를 거쳐) 김종직을, 김종직은 김굉필을 가르쳤으니 (도학의 학통이 이어진 것이며) 김굉필이 송유(宋儒)의 실마리를 얻어 주자와 같은 위치에 올랐으니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정여창, 김굉필, 성삼문과 박팽년에 대해서도[7] 종사를 의논하도록 했다. 조광조가 이심원을 거론하자 정광필이 반대했는데 임금도 이에 동의했다.[8] 참찬관 김정(金淨)이 대학연의를 강의하다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건의했다.[9]
1518년(중종 13년) 11월에는 대사헌으로 세자부빈객을 겸하면서 한편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안처겸(安處謙), 박훈(朴薰) 등 28인이 뽑혔으며, 이어 김정(金淨), 박상(朴尙), 이자, 김구(金絿), 기준(奇遵), 한충
또한 그는 사회적으로도 성리학 이념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판단, 향약(鄕約)을 장려하여 조선의 성리학성리학 이론서와 성리학 기본서적을 무료로 인쇄하여 전국 각지에 보급, 배포하였고, 아녀자들 역시 공맹의 도와 주자의 예를 배워야 한다며 이를 손수 한글불교를 미신으로 규정하여 왕실의 소격서 철폐와 함께 불교적인 종교행사 역시 없앨 것을 중종
음서 제도소격서 혁파와 불교시설 혁파, 불교행사 주장, 무속인
1519년 3월 6일 일시적으로 대사헌겸 동지경연성균관사 직에서 사직했다가 9일만인 3월 15일에 복귀했으나 그날 말에서 떨어지는 낙마사고를 당해 홍문관부제학4월5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8월
그는 또한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유자광 등 중종 반정단경왕후는 연산군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단지 그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와 중종 반정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정 후에 폐위된 것은 잘못이라며, 단경왕후장경왕후가 사망하자 그는 다시 단경왕후
1519년 10월 중종반정이성동(李成童) 등과 함께 중종 반정(1506년) 때 정국공신홍경주
그러나 개혁의 방안을 놓고 조광조는 남곤남곤은 '참된 선비라면 학술과 문예에 모두 능해야 한다'고 했고, 김숙자가 그의 아들 김종직
중종 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중종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오종록 교수는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정암을 키웠으나 정암 등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며 "정암과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5]"고 봤다.
그러나 정암은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5] 중종은 사림파
그러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고 특히 경연 때마다 발언이 그치지 않아 중종도 그 응대에 지치기 시작했는데, 당시 조광조 등에 의해 벽지로 좌천된 남곤, 심정 등이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왕도가 일조일석에 이뤄지지 않는 것임을 알고 자리를 내놓으려 했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2]
중종은 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훈구파[5] 그에 의하면 왕의 심복이 한순간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5]
1519년(중종 14) 10월 대사헌 조광조는 대사간 이성동 등과 함께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105명이 문란하게 책록됐다며 부당한 자들을 훈록에서 삭제하려는 위훈 삭제(僞勳 削除)의 소를 올렸으며, 대신 육경들도 이를 지지하는 계청을 올렸다. 중종은 하는 수 없이 자격이 없다고 평가되는 심정, 홍경주 등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공신 훈적을 박탈하고 공신전과 노비를 몰수했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원망을 사게 됐다.[2]
위훈 삭제 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사림파의 선배격인 남곤 등도 동조하였고, 정광필, 김전, 안당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조광조에게 기울어졌다고 왕에게 말하게 하고, 심정은 또 경빈 박씨[2]
위훈 삭제 사건보다 앞서 홍경주가 찬성이 되었다가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남곤·심정 등과 기맥을 통해 홍경주는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씨
심정은 홍경주를 시켜 밀서를 가지고 실의(失意)한 여러 재상들에게 찾아가 조광조를 죽일 것을 모의케 하자 홍경주는 영중추부사 김전남곤
그날 밤, 홍경주,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10] 드디어 음력 10월 15일 밤 홍경주·김전·남곤·이장곤(李長坤)·고형산
그는 전적을 거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교리, 응교, 승지를 지내고 부제학이 되어 유학과 문치에 뜻을 둔 중종에게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2] 그러나 신진 변혁주체들이 기성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수립하려 했으나 결국 보수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그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2]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만들어 불만세력을 만들어버렸다. 또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대해 불안을 느껴 조광조를 처단한다.
한 세대 뒤의 유학자 이황이나 그의 손제자인 율곡 이이
조광조를 위시하여 참찬 이자 (李耔)·형조 판서 김정(金淨)·대사성 김식(金湜)·부제학 김구(金絿)·도승지 유인숙(柳仁淑)·승지 박세희(朴世熹)·응교 기준(奇遵)·수찬 심달원(沈達源)·공서린(功瑞麟)·윤자임(尹自任)·안정(安挺)·이구(李構)·홍언필홍경주 등은 그날 밤으로 모두 죽일 계획이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우의정 안당(安塘)·신임 대사헌 유운(柳雲)·신임 대사간 윤희인(尹希仁)·전한(典翰) 정응(鄭應)·봉교(奉敎) 채세영[10] 11월 16일[10]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5]"
그가 옥 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왕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5]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
권력을 잡게된 심정과 남곤 그리고 홍경주는 조광조를 살려두려 하지않아서 중종은 결국 음력 12월 20일 능주(綾州 :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김식, 김정
그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가 되어준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곳에 고향을 둔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이었다.[11]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11]
그가 유배되자, 유배지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음력 12월 20일
사사당한 그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용인군[12] 이 추모옥은 후일 죽수서원으로 발전한다. 선조1년(1568)에 조광조는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을 논의하였고, 이에 따라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12]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2]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가 죽은 뒤 이렇듯 인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조광조에 대한 말을 일절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렸다.[2]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이듬해 봄에 선영이 있는 용인의 심곡리로 관을 옮겨 반장(返葬)을 했더니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다고 전한다.[2]
그의 영정 초상화는 조선시대에 제작되었으나 대부분 실전되었다. 그러나 1750년
참고|신사무옥 조광조, 김식 등이 사사된 후 김종직 학파에서는 남곤, 김전김종직 학파 출신으로 중종 반정에 참여했으며 남곤, 김전 등과 교류하던 성희안과 유순정남곤은 조광조 등의 사사가 결정될 때 반대하였지만, 기묘사화
성균관 학유였던 안처겸(安處謙)과 부수찬이었던 안처근(安處謹) 형제가 후에 훈구파의 영수인 심정, 홍경주 등을 제거할 때 배신자, 변절자로 지목된 남곤, 김전송사련(宋祀連)[13]의 밀고로 탄로났다.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년) 송사련으로부터 안처겸 형제의 모의를 접한 남곤 등은 안처겸 등의 역모를 주장하여 안당
조광조 등의 개혁파가 중종 기묘년에 사화를 당한 10년 후에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신원회복을 요청했다.[14] 1540년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일단 복권되었으나 명종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2]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瀟灑)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
1553년(중종 38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경연(經筵)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시사(時事)를 논하는 자리에서 기묘사화
1544년(인종 원년) 인종은 즉위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기묘 명현들의 신원을 복원하였으니 이는 평소 존경하던 스승 김인후(金麟厚)와 이황(李滉) 등의 영향과 그를 평소 동정하던 인종명종 초에 훈구파인 이기1559년(명종 14년)에는 경상도 산음(山陰)의 유생(儒生) 배익겸(裵益謙)이 정사의 폐단을 논하면서 그의 개혁정치를 언급했다가, 훈구파들로부터 비판 공론이 다시 나타났으나 1560년초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선조 대에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
1567년(명종 21년) 선조 즉위 후 기대승에 의해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진 이후, 계속된 사림파들의 상소와 주청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의 증직이 내려지고, 시호가 추증1582년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글씨는 이산해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관에 추서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
1519년(중종 14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된 사당에 사액이 내려져 1570년(선조 4년)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이 된 이후, 1576년1650년(효종 원년)에 그의 묘소 근처에 세워진 심곡서원용인시 수지구양주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고, 그와 그의 동료 사림들은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보급하였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성리학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그가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김굉필조선
동시에 그는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추진하였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던 기관이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정암으로선 도교적 제천행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5]
도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해도 정당한 명분을 갖추지 않고, 비밀리에 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논의였다. 중종연간에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중종
1518년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
조광조는 사사되었지만 그의 제자인 백인걸과 이연경 등은 명종 때에 정계에 진출하며, 백인걸의 문하에서 한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그러나 이이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11]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11]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
급진적이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되고 있다. 선조때의 성리학자 이이
또한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11]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인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2] 그가 사사될 당시 그를 제거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로 심정과 남곤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계되었다 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
《정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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