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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우리 동화, 무엇이 문제인가
조대현(동화작가)
생명력 긴 작품 써야
최근에 필자는 동화 창작과 관련하여 두 가지 귀중한 체험을 했다. 하나는 필자 개인의 동화선집을 묶기 위하여 그 동안 쓴 단편동화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살펴본 일이고, 또 하나는 모 출판사가 기획한 ‘우리 동화 60선’에 추천된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읽은 일이다.
먼저, 개인 선집에 들어갈 작품을 선별하면서 느낀 소감은 자신에 대한 심한 실망감이었다. 40년 가까이 동화를 써 왔지만 막상 ‘선집’이란 이름으로 펴낼 작품을 가려 뽑으려고 하니 선뜻 내세울 작품이 별로 없었다. 쓸 당시에는 혼신의 힘을 다 기울였고 그만큼 성취감도 맛본 기억이 있는데 시간이 지나 좀더 객관적인 입장이 되어 다시 보니 허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소재나 주제가 너무 진부하여 독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줄 만한 작품이 드물고, 담긴 내용이 함량미달이거나 완성도가 부족하여 깊은 감동을 주기가 어려운 작품이 태반이었다. 그렇다고 수법상으로 주목받을 만한 작품도 거의 없었다. 가까스로 10여 편의 작품을 뽑아 편집자에게 넘겼지만 지금도 불만과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 동화 60선’ 감상에서도 실망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평소에 역량 있는 작가라고 보았던 작가들의 대표작으로 추천된 작품인데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작품이 많았다.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비교하면서 읽으니까 우열의 차이도 더욱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물론 평소의 역량과 작품 사이에 괴리가 드러나는 까닭은 추천자가 대표작을 바로 뽑지 못하고 아무 작품이나 손쉽게 골라보낸 탓이겠지만 어쨌든 우리 동화 전체의 수준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아쉬움은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필자가 개인적으로 절감한 것은 단 한 편의 동화를 쓰더라도 오래 동안 독자의 기억에 남고, 언제 읽어도 감동이 되살아나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새삼스러운 자각이었다. 비록 쓰는 작품마다 모두 명편이 되기는 어려워도 그 중 한두 편만은 문학성과 재미성이 골고루 갖춰진 작품을 남겨야 하다 못해 문학사 한 귀퉁이에라도 남지 않겠느냐 하는 절박감 같은 것이었다. 특히 오늘날처럼 작가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발간되는 동화집의 양이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아지는 시대에, 당대를 넘어 다음 세대에까지 읽힐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것은 작가 모두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자성 없이는 사후의 문학사적 평가는 고사하고, 작가가 생존해 있는 당대에도 주목받을 만한 작품을 생산하기가 어렵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80년대 이전, 작가정신 강해
그렇다면 한 작품이 당대를 뛰어넘어 다음 세대에까지 읽히기 위해서 갖춰야 할 요건은 무엇일까? 무엇이 작품을 오래 살아남게도 하고 일회용으로 단명하게도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기 위해 필자는 다시 한번 문학사에 오르내리는 전(前)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눈여겨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대를 따라 내려오면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까지 서로 비교를 하며 읽어보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필자에게 1차적으로 감지되어 온 사실은 1980년대 후반을 고비로 그 이전 세대 작가와 이후 세대 작가의 작품 성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점이다.
80년대 이전 작가들이 창작의 무게 중심을 주제구현에 두고 작품을 써 온 데 비해, 이후세대 작가들은 주제보다 동심에 바탕을 둔 ‘이야기’ 자체와 등장인물의 캐릭터 조형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나 보였다. 작품에 나타난 소재를 보더라도 전세대 작가들이 역사성이나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사건을 많이 다룬 데 비해, 80년대 이후 작가들은 어린이의 현재적 삶의 모습이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갈등 묘사에 더 열중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현상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야기를 엮어가는 수법에 있어서도 전세대 작가들이 사건을 설명하는 방법(telling)으로 풀어온 데 비해, 현세대 작가들은 사건을 장면묘사 위주로 보여주는 방법(showing)을 즐겨 쓰고 있었다. 그리고 문장도 현대로 내려오면서 점점 더 감각적·구체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밖에, 전세대 작가들이 중학년 이상 고학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많이 써 온 데 비해, 80년대 이후부터는 동화문학의 주류가 중학년 이하 유아 대상으로 하향화되고 있는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이러한 변화는 시대추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어느 시대 작품이 더 우월하고 어느 시대 작품이 그만 못하다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두 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놓고 어느 세대 작가들의 작품이 더 깊은 감동을 주고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를 따져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감동과 생명력의 실체를 밝혀보는 일이야말로 동화작품이 시대를 초월해서 오래 읽힐 수 있는 비결을 푸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고 평가기준이 다르겠지만 필자의 안목이나 식견으로는 80년대 이전 작가들의 작품이 그 이후 작가들의 작품보다 진지성이나 그 안에 담긴 이야기의 함량 면에서 단연코 우세하다고 말하고 싶다.
80년대 이전, 특히 창작여건이 열악했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당시의 작가들은 작품 속에 시대적 아픔과 어린 주인공들이 겪는 고민을 열정적으로 담아 쓰려고 노력한 흔적을 역력히 볼 수가 있다. 방정환의 ‘만년샤쓰’를 보면 가난한 주인공 소년이 추운 겨울날 눈 먼 어머니에게 속옷과 버선까지 벗어 드리고 홑옷에 맨발로 학교에 오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이 감동을 주는 까닭은 극한의 가난 속에서도 민족의 보편적 가치인 효를 다하고, 그러면그러면서도 가난에 굴하지 않고 밝게 생활하는 소년의 건강한 모습이 의지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작가는 일제치하의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우리 청소년이 굳세게 고난을 이겨 나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이 작품을 썼던 것이다.
193.40년대에 주로 활동한 마해송의 작품에서도 유사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가 1931년 <어린이>에 연재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 당하고 광복 후에 완성한 ‘토끼와 원숭이’를 보면 일제의 한국 침략과 그 후에 벌어진 민족분열의 슬픈 현대사가 동물의 의인화를 통해 저항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은 다시 ‘떡배 단배’로 이어지면서 주체성을 찾는 것만이 민족의 살 길임을 강렬하게 각인시켜 주고 있으며, 그 정신은 ‘꽃씨와 눈사람’으로 이어져 자유당 말기의 독재체제에 항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흔히 최초의 창작동화로 일컬어지는 ‘바위나리와 아기별’도 표면상으로는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지만 내면에 봉건적 가부장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저항과 비판정신을 통해 당대의 불합리한 현실을 풍자해 보임으로써 어린 독자들에게 근대적 가치인 주체성과 자유지향의 의식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194,50년대에 주로 활동한 김요섭은 우리 동화에 최초로 플롯 개념을 도입하여 단편동화의 완성도를 높였으며, 동화문학의 특질 중 하나인 환상기법을 개발하여 수법과 소재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는 이와 같은 기법개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그가 활동하던 당대의 현실을 짧은 단편 속에 밀도 있게 그려, 6·25를 전후한 혼란기에 우리 어린이들이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을 잃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샛별과 어머니’ ‘은하수’ ‘꽃잎을 먹는 기관차’ 등 전후의 현실을 환상적으로 그린 그의 단편은 지금 읽어도 속이 꽉 찬 내용과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명작들이다.
그밖에, 평생 서민의식의 기조 위에서 작품활동을 한 이원수, 특히 그가 생애 후반기에 쓴 장편 ‘잔디숲 속의 이쁜이’, 중편 ‘호수 속의 오두막집’, 단편 ‘밤전차의 소녀’ 같은 작품은 그의 따뜻하고 원숙한 인생관이 과장 없이 녹아있어 언제 읽어도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같은 시기에 활동하다가 일찍 타계한 강소천의 동화에서도 오래 동안 잊혀지지 않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남북 이산의 슬픔을 꿈을 통해 극복하는 ‘꿈을 찍는 사진관’, 아기를 잃은 슬픔을 역시 꿈으로 승화시킨 ‘꽃신’ 등, 그의 단편에는 마음 저 밑바닥에서 길어올린 그리움의 정서가 절절하게 표출돼 있어 역시 지금 읽어도 공감이 간다.
6·25의 상흔이 걷히고 산업화 시대로 접어든 뒤에 나온 작품에서도 그 앞의 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받는 것과 같은 중후한 질량감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이준연의 ‘까치를 기다리는 감나무’, 권용철의 ‘쌍골죽의 꿈’, 이현주의 ‘알게 뭐야’, 이영호의 ‘보이나 아저씨’, 손춘익의 ‘돌사자 이야기’, 강준영의 ‘전쟁과 촛불’, 정진채의 ‘연밥’, 임신행의 ‘겨울 망개’, 권정생의 ‘강아지똥’, 조장희의 ‘아기개미와 꽃씨’, 정채봉의 ‘노을’ 등, 1960년대부터 80년대 후반에 걸쳐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작가마다 색채는 다르지만 그들이 시대와 역사의 고뇌를 외면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전통과 자연과 인간성, 정의, 자유, 진실, 양심 등 인류 보편의 가치를 옹호하려고 애쓴 모습이 작품 행간 행간에 짙게 배어 있다.
이들 작품을 통독하면서 필자가 공통적으로 느낀 것은 첫째, 작가의 창작자세가 매우 진지했다는 사실이다. 짧은 소품 한 편을 쓰더라도 80년대 이전 작가들은 단순히 동심이 담긴 이야기 조립에 머물지 않고 그 속에 역사적 시대적 고뇌를 담아 문학적 의미를 살리려고 애썼고, 그것을 통해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 세계를 그려 보이는 데까지 사고의 폭을 넓혀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작품 속의 현실은 대부분 어둡고 질곡에 차 있지만 그것을 헤치고 나가는 극복의지가 강하게 표출되어 있어 어린이의 소외심리에 깊은 감동과 위안을 주고 있었다.
둘째, 작가들의 자기 철학이 확고했다는 사실이다. 80년대 이전 세대 작가들이 대부분 식민지 시대의 체험이나, 전쟁 궁핍 등으로 얼룩진 불행한 역사를 체험하고 입지에 성공한 사람들이라 당대의 사회현실에 대해서 뚜렷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작품 창작에 반영되어, 그 시대 작가들의 작품에는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고, 그것은 다분히 불의와 불합리를 거부하고 동심이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이상적 시공간을 희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어 주제가 매우 건실하고 교육적으로도 유효성이 높아 보였다. 이와 같이 명쾌하고 건실한 주제의식과 교육적 유효성이 작품에 대한 신뢰를 한층 높여주고 있었다.
셋째,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의 함량이 높고 기술적인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다는 것이 또한 이들 작품의 공통적인 미덕이었다. 내용의 함량과 기술적 완성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대 작가들이 작품을 함부로 남발하지 않고 완벽한 작품을 내놓기 위해 고치고 다듬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시대의 작품이 지금 시점에서 보면 표현도 어색하고 배경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읽고 나면 가볍지 않은 감동이 오는 까닭도 워낙 내용이 충실하고 이야기 구조가 탄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충실성과 완벽성이 옛 작품을 오늘에도 읽히게 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3가지 요인, 즉 ①창작자세의 진지성에서 오는 높은 문학성과 감동 ②작가의 확고한 철학에서 오는 명쾌하고 건실한 주제의식과 교육적 효용성 ③내용의 충실성과 기교의 완벽성이 말하자면 작품을 오래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비결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비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필자는 그것을 장인적인 작가정신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필시 이들 옛 작품은 흐릿한 호롱불 아래서 한 자 한 자 잉크를 찍어 써 내려간 작품이 태반일 것이다. 그 중에는 원고료도 받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작품도 많을 것이다. 그와 같이 열악한 창작환경 속에서도 오로지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장인적인 정신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에도 읽힐 수 있는 생명력 긴 작품을 빚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가벼움 증후군에 빠진 이 시대 작가들
그러면 80년대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는 우리 동화의 실상은 어떠한가?
일일이 작품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이 시대의 동화가 80년대 이전 선배작가들의 작품에 비해 기교 면에서 크게 발전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선 문장 테크닉이 세련되어 작품을 읽는 데 쾌감을 주고, 표현을 간결하게 하여 독서에 탄력과 속도감이 붙게 한 것은 80년대 이후 작가들이 문장 운용방법에서 거둔 큰 성과라고 하겠다. 또한 묘사력이 탁월해져 장면 장면에 현장감이 넘치고, 줄거리 전개를 장면위주로 하여 전체 구성에 입체감이 돋보이도록 한 것도 신세대 작가들의 유효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작품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밝아져 동화문학에 대한 인상이 참신해진 것도 눈여겨볼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작품 속의 아동상을 어른의 종속물이 아닌 주체적 독립적 존재로 그려 그들의 살아 움직이는 발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전세대의 작가들이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되 그들을 독립적 인격으로 그리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어른의 생활영역 안에서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소극적 인물로 그림으로써 눈에 띄는 아동상을 창조해 내지 못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신세대 작가들이 어린이의 캐릭터 창조에 눈을 떴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역시 신세대 작가들에 의해 환상동화의 개발이 시도되고 있는 점도 주목되는 현상이다. 아직 이렇다 할 성과물을 접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었다는 것 자체가 한 발 앞선 진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와 징후에도 불구하고 8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에서 그 이전 시대 작품에서 받는 것과 같은 감동이나 중후한 울림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필자는 그것을 작가정신의 결핍에서 오는 가벼움 증후군 때문이라고 진단하고 싶다. 작가가 이 시대에 무엇을 (또는 어떤 작품을) 써야 한다는 자각과 소명의식을 갖지 못하면 자칫 대중적 인기몰이에 휩쓸리기가 쉽다. 그것은 필경 어린이의 저급심리에 영합하여 명랑동화나 공포소설 같은 통속물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 맹위를 떨친 명랑소설 붐이 바로 이런 현상으로, 당시 영리추구에 급급하던 출판계와 일부 작가들의 무분별한 결탁이 이런 일회용 소모품 같은 아동 독서물울 무더기로 쏟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이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80년대 이후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 참신한 감각과 현장감 넘치는 묘사에 고개가 끄덕거려지면서도 다 읽은 뒤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그러한 기교 뒤에 당연히 내재되어 있어야 할 작가의 의지나 고뇌의 흔적이 감지되어 오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러한 문제를 헤쳐나가기 위해 어린이에게 주어야 할 정신적 양식이 무엇인지-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이 생활주변에서 일상적인 소재를 찾아 즉흥적 묘사를 하다보니 작품에 무게가 없고 전반적으로 경박단소해 보임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결같이 실망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런 것이다. 앞뒤 이야기의 꼴은 갖췄으나 내용이 별것 아닌 생활 재현에 그치고 만 작품, 발상이 신선해 읽다 .보면 스토리 전개과정이 억지스럽고, 그나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주제가 모호한 작품, 문장 수사는 요란하나 읽고 나서 아무것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주지 못하는 공허한 이미지 과잉의 작품, 부분 부분 재치는 번뜩이지만 마치 방송 개그같이 헤픈 웃음만 강요하는 작품····. 이런 작품들을 계속 읽다보면 오늘의 젊은 작가들이 동화문학을 얼마나 가볍게 보고 안이한 자세로 창작에 임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더구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가벼움 증후군이 몇몇 작가에 한정되지 않고 이 시대 젊은 작가들 사이에 당연한 관행처럼 만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많아졌어도 특징있는 자기세계를 보여주는 작가는 드물고, 기교가 눈에 띄게 향상되었어도 깊이있는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을 찾기가 어렵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동화가 한 편의 문학작품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표현기교도 중요하지만 당대 어린이의 정신세계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겠다는 작가의 투철한 의지가 작품 속에 큰 기둥으로 버티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 줄거리만 있지 내용의 실체가 없는, 다시 말해서 형체만 있지 본질이 빠진 작품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이 가볍고 깊이가 없는 까닭은 작품 내면에 이런 본질적 문제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배작가들, 특히 창작환경이 열악했던 시대 작가들의 창작자세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생존 자체가 불안정하고 원고료조차 보장이 안 되는 시대였지만 그 시대 작가들은 분명히 당대의 소명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 소명을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기 위해 전력투구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소년들에게 가난하지만 밝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소망한 방정환, 해방공간에서 주체성과 자유 등 근대적 가치를 심어 주려고 노력한 마해송, 6·25의 혼란 속에서도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랐던 강소천, 서민 어린이들에게 평생 사랑과 위안을 주려고 애쓴 이원수, 환상이라는 새바람을 불어넣어 우리 동화의 질을 한층 높인 김요섭····, 이들의 작품이 오늘에도 빛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당대의 현실 속에서 아동문학이 해야 할 소임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창작에 임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이들 작품 속에는 당대의 어린이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뚜렷한 신념이 담길 수 있었으며, 그만큼 내용의 충실도가 높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작가가 자기 시대의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뚜렷한 어린이 사랑의 신념을 가지고 창작에 임하는 태도를 작가정신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작가들에게 필요한 것도 이런 정신의 회복이라고 하겠다. 시대가 변하여 어린이의 자유가 크게 신장되고 생활여건도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 시대에도 역시 어린이를 둘러싼 사회환경에는 개선되어야 할 여러 가지 삶의 문제가 있다. 나날이 증가하는 이혼풍조와 그로 인해서 어린이들이 받는 고통과 좌절,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인한 왕따 문제, 가정해체로 인해 보호의 그늘에서 벗어난 노인과 어린이의 소외 문제, 전자매체의 발달로 인해 정신적 공황에 빠지는 어린이의 문제그밖에 자연파괴와 생명경시 풍조로 인한 도시의 황폐화와 소비시대가 몰고 온 여러 가지 병리현상 등, 우리 사회에는 어린이의 건강한 삶을 해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오늘의 작가들은 이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파고들어 작품으로 다뤄야 한다. 다루되 표피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수준에 그치면 별 의미가 없고,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불합리한 사회구조 때문에 어린이가 겪게 되는 갈등 양상을 가슴이 뭉클하도록 감동 깊게 형상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그런 갈등 속에서도 어린이가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작가의 인간적이며 도덕적인 신념을 작품 속에 불어넣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을 읽는 어린이가 미래에 대한 상승의식과 정신적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해야 진정 생명력 있는 작품이 잉태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연찬으로 경쟁력 높여야
이를 위하여 필자는 오늘의 작가들에게 좀더 자기연찬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고 싶다. 명색이 아동문학가라면서 그 흔한 문학개론 한 권 들춰보지 않은 작가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동화작가로 입신 처세하겠다면서 선배들의 동화작품 한 편 안 읽는 작가는 또 얼마나 많은가.
모름지기 동화문학을 지망하는 사람이라면 일반 성인문학 작가들이 하는 문학원론에 대한 공부부터 두루 섭렵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이론의 토대 위에서 1920년대 이후 선배작가들이 이룩해 놓은 작품을 읽어 아동문학을 보는 눈과 동화문학에 대한 자기 소신을 뚜렷이 정립해야 할 것이다. 실제 창작은 그런 연후에나 가능하다. 많은 동화작가들이 이런 연찬 과정이 없이 곧바로 창작에뛰어들어 기교만 승하지 내용은 허술한 ‘의미 없는 아이들 이야기’를 양산해 놓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동화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지만 역시 그 속에는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녹아들어 있어야 한다. 성인소설이 그것을 어른의 기준과 관점에서 보고 쓴 것이라면, 동화는 어린이의 시각과 관점에서 보고 쓴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동화작가도 단순히 어린이의 생태나 생활만 관찰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고, 이 시대 어린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현실을 모두 작품의 소재로 상정하고 관찰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어린이의 정신 성장에 저해가 되는 문제점을 구조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작품의 뼈대로 삼아야 한다. 그런 구조적 문제에 대한 성찰이 없이 어린이의 사소한 생활묘사에만 집착하는 한 결코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은 나오기 어렵다.
이와 함께 해외명작과 새로 번역되어 나오는 외국 근작들도 부지런히 찾아 읽어야 한다. 세계가 한 울타리 속처럼 좁아지는 시대에, 우리동화의 인류적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외국 작품을 통해 새로운 감각과 수법을 수혈 받는 일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젊은 작가들에게 또 한 가지 권고하고 싶은 것은 작품 발표나 저서 발간을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것이다. 작품이란 벌거벗은 작가의 분신과 같은 것이어서 일단 지면에 공개가 되면 독자에 의해서 속살 깊은 곳까지 속속들이 파헤쳐져 검증을 받게 된다. 더구나 요즘 어린 독자들은 똑똑하고 영리하기 짝이 없어서 전문가인 작가가 미처 생각해 내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내 품질을 평가한다. 하물며 비평가나 편집자들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 독자나 비평가들에 의해 드러나는 허점에 대해 낯뜨거워 할 줄 모르는 작가라면 그는 이미 발전이 끝난 작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품집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특히 첫 작품집은 그 작가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선보이는 관문 구실을 하는 법이어서, 첫 작품집의 내용이 신통치 않으면 문단이나 출판계는 철저히 그 작가를 외면하게 된다. 그 다음에 아무리 훌륭한 작품을 써도 첫 작품집에서 실추된 명예는 좀처럼 회복되기가 어렵고, 회복되는 데도 많은 시간과 공력이 소요된다. 작품 발표나 저서 발간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컴퓨터 아닌 원고지에 한 자 한 자 눌러쓰고, 그 위에 다시 여백이 꽉 차도록 수정과 퇴고를 거듭했던 전세대 작가들의 정성과 자기 작품에 대한 애정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적어도 80년대 이전까지는 등단하기가 바쁘게 설익은 습작품을 모아 작품집부터 내고 보는 무모한 관행은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자기의 내적 완성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에 반세기를 넘어서도 읽히는 경쟁력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작가들이 선배 작가들의 그런 정성과 장인정신을 되살려 낼 때 앞으로 다시 한 세기를 넘어 살아남을 생명력 있는 작품이 창조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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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현 님은 1939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으며, 196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영이의 꿈’이 당선됨. 지은 책으로 <범바위골의 매> <아스팔트의 촌탉> <잠깨는 산> <홀로 서서 가는 길> 외 40여 권이 있음. 한국아동문학상, 소천아동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