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걷기
영주시에 다녀올 일이 생겼습니다. 대부분의 지방나들이는 조사와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차를 직접 몰고 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번에 영주를 가게 된 일은 회의 때문이었지만 겸사해서 주변을 돌아볼 요량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아는 친척 한분이 졸음운전으로 청춘을 마감한 것을 본데다 골목길 안쪽에 들어 앉아 있는 차를 뺄 상황도 아니어서 이른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영주로 떠났습니다. 영주야 비교적 자주 가는 도시기에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지만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지난밤의 수면도 그리 넉넉지 못한 때문인지 졸며, 자며 영주에 도착했습니다.
영주는 1980년 풍기읍과 주변의 9개면을 합쳐 만든 영풍군을 1995년 통합해 하나의 영주시로 거듭난 곳입니다. 소백산의 비로봉(1,439m), 국망봉(1,421m), 연화봉(1,394m)으로 이루어진 소백산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영주시에 있는 풍기는 사과, 인삼, 인견, 한우 등으로 무척 유명한 곳입니다. 최근에는 소백산 자락길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영주고속버스터미널 주변은 수년 동안 별로 변한 것이 없습니다. 개발호재가 별로 없어서 인지 상권이 죽어가서인지 모르겠지만 왠지 낡고 어두운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서울의 고속버스터미널과는 너무 대비되는 터미널건물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버스에서 내려 우선 표를 파는 창구를 먼저 찾아갑니다. 낡은 안내판은 참 세월 있어 보입니다. 영주시를 찾으시면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이 안내판을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낡은 것이 추한것이 아닐 때 그건 참 많은 생각과 감회를 떠올리게 하는 오브제가 되곤 합니다. 안내판을 우선적으로 찾는 것은 버스를 타면서 생긴 버릇 중의 하나인데 어느 곳이든 버스를 내리면 제일 먼저 돌아갈 차의 시간을 확인하게 됩니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반 정도 빨랐습니다. 이른 아침에 너무 긴 간격으로 배차되어 있는 버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첫차를 탔더니 많은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아직 식전인 배가 고파 왔지만 식당도 찾을 겸, 영주시도 살펴 볼 겸 목적지인 영수시청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길을 걷는 것 그것은 찾아간 도시를 가장 빨리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요즘 제가 사용하는 블로그의 이름도 ‘걷는 돌처럼’입니다. 걷는다는 거, 다 제 팔자인 것이지요.
터미널을 나와 걷는 길은 두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이곳저곳 부딪히며 정쌓기 좋은 넓이입니다. 길가에 세워놓은 입간판이나 손수레 역시 두사람을 친근하게 만들어 주는 대표적인 묶음장치입니다. 시청 방향이다 싶은 곳을 대충 찍어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터미널을 나와 첫 번째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는 잠시 망설여야 했습니다. 이미 아내에게 전화로 영주시청으로 가는 버스 번호를 확인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나오면서 걷는 일은 의외로 시도하기 쉽지 않은 도전과제가 되어버린 느낌입니다. 가로수는 직경이 20센치 내외인 은행나무들입니다. 아직은 봄이어서 그런지 은행나무 잎은 먼지가 적은, 푸릇하고 싱싱한 느낌의 밝은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영주 기독병원 옆에 골목시장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골목의 지붕을 덮어 시장으로 꾸며 상권을 형성한 것인데 간판이 무척 거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골목시장이라는 간판만 요란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간판 덕분에 사람들이 골목을 찾고 그곳의 상권이 살아난다면 보기에 좀 거슬린다 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골목시장 입구에 꽃집이 있기에 마침 요즘 몇가지 꽃씨를 찾고 있는 터여서 들러보았습니다. 손님을 맞은 주인아주머니에게 꽃씨를 묵으니 “꽃집은 꽃을 파는 곳이지 꽃씨는 팔지 않아요.”라고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옵니다. 꽃집에서 꽃을 팔뿐이라는 그 말이 참 맞는 것 같긴 한데 나에겐 아니라는 생각이 더 듭니다. 꽃시는 꽃집에서 팔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꽃씨는 어디서 살 수 있죠?” “그건 내가 모르죠. 다른데 가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여러 꽃집을 다니며 꽃씨를 수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찾아간 모든 꽃집에서 꽃씨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꽃집에서 꽃씨를 산 기억이 분명 있는데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는 이는 없었습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럼 꽃씨는 어디서 사야 하는 거지요? 인터넷 판매 사이트에서 구하면 어렵지 않겠지만 꽃씨값보다 배달료가 더 비싼 기형적인 구매는 하고 싶지 않아서 굳이 찾지 않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니 영주선비문화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인기가수 박상철씨가 내려온 모양인데, 아쉽게도 축제는 16일로 끝나 버렸습니다. 전국에 너무 많은 축제가 있어 예산의 낭비가 많다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지방을 찾은 사람들은 저렇게 걸린 현수막을 보면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됩니다. 뭐 이론하고 실제하고는 차이가 많은가 봅니다.
아까부터 앞서 걸으시는 할머니가 한분 계셨는데 다른 선행자들은 다 사라지고 그 할머니만 계속 내 앞을 걷고 계십니다. 이곳보고 저곳에 정신 파느라 꽤 늦은 내 앞에 계속 계신걸 보니 저 할머니 꽤나 걷기가 힘드신 모양입니다. 허리에 손을 놓고 가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허리쪽이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조금 가시더니 남의 가게 앞에 앉아 쉬십니다. 뭐 좀 늦게 가는 것이야 어떻겠습니까. 그저 아프지나 마시길 바래봅니다. 좀 더 걸어가니 또 시장이 나옵니다. 이번시장은 전보다는 좀 더 세련된 간판을 달고 있습니다. 그 옛날 드라마 제목 같은 서울뚝배기집을 시작으로 여러 음식점들이 경쟁 하더니 건강원, 오락실, 철물점, 슈퍼, 담뱃가게가 가지런히 줄을 섭니다. 슈퍼에 들러 생수를 한병 사고 길도 물을 겸 이것저것 질문을 하니 주인아주머니는 길은 친절히 알려주시는데 다른 건 묵묵부답입니다. 슈퍼를 나와 길 건너편에 종묘상이 있어 꽃씨를 물으니 무씨는 있는데 원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슈퍼 아주머니가 알려준 대로 길을 갑니다. 걸어서 십오분이면 시청까지 간다 했으니 천천히 길을 걷는 내걸음으로는 30분 이상이 걸릴 것입니다. 얼추 회의시간에 맞는 시간입니다. 현대자동차, 영진모텔, 돈텔마마를 거쳐 영주우체국을 지나니 메밀음식점이 보입니다. 걸으니 땀도 나고 내가 좋아하는 냉면이 정말 먹고 싶었지만 아침을 찬음식을 먹은걸 집에서 안다면 좋아하지 않을 걸 뻔히 알기에 눈을 감고 지나칩니다. 골목틈 사이로 멀리 구성공원에 세워진 정자가 보입니다. 구성산성터에 자리잡은 이 공원에는 가학루라는 잘빠진 정자가 유명합니다. 가학루는 원래 정자가 아닌 성의 문루입니다. 이곳에는 부용계기념비, 위령비 등 여러개의 비들도 있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칠 뿐입니다. 아까시나무가 많은 이 야산이 가지고 있는 역사들은 언제고 다시 찾아 주름을 세듯 헤아려볼 계획입니다.
세무서사거리에서 좌회전해 곧게 난 길을 계속가면 영주역이 나옵니다. 이 길에는 몇 곳의 식당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비공장이나 인테리어, 금속가공 등을 하는 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어 서울의 구로공단이나 문래동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다만 서울과 달리 공장보다는 서비스센터에 가깝고, 큰 건물이 없는 훨씬 산뜻한 곳입니다. 또 하나 이 거리에는 영주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한우음식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기를 먹기엔 시간이 없고 깔끔해 보이는 분식점이 있어 불쑥 들어가 봅니다. 내 나이 또래의 여성 둘이 있는데 무얼 먹겠냐는 목소리가 꽤나 퉁명스럽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영주에서 만난 여성들의 목소리가 다 이렇습니다. 서울 촌놈이 듣기에는 시비 거는 걸로 오해하기 딱 맞는 목소리인데 하는 행동을 보면 그런 건 분명 아닙니다. 참 새롭습니다.
시간이 얼마 안남아 급하게 시킨 김밥을 먹고 역까지 한걸음에 달려갑니다. 역에는 줄을 선택시들이 때 이르게 더운 날씨 아래 졸고 있습니다. 역에서 시청까지 가는 길에는 허리깨나 굵은 튜울립나무 가로수들이 갈색꽃잎들을 길에 떨구고 있습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마음은 느긋합니다. 영주시청 청사가 저 앞에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