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엽서 - 대한민국 60년] 귀순용사
'의사, 변호사, 다음으로 귀순용사'
연이어 터지는 플래시 속에 태극기를 배경으로 앉아있는 북한군복 차림 사나이. 시선은 불안정하고, 비장감이 감돈다.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끼던 중 어떤 계기로 대한민국을 동경하다 목숨 걸고 자유대한의 품에 안겼다는 귀순동기. 회견의 끝은 화환 걸어주기와 '대한민국 만세!' 삼창. 민간인 귀순자까지 귀순 '용사'라 일컫기도 했지만, 휴전 이후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 온 현역 북한군을 귀순용사로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이렇게 볼 때 귀순용사 1호는 1953년 9월 21일 미그15기를 타고 온 당시 21세의 노금석 북한군 소위다. 노금석씨는 현상금 10만 달러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공부를 한 뒤 방위업체에 근무하다가 2000년에 은퇴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귀순용사는 미그19기를 몰고 온 이웅평씨다.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공습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지금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1983년 2월 25일 오전 10시58분이었다. 이웅평씨는 가정을 이루고 공군대령까지 진급했지만 2002년 간기능부전으로 별세했다. 당시 나이 48세.
바닷가에서 주운 라면 봉지에 '맛을 보고 사라'는 문구가 있는 걸 보고 한국이 자유사회가 아닌가 짐작하게 됐다는 그의 고백이 관심을 끌기도 했는데, 사야 맛을 볼 수 있지 어떻게 맛을 보고 사냐는 객쩍은 입방아를 찧는 이들도 있었다. 이후 1996년 5월 23일 북한군 이철수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해서 북한의 전쟁 준비 상황을 전해 주목 받았지만, 이웅평씨 때와 같은 열광적 환영에는 못 미쳤다.
가장 '귀순용사답지 않은' 귀순 동기를 밝힌 이는 1967년 휴전선을 넘은 당시 22세의 북한군 리영광씨다. 그가 밝힌 동기는 '세계 일주를 하고 싶어서!' 중학교 때부터 자유분방한 성격 탓에 '남조선 대학생'이란 별명을 얻은 그다. 뱃사람 되겠다고 가출하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세계 일주한다며 압록강을 건너다 실패한 그다. 그가 쓴 책 '개마고원 옹고집'의 먼지를 오랜만에 털어내 본다.
대다수 '보통 국민'에게 귀순용사는 체제 우월성을 재확인하며 반공 의지를 다지는 계기였고, 정권에는 국민에게 체제 안정의 필요성을 인식시킬 수 있는 호재였다. '의사, 변호사, 다음으로 귀순용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크게 우대 받았던 그때 그 시절 귀순용사들과 최근의 탈북자들을 비교하면 실로 격세지감이다. 탈북자와 그 가족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크로싱'에 나오는 다음 대사는 그때 그 시절 귀순용사들도 평생 가슴에 품고 있는 말이 아니었을지. 새삼 고(故) 이웅평씨의 명복을 빈다. "죽으면 아빠 엄마 다시 만나서 재밌게 살 수 있는 겁네까? 진짜 다시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 겁네까?"
글 : 김동식·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 일러스트레이션 : 박광수
출처 : 조선일보 2008.07.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