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각묵스님과 이글에 대한 댓글로 한동안 대화를 이어나간적이 있습니다.
결국은 12연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육입의 해석이 달랐다는 것을 확인했고 삼세양중 인과론을 뒷받침하는 경전들을 보면서 삼세양중인과론으로 12연기를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육입과 육근은 같은 것이지만 용도,사용하는 의도가 다르다는 내용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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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드리야(근, 기능)와 아야따나(처, 장소) 와 다뚜(계, 요소) 란 무엇인가?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
“ 안의비설신의의 여섯 가지는 어떤 문맥에서는 인드리야(근, 기능)라는 술어로 나타나고 어떤 문맥에서는 아야따나(처, 장소)라는 술어로도 나타나고 어떤 문맥에서는 다뚜(계, 요소)라는 술어로도 나타납니다. 인드리야와 아야따나와 다뚜는 다른 문맥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마노)의 여섯 가지에만 국한하여 보면 이 셋이 지칭하는 것은 꼭 같습니다.
[indriya]
인드리야를 중국에서는 근으로 옮겼고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기능이라 옮깁니다. 눈에는 형상을 보는 눈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기능과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보는 기능은 귀 코 혀 몸 등에는 절대로 없는 눈만의 고유한 기능이고 형상은 반드시 이러한 눈을 통해서만 인지가 됩니다. 그래서 눈은 형상이라는 대상을 지배하는 능력을 가진 지배자(인드라)입니다. 지배자라는 의미를 살려서 인드리야(지배하는 것, 고유한 능력, 고유한 기능)라는 술어를 사용한다고 주석서들은 한결같이 설명합니다.
[ayatana]
그리고 눈이 보는 작용을 할 때 보는 작용과 관계된 마음과 마음부수들은 눈을 장소로 하여 일어납니다. 그래서 눈은 장소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눈은 마음(알음알이, 식)과 마음부수들이 대상을 즉 형상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눈을 눈의 장소(짝쿠 아야따나)라 부릅니다.
[datu]
그리고 눈은 형상을 본다는 고유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을 강조할 때는 눈의 요소(짝쿠 다뚜)라고 부릅니다.
[dvara]
그리고 눈은 마음과 마음부수들이 대상을 만나는 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역할을 하는 눈을 눈의 문(짝쿠 드와라)이라고 합니다.
즉 안근(인드리야)은 안처(아야따나)이고 동시에 안계(다뚜)가 되고 ... 의근은 의처이고 의계입니다. 그러면 왜 같은 것을 두고 다른 명칭을 사용하느냐? 그 작용이나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홍길동이라는 사람을 상황이나 역할이나 작용 등에 따라서 아버지라고도 부르고 홍과장이라고도 부르고 남편이라고도 부르고 학부형이라고도 부르고 한국사람이라고도 부르는 등과 같습니다. 이처럼 같은 것을 그 역할이나 작용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는 것이지 눈의 기능이 따로 있고 눈의 장소가 따로 있고 눈의 요소가 따로 있고 눈의 문이 따로 있고 눈의 감성이 따로 있는 것이 절대로 결코 아닙니다.”
"저도 14-5년전에 빠알리를 처음 배워 우쭐 댈 때 이런 소리를 많이 하고 다닌 장본인입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금강경 역해에서도 아야따나를 인드리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핵심이라고 떠들었는데 참 부끄럽습니다. 지금 생각하는 참 진땀이 납니다. 아직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버젓이 책으로나 말로나 글로 하고 다니는 분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야합니다."
* 이중표교수님의 주장을 반박하는 다른 증거는 비단금님이 지적한 것처럼 아래와 같이 2개의 한문경전에서 육입이 [허망한마음]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이 되었습니다.
[中阿含經卷第五十八 法樂比丘尼經]
有幾因幾緣從無想定起。尊者大拘絺羅 答曰。有三因三緣從無想定起。云何爲三。一者念一切想。二者不念無想界。 三者因此身因六處緣命根。是謂三因三緣。從無想定起。
[中阿含晡利多品 大拘絺羅經 ]
比丘從滅盡定起。作如是念。我從滅盡定起耶。法樂比丘尼答曰。比丘從滅盡定起時。不作是念。我從滅盡定起。然因此身及六處緣命根。是故從定起
댓글이 늦엇네요. 기숙사에서도 컴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없는 처지입니다. 인도니까요^.^ 먼저 [눈의 기능은 안식을 생하게 하는데 인으로 작용하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다르게 표현합니다. [안식을 생하게 하는데 보는 눈이 인으로 작용한다.]입니다. 역시 눈은 보는 것이지요. 짝구를 시각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제 상식입니다. 예전에 부진근 ,승의근 으로 나누어 보기도 햇는데요. 눈을 시각으로 번역하는 것에서 이미 모든게 정리되고 잇습니다.
그리고, 중론 관육정품을 님덕에 다시 살펴볼 기회를 가?습니다.님은 [ 실로 그 眼은 그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네.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들을 보겠는가?]라는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산스크리트본에 의하면 眼(짝구)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보는 작용,성품(다르샤남)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끝 게송에서 이 여섯가지 성품들은 모두 부정됩니다. 이말은 불교에서는 [짝구인드리야는 보는 기능인데 이 보는 기능(안근)과 대상에, 빛,집중등의 조건이 모이면 안식이 발생한다]라고 말하는데 중론에서는 보는 성품(다르샤남)이란 홀로 존재하는 보는 성품, 보는놈, 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것들은 외도의 사상이지요. 이번기회에 느낀것은 중론을 한문이나 한글로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거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후박나무님 덕에 의문점 하나가 풀렸습니다. 제가 가진 중론은 박인성교수님의 중론으로 산스크리트본 2본, 티베트본 2본, 한역본 3본을 교정해서 싣고 있는 것인데요. 산스크리트본에서는 안근이 봄으로 해석되어 있고, 한문본 3개중 하나에서만 見으로 되어있습니다. 위에 인용 부분도 [실로 그 봄은 그 자기자신....]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문본을 참조하여 봄을 眼으로 바꾸어 적은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불교는 연기이며 心입니다. .... 저는 마지막 게송은 육육법설을 말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보일것과 봄이 있지 않기에 식 등 넷(식,촉,수,애)이 있지 않네 어떻게 다시 취 등이 있겠는가?] 색경-안근-안식-촉-수-애
덕분에 根과 處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습니다. ......
[저는 마지막 게송은 육육법설을 말하는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볼때는 육육법이성립하지 못함을 말하고 있는것 같습니다.보는놈과,보는작용(성품)과 보는 대상이 부정되니 당연히 식-촉-수-애-취가생겨날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까지 님이 파악하신 根과 處에 대한 개념을 듣고 싶군요...()
먼저 중론 3장 마지막 게송에 대해 말씀드리면.... 중론에서는 이렇게 부정하면서 설명하는 스타일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1장의 4연법을 설명하는 스타일도 그러하지요. 보일것(경)과 봄(근)이 없으면 육육법이 성립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은 경과 근은 육육법의 조건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지요....
제가 이해한 근과 처에 대한 개념은 이러합니다. 根은 감각기관의 기능입니다. 안근은 눈의 기능입니다. 봄입니다. 處는 識이 일어나고, 멸하는 장소입니다. 안처는 눈(眼)으로 안식이 생멸하는 장소입니다.
중론 3장에서는 봄, 들음, 냄새맡음, 맛봄, 감촉, 의를 根이라 했습니다. 境을 그들의(육근들의) 작용영역이라 했습니다. 봄(근), 보일것(경)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볼때에는...... 안처(내입처)는 눈이고 색처(외입처)는 사과입니다. 그리고 안근의 작용영역(경)은 색입니다. 이렇게 근과처에 대해 이해가 훼갈린 것은 한문경전때문으로 생각되는 군요. 안근과 안처를 대부분 한역경전은 모두 眼으로 한역하였기 때문으로 문맥에 따라 안근 혹은 안처로 이해하여야 하겠군요......
사실... 의처에 대한 약간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인용한 잡아함경 제13권 322경(안내입처경)에서 [의를 내입처라 하는 것은 심, 의, 식은 색이 아니어서...]라고 하고 있는 점입니다. 유가사지론에서 [무엇을 의(意)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심(心) 의(意) 식(識)을 말한다.] 라고 같은 의미의 설명이 등장합니다. 잡아함경 제13권 322경에 해당되는 니까야가 있습니까? 있으면 빨리어는 어떻게 되어있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이교수님이 인용한 대구치라경은 중아함경으로 유부에서 전승된 경전이며, 구사론은 유부의 아비달마 로서 의근은 6경 모두를 활동 영역으로 하고 있다고 동일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유부와 초기유식과 차이가 없는 것은 이해되지만 잡아함경에서도 의처에서 심, 의, 식이 등장하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공부하시는데 빠쁘시더래도 수고 좀 부탁드립니다.
또 늦었습니다. 먼저 잡아함경 제13권 322경(안내입처경)에 해당하는 빨리 경전을 찾지 못했습니다.아야따나네 대해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4권 살라야따나 전체를 찾아보았는데 그와 상응하는 경전은 발겨할수 없었습니다. 다음에 쌍윳따 전체를 찾아보겠습니다. 중론에 대해서 ...저의 견해는 중론은 외도와 사견을 가진 부파불교를 깨부수는 작업이기에 4구, 4연,육근,4성제등등(잘못생각하는 불교교리)이 논파되는데 그것은
불교 교리를 깨는 것이아니라 잘못생각하고 있는(보는놈이 있다등등)관념을 부수는 것입니다.( 귀류논증에의한 파사현정)...그리고 끝에서는 맞는 불교교리는 깨는 것이 아니라 끌어 안습니다.(진제=속제).
[ 안근(인드리야)은 눈의 기능, 眼處(아야따나)는 識이 일어나는 장소] 라는 이해에 저도 동의 합니다. 의처도 다를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노(의처)는 오문전향과 의문전향 모두에 작용하기 때문에 [의근은 6경 모두를 활동 영역으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는것이고 [의를 내입처라 하는 색이 아닌 심, 의, 식이다.]라는 말도 별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이로써 인드리야와 아야따나에 대한 정리가 잘 된듯합니다.이곳에 토론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토론은 참좋은것인데 내용에 대한 치열한 토론은 사라지고 반대 의견을 펴는 상대방에 대한 반감이 더욱 강화되는 것 같아 보기가 안좋습니다.
그런데도 흔들림없이 대화에 임하는 비단금님의 자세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이중표 교수님의 문제는 육입만이 아니라 멸진정에 대한이해나 구차제정에 12연기,8정도를 대입해서 설명하는 것등에서도 많은 문제를 보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아함에 관한한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인데 ... 이것은 이교수님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학의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 열심히정진 하여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님께서 인용을 해주신 두경의 인용문제점, 경들의 이름이 뒤 바뀐 점, 또 자세히 근거를 설명해주신 분에게 오히려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심, 의, 식을 언급한 것은 부파불교의 6식설이나 유식의 8식설이나 출발점은 같으며, 유식에선 심과 의에 대해 자세히 이론을 세워 풀어 간 것이구나 하는 저의 견해를 밝히고 싶었던 것이고, 의처와 심의식의 [의] 도 빨리어에서는 다른 단어를 같은 한문 意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아함에서 인용한 경들에서 의근의 활동영역으로 6경을 말하지만 대부분의 아함부경전에서는 법경만을 말하고 있음도 부언하고 싶군요. 이어질 후박나무님과 이곳 카페회원님들과의 토론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