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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누가복음 19:45~48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마 21:12-17; 막 11:15-19; 요 2:13-22)
45 성전에 들어 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사 56:7렘 7:11)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위대한 비폭력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Jr 1929.1.15~ 1968.4.4)목사는 지독한 인종주의차별 환경 속에서 흑인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참된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받고자 발버둥 쳤던 사람입니다. 미국은 지금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흑인은 물론 억압받는 소수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의‘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그 꿈이 어쩌면 이제조금은 이루어진 셈입니다. 39살의 짧지만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명 연설가이자 설교가로 이름 높았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흑인들이 고통 받는 현장에서 분노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1963년, 미국의 정신적인 역사를 바꾸어 놓은 위대한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연설입니다.������우리는 지금 비록 역경에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의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시대의 아픔에 대한 분노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시대정신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인물이 된 그는, 그가 목사 된 이유를 이렇게 고백합니다.������나를 성직으로 인도한 것은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다만 인류를 위해 몸을 바쳐 봉사하겠다고 하는 내적인 충동이었습니다.������바로 그 안에는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의 안타까움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온전한 믿음의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 문입니다. ������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1964년. 35세. 역대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밖에 많은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 바쳤다는 것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1968년 2월 4일, 마틴 루터 킹은 고향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위와 같이 설교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바로 두 달 뒤 그는 암살당했습니다. 1968년 4월 9일 역시 에버니저 교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는 마틴 루터 킹의 아내 코레타의 뜻에 따라, 2월 4일의 설교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었습니다.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이 날을 국장일로 선포했습니다. 지난 번 미국에 갔을 때 애틀랜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저의 친구 목사의 초청으로 애틀란타에 갔다가 루터 킹 목사의 기념관과 무덤, 그리고 에버니저 교회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암살 장면과 설교내용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이 설교는‘드럼메이저(Drum Major) 설교’또는‘나는 정의를 위한 드럼메이저입니다(I Am a Drum Major for Justice)’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드럼메이저라는 말은 본래 행진 악대나 고적대의 맨 앞에 나서 이끄는 사람을 뜻합니다. 마틴 루터 킹은‘드럼메이저 직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직분, 소명을 뜻합니다. 2월 4일의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만일 여러분이 제가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고 싶다면, 정의에 헌신한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평화에 헌신한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헌신했던 삶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아버지는 목사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Sr) 어머니는 알버타 윌리엄스 킹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본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으나, 1934년 유럽 여행에서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틴 루터 킹 ‘시니어’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되었다. 그의 ‘드럼메이저 설교’를 좀 더 들어보겠습니다.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인정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이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이야말로 위대함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 모든 사람은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섬길 수 있으니까요. 섬기는 데는 대학 학위가 필요 없습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몰라도 섬길 수 있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은혜로 충만한 마음, 사랑으로 움직이는 영혼입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는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증오에 바탕을 둔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보다 높은 영적 차원에 바탕을 둔 비폭력 저항을 강조했습니다. 그는“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를 향한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마십시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다시, 우리의 힘, 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에 영향을 미친 것은 또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습니다.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의‘영혼의 힘’에 바탕을 두어, 고난을 끈기 있게 견뎌내며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대중적 저항 운동의 모델이 바로 간디였던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 국가의 조치나 법령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비폭력의 철학이 아니었다면 미국 남부의 여러 거리에 피의 물결이 출렁거렸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1959년 인도를 방문하면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 노선에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인도에 머물면서 나는 비폭력 저항의 방법이야말로, 정의와 존엄을 위해 투쟁하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주의 도덕적 질서 안에 깃든 보편적 원리를, 일생을 통해 온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그 원리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분명하고 불가피한 것입니다.”
미국에는 두 가지의 얼굴이 있습니다.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다양한 인종과 집단들이 모여‘미국과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창조해내는 용광로(melting pot)와 같은 측면이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인종 및 사회 집단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갈등하며 결국 유색인종이나 소수 집단을 억압하는 도가니(crucible)와 같은 것입니다. 이 도가니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만인 평등의 기독교적 가치는 흑인 출입을 금하는 교회 앞에서 무색해졌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for whites only(백인만 출입할 수 있음)’나 ‘no blacks and dogs(흑인과 개는 사절)’이와 같은 문구가 공공장소에 흔했던 미국이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경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백화점 재봉사 로사 파크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1900년부터 몽고메리 시에서는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을 분리시키는 조례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몽고메리시의 버스기사들은 백인 전용 좌석이 꽉 차면 관행적으로 흑인 승객들에게 좌석에서 일어나도록 요구해왔습니다. 당시 운전기사는 백인 좌석이 가득차 두세 명의 백인 남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로사 파크를 포함한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사 파크는 인종 차별법인 짐 크로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흑인 지도자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이후 일 년 넘게‘버스 안타기’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흑인끼리 차를 태워주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말을 타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경찰은 불법승차, 불법호객, 불량배 단속 등을 핑계로 탄압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에 대한 살해 위협이 이어졌고 자택이 폭파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1956년 11월 13일, 연방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는 선고를 내렸습니다.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 잭슨의 말대로 로사 파크는“우리가 모두 일어서기 위해 그녀는 앉아야만 했던 것”이고, 마틴 루터 킹은“우리 모두가 일어설 수 있도록” 앞장서 투쟁했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968년 3월 29일 마틴 루터 킹은 흑인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습니다. 궂은 날씨 탓에 일을 하지 못하고 귀가한 흑인 근로자들은 2시간치 임금을 받은 반면, 함께 귀가한 백인 근로자들은 하루치 임금을 받았던 것. 마틴 루터 킹이 멤피스로 타고 가는 항공편에 대한 폭파 위협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기도 했습니다. 4월 3일 마틴 루터 킹은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내가 멤피스에 오려 했을 때, 사람들이 그 위협에 관해, 아니 지나간 위협에 관해 말하더군요. 마음이 병든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려 할까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산정(山頂)에 올라봤으니 말입니다. 난 개의치 않습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래 살고 싶지만 인명은 재천이겠지요. 이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 분은 제가 산정에 오르는 걸 허락했습니다. 그곳에서 굽어보았지요. 약속의 땅을 보았지요.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여러분께 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리라는 걸 말입니다. 오늘밤 나는 행복합니다.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눈은 주님께서 오시는 영광을 보았으니까요.”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 투숙한 마틴 루터 킹은 4월 4일 오후 6시1분,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를 당했습니다. 총탄은 그의 오른쪽 뺨을 뚫고 들어가 턱을 지나 척수를 망가뜨리고 어깨에 박혔습니다. 범인으로 체포된 인물은 제임스 얼 레이. 그러나 그가 범행 자백을 번복하면서 마틴 루터 킹 암살에 관한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됐고 논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영혼이 저격당하기 전 발코니에서 한 마지막 말은(현장에 있던 제시 잭슨의 증언) 이러했습니다.“이봐 벤! 오늘 밤‘주여 이 손을 잡아주소서’를 꼭 연주해주게나. 정말 멋지게 말이야.” 그날 밤 행사에서 연주하게 되어 있던 벤 브랜치에게 건네는 말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응급 처지를 받았으나 7시 5분 공식 사망 선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나이 39세. 검시(檢屍) 결과 마틴 루터 킹의 심장은 60대 나이 상태였다고 합니다. 불꽃같은 삶이 그의 심장을 너무도 빨리 태워버렸기 때문이었을까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은 미국의 연방 기념일이자 공휴일, 바로‘마틴 루터 킹의 날’입니다. 2009년의‘마틴 루터 킹의 날’은 1월 20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취임 하루 전이었습니다. 이 날 오바마는 자원봉사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몽상가가 아니라 실천가이자 행동가였던 인물, 낮은 곳에서 변화를 위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정의와 평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오늘 수백, 수천, 아니 수백만의 우리 미국인들이 바로 그 인물, 킹 목사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심장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수많은 농촌 미 자립교회가 후원금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립하는 그날이 오는 것입니다. 농촌교회인 우리 상내백교회가 부흥하여 구름 떼처럼 벌 떼처럼 주의 백성들이 원근각지에서 몰려는 것입니다. 농촌교회도 부흥할 수 있다는 꿈을 갖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은‘자신이 속한 시대를 향한 항쟁에, 스스로를 내몰았다’고 할 수 있으며,‘미국 전체의 권력 체계와 가치 질서를 송두리째 재편한다는 자신의 최후 목표를 향해 고결하고 늠름한 사회운동의 공격수 노릇을 자처하고 그 역할에 헌신한’인물이었다면 저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세계적 대형교회가 한국에 운집해 있다는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나라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가난의 문제, 미 자립의 농촌교회들이 하루 속히 자립하여 건강한 교회가 되어서 문화명령과 선교명령을 함께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 오늘날 방향을 잃어버린 체 표류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농촌교회 또한 어느 도시교회 못잖게 아름답게 성장하고 부흥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이 감당치 못할 일을 능히 감당하는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일에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갖고 긍지를 갖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의 슬렘가에서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창립되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과 가까이 다가서기를 원했습니다. 그 시대에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목격하면서 기독교 운동이란 바로 이를 위한 투쟁적인 운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헌신적으로 자기의 삶을 드리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여성들이 울고 있는 한 나는 싸울 것이다. 아이들이 굶주리고 있는 한 나는 싸울 것이다. 사람들이 감옥에 가는 한 나는 싸울 것이다. 술 취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한명의 가난한 소녀가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한, 어둠 속의 영혼이 한명이라도 하나님의 빛없이 남아있는 한, 나는 싸울 것이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싸울 것이다.������그는 시대의 아픔과 고통을 자기의 아픔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불같은 사랑의 분노가 마음속에 일어나면서 평생을 주님을 위해 기도드렸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마음속의 분노가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듭니다. 그는 평생 동안 성령 없는 기독교를 거부했고, 살아있는 성령의 역사를 제도로 바꾸는 사람들에 의해 교회의 비극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자와 법과 교리를 따지는 사람들의 횡포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교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왜 기독교를 조롱하고 폄하하며 혐오하기까지 할까요? 사람들은 예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고, 예수님은 믿고 싶은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 안에 예수님이 없다는 비난입니다. 이런 소리를 듣고 우리의 마음이 통분(痛憤)하고 가슴이 뜨거워 질 때 그 때부터 변화가 일어나고 나 자신부터 변화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분노란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된 분노는 나도 파괴하고 남도 파괴합니다. 성경에 분노하는 인물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악한 분노 때문에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째 아들이었던 가인이 분노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동생 아벨을 향해서 분노하여 인류역사상 첫 번째의 살인이라는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예언자였던 요나도 분노합니다. 니느웨 성을 어떻게든 망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성 백성을 다 망하게 하옵소서.������ 남이 무너지고 멸망하는 것을 기대하는 분노였습니다. 유대 분봉왕이었던 헤롯이 분노하게 되었을 때 그는 죄 없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을 다 살해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분노할 때 늘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가 내는 분노가 인간적인 욕심과 인간적으로 열 받쳐서 하는 분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인지를 구별해야 됩니다.//성경에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분노는 인간의 악한 분노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분노, 사랑의 분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서는 그 자체는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세우시고 사랑하시기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지만 죄인을 사랑하시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고치며 치유하고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서 분노하십니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가 못된 자식에게 채찍을 들어 때리면서까지 가슴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분노하십니다.
바로 이런 분노를 마음속으로부터 갖고 있으면서 이 땅위에서 분노하셨던 분이 있습니다. 본문 속에 나타나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거룩한 분노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사람들을 향해 채찍을 드셨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를 향한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우리 자신의 분노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기에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지게 됩니다. 우리는 내 맘에 들지 않고 싫으면 분노합니다. 내 맘을 거스르면 열이 받쳐서 분노합니다. 내 가치관과 삶의 태도와 다를 때, 내가 업신여김을 받을 때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터뜨립니다. 우리가 쉽게 화를 내는 것을 거룩한 분노나 정당한 분노라고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지 않고 분노하는 것, 기다림 없이 분노하는 것, 미워하면서 분노하는 것, 적대감을 갖고 분노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성질를 부린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변화를 기대하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랑하며 긍휼을 베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당시 종교적 지도자들은 외향만 괜찮았습니다. 예수님은 실망하셨고, 경건한 척하고 속에는 불의가 가득 찬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연약한 사람의 인격을 짓밟는 것을 보시면서 분개하셨습니다. 돈과 권력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다 무너뜨리고 싶으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척하고 가난한 순례자들의 돈을 착취하는 행위를 그대로 놓아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분노였습니다. 이 세상을 생명의 역사로 바르게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분노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영적인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소유물처럼 사유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 욕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예수님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신본주의의 팻말을 붙이긴 했지만 실상은 인간중심적인 욕심대로 하는 인본주의적 사고를 예수님은 꿰뚫어 보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둘째,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 혼신을 다해서 나아가고 있지만 정작 본질적인 것을 잊은 사람들,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잊은 사람들,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주변적인 것들에 대해서 열정을 쏟아 붓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탄식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모든 일에 율법을 들먹이면서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을 속박하는 종교성을 허락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교가 자유와 평안을 주지 않고 백성들을 억압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율법의 문자에 가두어 두고 하나님의 영적인, 창조적인 개방성을 폐쇄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을 향해서 비판하셨습니다. 넷째, 무엇보다 예수님은 타인은 율법에 의해서 비판하고 재판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보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분노하셨습니다. 자기 눈에 있는 들보, 기둥과 같은 큰 문제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가 있다고 비판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은 개혁의 대상이라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개혁의 대상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탄식하면서 분노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당시, 백성의 지도자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미워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거룩한 분노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와 우리들의 분노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움 때문에 분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높여 드리기 위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분에 못 이겨서 분노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분노는 결코 하나님의 의와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는 맘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뒤집어 씌워서 정죄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무언가 갖고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영적인 자리에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돈과 재물을 갖고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명예와 권력이 있을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분노는 연약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줍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분노할 때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변화하고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갖고 계신 분노는 자신의 생명을 건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 사실 때문에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분노는 과시적이지만 지속성이 없습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기준과 판단의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이벤트성으로 의분을 느낀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분노에는 인간적인 완악함이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분노할 때 예수님처럼 분노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성령의 도움을 받아 먼저 내 자신부터 분노의 대상인 것을 알고 거기서부터 치유하고 고쳐나가며 변화하는 역사를 얻어야 됩니다. 이 때 우리 스스로 확인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분노가 자신을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분노인가, 내 이익을 얻기 위한 분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분노인가를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분노는 반드시 인간의 교만을 자극합니다. 천상천하에 자기 밖에 없는 줄로 착각하게 합니다. 이러한 분노는 갈등을 야기 시키고 미움을 증폭시키며 서로의 편을 가르고 그것 때문에 싸우게 합니다.
분노할 때 예수님의 거룩한 사랑의 분노인가, 아니면 인간의 교만한 분노인가를 구별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미움으로 시작해서 미움으로 끝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런 분노는 악한분노입니다. 자기인격과 남의 인격을 파괴시키고, 자기 생명과 남의 생명도 무너뜨립니다. 이러한 시도는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노는 어떤 경우에도 도움이 안 되는 잘못된 것입니다. 둘째, 사랑의 명분으로 시작하나 미움으로 끝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속한 분노이기 때문에 멈춰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명분이 있고 의를 갖고 있어도 마지막이 미움으로 향해서 가면 더 이상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가 없기에 멈춰야 됩니다. 셋째, 미움으로 시작했으나 사랑으로 승화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은 축복받은 분노입니다. 인간적인 분노에서 시작했으나 예수님의 분노로 마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속할 수 있으나 겸손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기도하면서 해야 하는 분노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나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이룰 것입니다. 넷째,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분노가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분노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분노입니다. 사랑의 분노는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을 사랑하는 분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살리고 성숙하게 하며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드리는 분노입니다.
화를 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결심해도 순간순간 화를 낼 것입니다. 운전을 하다가도 누군가 나보다 앞서가면 화가 나고, 가정에서도 식구들이 내 말 한마디를 안 들었다고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화를 낼 때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화인가, 아니면 더 이상 지속하지 말아야 될 화인가를 스스로 확인해야 됩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 조항을 붙이면서 가톨릭을 비판하고, 대주교께 사본을 보내면서 이런 부탁의 편지를 썼습니다.������주교가 신도들 사이에서 복음을 침묵하게 하고 면죄부에 대해서만 시끄러운 소리를 허용한다면 그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일입니까. 간청합니다. 그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설교하라고 명령하십시오. 이제 더 이상 면죄부 설교하지 말고 복음을 설교하고 사랑의 의를 설교하십시오.������지금 한국 교회는 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습니까?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사라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겠습니까? ������너희가 나를 잊었구나! 너희가 나를 잃어버렸구나! 개혁의 소리가 요란한데 너 자신이 바로 개혁의 대상인 줄 알지 못하느냐?������우리들은 예수님을 뒤 쫒는다고 하면서 본질은 잃어버리고 주변에 현혹되어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늘 개혁이란 본질과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안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개혁의 대상인 것을 고백할 때 나로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개혁의 역사가 시작 될 것입니다. 목사로부터, 모든 성도님들이 이 마음을 갖고 주의 말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와 백성과 사회와 민족을 바꿔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바르게 개혁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두 번의 결단으로 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 몇 마디 깨달았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려는 끊임없는 결단과 노력이 없이는 진정한 개혁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게 힘든 과정이기에 그 과정을 이룰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말씀에 기준 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에 비춰 바꿔져야 할 모습들은 없습니까? 개혁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바꿔져야 합니다. 내가 개혁되고 바꿔지면 하나님은 정말 기뻐하십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 인간적인 분노가 되지 않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사랑의 분노, 거룩한 분노를 먼저 나 자신 경험하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을 갖고 나부터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직장, 그리고 교회와 민족의 역사가 변화되는 축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