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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토의 최남단 마라도 이야기
그림 출처: 서울신문
제주도란 건널 '제(濟)', 고을 '주(州)'이니 바다를 건너 있는 고을이란 말이다. 항해가 어려웠던 시절 바다 건너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런 이름이 생겼겠는가.
그 제주도를 일반적으로 말하여 한자로 쓴다면 '濟州島'일까, '濟州道'일까?
물론 섬으로 말한다면 '濟州島'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쓸 때는 '濟州道'가 맞다. '島'보다 '道'가 상위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제주도에는 유인도(有人島)가 다섯이 있다.
추자도, 우도, 가파도, 비양도, 마라도다.
나는 이번 여행길에 한라산 곳곳을 누비리라 꿈꾸며 왔다가 제주에 막상 와서 보니 '이 나이에 언제 다시 제주도에 오랴 '하는 마음에 제주공항에 도착하는 즉시 터미널에 들려 모슬포(摹瑟浦)를 향하였다. 마라도를 가고 싶어서였다.
모슬포 가는 길에는 벚꽃이 한창이었고, 이어서 유채꽃이 가로수와 함께 남국의 정서를 물씬 자아내고 있었다.
모슬포는 제주도 서남단에 있는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항구다.
이 항구는 암석해안과 암초로 둘러싸여 천연의 방파제가 있는 곳으로 마라도 정기여객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마라도는 모슬포 항에서 11km/25분 거리에 있는 한국최남단의 섬이다.
섬이 보이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니 섬 전체가 산이나 언덕 하나도 없는 하나의 골프장 같다. 거대한 항공모함과도 같다.
크기가 여의도(7.0㎞²)의 1/23 정도로 작은 0.3㎞²요, 섬 둘레가 4.2km, 동서가 0.5km, 남북이 1.25km밖에 안 되는 고구마 모양의 조그만 섬이다.
여기서 관광수입과 어업으로 생활하는 주민 70여명이 살아가고 있다.
마라도는 원래 무인도였는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0년 전인 1883년(고종 20) 부터라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대정골에 김씨라는 이가 투전을 하다가 가산을 탕진하여 생활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그의 친척들이 제주 목사에게 이들이 마라도 섬을 개척하며 살게 인가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가 그 허가를 얻어 김(金)· 나(羅)· 한(韓)씨 등 영세농어민 4~5세대가 정착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마라도는 금섬(禁섬)으로 어부들이 접근을 꺼리던 섬이었다. 섬 전체가 울창한 원시림이어서 제주 주민들이 '남방애'라는 제주 고유의 나무절구를 만들기 위해서 아름드리나무를 구하러 찾던 섬이었다. 그러던 곳을 경작지를 마련하고자 숲을 태워버리는 바람에 오늘날과 같이 나무가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숲을 태우는 동기를 다르게 말하는 이야기도 있다.
고향을 떠나 이 섬에 이주해 온 사람 중에 퉁소를 아주 잘 부는 사람이 있었다. 휘영청 달 밝은 달밤에 퉁소를 불고 있으면 그 소리에 수많은 뱀들이 몰려 왔다고 한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숲에 불을 질렀더니 나무는 석 달 열흘이 지나야 불길이 멈추었다. 이때에 놀란 뱀들이 꼬리를 서로 물고 뭍으로 건너가 버렸다. 그래서 마라도에는 뱀과 개구리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마라도는 인공림을 포함해서도 사람 키 이상 큰 나무가 없는 섬이 되고 말았다.
마라도에 있는 선착장 넷 중 우리는 자리덕선착장에서 하선한다.
'자리덕'이란 이름은 이 선착장 일대가 사시사철 자리돔 낚시의 포인트이기 때문에 생긴 말이라 한다.
하선할 때 유념할 것은 선착장을 기억하고 꼭 그 자리로 되돌아 와야 하는 것이다. 마라도 행 선박으로는 정기여객선이 있지만 유람선도 있어 승선 위치가 서로 다르고 ,가는 곳이 서로 다른데다가 정기여객선도 왕복표를 끊었기 때문이다.
그 선착장 좌측에 대문바위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개의 입을 벌리고 있다.
억겁의 세월동안 검은 현무암 바위가 파도로 깎기우고 뚫려 단애가 된 해식 동굴이었다.
그 해안선과 그 주변경관이 아름다워 2000년 7월 천연기념물 제423호인 <마라도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우리를 제일 먼저 맞는 것은 선착장에서 층계를 올라서 본 골프장에서 보던 12인승의 전동카트였다.
반가와 마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전동카트를 타고 가서 자기네 자장면을 먹으라는 것이다.
이런 전동차가 이 섬에 34대나 된다. 나는 이를 타고 원조 자장면 집이라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곳은 차로 5분도 체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그 내부에는 이곳에서 해물자장면을 먹고 남기고 간 사람들의 싸인으로 벽과 온 천장을 꾸미고 있었는데, 제주 소주를 4천원에 팔고 있었다.
종업원에게 왜 마라도 해물자장이 유명한가를 물었더니 청정해역의 해물 때문이라고 하지만 TV CF의 어느 핸드폰 광고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장면이 방영된 후 유명해 진 것 같다는 것이 정설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섬 어디나 핸드폰 하나로 배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렇다.
전동차는 2시간에 2만원을 받고 대여도 하여 주는 모양이다. 어느 횟집에서는 3만원만 주고 회를 시키면 무료로 대여하여 주어서 회 준비하는 동안에 섬 일주를 10분 하고 와서 회를 먹는다고도 한다. 자전거 대여소도 있었다.
해물자장을 먹은 후 나는 아까 내린 선착장으로 다시 내려갔다. 마라도 관광을 처음부터 하고 싶어서였다.
마라도는 관광은 중앙에 남북으로 바다 돌을 깎아 만든 신작로를 중심으로 하여 해안선 도로를 따라 다니는 것이다. 천천히 보이는 곳마다 사진을 찍으며 다녔더니 2시가 30분 정도 소요 되었다.
*.마라도의 절과 성당과 기독교 교회
주민등록상으로 26가구에 70여 명이 산다는 이 작은 섬에는 교회와 성당과 절이 있다.
이곳이 국토의 최남단으로 전국의 수없는 관광객이 모여 드는 곳이라서 포교를 위한 차원에서 다투어 지은 것 같았다.
그 중에서 선착장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관음성지 기원정사'였다.
이 절에는 제주를 마주 보고 있는 해수관음보살 입상이 그중 멋있는데 일붕 스님의 동상도 있다.
내가 아는 일붕(一鵬) 서경보스님은 미국 템플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1백26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저서, 최다 통일기원비를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기승(奇僧)이다. 마라도 통일기원비도 그 중에 하나였다.
마라도에 절을 세우게 된 것은 서귀포에서 1914년 출생하고 19세에 남제주군 산방굴사에서 강혜월스님을 은사로 불교계에 입문한 때문인 것 같다.
*. 할망당(애기업개당) 이야기
자리덕선착장과 살래덕선착장 사이 해안가에 '처녀당'(애기업개당)이란 이름을 가진 할망당이 있다. 할망당에는 애기업개에 대한 슬픈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다.
-마라도가 무인도였던 옛날에 있었던 일이었다.
모슬포에서 잠수(潛水)를 하고 살던 이씨 부인이 물을 길러 바닷가에 갔다가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숲 속에서 태어난 지 3개월도 안 되는 여자 아이를 발견하였다. 이 아이의 부모를 찾던 이씨 부인은 부모를 찾지 못하자 수양딸로 길렀다.
그 이씨 부인에게도 태기가 있어 첫아들을 낳으니 그 수양딸이 그 아들의 애기업개가 되어 주었다.
당시 마라도는 섬 주변에 각종 어류와 해산물이 풍부했지만 금단의 섬이어서 그것들을 잡으면 바다 신이 노해서 거친 바람과 흉작으로 화를 입는다고 하는 금기의 섬이었다. 그래도 매년 봄이 되면 망종(6눵 5일 경)으로부터 보름동안 모슬포 잠녀(潛女)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라도 '섬비물' 해안에 배를 대고 물질을 시작하였다. 그 무렵 유난히 날씨도 좋고 소라, 전복 등도 너무 많이 잡히는 바람에 이래를 지내는 동안 가지고간 양식이 다 떨어져서 그만 돌아가야만 했다. 그런데 떠나려면 잔잔하던 바다가 험악하게 거칠어지고, 배에서 내리면 잔잔해 지는 것이었다.
"이거 틀림없이 바다 신이 노한 거라. 이제 살앙 돌아가긴 틀린 거 닮수다."
그때 나이 많은 잠수 선주(船主)가 지난 밤이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젯밤 꿈에 신선이 나타나 이르기를 애기업개를 두고 가야지 아니면 모두 물에 빠져 죽을 거랜 합디다. 어멍도 아방도 없는 아이니 두고 가야쿠다."
이씨 부인역시 똑 같은 꿈을 꾸었다. 일행의 모진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아기업개를 두고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고, 얘야. 아기 기저귀를 그냥 두고 왔구나. 저 바위 위에 하얀 걸렁이 보이지? 어른 가서 걷어 오너라."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 배는 도망치듯 마라도를 빠져나가 모슬포를 향하였다. 아기업개는 울며불며 엄마를 불러댔지만 바다는 신기하게도 잔잔하기만 하였다.
3년 후 가 보았더니 모슬포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굶주림에 지쳐 죽은 애기업개의 뼈가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정성껏 수습하여 그 자리에 곱게 묻어주고 애기업개를 위해 그 자리에 당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매달 7일과 17일, 27일마다 정성껏 제를 지내고 해상 안전을 기원하니 그 후로 바다에서 사람들이 죽는 일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 가파초등학교 마라도 분교
한 학급이 80명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우리 성인들의 눈에는 시골 학교에 그 큰 건물에 비하여 너무나 적은 학생 수에 신기해 하기만 하는 법이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작은 학교인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 앞에 섰다. 수업에 지장 될 것 같아서 교내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 학교는 전교생이 1명이던 것이 금년에 2명의 신입생이 늘어 선생님 1명에 전교생 총 3명(3학년 1명, 1학년 2명)인 학교다.
마라도에 와서 마라도를 보고 가야하듯이 '제주 가파도마라도분교'이니 제주를 보고 갈 것이다.
교문을 가로지른 3개의 정랑에 눈길이 가는 것이 그래서다.
제주 옛 어르신들의 말에 의하면 사진처럼 정랑이 3개가 걸쳐 있으면 주인 식구가 다 없다는 뜻이고, 2개의 경우는 아이들이 근처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요, 하나는 주인이 이웃에 갔기 때문에 마소 출입을 막기 위함이란다. 그건 원칙일 뿐이고 지금은 출입을 금하는 표시로만 쓰일 뿐이다. 이 마라분교 교문의 정랑 3은 오히려 출입급지를 위한 것이어서 수업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둘러보는 일은 삼가고 지나간다.
*. 일출과 석양을 볼 수 있는 마라도
정자(亭子)란 산수풍경이 좋은 곳에 사방을 둘러 볼 수 있게 벽 없이 네 기둥만으로 지은 집이다. 그러나 마라도 정자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정자를 짓되 일출과 일몰의 놀을 보기 좋은 곳에 지은 것이다. 그 정자는 산이 없는 마라도에서나 바다 위 배 위에서 멀리서 보면 가장 눈에 띄는 멋진 풍경 중에 하나다.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년 12월 31일과 1월 1일이 일출 행사로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지는 해와 뜨는 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마라도의 식수
마라도가 120여년 이전에 무인도였던 것은 무엇보다 식수(食水) 난 때문이었던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의 하나가 빗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마라도를 거닐다 보면 웅덩이가 자주 눈에 띠는데 이는 주민들이 허드레 물을 쓰기 위해서 빗물을 받아 놓기 위한 것이다.
마라도 등대 가는 길에 있는 담수화시설비를 보니 이제는 전기의 힘으로 담수화 하여 식수를 해결하는 모양이다.
그 부근에 있는 원형시설의 태양발전 시설은 30kw급 태양광 발전소로 해수의 담수화는 물론 27가구에 전력을 공급하여 전등은 물론 TV 등과 같은 문명시설을 즐기고 있었다.
*.마라도 향토표지(등대)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
1903년에 건립된 인천 팔미도 등대다. 그러나 이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마라도 등대다.
마라도 등대는 마라도에서 제일 높은 지대인 39m에 설치된 마라도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다.
1915년에 무인등대로 설치되었다가 1955년부터 유인 등대로 바뀐 것인데 이 등대의 불빛은 한국에서 제일 밝다는 등대로 38km 떨어진 해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7.5㎾급 풍력발전기 2기가 빙글빙글 돌고 있고 그 아래에는 태양열 발전소가 설치되어 있어 발전하는 우리나라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하였다.
그 관리소 앞에는 각국의 유명 등대의 견본들이 설치되어 있어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게다가 제주지방 해양수산청에서는 제 10회 '바다의 날'인 2005년 5월 30일에 타임캡슐을 묻어 오늘의 문명과 문화를 10년 뒤에 개봉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 10년이 너무 짧은 시기라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한민국 최남단비'를 철거하자는 애국심
마라도에 와서 꼭 사진 한 장만 찍어가라면 '대한민국 최남단'비일 것이다. 사람들이 Korea의 최남단 섬이라기에 우리나라 3,400여 개의 섬 중에 마라도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 최남단의 비보다 더 남쪽 아래에 호랑이가 웅크린 모양의 장군바위가 전설과 함께 서있다.
-하늘에 살고 있는 천신(天神)이 땅에 살고 있는 지신(地神)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오는 길목이 바로 장군 바위다. 주민들이 해신제(海神祭)를 지내는 곳이요, 누구라도 이 바위에 올라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신성시하는 바위다.
그 바위 옆에 조국순례기념비가 있고 거기에 민족의 염원을 이렇게 포효하고 있다.
-民族이 念願 하나로 모아/ 南北統一의 발판 삼고
凍土를 解凍시키는 그날/馬羅여! 砲哮하며 五大洋을 向하자
그런데 이 '대한민국최남단'을 없애 버리자는 사람들도 있다. 한 마디로 나라도에서 149km 지점에 암초지대지만 이어도가 있고 이어도에 한국의 해양과학기지까지 조성해 놓았다. 그런데 여기를 대한민국최남단이라 비석까지 세워 놓는다면 이는 이어도가 우리나라 영토가 아니라는 말이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다.
그렇지 않아도 독도처럼, 중국과 영토분쟁이 있는 지역이라서 이는 국익의 차원에서 심사숙고하여야 할 일이지만 나는 해양법의 문외한이라서 이 비가 오히려 이어도를 기억하는 게기가 되는 듯하여 기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바다에 빠지듯 낮게 낮게 선
지평도(地平島) 마라도는
하나의 비행접시(UFO)
한 척의 항공모함.
국토(國土)의
마침표(.)인가
물음표(?)인가
오메가(Ω)가 알파(α)에게
내 나라 사랑에 보고 싶어
봄이 제일 먼저 노크한다는
마라도에서 서서
나는 묻고 또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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