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두번째 미얀마 순례기 (3) (2024. 11. 7일-11. 15일)
미얀마 불교와 문화의 중심지
천년 고도 만달레이에 도착하여 삼사 순례를 하다
글 덕광 김형근(德光 金 詗 根) -본지 편집인
2024년 11월 10일 바간 왕조 수도였던 바간에서 20인승 밴으로 출발해서 6시간 만에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만달레이는 범어의 ‘만달라Mandala’ 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넓은 평원’을 의미한다. 1861년 콘바웅 왕조의 민돈 왕이 수도였던 아마라푸라를 버리고 만달레이 힐 아래에 수도를 정하므로써 미얀마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인구는 150~200만 정도. 만달레이는 양곤에서 북쪽으로 716km 떨어진 에라와디 연안의 동쪽에 있다. 콘바웅왕조(1752~1885)는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과 3차례 전쟁에서 패배한 후에 1886년 영국 식민지 시대가 되면서 영국이 조그만 항구 양곤을 중점적으로 개발하여 미얀마 중심도시로 부상하면서 미얀마 중심도시 역할을 양곤에게 빼앗겼다. 현재는 미얀마 문화의 도시로 역사와 불교의 중심이고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모습이다.
마하무니 파고다, 쉐난도 수도원, 쿠도도 파야 등 중요 사찰과 많은 스님, 불교 강원과 대학 등 불교 교육기관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State Pariyatti SASANA University Mandalay불교대학’과 수담마 부파의 마소에잉 짜웅 Masoyein Monastery 그리고 쉐진부파 스님 교육기관인 마하간다용 짜웅은 만달레이 인근의 아마라푸라에 있다.
이 만달레이에서 불교 경전 제5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이 결집은 민돈 왕의 주최로 1868년에서 1871년까지 약 3년 동안 만달레이에서 2,400명의 스님에 의해 5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패엽경이 필사해오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자나 탈자 등을 교정하기 위해 참여자의 합송(合誦)만도 무려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후 교정된 삼장을 총 729매의 대리석에 4년이나 걸려 새긴 것이다. 이러한 대리석 석경이 지난 2013년 6월 24일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 결집의 결과인 삼장은 ‘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책(largest book in the world)’으로 알려졌다. 제5차 결집은 2차 영국-버마 전쟁으로 해안가 요충지를 대거 상실하고 내륙 지역만 남았을 때 했던 결집으로 이로 인해 미얀마의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꼰바웅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약 50여 년에 가까운 오랜 식민 통치에 맞써 싸우는 데 도움을 준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오후 3시 무렵에 만다레이 왕궁에 보이는 중국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만달레이 이 왕궁은 1857년 초 아마라푸라에 있던 왕궁을 해체하여 주요 자재를 옮겨와서 공사를 시작하여 1859년 5월에 공사를 마쳤다. 당시 미얀마는 1852년 영국과 2차 전쟁에서 패하고, 1885년 민돈 왕의 아들 띠보 왕은 영국과 3차 전쟁에서 만달레이 왕궁은 점령당했고, 띠보 왕은 인도로 추방당하였다. 그곳에서 죽었고 그 시체는 아직도 인도에 묻혀있다.
그후 왕궁은 영국군 주지사 관저로 사용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군수 기지로 이용되다가 그들이 퇴각하면서 불을 지른 불로 잿더미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그 후에 복원한 것이다. 왕궁은 한변의 길이가 2킬로 미터로 정사각형 부지에 세워졌다. 외곽성의 높이가 8미터, 두께가 3미터에 이르는 매우 견고한 성. 외곽 성곽의 길이는 한 변이 2km에 이르며 성벽의 두께는 3m이었다. 각 벽면에는 세 개씩 출입문이 이었고, 성곽에는 황금빛 첨탑이 열여섯 개의 포루가 세워졌다. 성벽 밖에는 깊이 4.5m, 폭이 64m에 이르는 인공 수로를 만들었고, 그 위에 다섯 개의 다리를 놓았다.
태국의 치앙마이에 있는 해자가 유명하다. 여기는 궁이 아니라 시내를 해자가 감싸고 있다. 남아있는 길이가 6km 정도이고 걸으면 2시간 정도 걸린다. 만달레이 왕궁은 8km인데 치앙마이 해자보다 폭과 깊이가 훨씬 크고 깊다.
2층 식당에서 보이는 왕궁은 만달레이 시내와 분리된 곳에 서 있는 고풍스러우면서도 권위가 있어 보인다. 이날은 왕궁을 멀리서만 보았고, 13일 아침 일찍 택시로 이곳을 찾았다. 이른 아침에 해자를 따라서 운동하는 사람과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만달레이 언덕과 세 개의 사찰순례
식사를 마치자 마자 만달레이 고개로 갔다. 이 곳은 만달레이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작은 산이다. 해발 230미터. 정상까지 회랑이 연결되어 걸어서 954 계단으로 갈 수도 있는데 우리는 차로 올라갔다. 우리 일행이 막 도착했을 때 일몰이 시작되었다. 천년 고도에서 강 건너 산 밑으로 그윽하면서 부드러운 빛을 내보내면서 조금씩 모습을 감추는 아름다운 일몰을 보게 되어 너무나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 곳 정상에 수따웅삐예 사원Sutaungpyae Pagoda이 있다. 이 사찰은 황금과 보석, 색유리로 장식하여 매우 화려하였다. 바간 왕국을 세운 아노라타 왕이 1052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사원을 세우려던 우 칸디 스님이 이 지역 스님들과 주민들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때 만달레이 언덕 맞은 편 용킨 산에 있던 코브라 뱀이 스님을 도와주어서 무사히 사원 건립을 마칠 수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사찰을 빙 돌면서 만달레이 시내를 볼 수가 있었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곳에서 종을 쳐 봤다.
이 곳을 나와 우리 일행은 어둑어둑 해졌을때 산다무니 파고다와 쿠도도 파야를 방문하였다.
산다무니 파고다 Sandamuni Pagoda는 경전을 돌에 새긴 석장경이 모셔진 사원이다. 만들레이 힐 아래 쿠도도 파야 맞은 편에 있다. 민돈(Mindon) 왕이 만들레이 왕궁을 건설할 때 임시거처로 사용하던 장소로 그를 도와 왕궁을 건설하던 남동생 꺼나웅(Kanaung)왕자가 1866년 반란을 일으킨 밍군(Myingun)왕자에게 암살당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이 사원을 세웠다. 꺼나웅이 매우 총명해서 민돈 왕이 동생을 후계자로 삼자, 민돈 왕 두 아들이 꺼나웅과 각료들을 암살했다고 한다.
사찰안에 청동 불상이 모셔져 있고, 금속성 느낌의 법당을 장식하고 있는 은색 타일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어둑 컴컴한 시간 사찰 문 닫기 직전에 도착했기 때문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부처님께 삼배하고, 친절한 안내인이 손 전등을 이용해서 안내를 해주어 대리석에 새겨진 석경을 볼 수 있었다. 내 생애 처음보는 석경이었다.
쿠도도 파야 Kuthodaw Paya: (파야 paya, 성스러운 곳. 불교적 의미가 큰 사원) 일반인들이 예배를 드리거나 종교 행사 때 이용하는 사원이다. 쿠도도 파야는 불교적 의미가 큰 사원이다. 인도에 아소카 왕이 불교를 널리 전파했다면 미얀마에는 신심깊은 민돈 왕이 있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갈 수 있다면 민돈 왕을 친견하고 싶다.
이 사찰은 산다무니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걸어서 쿠도도로 갔다. 늦어서 문을 닫은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입장하려면 큰 스님의 허락이 필요했다.
미얀마 민돈왕은 서양의 종교로부터 불교를 보호, 육성하고 국민들의 문화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자 불교 진흥에 적극적으로 힘썼다. 그는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여러 사원들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에 혼재해있는 여러 불경들을 정리할 계획을 세웠다. 민돈왕은 제 4차 경전 결집 이래로 패엽에 기독되어 있어 여러 차례 필사하면서 생긴 오류를 시정하고자 하였다. 결집된 경전은 금과 잉크, 철필로 필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전승되어 내려오는 다양한 불경을 종합 정리하여 버마의 진본 불경으로 지정하였으며, 1860년10월 부터 1868년 3월까지 7년 6개월에 걸쳐 이 불경을 대리석 판에 새겨 꾸도도 사원에 보존하도록 하였다. 대리석 크기는 가로1m, 세로 1.2m 이며 총 숫자는 729개이다. 경전 결집 대리석 판과 보관용 탑을 만드는 당시 돈으로 2억 2천 6백만 짯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1871년 4월 15일, 불교 교리에 해박한 총 2,400명의 스님들을 모아 결집된 경전을 150일간 독송함으로써 5차 경전 결집 대회를 마무리 하였다.
경전의 도난을 우려하여 흰 대리석에 새겨 이곳 쿠도도 파야의 729개의 탑속에 모셨다. 그러므로 이 쿠도도 사원은 한국의 해인사 같은 곳이다. 중요한 사찰이어서 그런지 경비병이 있었다. 불상 앞에서 한 경비병은 독경을 하고, 두 명은 야식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흰색 탑 속에 안치된 경전은 탁본으로 뜰 경우 400페이지 분량의 책 38권이 나오는 방대한 양이라고 한다. 이 경전을 매일 8시간씩 읽을 경우 1년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201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불교경전 결집
부처님 가르침은 제자들의 구술로 전해졌다. 부처님께 직접 들은(여시아문) 내용을 중심으로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기록들이 모아져 경전(經典)이 됐다.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기억하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을 각각 발표하여, 대중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불설(佛說)로 확정됐다. 부처님 가르침이 훼손되지 않게 후대에 바르게 전하려는 뜻으로 결집이 진행됐다.
제1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 후 6개월 후 이뤄졌다. 인도 대륙 중심이었던 라자그리하의 칠엽굴(七葉屈)에 500명의 제자가 모여 경장과 율장을 편찬했다. ‘500 결집’이라고도 불리는 제1차 결집은 마하 가섭이 주도하고, 경장은 아난다가, 율장은 우팔리가 암송했는데 이후에 근본경전으로 중시됐다.
제2차 결집은 부처님 열반 후 110년이 지난 기원전 383년경에 이뤄졌다. 바이샬리 결집 또는 ‘700 결집’이라 부른다. 아난다의 제자 야사는 바이샬리의 브리족 출신 비구들이 계율에 위반되는 10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았다. 이에 700명의 비구가 바이샬리에 모여 10가지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이것이 제2차 결집이다. 이때는 주로 율(律)에 대한 토의가 진지하게 진행됐다. 불교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로 분열되었다.
제3차 결집은 인도 대륙 전체를 통치한 최초의 제왕 아쇼카왕 때 실시됐다. 아쇼카왕 즉위 17년째 되는 해, 마가다국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목갈리풋타 팃사의 주도로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결집을 했다. 이때 비로소 장로 비구들의 논서를 담은 논장(論藏)이 마련되어 경장, 율장, 논장으로 완성되었다.
제4차 결집은 카니슈카왕 시대에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을 편집한 것을 지칭한다. 부처님 열반 400년경 카슈미르 환림사에서 경.율.논 삼장에 정통한 500명의 비구가 결집을 했다. 이때 모인 주석서는 총 2백 권, 30만 송 660만 언에 달했다. 그 주석서의 이름이 '아비달마대비바사론'으로 7세기 현장에 의해 처음 한역되어 동아시아에 전해졌는데, 사실상 이 책 하나를 편집하기 위해 이루어진 결집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4차 결집을 전후해서 처음으로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기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