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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75>
백두산(白頭山)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 김수현과 전지현이 백두산을 창바이산(長白山)으로 표기한 중국 생수 광고 계약을 취소하면서 한·중간에 역사·문화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진 적이 있습니다. 김수현과 전지현은 중국 헝다 그룹이 출시한 생수 ‘헝다빙취안(恒大氷泉)’ 광고에 동반 출연했습니다. 하지만 생수병 겉면에 원산지가 ‘창바이산’으로 표기된 게 알려지자 이들은 손해를 감수하고 광고 계약을 취소했습니다. 국내 인터넷 등에서 “돈 때문에 백두산을 중국 땅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 시도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이용당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소속사는 “원산지 표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며 사과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중국에서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관영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백두산 표기를 둘러싼 한국 내 논란을 전하면서 ‘웃기는 일(鬧劇)’이라고 말했습니다. 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인민망도 “일부 한국 관광객은 창바이산에 놀러 와서도 ‘백두산은 한국 땅’이라는 불법 시위를 벌인다”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중국 네티즌의 반응은 더욱 노골적이었습니다. “창바이산이 한국 땅이면 서울은 미국 땅” “김수현을 보이콧하자‘ 등의 글이 웨이보(微博 · 중국판 트위터)에 올라왔습니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진하면서 중국의 민족주의 성향은 갈수록 강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중국 내 한류 열풍이 광고 계약 취소 사건의 여파로 빠르게 식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었습니다. 인민망은 ’창바이산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신성한 영토‘라고 적었습니다.
중국에서 창바이산이란 지명은 12세기 금(金)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창바이산은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기 약 1000년 전부터 불리던 지명인 셈입니다. 우리 역사 문화에도 장백산(창바이산)과 백두산이 같이 등장합니다. 논란이 된 생수의 원산지는 중국 쪽 백두산 지역입니다. 생수의 상표가 창바이산인 것도 아닙니다. 창바이산이란 원산지 표기를 찾으려면 생수병을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중국은 2002-2007년 고구려·발해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을 진행했지만 민간기업의 광고까지 손대지는 않았습니다.(참고자료: 조선일보 기사 · 안용현 특파원)
‘백두산이냐 창바이산이냐’는 한·중 대립은 복잡한 백두산 영유권에서 비롯됐습니다. 1712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천지(天池) 남동쪽 4km 지점에 세우면서, 천지를 포함한 백두산 북쪽은 청나라가 차지했습니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가 여진족의 발상지인 백두산에서 제사를 지내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의 남쪽 부분은 조선 영토로 확인받았습니다. 중국은 백두산을 12세기부터 창바이산으로 불러왔습니다. 을사조약 이후인 1909년 일본이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백두산정계비와 석을수(石乙水 · 두만강 지류)를 기준으로 국경을 정했습니다. 이 국경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하며 무효가 됐습니다.
북한은 1962년 중국과 국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백두산 남동부 영유권을 얻었습니다. 현재 백두산 전체의 75%는 중국 땅, 25%가 북한 땅입니다. 백두산 천지는 54.5%를 북한, 45.5%는 중국이 관할합니다. 구글 인터넷 지도는 창바이산과 백두산을 병기합니다. 역사가들은 고구려에서 태백산, 고려에서 백두산이라 부르다가 조선 세종 무렵부터 백두산·장백산을 혼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과 선조실록에는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조선일보 기사 · 양지호 기자)
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삼국유사>입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 등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太白山(태백산)'을 지금의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는 편인데, 기록에 따라 묘향산 설, 지금의 태백산 설 등이 있습니다. 단군신화, 부여, 고구려를 설명하면서 '태백산'을 무대로 언급합니다. 대체로 10세기 후반부터 백두산이라 불렀다고 추정하지만, 19세기 때까지도 태백산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했다 합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백두산 이외에도 장백산을 혼용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도 장백산이 백두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백두산에 관련된 신화는 한민족뿐만 아니라 만주족, 특히 청나라에서도 나타납니다. 만주족의 기원 신화의 중심지 또한 백두산이며 청나라 시절 백두산은 만주족의 영산으로서 매우 특별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산해경>의 기록에선 ‘불함산(不咸山)’으로,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221∼589)에는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등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현대에는 '창바이산(長白山)'이라고 통일되었는데, 이는 만주어로 '긴 흰 산', '큰 흰 산'이라는 뜻인 '골민 샹기얀 알린(Golmin Šanggiyan Alin)'을 번역 차용한 것으로, 요나라, 금나라 시기부터 쓴 이름입니다. 이러한 명칭은 9개월 가까이 눈이 쌓인 특색 있는 산정의 모습을 잘 반영한 것입니다. 즉 현대 중국이 사용하는 '장백산'이라는 표현은 한족(漢族)의 용어가 아닙니다. '長白山(장백산)', '白山(백산)'은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지칭한 이름들입니다. 10세기 무렵부터 중국에서 대부분 장백산, 백산이란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고, 같은 시기 고려에서도 장백산이란 명칭으로 많이 불렀고, 조선 시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지금의 백두산이란 명칭은 조선 말기에서나 빈도가 높아집니다.(참고 자료: 인터넷 ‘나무위키’)
고지도에 나타나는 백두산 천지의 이름도 ‘대택(大澤)’, ‘대지(大池)’, ‘천상근(天上近)’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천상근(天上近)’이라는 이름은 하늘 가까이 있다는 뜻으로, <관북지도> ‘갑산부’와 <전세보> ‘조선만주지도’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여지도>에서는 ‘대택’이라고 표기했고, 백두산이 마치 천상에 떠 있는 산처럼 묘사되고 있어, 천산(天山)으로 백두산을 생각하는 당시의 인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은 지도에 따라 여러 색깔의 백두산이 있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흰색입니다. 흰머리산의 이미지가 표현된 것입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백두산은 국토의 종산(宗山)이자 국가의 최고 명산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습니다. 1402년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백두산이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16세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에 와서야 백두산을 국토의 조종산으로 표시하고 백두대간이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최원석 · ‘옛 지도로 본 백두산의 역사’)
독립운동가 일우(一雨) 정윤(鄭潤), 1898-1931) 선생의 저서인 <史誌通俗攷)>란 책 이름은 역사를 세상에 널리 통하도록 연구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저자는 우리 역사가 시작한 이래 씌어진 중국과 한국의 온갖 역사서들과 풍속, 문화, 지리서 등 총 66종의 전문서들을 연구하여, 앞선 역사가들이 밝힌 바 없는 우리 민족의 나라 이름 33개, 임금 이름과 사람 이름 27개, 산 이름과 강 이름 26개의 어원(語源)과 역사, 문화, 풍속의 근거들을 처음으로 이 세상에 제시하였습니다.(<史誌通俗攷)> 해제 · 역주자 정재승) <사지통속고>에 의하면, 백두산, 장백산이란 이름이 있기 전엔 ‘백민(白民)’, ‘백산(白山)’. ‘불함(不咸)’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 ··· 山海經(산해경)에 이르되 ‘肅愼國(숙신국)이 백민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白民(백민)은 ‘배뫼’: 白山(백산)의 음전(音轉)이요, 또 <산해경>에 이르되, ‘대황의 한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불함(不咸)’이라 하니,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 하였으니, 불함산은 백두산이니라 ··· ”(<사지통속고> P79-80)
“하얀 것을 ‘희’다 하며, 두(頭)를 ’마리‘라 하나니, ’희마리뫼‘가 백두산이라. 아홉 종족이 ‘희마리뫼’를 중심으로 하고 흩어져 살았나니, ···· ”(<사지통속고> P144) “희마리뫼(백두산)를 ’한울뫼(天山)‘라고 하고, 산 위의 연못을 ’한울못’(天池)이라 하나니, ’한울(天)‘의 ’울‘과 ’울에뢰‘(雷)의 ’울‘을 서로 교차하여 ’천지(天池)‘라, ’뇌택(雷澤)‘이라 한 것이다.”(<사지통속고> P177)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장관이었던 안호상 박사는 백두산의 이름을 ‘한밝산’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흔히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 영주산(한라산)을 합해 삼신산(三神山)이라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삼신산은 3개의 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얼(三神 · 上帝)님이 이 땅에 내려와 나라를 여신 한밝산이 바로 삼신산이라 하였습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삼위 태백’이라 한 것은 ‘3신산 태백산(太白山· 한밝산)’의 표현이라 했습니다. 함경도에 있는 이 한 개의 산을 두고 나라와 시대와 사람에 따라 갖가지 다른 이름들을 붙여지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자기의 나라, 지역, 마을을 높이고 귀중히 여기기 위하여 그곳에 잇는 산에다 ‘한밝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예로서, 고구려가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긴 후 이곳을 백아강(伯牙岡 · 밝뫼)으로, 여기 있는 산을 모란봉(牧丹峯 · 한밝산)으로, 또 고구려의 수호산(守護山)으로 묘향산을 한밝산(太白山)이라 하였고, 신라가 서울을 경주로 정하고 봉화에 있는 산을 한밝산(太白山)으로, 고려가 서울을 개성으로 정하고 그 수호산으로 구월산을 한밝산으로, 조선조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 뒷산을 백악(白岳 · 한밝산)이라 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한밝산 아시 땅은 궁골산(弓忽山 · 검골산)이요, 방골산(方忽山 · 밝골산)이요, 금미달(今彌達 · 검땅)이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또 경남 의령군 부림면에 있는 자기 고향마을의 예를 들어 우리 땅 곳곳에도 ‘한밝산’과 관련된 땅 이름들이 많았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을 이름 ‘설메’는 처음에는 백산(白山 · 밝메), 다음은 ‘雪山(설산 · 설메)’, 다음은 ‘立山(입산)’이라 했으며, 마을 바른 편의 산이 ‘長白(장백 · 한밝산)’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설메 앞 마을을 구메(龜山, 九山 · 검메)라 했고, 설메 왼편 마을을 방골(方忽, 栗谷: 밝골)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한뫼 안호상(安浩相 · 1902-1999) 박사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집안 어른이기도 한 독립운동가 안희제(安熙濟 · 1885-1943) 선생도 자신의 호를 마을 이름을 따서 白山(백산)이라 했고, 그가 운영한 백산상회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배달 · 동이 겨레는 아득한 옛적부터 중원 대륙에 퍼져 살 때에도 조상의 본향인 배달나라의 삼신산 한밝산[太白山]을 잊지 못하여, 이곳저곳의 산에다가 그 이름을 따다 붙였는데, 太白山은 중국의 하남성, 절강성, 섬서성, 감숙성 등에, 白山은 강소성과 절강성에 , 三危山은 감숙성 돈황현, 감숙성 조서산의 서쪽, 감숙성 천수현(天水縣), 운남성, 사천성 등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옛날 배달 사람들과 중국 한족들이 배달의 삼신산인 한밝산 하나를 두고 한문을 빌어 여러 가지 이름들로 적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54가지의 이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蓋馬大山(개마대산) 蓋馬山(개마산) 九月山(구월산) 弓忽山(궁골산) 今彌達(금미달)
單單大嶺(단단대령) 徒太山(도태산) 徒太白(도태백) 塗山(도산) 頭山(두산) 大朴山(대박산)
丹山(단산) 牧丹峯(목단봉) 朴達山(박달산) 白階山(백계산) 白山(백산) 白岳山(백악산) 白岳(백악) 白達(백달) 白頭山(백두산) 伯牙岡(백아강) 白亦山(백역산) 白雲山(백운산) 白州(백주) 方忽山(방골산) 釜山(부산) 不咸山(불함산) 神山(신산) 鼻白山(비백산) 三神山(삼신산) 三聖山(삼성산) 三危山(삼위산) 雪山(설산) 阿斯達山(아사달산) 長白山(장백산) 祖白山(조백산) 祖山(조산) 甑山(증산) 天山(천산) 天白山(천백산) 天祖山(천조산) 天神山(천신산) 天聖山(천성산) 天登山(천등산) 太博山(태박산) 太伯(태백) 太伯山(태백산) 太白(태백) 太白山(태백산) 太皇山(태황산) 風山(풍산) 咸朴山(함박산) 桓山(환산) 丸山(환산)
(참고자료: 안호상 · ‘나라역사 6천 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