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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힐링건강/음식 스크랩 세월호 취재 기자의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고백기
잔디 추천 0 조회 25 14.05.30 16:3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세월호 취재 기자의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고백기
두통, 소화불량, 불면증, 악몽…

“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어찌할 거나”

 

 

 

46년 생애 처음으로 심각한 편두통으로 두통약을 사 먹었다. 아무리 맵고 짜게 먹어도 속이 답답하거나 아픈 적이 없었는데 요즘은 소화제를 매일 들이켰다. 또한, 조그마한 일에도 신경질이 나고 짜증이 나면서 입맛이 없다.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인생에 단 한 번도 입맛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독감에 걸려도 입맛만큼은 왕성했던 나였다.


새벽까지 잠을 설치고 난 다음 날은 멍하니 있다가 졸음이 몰려와 진한 커피를 두세 잔 씩 마셔야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뭔가 죄를 지은 듯한 느낌이 들고 가슴은 두근두근, 얼굴에는 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왠지 우스갯말과 농담은 해서도 안 되고 웃고 즐기는 일은 피해야 할 것 같다.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집중이 안 된다. 항상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 온몸에 가려운 듯한 증상이 나를 괴롭혔고 다음 날 아침이면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이 모두가 4월 16일 오후부터 벌어진 일이다. 476명이 탄 세월호가 이날 이른 아침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본 직후부터였다. 28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에 갇혀 생사를 모르는 상황이 쉴 틈도 없이 보도되는 걸 지켜본 기자의 정신 상태는 정말이지 실시간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고원인과 피해 상황에 대한 취재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는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입에서는 “저런 나쁜….”, “어떻게 또 이런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됐다. 말도 하기 싫었다. TV를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상태가 지속됐다. 속으로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진도로 가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불안감만 엄습하고 해야 할 일이 정돈되지 않았다.  

 

되살아나는 참사, 참사의 악몽

 

“살려주세요. 아저씨, 아저씨…. 학교 가야 해요.”
세월호 참사, 그날 이후 난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렸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꿈에선 땀이 피처럼 느껴졌다. 베게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매일 꾸는 꿈에는 18년 전 발생한 대구 상인동 폭발 사고 때의 학생들과 세월호 안에 갇혀 있는 학생들이 오버랩 되어서 등장했다. 피에 절고 물에 잠긴 그들은 “아저씨, 살려 주세요.”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그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데도 닿지 않았다. 아무리 발악을 해도 몸은 꿈쩍 않고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리다 잠에서 깼다. 시쳇말로 가위에 눌린 것이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는 1995년 이맘때인 4월 28일 오전 7시 52분쯤 일어났다. 지하철 1호선 상인동 사거리 공사 현장에서 새어나온 도시가스가 폭발하면서 101명이 사망한 사건. 공사 현장 인부가 실수로 깬 지하 매립 도시가스관에서 새어나온 가스가 밤새 지하 공간에 머물러 있다 다음 날 아침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꽃과 닿으면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반경 400m의 건물과 시설, 차량들이 쑥대밭이 됐다.


사고 당시 나는 사고 현장에서 1km 떨어진 대구 달서경찰서 형사계에서 출입기자로서 당일 새벽에 있었던 사건을 정리 중이었다. 난데없는 폭발음에 경찰서 건물이 흔들리고 유리창이 깨졌다. ‘쾅’하는 진동에 먹던 라면이 붕 떠서 쏟아질 만큼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경찰서 밖으로 뛰쳐나갔더니 검은 연기와 함께 50m가 넘는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1차 폭발이 있은 지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아직 구급차도 도착하지 않았고, 취재차에서 내리자마자 시내버스가 폭발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현장에 있던 1톤 무게의 복공판은 수백 미터를 날아가거나 지하로 무너져 내렸다. 복공판 위를 달리던 차량들은 지하로 매몰되거나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건물들과 전신주가 모두 부서졌다. 일반 전화도 불통 상태. 피해자들의 사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사고 발생 시간은 인근에 있던 영남중고등학교 학생들의 등교 시간이었다. 총 101명의 희생자(202명 중상) 중 학생이 42명이나 포함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회사로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일반 전화선(당시엔 휴대폰이 없었다.)이 살아 있는 건물을 찾아 곡예를 하듯 사건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그 순간, 뒤쪽에서 “아저씨 살려주세요. 저 학교 가야 해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고생이었다. 허리 아래쪽이 지하철 공사장의 무너진 대형 철제 빔에 눌려 있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철제 빔을 들 수 없었다. 주변에 있던 경찰을 불렀지만, 경황도 없었고 목소리도 닿지 않았다. 

 

“다시 오마, 당황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구조반이 곧 올 거야.” 내가 그 여학생에게 한 이 한마디 말은 인생을 따라다니면서 후회를 하게 만들었다. 나는 현장의 이 급박한 상황을 신문사 데스크에 먼저 보고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앞섰다. 취재인력을 지원받고, 지시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근처 건물에 들어가 살아있는 전화선을 발견해 보고를 마친 뒤 돌아와 보니 여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10분 상간의 일이었다. 미친 듯 취재를 마치고 20개의 병의원을 돌아다니며 그 여학생을 찾기 시작했다. 끝내 한 병원에서 발견한 여학생은 이미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난 여학생 가족에게 얼굴을 두드려 맞았다. 맞아도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에게 물었더니 철제 빔에 깔리는 순간 이미 요추에 손상을 입어서 즉시 구조를 했더라도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인명 구조보다 취재를 택했다’는 죄의식은 마음 한구석에 대못처럼 박혀버렸다. 대구시 당국과 싸움까지 해 가며 여학생의 보상 문제를 끝까지 도와줬지만, 트라우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사건 1년 후 영남중고에서 펴낸 추모집에 나의 죄를 고해하고 가족들의 용서를 다시 한 번 구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내 자식 같은 아이들에게 무슨 말을…

 

 

 

 

“아빠, 나 지난해 이맘쯤 세월호 타고 제주도 수학여행 다녀왔는데 1년만 늦게 태어났으면 아빠 얼굴 다시 못 볼 뻔했어요. 사랑해요.”


4월 16일 저녁, 세월호 침몰 사고 취재를 하고 있는 중에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얘기인 즉,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탔던 바로 그 배, 세월호를 타고 지난해 이맘때 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아빠, 정말 무서워서 공부가 안돼요. 그 친구들 지금 아마 식당 칸에 몰려 있을 텐데. 어떻게 해요.” 아들의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은 아픔과 슬픔이 몰려왔다. 승선인원 파악, 늦기만 한 구조 상황, 승객들을 버리고 탈출한 선장의 이야기를 취재하면서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그 이후부터 난 두통약과 소화제, 커피를 끼고 살았다.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일주일 후 각종 증상이 사라지지 않아 서울대병원 정신의학과가 펴낸 자료를 훑어보니 나의 이 모든 증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였다. ‘사람이 전쟁, 고문, 자연재해, 사고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계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하게 되는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신의학칼럼리스트이자 의학박사인 지인에게 상담을 요청했더니 “소화불량, 불면증, 편두통 등 각종 증상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와서 생긴 증상이다. 18년 전 받은 정신적 외상이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다시 재현되고 증폭되면서 악몽을 꾸게 하고 끊임없는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상황이 심각하다. 항불안제와 항우울제 등 약을 복용하고 세월호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게 좋다. 이런 경험을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세월호 사건으로 숨진 학생과 유족들, 실종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겐 나의 이런 고통은 한낱 실없는 어리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게 죄스런, 이 마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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