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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 어느 민족 할 것 없이 다른 민족과 국경을 맞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화가 유지될 때는 괜찮지만 평화가 깨어졌을 경우에는 국경을 맞댄 이민족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이 됩니다. 이런 상황은 국경을 접한 나라가 많을수록 더 심각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북한까지 치고 해양의 국경선까지 포함한다고 해도 중국, 러시아, 일본 3개국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무려 15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고대사회라고 하더라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특히 중국은 북방의 기마 유목민족인 흉노족(몽고, 훈족)이 호시탐탐 남쪽으로 한족을 노리는 상황이어서 더욱 심하였습니다. 옛날에는 외적의 침입에 방비하는 방법으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 성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성(城)과 곽(郭)입니다. 여기서는 성곽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알아볼 것은 곽(郭)입니다. 곽은 외성(外城)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영어로 번역을 하자면 wall이라고 하며 중국의 대표적인 외성인 곽으로는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그냥 장성(長城)이라고 합니다. 달에서도 육안으로 관측된다는 유일한 지구의 건축물이라고 한다는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만큼 장성이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건축물 가운데서 독보적이기 때문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곽은 인간의 거주지를 직접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인 국경선의 개념이 강합니다. 중국의 장성은 실제 길이가 약 6,500km쯤 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간선만 그렇고 없어졌거나 방향이 바뀌어서 버려진 것을 모두 합친다면 그 10배쯤 된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모든 면에서 과장과 허풍이 센 편이지만 장성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성이라고 하는 곽은 북방의 기마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침입에 방비하기 위하여 쌓은 것입니다. 작년에는 동양고전연구소의 답사팀을 이끌고 돈황을 중심으로 한 실크로드 구역을 다녀왔습니다. 그때 본 지아위꽌(嘉峪關, 가욕관)과 위먼꽌(玉門關, 옥문관) 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아위꽌 지아위꽌은 장성의 서쪽 끝에 위치한 관문으로 동쪽 끝의 관문인 산하이꽌(山海關, 산해관)과는 대척점에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성문의 망루에서 반대편 망루를 바라본 모습입니다. 이쪽 망루의 지붕의 선과 반대쪽에 보이는 망루 등을 합치면 모두 5개는 됨직합니다. 곽(郭)은 원래 이런 외성의 망루가 동서남북으로 빼곡히 서 있는 모양을 나타낸 글자입니다. 외성 곽(郭) 갑골문-금문대전-소전-해서 갑골문을 보면 지아위꽌 같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망루가 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높을 고(高)'자(『이미지로 읽는 한자』 188쪽 참조)에 좌우, 하측으로 망루가 3개 추가된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금문대전에 와서는 형체소를 나타내는 읍(邑)의 형태가 추가되었고 망루는 2개로 줄었으며, 소전과 해서까지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 곽(郭)자의 이체자들을 살펴보면 옛날 모습을 그대로 많이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곽(郭)의 이체자 제일 앞의 이체자는 '높을 고(高)'자의 상하 대칭 형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자부터는 형체소 읍(邑)자가 추가 되었고, 부수자로 쓰이는 우부방(阝)으로 간략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곽(郭)은 원래 외성(外城)이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이는 곧 성(城)을 방비하는 띠(帶)모양의 성을 말합니다. 요즘도 외곽(外郭)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주로 변두리라는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축구에서는 골 에어리어 바깥에서 쏘는 슛을 외곽 슛이라고 하지요. 농경민족인 중국과 기마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접경지대는 드넓은 북방의 초원지대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는 사막지역입니다. 식물들은 거의 살 수 없는 불모의 지대입니다만 사람들의 영토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북방의 흉노족과 면한 나라들은 각기 흉노족의 남침을 위한 외성, 곧 곽의 축조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서쪽 끝의 진(秦)나라와 중앙의 조(趙), 연(燕)나라는 물론이고 동쪽에 면한 제(齊)나라까지 예외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통일하여 이들을 하나로 이어서 만든 것이 장성입니다. 장성은 진나라의 육국 통일 후 진시황의 통치기간 중에 완성을 보았습니다. 불과 10여 년만이었습니다. 그 긴 만리가 넘는 장성을 20년도 안 되어 완성하였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축성 방식 또는 기술을 생각해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시의 축성 방법은 판축법(板築法)이라는 요즘으로 치면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기술이었습니다. 이 축성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한자 축(筑, 築)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자는 원래 공이(杵)라는 뜻입니다. 절구 같은 것에 무엇을 넣고 빻을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사진과 같은 공이는 절구공이는 아니고 흙을 다지기 위한 공이입니다. 위쪽에 사용하기에 용이하도록 가로로 된 손잡이를 덧붙인 것도 있었지요. 중국 북쪽 황토고원지대의 흙은 입자가 매우 가늘고 균일해서 공이로 다져주면 황토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그 자체가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져서 굉장히 오래 갑니다. 특히 강수량이 적은 지역으로 갈수록 내구성은 더 높아지게 됩니다. 그럼 공이를 표현한 옛날의 축(築, 筑)자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쌓을 축(筑) 금문대전-소전-해서 쌓을 축(築) 금문-소전-해서 축(筑)과 축(築) 두 글자로 나누어서 분류를 했습니다만 원래 두 글자는 동일한 한자입니다. 축(筑)은 지금은 악기 이름으로 쓰입니다만 그건 이 글자가 만들어지고나서부터도 한참 뒤의 먼 훗날의 이야기였습니다. 두 글자의 차이는 '나무 목(木)'자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뿐입니다. 원래 공이를 잡고 짚 같은 것을 섞어가며 공이로 다져가면서 성을 쌓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지요. 그럼 판축법으로 성을 쌓는 기법에 대하여 잡시 알아보겠습니다. 판(板)은 널빤지입니다. 널빤지를 양쪽 지지대 사이에 세우고 안에는 황토흙을 넣어 고르고 다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층씩 쌓아나가 원하는 높이까지 쌓는 것이지요. 판축법 개념도 바로 위의 개념도처럼 쌓는 것입니다. 판축법은 말하자면 통흙담을 쌓는 것인데 벽돌 등을 이용하여 쌓는 방식보다 비용이나 효율면에서 상당히 장점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공법이 많이 발전한 요즘도 심심찮게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널빤지 틀에 흙을 넣고 가로 손잡이를 댄 공이로 열심히 흙을 다지고 있습니다. 노동을 하다보니 더운지 옆의 나무에 옷을 걸어놓고 말이지요. 그리고 나무의 높이를 가지고 가늠을 해보건대 이미 상당한 높이까지 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의 북서부는 매우 건조한 곳입니다. 그래서 한나라 때 판축 기법으로 쌓은 성을 아직도 그곳에서는 볼 수 있습니다. 작년 돈황에서 본 고(古) 장성 유지입니다. 중간중간 허물어진 곳도 있지만 옛모습을 아직도 상당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직접 본 느낌은 성의 높이가 생각보다 낮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흉노족들의 이동 수단인 말과 휴대용 양식인 양(羊)이 넘을 수 없을 정도로만 쌓으면 되었으므로 실제 그다지 높이 쌓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니다. 중간에 층이 생긴 이유는 접착력을 높이기 위하여 풀이나 짚 같은 것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돈황에서는 이런 성 뿐만 아니라 관문도 판축법을 이용해서 쌓았는데 옥문관이 바로 그렇게 쌓은 것이고, 옥문관에도 저런 켜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소한 한나라 때까지는 성을 저런 방법으로 쌓았습니다. 지금 보이는 벽돌성은 사실 이 시점보다 많이 뒤진 시대에 나왔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의 건축물입니다. 실제로는 판축으로 쌓은 성에다 바깥에 벽돌을 입힌 것이지요. 그래서 가끔 중국에서 성이 무너져 뉴스에 나오는 일이 있는데 허물어진 안쪽이 모두 흙담인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축(筑)은 악기입니다. 거문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사기』「자객(刺客)열전」에 나오는 고점리(高漸離)가 축의 달인입니다. 옛날 성을 쌓을 때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한꺼번에 쌓았고 요즘으로 치면 이장 정도에 해당하는 정장(亭長)이 부역 인원을 동원하는 책임자였습니다. 진나라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진승과 오광, 그리고 그 위에 우뚝 서서 한나라를 세운 유방도 모두 정장 출신이었습니다. 성을 쌓느라 많은 사람을 동원한 모양이 바로 '무리 중(衆)'자입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시피 중국에서는 지금도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여 판축법을 이용해서 담(성)을 쌓고 있습니다. 정말 저런 광경은 중국이 아니면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중(衆)자는 과연 어떻게 변천해왔나 한번 살펴 볼까요? 무리 중(衆) 갑골문-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갑골문은 일(日)자 형태의 아래 세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일(日)자의 형태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두 가지 견해가 있어왔는데 문자 그대로 해라는 설과 쌓고 있는 성이라는 설입니다. 이 형태는 금문서부터는 '눈 목(目)'자의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하나의 문자를 만들면서 같은 형태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쓴다는 것은 정말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저 위 사진처럼 성을 쌓느라 바글대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후세로 오면서 사람 위에 있는 형태는 쌓고 있는 성을 나타낸다는 설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을 쌓느라 사방천지에서 모여든 바글거리는 사람이 바로 무리(衆)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쟁 때 성을 쌓는 도구를 휴대하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사기』「경포(黥布)열전」에 보면 항우가 남보다 먼저 판(板: 널)과 축(築, 筑: 공이)을 들고 전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자는 이체자와 요즘 중국에서 쓰이는 간체자를 보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체자-간체자 앞의 이체자는 아랫 부분이 확실히 인(人)자가 세 개이고 간체자는 아예 인(人)자만 세 개를 써 놓았습니다. 중국에 가면 자동차 브랜드로 대중(大众)이란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바로 독일의 국민차로 중국에 진출한 폴크스 바겐입니다. 폴크스가 바로 대중이라는 뜻입니다. 약간 옆길로 새서 축(筑)과 연관지어 상상을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사진처럼 성 같은 대규모 부역에는 많은 인원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음악이 나왔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노동요의 기원입니다. 성을 쌓는 데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후한 때의 시인으로 건안칠자의 하나인 진림(陳琳)의 「장성의 샘에서 말을 물 먹이다(飮馬長城窟行)」라는 시의 일부를 보겠습니다.
往謂長城吏 가서 장성의 관리에게 말한다. 愼莫稽留太原卒 “부디 태원의 병사 오래 붙들어두지 마오!” 官作自有程 “관에서 하는 일 나름대로 기한 있으니, 擧築諧汝聲 공이나 들어 너희 노래에 맞추려므나!” 男兒寧當格鬪死 사내라면 차라리 싸우다 죽지, 何能怫鬱築長城 어찌 괴로이 장성이나 쌓을 수 있겠습니까?” 長城何連連 장성 얼마나 줄줄이 이어져 있는지, 連連三千里 줄줄이 삼천 리는 되네. 길게 이어진 장성을 쌓느라 멀리 태원이라는 곳에서 징발된 사람이 고충을 토로하는 부분입니다. 이 시를 보면 최소한 후한이 끝날 때까지는 성을 쌓는 데 판축법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성(郭)을 쌓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공이(築)를 들어서 노래에 맞추라는 부분이지요. 노동요를 부르며 성을 쌓느라 공이로 흙을 다지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래서 실없이 드는 생각이 이때 노래의 반주를 한 악기가 혹시 축(筑)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곽(郭)은 외성으로 대규모로 사람이 사는 구역의 외곽을 나타냈다고 했지요? 그래서 둘레라는 뜻이 생겨났고 여기서 나온 한자는 곽(廓)입니다. 그 외에도 이 곽(郭)자는 많은 한자의 음소로 빈번하게 쓰입니다. 곽이 외성이라면 내성도 있겠지요. 내성을 나타내는 한자가 바로 기다리던 성(城)입니다. 성은 영어로 으레 castle이라고 합니다만 한자 성(城)의 경우는 주로 city로 번역을 합니다. 자금성을 영어로 Forbidden City라고 하고 시내(市內, downtown)를 중국어로 청네이(城內)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성(城)자도 곽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글자입니다. 성 성(城) 금문-금문대전-소전-해서 성(城)자는 금문대전의 모습이 원래 자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글자입니다. 외성인 곽(𩫏, 郭)에서 창(戈)을 들고 지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금문 때부터 창(戈)을 형체소로 취한 성부인 성(成, 丁이 음소)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소전부터 지켜야 할 영토를 나타내는 토(土)자에 음소인 성(成)을 덧붙인 지금의 형태로 바뀐 것입니다. 중국에 가면 관광지마다 저런 퍼포먼스를 많이 합니다. 지나치게 나이가 들어보이는 데다 칼도 녹이 벌겋게 슨 것이 거의 사용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성을 지키는 무기를 든 병사. 바로 이 모습이 성(城)자를 나타내는 원래 뜻이었겠지요. 여담을 조금만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성을 점령하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과 일본에서는 그곳에서 피점령자의 후손들이나 유민들이 다시는 반기를 들지 못하게 성을 모두 허물어버렸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잘 알 수가 없지만 일본의 경우는 구마모토 성과 오사카 성 같은 경우가 그런 이유로 허물어진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을 허무는 것을 한자로 발성(拔城)이라고 합니다. 성을 뽑아낸다는 것이지요. 위의 이야기들을 종합해보면 통흙담으로 쌓은 성은 허물기도 쌓을 때만큼이나 용이했을 것입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산동 쪽에 가면 유난히 v w 차가 많아 아편전쟁 후 독일 조차지였던 영향으로 생각해서,
大众 마크를 별 생각 없이 원래 상표마크를 뒤집어 놓은 모양인가 하고 봤는데,
선생님 덕분에 폴크스가 대중이란 뜻을 알게 되어
정말 고맙습니다.
곧 입춘이지만 며칠 더 추울 모양입니다.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