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世宗 (1397년-1450년)/ 13세~54세. 휘(諱)는 도(祹). 군호는 충녕(忠寧). 외로운 사람이다. 왕실에서 왕자로 태어나, 삼자(三子)임에도 본의 아니게 세자가 되고 또한 군왕이 되어서 그는 외롭다. 아니 어쩌면 이런 파행을 거쳐 왕이 되지 않았다 해도 군왕이라는 자들이 원래 다 외롭다. 그의 결정이 많은 이의 행불행을 좌우하고, 때로는 그의 결정이 전쟁을 만들기도 하여 하 많은 사람들의 목숨마저 좌지우지 하니, 그 결정을 쉼 없이 해야 하는 자에게 외로움은 어쩌면 숙명이다. 추운 겨울날, 삭풍에 사정없이 흔들리는 용포를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묵연히 서 있는 뒷모습, 그것이 그의 이미지다. 가장 아끼는 신하를 정적들로부터 보호하지 못했을 때, 하여 그의 죽음을 목도해야 했을 때 종당에는 아내마저 폐서인을 하여 내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원치 않은 여인네를 품어야 했을 때, 전쟁을 하자 한 신하들을 설득하여 화친을 했으나 그 결정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날려야 했을 때, 대국에게 실리를 위해 자존심 버리고 머리를 조아려야 했을 때 그는 바로 저 뒷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어깨에 얼마나 많은 한숨과 눈물이 배어 있었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다. 소년시절부터 서충(書蟲)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배우고 때로 익히는 것을 진심으로 즐길 줄 아는 이라서, 설령 폐서인이 되더라도 당신의 진정을 의심치도 또한 당신을 원망치도 않겠다한 맘결 고운 아내 소헌이 있어서, 정치의 저 모진 삭풍을 온몸으로 함께 막겠다한 충직한 신하들이 있어서, 때로는 기껍게 때로는 아프게 사랑해야 할 백성들이 있어서 그는 외롭지 않다. 무엇보다 꿈이 있으므로 그는 외롭지 않다. 만인지상인 자신으로부터 그저 평범한 하나하나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선에 난 것을 기껍다 여길 만큼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할 꿈이 있는데 그가 어찌 외로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그는 꿈이 가지는 큰 위력을 아는 자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진실에 먼저 눈뜬 자. 그래서였을 것이다. 우리민족 최고의 문화유산이자 지적자산인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500여년 전 그가 목 놓아 강변했던 그 소리가 들려온다. “조선의 말에 걸맞는 조선의 글, 우리 고유의 글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름 할 것이다. 조선이 천하대국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이민족을 칼로써 누르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것보다 더 크고 가치있는 길은 천하의 백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문화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조선이 문화대국으로 우뚝 서는 순간, 온 나라 민족은 앞 다투어 조선의 언어를 배우고자 할 것이며, 허면 이 나라 조선의 민족혼은 천하로 뻗어나가게 될 것이다.”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1395~1446)15-50대. 세종의 정비. 이해심 많고 맘결고운 후덕한 이다. 세종 즉위 직후 아버지 심온이 역적으로 몰려 사사되고 친정은 멸문지화를 당해 친정어미가 관기의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목도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 아버지 심온의 옥사를 주도했던 박은 등이 후환이 두려워 폐위를 주청하여 왕후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기도 하나 군왕 세종이 끝끝내 그를 윤허하지 않아 그 위기를 모면한다.
황희(1363~1452)47세. 정무처리의 귀재. 그러나 모질지 않은 성품 탓에 청탁 뇌물 수수 등의 비리사건에 자주 연루된다. 세종에게 중용되어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자나, 초정 무렵 세종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특히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극력 반대해 관직을 잃고 유배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일 세종의 인격과 군왕으로서의 자질에 감복하여 23년간 정승으로 재임하며 조선의 정치를 이끄는 브레인 역할을 한다.
장영실(생몰연대 미상). 기녀 소생의 동래현의 관노 출신으로 조선 최고의 과학 기술자다. 제련(製鍊) ·축성(築城) ·농기구 ·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던 그는 1423년(세종 5) 군왕 세종의 특명으로 발탁, 상의원(尙衣院) 별좌가 되면서 노예의 신분을 벗는다. 반상의 구분이 엄연했던 당시 조선사회로서는 혁신적인 일이었다. 이후 세종의 특명을 받고 명나라에 건너가 갖은 핍박을 감내하며 진보적인 과학기술을 습득하였을 뿐 아니라,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창의성을 결합, 천체관측용 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 현주일구와 천평일구, 고정된 정남일구, 앙부일구, 주야(晝夜) 겸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圭表),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欽敬閣)의 옥루(玉漏)를 제작 완성하였다. 특히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했다. 그 공으로 상호군으로 특진되어 당상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조말생(1370-1447)40세. 본관은 양주, 자는 근초, 호는 사곡이다. 박은이 정치 9단이라면 조말생은 8단은 되는 노회한 보수 정객이다. 젊은 시절,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항상 측근에서 태종을 보좌한다. 태종조 지신사(후일의 도승지, 오늘날의 비서실장)을 지낸바 있으며, 세종의 초정 무렵, 병권이 상왕 태종에게 있을 때 병판으로 지목되어 그의 오른팔 노릇을 하는 확고한 구왕파다. 권력 못지않게 금력의 단맛을 추구하던 그는 세종 8년은 장죄(贓罪/뇌물 수수혐의)로 인해 외직으로 좌천되는 불명예를 감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군사분야와 병법에 밝다는 장점을 인정받아 다시 조정에 기용되어 최만리 등을 후계자로 키우며 조정 내 보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윤회(1380-1436)30대 중반. 활달하고 이해심 많고 끈기 있는 성품의 소유자. 그러나 한 번 술독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주불사(斗酒不辭)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하여 술 때문에 순군옥에 여러 번 갇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취중에 교서를 작성해도 임금의 뜻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효빈 김씨. 김점(金漸)의 딸로 원래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시비였으나, 뛰어난 미모로 태종에 총애를 받아 상전인 신덕왕후 강씨를 배신하고 태종의 후궁이 되어 태종이 잠저(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 즉 개성의 정안군 방원의 사저)에 있을 때 아들 경녕군을 낳았고, 그 공으로 태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1401년 빈에 봉해졌다. 뛰어난 외모 때문에 신덕왕후 강씨조차 그녀를 이성계앞에 내놓기를 꺼렸다고 하는데 결국은 태종의 후궁이 되었다. 태종의 총애를 이용해 아들 경녕군을 권좌에 올리기위해 노심초사한다.
경녕군(1395-1458)10대 후반. 효빈 김씨의 아들이자 태종의 제 1 서자. 이름은 비. 천성이 어질고 학문에 밝아 주위의 칭찬이 자자했으며, 태종 이후 5조에 걸쳐서 왕실의 자문위원으로 국정에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줌. 세종초에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사신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도 했음.
맹사성(1360~1438). 후덕한 성품의 재상, 또한 음악에 밝고 활달한 성품에 괴짜. 황희(黃喜)와 더불어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했고, 성품이 청백검소하여 남루한 행색으로 소타고 피리를 불며 다녔던 관계로 그가 정승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 수령(守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이수(1374년-1430년)30대 후반. 효령과 충녕의 스승이 되는 자다. 온갖 비리와 전횡이 난무하던 고려왕조도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하였으며 결국 정도전 같은 유능한 신하를 권력을 위해 버렸던 조선 왕실도 모두 마뜩치 않아 하는 인사다. 그래서 1408년 태종으로부터 왕자들로 하여금 무식이나 면하게 하라는 어명을 받고 효령과 충녕을 가르치게 되나 처음에는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수수께끼 같은 주제를 과제로 던졌을 때 이를 깊이 있게 궁구하여 ‘실천궁행’의 길까지 모색하는 세종에게 감명을 받아 열의를 가지고 그의 교육에 힘쓴다. 군왕 세종에게 “백성의 하늘은 밥”이라는 단순하나 엄준한 진실을 현실 속에서 가르친 것도 그고, 배움은 실천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마른 나무 껍질처럼 그저 건조할 뿐이라는 지식인, 나아가 지도자의 마땅한 마음가짐을 가르친 것도 그다.
정인지(1396~1478)10대 후반. 경서에서 산학, 천문, 지리 음운학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는 천재형의 인간. 세종이 충녕대군 시절부터 교유했던 인물로 세종이 저위(儲位/세자위)를 받아들일까 말까로 고민할 때, 이 나라 조선을 가장 사랑할 용의가 있다면 그 자리를 물리치면 안 된다고 용기를 주었던 인물. 후일 훈민정음 창제에도 크게 공헌한 바 있는 인물로 세종이 신하라기보다는 벗으로 여긴 평생의 지음이다.
최만리(1398∼1456)10대중반. 꼬장꼬장한 성품의 원칙주의자. 1419년(세종 1) 생원으로 증광문과에 급제, 홍문관에 기용되어 집현전박사를 겸임.조말생과 함께 세종정부의 합리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지나치게 개혁적인 정책들에 반대하기도 했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뒤 1444년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 한때 세종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으나 그는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꼽히는 인물이다.
엄자치(출생연대 미상-). 태조 조 아기내관으로 출발하여 세종, 문종, 단종 삼대에 걸쳐 근시노릇을 한 인물. 충녕대군의 어린 시절, 위기에 처한 충녕대군을 목숨을 걸고 구해준게 인연이 돼 세종의 근시가 된다. 후일 태조의 근시였던 김사행이 남겨둔 비밀지도의 존재를 알게 되고 또한 이것이 범궐을 꿈꾸는 무리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을 밝혀 내는 데 크게 공헌한다. 그 후 세종의 눈과 귀 역할을 하며 야인정벌과 훈민정음 창제 비밀프로젝트 수행시 비밀 정보원 노릇을 한다.
김종서(1390~1453). 치밀하고 꼼꼼한 일면 호방하고 추진력이 강한 일면도 가진 인물이다. 혈기방장한 젊은 시절에는 정도전의 실각과 그로 인해 요동정벌이 좌초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겨, 요동에 대한 꿈을 설파하며 호언하는 양녕의 측근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세종의 초정 무렵에는 강력한 반대세력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후일 세종의 현실적인 외교론과 타당성 있는 북벌론에 동의, 평생 그의 충복으로 살아가며 육진 개척에 일생을 바친다.
최윤덕(1376~1445). 뛰어난 무예를 지닌 용장이자 백성을 아끼는 덕장. 자유롭고 호방한 성격을 지녔고 불의 앞에 굳히지 않는 의기 또한 뛰어나다. 경성절제사 시절 세종을 처음 만나 그의 인간됨을 안 이후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다. 세종시절 군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 대마도 정벌, 4군 개척에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세종으로부터 재상직을 명받으나 “군인은 군무를 떠날 수 없다”며 간곡히 거절한다.
유정현(柳廷顯) (1355~1426). 깊은 생각 후에 행동한다. 말이 본시 무겁고 결단하면 힘이 있다. 사려 깊고 합리성이 장점이나 기본적으론 보수적인 중신. 양녕의 장자승계를 굳힐 인물로 태종에 의해 영의정에 제수되나 충녕의 사람됨을 알게되자 ‘택현자’론에 힘을 싣는다. 세종 즉위후엔 대마도 정벌 때 삼군도통사로 활약하였고 다시 좌의정까지 역임한다.
허조(1369~1439). 꼬장 꼬장, 깐깐한 성격의 예조 관원. 기본 보수적이고 본인의 주장과 생각이 강한 편이라 즉위 초 세종을 자주 곤경에 빠뜨린다. 원칙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때론 강자에게 쉽게 엎어지는 다소 이중적인 성격의 소유자. 세종대 최고 관직까지 올라 각종 제도의 정비 및 윤리관 확립에 큰 업적을 남긴다.
변계량(1369-1430)40대 중반. 하늘이 낸 문재로 특히 외교 문서에 능통했던 이다. 그는 관직 생활 대부분을 학관직에 종사하여 세종 대의 학문적 기반을 닦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문형(文衡)이었다. 예문관과 집현전에 주로 근무하며 태종 대와 세종 초의 외교 문서 작성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고, 많은 학사들을 길러냄으로써 세종의 문치주의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그 성품이 편벽하고 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심해 아내를 학대하여 파직의 위기를 맞을 정도로 괴벽한 일면이 있는 인물. 이는 음탕했던 누이와 그 딸로 인해 여러 차례의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된 일이 있는 바, 그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바가 큰 듯 하다. 이런 그를 세종은 여인네를 나아가 인간을 사랑하는 길을 성심성의껏 일깨우며 그의 장점을 높이사 곁에 두고 귀히 썼다.
김문 (金汶) (생 미상 ~ 1448). 명석하고 경서에 밝은 뛰어난 학자. 하지만 출신성분상의 비밀을 안고 있으며 이를 뛰어넘고 싶어 출세욕이 강하다. 이 때문에 조말생의 심복으로 포섭되어 조정에 입문하게 됐는지 모른다. 이후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면서 세종을 곤경에 빠뜨린다. 모든 학문에 밝았고, 특히 사학(史學)에 정통하였다. 저서로는 《의방유취(醫方類聚)》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등이 있다.
신장(申檣) (1382∼1433). 뼈대 있는 학자집안 출신으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다. 하지만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여기 저기 야단 맞기 바쁘다. 과거시험 역시 답안은 장원급제감이나 이름을 빼 먹는 바람에 간신히 통과한 처지. 명학자 신숙주의 아버지이자 윤회와는 사돈지간이다. 훗날 문종이 되는 세종의 아들 이향의 세자사가 되어 아들 신숙주와 왕자들의 인연을 맺어주게 된다.
다연. 동래현 호족 한영로의 딸. 구김살없는 밝은 성격에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를 머금게 하는 남달리 웃음이 많은 여인. 반가의 여식으로 공노비 출신이자 아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장영실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아버지 한영로가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위해 딸을 명나라에 진헌처녀로 보내면서 생이별을 하게 된다.
태종太宗 (1367~1422) 43-56세. 태조의 5남, 조선 제3대 군왕, 강한 사람이다. 갓 창업된 나라 조선, 그 조선의 왕권을 위협하는 자라면 그게 누구든 단칼에 베어 버릴 수 있는 자, 나아가 그 칼에 묻은 적의 피조차 핥을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태종이다. 승복할 줄도, 뒤돌아 볼 줄도, 에움길로 돌아갈 줄도 몰랐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것이 또한 그다. 그래서였다. 창업의 걸림돌이라 믿은 정몽주를 격살하고, 나아가 정치동지 정도전을 제거하였으며, 형제에서 처남, 사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제 손으로 거두고도 그 상청에 눈물 한 방울 보태지 않을 수 있는 냉혹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그는 약한 사람이다. 무력과 권력이 유일한 힘이라 믿었기에, 정치란 지배하고 군림하고 명령하는 것 이상이 아니라 믿었기에.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경구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무력과 권력은 무한할 수 없다. 그가 쥐고 있는 칼이 녹슬고 무디어 지면 권력도 힘을 잃는 것은 인지상정. 그렇다면 그의 강함은 여기서 끝이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힘은 무력이 아니라 영향력임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라면 알면서도 외면했던 것일까. 물론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혈기 방장한 무인의 기질을 타고 났으나 장비형의 거친 무부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자신이 가진 넘치는 카리스마와 과단성 결단력 무엇보다 빛나는 추진력을 지나치게 신뢰한 우를 범했을 뿐이다. 허나 이 또한 어찌 군왕 태종 한 개인의 잘못이라 하리. 창업 후 채 십년도 되지 않아 보위에 오른 그에게 일각일각은 참담한 난세였으며, 시시때때로 궁궐은 사지였고 정글이었다. 그러므로 재상들을 통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정치를 추구하는 “의정부 서사제”의 안정적 구현을 기다릴 여유가 처음부터 그에게는 없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행정부서 곳곳의 문제를 자신의 힘 아래 확고하게 두어 그 어떤 반역도 허락지 않으려는 강력한 왕권의 구현을 목표로 하는 “육조 직계제”를 채택하는 것은 창업군주 태종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시대의 대세이며 숙명이었을 지 알 수 없었다.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1365~1420)45-56세. 태종의 정비이자, 세종과 양녕, 효령의 의 모후. 척당불기한 성품에 괄괄한 여걸로 남동생 무질·무구 형제와 함께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이 컸으나, 뒤에 무질·무구 등 형제 모두가 사사되자 남편 태종과 그 측근들에 대한 원한을 불태운다. 결국 복수를 위해 아들 양녕을 강하게 훈육하며 그가 권좌에 오를 날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회한 많은 세월을 감내한다. 끝 간 데 없이 난행을 일삼는 양녕의 소행으로 인해 그가 폐세자가 될 위기에 처하나 자신의 원한을 제대로 풀어줄 아들은 양녕이라 믿었기에, 또한 장자가 왕위를 승계하지 않을시 제 속으로 낳은 아들들이 태종 치세에서 그랬던 것처럼 서로에게 칼을 들이댈 상황이 올 것을 두려워하여 충녕을 국본으로 삼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기도 한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16세-50대까지. 태종의 장남. 휘(諱)는 제(褆) 활달한 성품에 매혹적인 달변의 그는 타고난 보스다. 그의 나이 십 세, 왕세자로 책봉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태종의 핵심 참모요, 정치동지였던 외숙 민무구 민무질의 손에 맡겨져 권력을 주무르는 능력마저 보태니 보스로서 나무랄 데가 없는 인물이다. 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이 너무도 분명했던 인물이다. 그 발 앞에 충성 서약을 한 충복은 지옥 불 속에 들어가서라도 꺼내올 의리를 지녔으나 자신에게 맞서는 자에게는 철퇴를 내리치는 것도 마다치 않을 비정을 품은 자, 어쩌면 아버지 태종의 성정을 그대로 빼어 닮은 유일한 아들, 그가 바로 양녕이다. 그는 호전적인 정복자다. 양녕은 호방함과 뛰어난 무재 또한 아버지 태종을 그대로 빼 닮았다. 아니 어쩌면 그 호방함(?)은 아버지 태종을 능가했을지 몰랐다. 요동, 그것은 양녕의 피를 끓게 하는 도전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 양녕은 아버지 태종을 일면 불신했다. 개국 5년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천명했다. 아비는 그런 정도전이 노여웠고, 그의 입장을 조선 전체의 입장이라 여겨 등 돌릴 대명(大明)이 두려워 그를 거세했다고 믿었다. 국제관계와 외교적 역학을 알기에 그는 어쩌면 너무 어렸고, 또한 공부가 부족했으며 무엇보다 힘써 궁구할 성의가 없었다. 그래서 한어(漢語/중국어)를 공부하며 지명극명(知明克明)을 해 보고자 하는 아우 충녕의 깊은 속내를 헤아려 볼 의사를 품지 않았으며 명국 사신을 향해 그 호전성을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조명외교의 심각한 걸림돌을 놓기도 했다. 권리에 밝았으나 의무에 어두웠으니 군주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노력과 땀을 묻어야 하는지 알았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는 국본의 자리를 놓쳤다.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14세-50대. 태종의 차남. 이름 보(補). 타고난 독서인에 사색적인 인물이다. 정치가보다는 종교 지도자가 되기에 보다 합당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권력은 왕권이라는 유혹은 그에게도 달콤한 것이었다. 부처를 닮은 성정을 가진 임금의 온후한 정치를 구현하는 꿈을 그라서 어찌 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릇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그래서 이 야심을 한 번도 세상에 내놓지 않고 선선히 동생 충녕이 국본에 오르는 것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에게 수많은 위로가 되기를 마다치 않았다.
상왕 정종(1357∼1419)53세. 태종의 둘째형이자 조선의 2대 왕. 태종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자 이방원에 의해 왕으로 추대됨. 형식상 권좌에 올랐으나 동생 방원이 정사를 좌우하자 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왕위를 동생에게 선위함. 이후 상왕으로 인덕궁에서 사냥, 연회 등을 즐기며 천수를 누림.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권력에서 밀려난후 기생 초궁장을 애희(愛姬)로 들여 외로움을 달램.
김한로의 딸로 양녕의 처. 호방한 기질에 여자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남편 양녕을 지아비로 둔 탓에 평생 외롭게 지낸 불우한 여인. 하지만 사랑을 못받는 대신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해 왕세자 양녕이 권좌에 오를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남편의 어떠한 추문도 온몸으로 막아주고 덮어줄 의사가 있다.
하륜(1347~1416)63세. 좌하륜 우숙번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태종의 최측근이자 지기였던 신하.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을 제거하고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잡는데 일등공신이었음. 정도전이 타고난 혁명가였다면 하륜은 천부적인 행정가 자질을 갖췄음. 조선 건국의 핵심인 태종을 도와 신생국 조선의 설계도를 그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움. 성품이 모나지 않고 대인관계가 좋아 정적이 별로 없었음.
박은 (1370~1422)40세. 음흉한 성품에 노회한 정치 9단이다. 2번에 걸친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 강원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한성부윤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 ·계림윤(鷄林尹) ·전라도관찰사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의정부참지사 겸 대사헌을 지내는 등 출세가도를 달려온 인물이다. 1416년(태종 16) 우의정 겸 수문관대제학에 이어 좌의정 겸 이조판사를 지낸 다음, 금천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내심 영의정 자리를 기대하고 있던 중 세종원년 세종의 장인 심온이 영의정에 제수되자 강상인의 옥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심온 등의 세력을 제거한다.
심온(1375~1418)35새-40대 중반. 세종의 장인이자, 정치스승격인 인물. 태종이 선위하여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아우인 도총제 심정이 상왕의 군국(軍國) 대사(大事) 처리에 불만을 말하는 것을 병조판서 박습(朴習)이 밀고하여 옥사가 일어나 그 수괴로 지목되어 귀국 도중 의주에서 체포된 뒤 수원에서 사사(賜死)된다.
김한로(1367-?)43세. 양녕대군의 장인. 치부와 권력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기회주의자. 사행길에는 상단의 뒷배를 자처해 치부를 꾀하고, 여식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자 그 권세를 믿고 전횡을 일삼는가 하면, 사위 양녕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여식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는 것조차 아랑곳 하지 않으며 기녀 어리를 사저에 은닉했다가 은밀히 입궁시켜주는 행위 또한 마다치 않는다. 양녕이 폐세자 되자, 결국 부와 권세를 모두 날리고 몰락의 길을 걷는다.
민무구(?~1410)40대 초반. 태종비 원경왕후의 동생. 1398년 제1차왕자의 난 때부터 매형이자 후일의 군왕 태종으로 등극하게 되는 이방원과 뜻을 같이한 정치동지다. 차분하고 냉혹한 성품의 그는 세자 양녕의 국본으로서의 자질이 심각하게 의심받자 효령, 충녕, 성녕 등 모든 왕자를 거세할 무모한 꿈을 꾸기도 한다. 결국 태종의 손에 사사되는 비운을 맞게 되는 이다.
민무질(?~1410)30대 후반. 역시 제 1 차 왕자의 난 때부터 태종과 뜻을 같이해온 자다. 형 무구에 비해 성품이 무르고 우유부단한 일면을 갖고 있다. 민무구가 비정한 정치꾼이라면 민무질은 문약한 학인의 전형이랄까. 그러나 시대는 이 심약한 학인에게조차 권력을 향한 쟁투를 부채질 한다. 결국 그 역시 형 무구와 함께 태종의 손에 사사된다.
이숙번(1373-1440년)30대 후반. 1,2차 왕자의 난을 이방원과 함께 통과하며 그 지위를 확고히 해 준 공을 인정받아 좌명공신 1등에 책록 된 인물로 한동안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공신임을 빙자해 태종에게 불충하고 무례함은 물론, 개인적인 거동에 있어서도 갑사를 동원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1417년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함양으로 유배되는 것으로 태종에게 버림받는다.
고려왕조부터 대대로 내려온 동래현의 지방 호족. 고려왕조때 권세를 누리다 왕조가 교체되면서 권력의 부침을 겪는 인물. 호시탐탐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노리다 고려황실 부활세력과의 접촉으로 태평관을 공격하는 전위군에 가담한다. 외동딸 다연을 사랑하는 노비 영실을 눈에 가시처럼 여긴다.
신빈 김씨(愼嬪金氏. 1404-1464) 15-50대_이정현 세종의 후궁. 본명은 이선(二善) 구김없고 강인한 성품을 지녔으며 남달리 총명하다. 조선 역사상 최고의 신데렐라. 어미의 약값을 벌고자 관동 쇠귀할미에게 자신을 종으로 팔고 이선의 재주를 높이산 쇠귀할미가 아리고 비자로 궁궐로 들여보낸다. 이후 아버지 심온의 역모죄로 친정이 멸문지화를 당한 중전 소헌왕후를 모시는 궁녀로 발탁돼 슬픔에 빠진 심씨를 위로하다 젊은 임금 세종과 사랑에 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