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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27일 주일
[(녹) 연중 제30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3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드님을 의롭고 자비하신 사제로 삼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주시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아드님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아가게 하십니다.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 부르심을 받아 대사제가 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며 자비를 부르짖는 눈먼 거지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를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31,7-9
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야곱에게 기쁨으로 환호하고 민족들의 으뜸에게 환성을 올려라.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
‘주님, 당신 백성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소서!’
8 내가 이제 그들을 북녘땅에서 데려오고 땅끝에서 모아들이리라.
그들 가운데에는 눈먼 이와 다리저는 이
아이를 밴 여인과 아이를 낳는 여인도 함께 있으리라.
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은 울면서 오리니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었고 에프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5,1-6
1 모든 대사제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지정된 사람입니다.
곧 죄 때문에 예물과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그는 자기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3 그리고 연약한 탓에 백성의 죄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도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4 이 영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느님에게서 부르심을 받아 얻는 것입니다.
5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독서와 복음을 함께 읽다 보니 눈에 띄는 구절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 …… 구원하소서!”(예레 31,7)라고 외치라고 되어 있는데, 복음에서는 바르티매오가 과연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47)라고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그를 꾸짖었던 이들은 그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고, 또 어쩌면 너무 많은 이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며 외쳐댔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다 상대하실 수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에서는, “이렇게 외치며 찬양하여라.”(31,7)라고 말합니다. “구원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요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기에, 그분께 구원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분을 향하여 외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그러한 신앙을 바라셨습니다. 복음에서도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며 외쳤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꾸짖는데도 그가 외쳤던 것이 그의 찬양이고 신앙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라고 하시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자신의 입으로 치유를 청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고쳐 주실 수 있음을 의심 없이 믿고, 이로써 그를 꾸짖던 사람들 앞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다시 찬양합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은 하늘까지 움직였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을 때,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박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기분,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듯한 외로운 처지, 차라리 이쯤에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절박한 순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 역시 딱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이 커질수록 청하는 것도 커진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리코의 거지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소리 지르기 시작합니다. 주위 많은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죄인이 어디 자기의 목소리만 들어달라고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소리 지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제야 예수님께서 가시던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믿음’이고 믿음이 구원하는데, 그 믿음은 내가 무엇까지 청할 수 있느냐에 결정됩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될 때 그만큼 믿음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 컴퓨터 설립자이고 2009년 포춘지 선정 최고의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2011년 10월 5일 향년 56세의 나이로 췌장암과 싸우다 사망했습니다. 그가 2005년 스탠퍼드대에서 “늘 갈망하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제목으로 졸업 강연하였습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품었고 친구와 둘이 자동차 장고에서 시작한 사업은 10년 만에 직원 1,000명을 거느린 20억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또다시 돌아와 애플을 미국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뒤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늘 갈망하십시오.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Stay hungry, stay foolish).”
스티브 잡스의 종교는 불교에 가깝고 매일 명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참 종교는 그리스도교에 가깝습니다. 무언가를 우직하게 갈망한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어처구니없게 망가진 눈을 회복시켜달라는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이 강하다 칭찬하셨습니다. 더 불가능한 것을 청할수록 더 강한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주님께 무언가 청했던 것은 주일학교 교사 때였습니다. 한 아이에게 야단을 쳤더니 그 아이가 집에 간다고 가버렸고 저는 성당에 앉아 그 아이가 돌아오기를 기도했는데 기도가 끝나자 잘못했다며 그 아이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다음은 술 내기였습니다. 이미 2병을 마시고 기도하고 내기하여 각 6병을 마셨습니다. 물론 제가 이겼습니다. 신기한 것은 다음 날도 숙취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은 저를 사제로 불러주시면 한 번 나타나 달라는 청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성모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음은 박사 논문 발표가 잘 끝나기를 청했는데, 망친 줄 알았더니 교수님들이 다 만점을 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성당에 와서는 어르신들이 많고 교적에 허수가 많지만, 이른 시일 내에 미사 참례율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이었습니다. 3년째 되어가고 있는 지금 거의 이 기도가 성취되고 있습니다. 저는 또 개인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처럼 되는 청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청하는 것도 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요안나라고 부산교구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불쌍한 아이들이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처녀였음에도 아이들을 자녀로 삼아 키우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도망친 엄마 대신 모르는 한 여자에게 엄마가 되어 달라고 청하는 아이의 꿈을 모르는 체할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가 쇼크로 사흘 만에 돌아가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습니까? 믿음과 함께 나의 청하는 것도 커져야 합니다.
그분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황님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사람이 그 자매를 찍어누르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요안나 자매는 자신 앞을 이미 지나쳐가는 교황님께 온 힘을 다해 “파파, 파파”라고 불렀습니다. 교황님은 되돌아오셔서 그 자매의 두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또 상대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고 더 큰 것을 청합시다. 이것이 그분을 인정하고 내가 믿음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달라스 지역에 어쩌다 ‘우박’이 내릴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 우박을 보지는 못했지만, 우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박이 내리면 차량과 지붕에 피해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우박이 내린 후에는 지붕 공사 업자들이 무상으로 검사를 해 준다고 합니다. 검사 후에 문제가 있으면 유상으로 고쳐 준다고 합니다. 보험이 적용되면 큰 어려움은 없겠지만 생활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우박이 떨어지는 걸 막거나, 피할 수 없다면 그것도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원망한다고 우박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우박과 같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0년간 별 탈 없이 쓰던 노트북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보통은 전원을 껐다 켜면 되는데 이번에는 그런 정도의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지붕 공사 업자와 같은 본당 청년이 있어서 노트북의 검사를 맡겼습니다. 고마운 청년은 노트북을 검사한 후에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배터리가 팽창해서 위험하기에 배터리를 교체해야 한다고 합니다. 10년 된 노트북이기에 프로그램을 바꾸고, 용량을 키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프로그램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예전에 있던 자료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노트북에 있어서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다만 최근에 준비했던 강론과 강의 자료들이 없어져서 아쉬웠습니다. 내년 2월에 있는 ‘신앙강좌’ 강의와 10일 정도의 강론이 없어졌습니다. 이것도 제게 내린 우박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고, 강론도 다시 준비하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더 좋은 강의와 강론을 준비하도록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료는 없어졌지만, 그것을 준비했던 저의 노력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노트북도 새로 마련했고, 자료는 가끔 외장 하드에 저장하면 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고치면 좋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임께서는 당신 찬미를 즐기라 재촉하시고,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셨으니,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우리의 건강에, 우리의 사업에, 우리의 가족에게 우박이 내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받아들일 것과 피할 수 있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큰 우박을 맞았던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의 이야기입니다. 눈이 멀었던 바르티메오는 일을 할 수 없기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눈이 먼 것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르티메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었도 은총입니다.” 열심히 얻어먹던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걷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눈도 뜨게 해 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바르티메오에게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메오의 앞을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큰 소리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말렸지만 바르티메오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이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메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바르티메오는 평생의 소원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바르티메오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소경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운명처럼 우박을 맞아서 소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르티메오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르티메오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드디어 바르티메오는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보고 싶은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르티메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세상을 보는 육체의 눈을 뜬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르티메오는 영원한 생명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영적인 눈을 뜰 수 있도록,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이렇게 청하면 좋겠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오늘의 성인
성 가우디오소 (Gaudiosus)
활동년도 : +455년
신분 : 주교, 증거자
지역 : 나폴리(Napoli)
같은 이름 : 가우디오수스
북아프리카 아비티나(Abitina)의 주교인 성 가우디오수스(또는 가우디오소)는 440년경 아리우스파(Arianism) 반달족의 왕 젠세릭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나폴리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끝내 자신의 교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폴리에서 선종하였다.
성 프루멘시오(Frumentius)
신분 : 주교
활동지역 : 에티오피아(Ethiopia)
활동연도 : +380년경
같은이름 : 프루멘시우스, 프루멘씨오, 프루멘씨우스, 프루멘티오, 프루멘티우스
·성 프루멘티우스(또는 프루멘시오)와 또 다른 청년인 아이데시우스(Aedesius)는 형제지간으로 페니키아(Phoenicia, 오늘날 시리아,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 지명)의 가장 큰 항구도시인 티레(Tyre) 태생이며, 에티오피아의 첫 번째 복음 선포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그 당시 인물인 루피누스(Rufinus)에 따르면 성 프루멘티우스와 아이데시우스는 티레의 철학자인 메로피우스(Meropius)의 젊은 문하생이었다.
메로피우스는 330년경 아라비아 해안을 따라 항해할 것을 결정하였는데 이 두 젊은 제자들이 스승과 동반하였다.
그들의 여행은 잘 이루어졌고 돌아오는 길에 신선한 음식을 구하기 위해 에티오피아에 정박했는데, 그곳에서 선원들과 그 지방 사람들과 싸움이 나서 스승과 모든 선원들이 살해당했다.
그런데 이 두 형제는 당시 배를 떠나 있어서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역시 체포되어 에티오피아의 고대 수도인 악숨(Axum)에 있는 왕궁으로 끌려갔으나 왕은 오히려 그들을 신하로 삼으면서 아이데시우스에게는 궁중 연회에서 술을 따르는 직책을 그리고 성 프루멘티우스에게는 서기직을 맡겼다.
그들은 왕이 죽은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왕비의 요청으로 그 지방에 계속 머물면서 서방의 상인들로부터 그리스도교에 대해 전해 듣고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왕의 아들이 계승하게 되자 그들은 완전히 석방되어 아이데시우스는 티레로 돌아가서 사제가 되었고, 성 프루멘티우스는 347년경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있던 성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5월 2일)에게 가서 에티오피아의 선교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성 아타나시우스는 그를 악숨의 주교로 축성하여 파견하였다.
그의 선교 활동은 왕의 형제들을 비롯한 수많은 개종자를 얻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 프루멘티우스가 사망한 후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를 ‘아부나’(Abuna)라고 불렀는데 이는 '우리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현재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총대주교에게 사용되고 있다.
1성 빈첸시오(Vincent)
²성 사비나(Sabina)
³성녀크리스테타(Christeta)
신분: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 +303년경
¹같은이름 : 뱅상, 빈센트, 빈첸시우스, 빈첸티오, 빈첸티우스, 빈켄티오, 빈켄티우스
²같은이름: 싸비나
³같은이름: 끄리스떼따, 크리스떼따
•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기록에 의하면 성 ¹빈첸시오(Vincentius)는 에스파냐의 아빌라(Avila)에 살던 젊은 신자였다.
그 당시는 다키아누스 총독이 로마 제국이 붕괴되어 가는 중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를 명령했을 때였다.
그는 과거의 우상숭배가 아닌 진정한 종교, 바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모든 배교 요청을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감금되었으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의 삶에 감동한 경비병들이 개종하고 . 그의 자매인 성녀 ²사비나(Sabina)와 성녀 ³크리스테타(Christeta)의 도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힘들게 알바(Alba)에 도착했지만 모두 체포되어 채찍과 몽둥이로 맞고 아빌라에 감금되었다가 돌 사이에서 뭉개는 잔혹한 형벌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모두 아빌라에서 순교자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