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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김지미의 첫 번째 남편)의 <춘향전>이
맞붙은 적이 있었는데 연산군을 소재로 한 영화도 1987년, 이혁수 감독의 <연산군>과
임권택 감독의 <연산일기>가 같이 붙은 적이 있다.
이대근, 강수연 주연의 <연산군>은 연산과 장녹수에만 초점을 맞춘 거의 ‘뽕’ 수준이고
유인촌, 김진아 주연의 <연산일기>는 왕의로서의 자아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남자로서의 자아 위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의 퍼스트 조감독이었던 김영빈 감독과의 인연으로 유인촌이 ‘김의 전쟁’에 출연한 것으로 기억된다.
<연산일기>에서의 유인촌은 광기가 있는 배우였는데.....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해 일으킨 중종반정은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쿠데타이다. 특정정치세력이 왕위계승자를 지지하는 것을 넘어
지덜 마음에 들지 않은 왕이라 하여 갈아 치운다는 것은 이미 왕조의 종말을 뜻한다.
이후부터 왕이 바뀔 때마다 독살설(소현세자, 효종, 경종, 정조 등)이 나오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인조반정으로 이미 왕조가 아니었다.
인조반정이 서인의 주도와 남인의 묵인으로 완성되었지만 모든 요직은 서인이 차지한다.
모양새를 갖추고 반정 초기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남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에 앉히지만 서인 정권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인은 원래, 처음 출발은 개혁성향이 강한 당이었다.
당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에 종속할 줄 아는 당파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부터 서인은
‘그들만의 나라’를 위해 당이 존재하는 쪽으로 변한다.
소현세자는 반청주의자들의 손에 죽었고 봉림대군은 그들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다.
조선 17대 왕 효종이다. 효종은 형과 형수(세자빈 강씨), 그리고 조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형과는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북벌이다.
여기서부터 우암 송시열이 나온다.
우리는 드라마(조선왕조 오백년)에서 말 타고 칼을 높이 쳐든 멋진 모습으로 북벌을 주장하는 효종의
모습에 흥분하고 박수를 보내곤 했다. 그러나 북벌은 당시 청나라 정세로 볼 때 무모한 헛된 꿈이었다.
차라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당시가 더 확률이 있었다.
당시 명나라는 마지막 희망인 영명왕이 미얀마로 도망갔고, 청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미얀마까지
쫒아가 영명왕을 죽임으로써 명은 완전히 망했다.
효종은 분명히 북벌하려 했고, 러시아와의 전투를 벌이는 등, 의지가 확고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달랐다. 효종과 송시열의 관계는 세조와 한명회의 관계와 같다.
물론 북벌에 대한 이론적 지주는 송시열이다. 허나 송시열은 실제 북벌을 추진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그는 자신들이 추종하는 성리학의 명분 때문에 북벌을 주장했을 뿐이다.
또 하나는 자신들의 잘못으로 일어난 조청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다.
효종은 즉위한지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죽는다.
조선 쇠퇴의 가장 큰 원죄를 지닌 인물 중 하나인 노론의 대부 송시열은 지나치게 고집이 세고
남에 대한 아량이 없으며 방편과 술수, 음모를 겸비한 삼류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 서인정권의 보스로 활약한 후, 숙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만
그는 그 후에도 노론의 영원한 대부로 남는다.
그러니 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거론되겠지만.....
서인은 송시열을 성리학을 만든 朱子와 동급으로 모셔 ‘宋子’라 칭하나
남인은 말을 놓는다. ‘시열아’ 라고... 상대편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효종의 외아들 현종은 15년 동안 서인과 남인이 벌이는 예송논쟁에 휘말려 별 하릴없이
보낸다. 예송논쟁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한심한 논쟁이다.
효종이 죽은 후, 상복을 1년 입느냐 3년 입느냐, 효종비가 죽은 후 상복을 1년을 입느냐
9개월을 입느냐 하는 것이 예송논쟁인데 이걸 가지고 한 10년을 서로 악다구니를 한다.
이는 효종을 소현세자의 동생으로 보느냐, 왕이니까 장자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서 발단된 것인데
성리학이 통치이념인 조선에서 조상에 대한 예가 통치수단의 하나임은 인정하지만 너무 한심한 논쟁입니다.
백성은 상복을 1년을 입건 2년을 입건 관심 없는데 말입니다.
조선시대 당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는 현종(재위 15년)과 숙종(재위 45년)시절입니다.
특히 숙종은 조선왕 중 가장 재위 기간이 영조 다음으로 깁니다. 그는 45년 10개월의 재위기간 내내
사생결단의 당쟁을 즐기며 자신 또한 왕 노릇을 즐긴 임금입니다.
이 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립니다. 1683년,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박세채의 소론으로 나뉘고
노론은 다시 송시열의 산당과 김육의 한당으로 나뉩니다. 허나 통칭 송시열은 노론으로 칭합니다.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문제로 허목의 청남(강경파), 허적의 탁남(온건파)로 나뉩니다.
무지하게 복잡하지요 !!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당쟁이 더럽다고 중간에서 관망하거나 양비론을 펼치는 사림은
양 쪽의 타켓이 되어 박살이 난다는 것입니다. 어디 한 군데 줄을 대지 않으면 벼슬길도
나갈 수 없으니 어떤 사림도 당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어째 좀 어디서 많이 본 모습 아닙니까? 오늘날과 좀 비슷하지 않습니까?
잠깐 ! 대동법 이야기를 하고 넘어 가겠습니다.
광해군이 경기도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한 것은 지난 번 글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이 그래도 백성을 생각하는 사림과 왕들의 노력으로 점차 확대되어 갑니다.
여기서 김육 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김육은 서인이나 효종 때 대동법을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사림입니다.
또한 수레와 수차 개발에 힘쓰고 상평통보 주조를 통해 화폐경제가 가능토록 했으며 선진 실용사상에도
관심이 높아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인물입니다.
같은 서인이지만 송시열의 명분과 원칙 집착을 싫어한 사람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토지개혁과 공평하지 못한 세금은 문제였습니다.
조선의 사림 중 가장 먼저 공납(세금)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노력한 사람은 조광조입니다.
조광조가 중종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는 율곡 이이와 오리 이원익이 노력했고 광해군을 거쳐
김육이 효종 때 큰 결실을 보고 숙종 34년에는 전국에서 시행됩니다.
대동법 시행이 100년을 허비한 것은 물론 기득세력의 저항 때문입니다.
양반 지주들이 대동법 시행을 죽기 살기로 막은 것은 부과기준이 가구당이 아닌 토지결수로 하는 것 때문입니다.
가구당으로 하면 양반지주나 가난한 농민이나 똑같은 세금을 내야 하나 토지보유분으로 하면 양반지주들이
더 많이 내야 하는 것이지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세금부과 방법이지만 양반지주들에게 어디 통하겠습니까?
그래서 100년을 끌었고 그 과정에서 김육이라는 사림이 큰 역할을 합니다.
숙종은 왕이라는 권위의식과 자의식이 대단한 왕입니다.
그의 체세 동안 당쟁은 극과 극을 달려 수많은 모함, 중상모략, 고변이 판을 칩니다.
숙종은 여러 번의 판 갈이를 통해 노론, 소론, 남인 등을 번갈아 등용하면서 당쟁의 줄타기를 잘하는
정치적 욕심이 강한 임금이었고 변덕이 죽 끓듯 한 임금입니다.
장희빈, 인현왕후, 송시열의 죽음, 장길산 등이 숙종 때 나옵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두 가지의 정국운영방침을 당론으로 정합니다.
하나는 ‘왕비는 서인에서 나와야 한다’는 국혼물실(國婚勿失)이고
다른 하나는 ‘산림의 선비를 높여 등용하자’는 숭용산림(崇用山林)입니다.
숭용산림은 선비를 우대하여 반대 당 파도 기용한다는 것인데 인조반정 후,
남인 오리 이원익을 영의정을 준 것도 이런 원칙이 있어서입니다.
그러나 현종 때의 1,2차 예송논쟁을 거치면서 이 원칙은 사라집니다.
숙종 때, 허적, 윤휴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숭용산림의 원칙이 깨졌음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국혼물실은 서인 집권기간 내내 이어온 철칙입니다.
숙종은 두 명의 서인 집안 왕비를 들이나 불행히도 왕자를 생상하지 못합니다.
장희빈은 이 때 등장합니다.
한국에서 한 인물 하는 탤런트들은 장희빈을 항상 거쳐 가지요.
이미숙, 전인화, 정선경, 김혜수 등등, 반면 단아한 성품의 이미지를 가진 탤런트는 인현왕후를 거쳐 갑니다
조선 왕실 여자 중 가장 미색이 뛰어난 그 장희빈은 남인 쪽과 연결이 되어 있고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인현왕후는 서인이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자, 숙종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졌고 서인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서인출신 대비(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 민비와 다른 명성왕후)는 장희빈을 싫어
했으나 대왕대비는 장희빈을 후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후기 들어오면서 당쟁이 조정 대신들의 영역을 넘어 왕실에도
뿌리 내려 대비, 중전, 후궁, 대왕대비 그리고 상궁, 궁녀까지 모조리 당쟁에 휩쓸린다는 것이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삼으려 하자, 서인들은 벌떼같이 일어나고
송시열은 이 때 사약을 받는다. 숙종도 한 성질 하는 임금임에는 틀림없다.
서인의 거두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다니......
당시 송시열은 국정 전면에 나서지 않고 제자를 앞 세워 막후 조정 했는데 숙종에게 제대로 걸린 것이다.
내친 김에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남인에게 정권을 넘긴다.
이것이 기사환국(1689)이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100 여명에 가까운 서인을 처형하고 유배 보낸다.
한 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인 정권은 채 5년을 넘기지 못하고 숙종은 노론에게
다시 정권을 넘긴다.(이 때는 서인에서 노론, 소론으로 완전 분리된 상태)
당시 남인은 정권을 잡고 지덜끼리 싸우는 추태를 보인다.
송시열 처리문제로 허적(탁남)이 허목(청남)을 제거한 후, 지 세상 만난 것처럼 권력을 휘두르자,
숙종의 변덕이 다시 발동한 것이다. 인현왕후는 다시 복위되고 왕비 장옥정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다.
이것이 갑술환국(1694)이다.
숙종의 이러한 결정에 결정적 역할은 숙빈 최 씨에게 찾을 수 있다.
숙종은 이 무렵 장희빈에게서 마음이 떴다.
전각에 물 긷는 무수리 신분의 숙빈 최 씨가 숙종을 반 쯤 녹여버린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들이 바로 연잉군, 훗날 영조이다.
장희빈은 결국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녀 역시 당쟁의 희생양인 것이다.
인현왕후 또한 복위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 죽는 것은 인현왕후가 먼저 죽는다.
숙종 때는 당쟁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다.
이때의 당쟁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지나가는 사람만 슬쩍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고리의 깃과 섶을 둥글게 접은 사람은 노론이고, 각지게 접은 사람은 소론이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의 옷차림도 달랐다. 노론의 여자들은 치마 주름을 굵게
접었고, 소론 쪽은 잘게 접었다. 당파에 따라서 제사지내는 방식도 달랐으며, 하물며 문중이나
친척을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같은 당파가 아니면 혼인도 하지 않았고, 왕래도 없었다.
1720년, 우여곡절 끝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등극하나 노론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노론의 마음은 숙빈 최 씨의 아들 연잉군에 있었고 경종을 겁박하여 왕세자도 아닌 왕세제로 책봉하게 한다.
신하가 ‘택군’을 하는 것이다. 재위 5년 만에 어머니 장희빈을 따라 간다.
영조(연잉군)는 왕 노릇을 가장 오래 한 인물이다. 자그만치 52년이다.
숙종이 45년, 영조가 52년 합하면 1세기이다.
보통 그 시절, 세계사를 보면 한 세상 바꾸는데 30,40년이면 가능했다.
영조는 두 가지 컴프렉스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어머니 숙빈 최 씨의 천한 신분이고
하나는 이복형인 경종 독살설이다.
소론과 남인, 일반 백성은 경종의 독살설을 기정사실로 받아 들여 영조는 노론의 왕 이었다.
우리는 영조의 가장 높은 치적으로 탕평책을 꼽는다.
그러나 영조가 탕평정책을 사용하는 것은 경종의 독살설을 명분으로 일어난 소론 이인좌의 난
이후부터인 1729년부터이다. 그것도 한 2,30년 했으니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2,30년이라도 한 것은 소론 온건파 조현명과 노론 온건파 원경하 라는 사림 덕분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강희제(청4대), 옹정제(5대), 건륭제(6대)시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융성한 시기였다.
당시 청의 연간 GDP는 전 세계 GDP의 30% 정도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지난 글에서 이야기 한 소현세자의 좌절이 가슴 아픈 것이다.
사도세자는 효종과 많이 닮았다. 文보다 武 에 관심이 많았던 그도 북벌을 꿈꾸었다.
사도세자는 자라면서 여당인 노론보다 소론과 가까웠고 아버지 영조의 경종독살설에 의구심을 가졌다.
사도세자가 왕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1749년, 15살부터 대리청정을 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을 겪으면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하기로
하고 온갖 음모를 꾸민다. 사도세자의 부인이 혜경궁 홍 씨이다.
오래 전 드라마에서 하희라가 주인공을 맡은 ‘한중록’을 쓴 여인이다.
이 여인의 집안은 아버지 홍봉한(사도세자의 장인)을 비롯해 골수 노론이다.
‘한중록’은 노론 집안인 친정을 위해 썼지, 억울하게 죽은 남편을 위해 쓴 것이 아니다.
세상 어느 장인이 사위는 여름 땡볕 아래 뒤주 속에서 8일간 굶어 죽는데 한강에 배 띄우고 물놀이 하고 있단 말인가?
영조는 너무 오래 왕 노릇을 했다. 영조 말에는 그 총명한 머리와 용인술은 사라지고 너무 늙어 판단력을 잃었다.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의 총애를 받는 화완옹주의 양아들 정후겸은 당시 21세였는데
정조의 외삼촌인 홍인한이 그에게 청탁을 해 호조판서를 할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22대 정조가 왕위에 오른다.
정조에 관한 이야기는 이 전 글에서 언급했기에 줄이고자 한다.
정조 사후,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조선은 완전히 망조가 든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마지막 개혁에 몸부림치나 이미 조선은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백성 편에서 보면 조선은 진작 망했어야 할 나라였다.
조일전쟁 이후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간 정조의 재위 25년 빼놓고 존재가치가 없는 왕조였다.
백성의 90%가 넘는 상민과 천민, 그리고 서얼들에게는 개 같은 나라였다.
5%의 사대부만을 위한 조선은 그 어디에도 백성을 위한 흔적이 없는 나라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든 노비는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전쟁포로이거나 범죄자, 타 민족이었다.
동족을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신분과 직업이 천하다는 이유로 사고, 팔고, 상속하는
나라는 조선 밖에 없었다. 정부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취직도 못하고 평생 사회를 원망하며 살아간 조선의 똑똑한 서얼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知好樂의 변변치 않은 지식으로도 조선의 사림들이 신분철폐만 해결해 주었어도
조선은 존재 의미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과거는 분명 흘러갔지만 역사는 죽어버린 화석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이라 생각합니다.
역사가 찬란하면 찬란한 대로, 어두우면 어두운 대로 현재의 우리에게 유익하게 작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영화를 보며 안타깝게 느낀 우리 역사를 잠깐 적고자 한 것이 길게 갔습니다.
저와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보시는 회원님에게는 양해를 구하며 다른 담론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변치 않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蛇足)
조선을 배경으로 하던, 다른 시대를 배경으로 하던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는 정해져 있다. 유동근, 조민기, 임호, 어린 왕이면 정태우, 나이 든 왕이면 이순재, 김무생, 서인석 등이다.
우리 회원 중에서 임금 역에 잘 어울리는 분은 누구일까??
첫댓글 역사드라마 같은 거 전혀 보지 않은 입장이지만...거기에 나오는 배우가 누구누구라는 것 정도는 알지요. 뮤지컬 명성왕후(나도 철없이 감동으로 봤지만)가 있고 지금 막 개봉할려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라는 것도 있고 ...노론의 역사왜곡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봐야 하겠지요 ?
역사가 주는 교훈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지요. 분명 모두 알고 있는데...
제가 공대 출신이라는 건 훈장님이 잘 아시문서..... 당쟁은 균형과 견제라는 측면에서 필요하나 서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에서 소모적 당쟁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 같은 언어를 쓰는데 말이 다르니 말입니다.
인자하신 임금님이시라면 당연 학무님이시고요.
학무님, 태풍님, 인바위님 이 세분은 잘 어울리시겠지요...
제가 궁금한건... 어디서 그렇게 긴 영화를 보시고... 이런 긴글을 쓰시는지...^^
평소 역사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묘사되는 상황들을 보면서 '만일 저 때 이랬다면...'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처음에는 한 꼭지로 생각하고 썼는데 쓰다보니 길어졌습니다. 잘 지내시죠?
61년도 신상옥<성춘향>, 홍성기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유명한 이야기이죠. 오래전 영화라 해서 꼭 개봉 당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죠. 영화진흥공사(당시)에서 필림을 빌어 볼 수도 있고, T.V를 통해 볼 수도 있으니까요. 글구 욜씸히 짤래도 뭐가 나와야 짜든지 말든지 한다는.....
결국 역사란 기득권의 싸움이 아닐까요. 조선 시대의 당쟁도 그렇고, 근현대사를 보더라도.... 결국 죽어 나는 건 백성들과 국민들이지요. 그건 그렇고 여울목 산장에서는 안분지족하고 오셨는지?
큰 맥락으로 보면 그리 볼 수 있겠지요. 기득권에 대한 끊임없는 집착이 역사을 퇴보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선배님이 오셨으면 더 좋았을텐데... 담에 함께 하시죠....
4편 모두 열심히 보았습니다.
요즘 많이 비쁘셨나 봅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