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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몸조심하고. 역사와 당 중앙을 믿는다."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시 서기는 공산당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직무 정지가 발표되기 하루 전인 지난 9일 체포되기 직전 측근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홍콩 잡지 '동향(動向)')
홍콩스타 장쯔이가 성성납을 했다고 해 유명해진 보시라이! 중국의 영웅에서 재물과 여색을 탐한 탐관오리로 추락한 사람이다.
장쯔이가 성상납, 탈세의혹, 출국금지 등 자신을 둘러싸고 불거진 수많은 논란에 대해 공식입장을 밝혔다.
장쯔이 측은 5월 29일 오후 보도자료를 통해 "평과일보(苹果日报)의 터무니없고 극단적인 허위 보도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장쯔이는 그간 '일대종사(一代宗師)' 촬영으로 밤낮없이 생활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만의 평과일보를 측은 지난 28일 미국에 서버를 둔 반체제 사이트 보쉰(博迅, Boxun.com) 측의 보도를 인용해 "중국 충칭(重庆)시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가 중국 톱 여배우 장쯔이와 10여 차례 밀회를 즐겼다"고 폭로했다.
보도에 따르면 "장쯔이와 보시라이를 연결해 준 사람은 다롄스더(大連實德) 그룹 회장 쉬밍(徐明)이"라며 "쉬밍은 그간 보시라이의 돈줄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장쯔이를 비롯한 유명 여배우 포함 약 100여 명의 여자들을 보시라이에게 성상납 시켰다"고 비난했다.
특히 한 차례 밀회에 18억원에 달하는 거액이 오가는 등 모두 1282억원에 달하는 성상납 소식이 전해며 충격을 줬다.
장쯔이 측은 "왜 그런 말도 안되는 소문과 비방으로 아무런 책임없는 배우를 명예훼손 하는지 모르겠다. 장쯔이에 대한 불편한 보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그들의 속내도 잘 알고 있다"며 "하지만 시간은 거짓말을 희석시키게 돼 있다"고 설명했다.
보시라이는 누구인가?
이날 보 전 서기를 연행하러 온 것은 허융(何勇) 중앙기율검사위 제1부서기와 장지난(張紀南) 중앙조직부 부부장이었다. 이들은 오후 2시쯤 중앙경위국(대통령 경호실 격) 요원 4명과 함께 그의 집에 들이닥친 뒤,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정치국 회의에 참석할 것을 통지했다고 한다.
보 전 서기는 그 순간 자신의 정치 생명이 끝났음을 직감했다고 더타임스는 전했다. 일반적인 정치국 회의는 외빈 접견 등에 이용되는 인민대회당이 아닌,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최고 지도부의 집단 거주지)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보 전 서기는 허융에게 "이 순간을 준비했지만, 너무 갑자기 왔다"고 말한 뒤, 가족과 친지에게 인사하려고 휴대폰과 유선전화를 들었지만 모두 선이 차단돼 있었다. 그는 집에 있는 측근들에게만 짤막한 인사말을 하고 대기 중인 검은색 밴을 타고 인민대회당으로 떠났다.
인민대회당 소회의실에서 열린 직무 정지 통보 현장에는 최고 지도부(정치국 상무위) 서열 8위인 허궈창(賀國强)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조직부장, 링지화(令計劃) 중앙판공청 주임 등이 참석했다. 허 서기는 태자당 계열이며, 리 부장과 링 주임은 공청단파 소속이다. 링 주임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비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보 전 서기의 직무 정지 등의 내용을 담은 문건이 낭독됐다. 지난 3월 26일 공안부에서 체포돼 조사를 받아온 그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가 4월 2일 사법기관으로 넘겨진 사실도 내용에 포함됐다고 한다.
보 전 서기는 발표 내용을 들은 뒤 "좋다. 오로지 사실만 믿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콩 언론 명경(明鏡)이 발행하는 한 잡지는 "보시라이가 이 순간 차기 최고 지도자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을 겨냥해 큰소리로 무엇인가를 말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전했다. 시 부주석은 보 전 서기와 같은 태자당 소속 인사이다. 그는 곧바로 중앙기율검사위 요원에 의해 베이징군구 산하의 한 초대소(호텔)로 호송됐다.
한편, 뉴욕포스트도 29일자에서 보 전 서기의 체포 순간을 보도하면서, "중국당국이 구카이라이가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과정에 대한 진술 내용을 곧 공개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연금 중이던 인권 변호사 천광청(陳光誠) 탈출 사건까지 터져 어려워진 상황을 조기에 수습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평서왕'으로 불렸던 보시라이
보 전 서기는 재임 당시 '평서왕(平西王)' '보총독(薄督)' 등으로 불렸다. 상하이의 푸둥(浦東)을 모방한 량장(兩江) 신구 개발과 임대주택 건설 등은 중앙 정부 지침을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사회주의문화운동(唱紅)'을 비롯한 일련의 좌파 정책은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 어록을 전 시민 휴대폰으로 발송했고, 공무원 20여만명을 시골로 내려 보내 1개월씩 노동에 종사하게 하는 문화대혁명 때의 하방(下放) 정책을 도입했다. 명절 때가 되면 빈민 수백만명에게 떡값 수천억원을 돌리는 인기 영합 정책도 자주 구사했다.
베이징 정가에서는 보 서기가 당 기관지를 사유물처럼 이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충칭일보는 지난해 10월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친동생인 덩컨(鄧墾) 전 후베이(湖北) 성장이 쓴 '자강불식(自强不息·스스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휘호를 게재했다. 이튿날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사촌 동생인 후진싱(胡錦星) 쩡아이(增愛)기금회 이사장 인터뷰가 실렸다. 후 이사장은 "충칭의 공동 부유 노선은 당에 고귀한 경험이다. 이를 무시하거나 곡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으로 충칭일보는 보도했다. 지방 당서기가 전·현직 최고 지도자의 가족이나 친척을 동원해 자기 정책 노선을 홍보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한 소식통은 "보 전 서기가 매일 충칭일보 기사를 점검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서기, 지방 4권 총괄 '막강 권한'
보 전 서기가 이처럼 충칭을 '독립 왕국'처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지방 당서기에게 해당 지역 당과 정부, 사법기관, 인민대표대회(지방의회 격) 등을 총괄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31개 성시(省市·성과 직할시)에 이르는 방대한 지방을 거느리고 있다. 이 중 인구 5000만명을 넘는 성시도 10곳이나 된다. 산둥(山東)·광둥(廣東)·허난(河南)성 등은 인구가 1억명에 육박한다. 성시 하나가 어지간한 나라보다 더 커서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규모가 큰 성시는 중앙당과 정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기도 한다. 건국 원수인 예젠잉(葉劍英)의 동생 예쉬안핑(葉選平)은 광둥성장을 지내던 1990년대 초 중앙정부가 지방 세수를 대거 회수하려 하자 "중앙 재정에 문제가 있다고 지방에서 돈을 빌려도 되는 거냐"며 공개적으로 리펑(李鵬) 당시 총리를 쏘아붙인 적도 있다.
◇지방 안정 유지가 최고 덕목
중국 학자들은 지방 당서기를 흔히 '왕'에 비유한다. 지방 행정을 책임지는 최고 관료를 넘어 지방 통치를 담당하는 정치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부여된 임무도 지방의 안정 유지를 통해 공산당 집권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 최우선이다.
당서기를 평가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이다. 덩샤오핑이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직후 장쩌민(江澤民) 상하이시 서기를 당 총서기로 발탁한 데는 그가 학생 소요를 조기에 진정시켜 유혈 사태를 막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당시 직접 시위대 사이로 뛰어들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눴다. 후진타오도 독립 욕구가 강한 티베트 당서기를 맡아 이 지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최고 지도자가 됐다.
베이징대의 한 교수는 "보 전 서기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업적을 쌓았지만, 중국 공산당이 원하는 당서기 역할과는 거리가 있었다"고 말했다.
보시라이는 성장론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부친 보이보(薄一波) 전 국무원 부총리는 덩샤오핑(鄧小平)과 가까운 혁명 원로로 장쩌민(江澤民) 체제 수립에 공을 세웠다. 중국 정치에서 상하이방(上海幇)과 태자당(太子黨) 인사들은 중국의 동남해안 지역에서 서기나 성장을 지낸 공통점이 있다.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에 따라 부유해질 수 있는 지역이 먼저 부유해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상하이방 대표주자였던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시 서기는 “해가 떠오르면 동쪽을 먼저 비출 수밖에 없다. 동쪽과 서쪽을 동시에 비추지는 않는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보시라이가 한때 상하이시 서기를 탐낸 것도 향후 정치적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보시라이가 2007년 말 상대적으로 분배를 중시하는 공산주의청년단 세력이 주름잡던 충칭으로 간 것은 이례적이었다. 공청단은 자수성가형이 많고 내륙이나 서부에서 일한 인물들이 많다.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신좌파의 기수로 떠오름과 동시에 놀랄 만한 경제성적표를 보여줬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지난해 충칭의 성장률은 16.4%로 톈진(天津)과 함께 중국의 성·시 가운데 가장 높았다. 해외투자 유치에도 전력을 기울여 휴렛패커드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충칭으로 몰려들었다. 시장을 안다는 점에서 구(舊)좌파와 달랐으며, 그의 이념은 차기 통치 이념으로까지 회자될 정도였다. 현 시점에서 돌아보면 문화대혁명 시기 열렬한 홍위병으로 활동한 그의 전력은 아킬레스건이었던 것 같다. 절제되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중국 지도부는 보시라이가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의 혁명 정신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을 법하다.
보시라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중국인들이 적지 않다. 인터넷에는 “그는 농촌 어린이들에게 무료로 달걀과 우유를 줬으며 도시와 똑같은 의료보험 혜택을 줬다. 나는 그가 그립다”는 반응이 나온다. 중국의 지니계수는 0.5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될 만큼 빈부격차가 심각하다는 점에서 보시라이의 여운은 의외로 길게 남을 수도 있다. 랑셴핑(郞咸平) 홍콩 중문대 석좌교수는 충칭시가 보여준 저소득층에 대한 공공임대주택 확대 정책을 중국의 부동산 버블을 치유할 수 있는 수단으로까지 평가했다. 국영 기업을 민영화하지 않고 수익을 재정으로 삼아 복지 투자를 늘리고 민간기업의 활력을 북돋운 점도 평가받고 있다.
중국의 3대 정치 계파가 성장이나 분배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추구하면서 노선 다툼을 벌이는 것은 아니다. 보시라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선별적으로 그의 정책을 흡수해 체제 안정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지난해 4월에는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7월에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11월에는 송영길 인천시장이 각각 충칭을 찾았다. 시진핑 부주석은 손 전 대표에게 “보통 외지인이 오면 상하이를 보겠다고 하는데 서부를 보겠다는 것은 탁견이 높다”는 덕담을 건네기도 했다.
충칭은? 서쪽으로는 양즈강(長江)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자링장(嘉陵江)이 흐르는 가운데 반도가 뻗어 있는데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과 이스트 강 가운데의 만하탄처럼 고층 빌딩이 즐비하다. 19세기 상하이가 동양의 뉴욕이었다면 지금은 중칭이 그 이름을 물려 받고 있다.
충칭은 전략적 중요성에 의해 중일전쟁(1937-45) 당시는 국민당정부에 의해 임시수도가 되었다. 미국등 50개국의 대사관도 수도 난징에서 전시 수도 충칭으로 이전하였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가 이곳에 자리잡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공업은 충칭에서 배워라”할 정도로 충칭은 중국 유수의 공업도시이다. 충칭의 지정학적 위치로 국가의 심장 산업이 충칭에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1940년대 항일전쟁당시는 일본을 피해 난징(南京) 우한(武漢)의 공장을 충칭으로 이전하였고 1950년대 중소분쟁 당시는 上海와 동북지방의 공장을 이전하였기 때문이다. 그후 1980년대 개혁 개방으로 연안지역에 투자가 집중됨에 따라 충칭의 공업이 일시 쇠퇴하였지만 2000년대 시작된 서부대개발의 일환으로 자동차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미래공업이 발전하고 있다.
충칭은 수당(隋唐)대에는 자링장(嘉陵江)의 옛 이름 유수를 따서 유주라 불렀다가 송대에 와서는 이 지역에 자주 발생하는 반란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공손의 의미로 공주(恭州)라고 불렀다. 남송(南宋)의 2대 황제(孝宗)는 자신의 셋째 아들을 이곳 공왕(恭王)으로 봉하였다. 그 후 효종이 황제의 자리를 공왕(恭王)에게 양위함에 따라 恭王은 남송의 3대 황제(光宗)가 된다. 공주(恭州)는 두번의 경사(double celebration)를 맞이하였다하여 쌍중희경(雙重喜慶)의 중경부(重慶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중국 지도부에는 후진타오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청년단(團派·퇀파이), 후진타오 이전의 주석이었던 장쩌민(江澤民)을 좌장으로 하는 상하이방(上海幇), 그리고 혁명원로 자녀를 중심으로 한 태자당(太子黨) 등 3대 계파가 존재한다.
우선 공청단은 2000년 이후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정치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전까지 정·관·재계를 주름잡았던 상하이방의 견제 세력으로 등장한 계파다. 공청단은 조직 자체가 공산당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기보다 향후 공산당을 이끌 지도자를 양성하는, 바꿔 말하면 공산당의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산당의 하위 조직이다. 18세부터 입당하는 공산당과 달리 14세 감수성이 예민한 어릴 때부터 입당해 보통 28세까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를 배우는 것을 목표로 중국 각지 평범한 집안의 수재들을 모아 양성한다.
공청단은 전통적으로 태자당과 상하이방보다 평등, 분배와 조화, 사회통합과 농민, 농민공 문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청단의 대표적 인물로 후진타오 외에 부총리 리커창(李克强), 광둥성 당서기 왕양(汪洋)이 있다. 차기 상무위원 후보로 리커창 외에 공산당 조직부장 리위안차오(李源潮), 선전부장 류윈산(劉雲山) 등이 거론된다.
장쩌민 전 주석을 필두로 한 상하이방
장쩌민 전 주석은 1985년 상하이 시장, 1987년 상하이 당 서기장 겸 중앙정치국 위원을 거쳐 주석에 오른 인물이다. 그만큼 상하이가 그의 정치 기반이었다. 그가 주석에 취임한 이후 상하이 출신들이 대거 중앙권부로 모여 들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주룽지(朱鎔基) 총리도 상하이 시장을 지낸 상하이방이다.
상하이방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면서 정치 이념보다 경제를 중시하고 중국 전체를 개혁·개방의 거점, 상하이처럼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추진해왔다. 경쟁관계인 공청단에 비해 성장과 효율을 강조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본주의와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중국을 급변하게 만든 주역으로 리카싱(李嘉誠) 등 화교자본과도 연결돼 있다. 유학파가 많고 외국어에 능통해 외교 협상 능력이 뛰어나다.
실제 개혁·개방 과정에서 중국 외교를 담당해온 대표적 지역 인맥이다. 장쩌민의 퇴임으로 영향력이 줄긴 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시진핑을 광의의 상하이방으로 분류할 만큼 상하이방의 정치 파워는 여전하다.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칭린(賈慶林) 정협주석, 리장춘(李長春) 선전담당 상무위원, 차기 상무위원 후보인 장더장(張德江) 부총리, 장가오리(張高麗) 톈진 당서기 등이 핵심 인물이다.
중국에서 콴시(關係)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태자당은 혁명원로의 자녀, 고위 공산당 간부의 자녀들이 혈연, 학교, 직장 등을 통해 그물망처럼 촘촘한 콴시를 맺으며, 중국의 당·정·군·재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중국의 핵심 요직에 4000여 명 포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현재 중국의 정치, 경제 파워는 “혈연 중심의 콴시에서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죽음으로 덩샤오핑의 자녀들이 태자당을 대표하던 시절은 끝나고 지금은 청칭홍 전 부주석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경제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는 보수파의 거두 천원의 아들 천위안(陳元), 양상쿤 전 주석의 아들 양사오밍(楊紹明), 보이보의 아들이면서 이번에 정치적 파문을 일으킨 보시라이(薄熙來) 등이 있다.
정치권에서는 주은래의 양아들 리펑(李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낸 예젠잉의 아들 예시엔핑(葉選平) 등이 태자당에 해당한다. 차기 상무위원 후보로 시진핑 부주석 외에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위징성 상하이 당서기 등도 여기에 속한다.
태자당은 혁명원로 자녀라 해도 노선에 따라 그 성격이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시진핑 부주석이 차기 리더로 부상함에 있어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협력한 데서 알 수 있듯 대체로 상하이방과 같이 성장과 효율을 좀 더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시장경제 신봉자이자 개방주의자인 시진핑
중국의 정치 시스템은 주석이 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연임 포함, 주석직을 10년 수행한다. 또 중국 공산당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의 상무위원은 총 9명, 임기 5년으로 외교, 국방, 경제, 인사 등 거의 모든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만장일치 원칙이며 서열 1위에서 9위까지 동등한 발언권을 갖는다. 따라서 차기 주석과 총리가 사실상 결정된 상태에서 각 계파는 서로 많은 상무위원을 확보하려 경쟁할 수밖에 없다. 이번 충칭(重慶) 시 보시라이 당서기 사건도 어떤 결과로 끝날지 아직 예단할 순 없지만 그 일례로 판단된다.
하지만 우리의 눈에 권력 투쟁, 공청단의 반격, 정적 제거 등으로 비춰질 뿐이지, 중국 정치 시스템상에서는 서구 민주주의의 정당 간 경쟁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보시라이가 태자당이기 때문에 앞으로 보시라이 대신 어느 계파가 상무위원 후보로 들어오는지에 따라 이번 사건과 정치 역학관계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보시라이가 너무 대중적이고 튀는 정치 행태를 보여 서열, 절제, 타협을 중시하는 중국 지도부에 부담이 됐고, 결국 계파에 관계없이 배제하기로 합의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보시라이는 공산당의 혁명가요를 부르는 등 문화대혁명을 연상케 하는 홍색 캠페인을 벌여왔다. 최근 전인대 공개석상에서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정치 개혁을 하지 않으면 문화대혁명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 후 바로 보시라이가 면직된 것은 사전 계파 간 합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무튼 보시라이의 실추로 태자당의 상임위원 후보는 셋으로 줄고 상하이방 둘, 공청단이 현재 셋에서 넷으로 늘 수 있을지가 향후 유동적이며 관전 포인트의 하나다.
그러나 앞서 얘기했듯이 추구하는 것이 비슷한 태자당과 상하이방이 주석직을 두고 상무위원 인원이 많다 해서 시진핑 시대의 중국이 태자당, 상하이방이 중시하는 성장과 효율 우선으로 갈 것이라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중국 공산당은 계파 간 투쟁과 경쟁을 하더라도 국가 이익과 상황에 따라 타협, 협력, 분열을 피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이번 전인대에서 지난 5년간의 바오바(保八) 정책 성장률 8%를 포기하고 7.5%로 낮춘 것도 각 계파의 성향이 무엇인가보다 현실적 상황 인식이 중요함을 보여준다.
그동안 수출 중심의 두 자릿수 고속 성장은 중국을 외환보유고 세계 최대의 국가, 주요 2개국(G2)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지만, 그대가로 빈부 격차가 극심해졌고 권력자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인민의 의구심도 커져서 최근엔 개혁 시발점이었던 광둥성 우칸촌에서 시위가 발생하고 티베트 분규가 계속되는 등 지도부는 계파에 관계없이 내부 안정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다.
공산당 지도부는 거대한 이익집단 조직
기득권 나눠먹는 의사결정 … 권력부패 공식 = 측근+거액비자금+해외유출
◆보쉰닷컴 "보시라이 비자금 1조5000억" = 보시라이 사건이 터진 뒤인 지난 3월 14일 이후 다롄시 소재 다롄스더(大連實德)집단의 쉬밍 회장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쉬밍 회장은 보시라이와 친분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구카라이는 충칭시 당간부와 공무원을 수족처럼 부렸으며 그의 친척들은 중국과 홍콩에 광범위한 비즈니스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유학 중인 그의 아들 보과과(薄瓜瓜)는 영국 유학시절부터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홍색 귀족'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혔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6일 보과과가 베이징의 특권단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영국으로 보내져 학업에는 무관심한 채 유럽식 스포츠카와 1등석 항공여행, 승마와 탱고에 탐닉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실제 옥스퍼드 대학 시절 턱시도 차림이나 윗도리를 벗어젖힌 채 파티에 참석하던 그의 사진이 온라인상에 확산하기도 했다
샤먼 시내에 건축 중인 거대한 빌딩을 가리키며 공산당이 하는 부동산 사업이라고 말했다. 확인해 보니 샤먼원창그룹유한공사(厦門源昌集團有限公司)라는 부동산 개발회사가 건축한 고층빌딩으로 공산당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큰 사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비결은 공산당과 동업을 하는 것. 그는 샤먼 시내에서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 공산당 간부와 동업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장(晉江)의 농민 출신인 라이창싱(賴昌星)의 성공신화를 거론했다.
1994년 샤먼에서 위안화(遠華)그룹을 세운 라이창싱은 1999년까지 자동차, 석유 등 530억위안(약 9조4000억원)어치의 상품을 밀수하고 300억위안(약 5조3000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혐의를 받고 있다. 라이창싱 위안화그룹 회장의 로비를 받은 공안부 세관 등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밀수를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1999년 주룽지(朱鎔基) 총리는 위안화그룹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결국 1000여명이 처벌됐다.
◆주택가에 성상납 등 풀코스 접대 빌딩 운영 = 라이창싱은 캐나다로 도피했다가 지난해 7월에야 강제 송환됐다. 그는 샤먼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접대와 로비를 무기로 삼았다. 그는 룸살롱, 호텔, 스파 등 기능을 갖춘 개인전용 접대 빌딩인 '홍러우(紅樓)'를 마련해놓고 유력 인사들을 극진히 접대했다. 라이창싱은 관리들이 미녀들과 객실에서 '정(情)'을 통하는 장면을 녹화까지 했다. 홍러우는 당시 주룽지 총리의 지시에 따라 반부패 학습장으로 공개됐다. 하지만 몇 년 전 폐쇄됐다. 현장을 직접 방문해 보니 주민들 주거지에 자리 잡은 반부패 교육장의 출입구는 용접돼 출입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1층은 중국이동통신사 영업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풀코스 접대 빌딩 라이창싱은 룸살롱 등 기능을 갖춘 개인전용 접대 빌딩인 '홍러우(紅樓)'를 마련해놓고 유력 인사들을 접대했다. 그는 관리들이 미녀들과 객실에서 '정(情)'을 통하는 장면을 녹화 했다. 중국정부는 이 건물을 반부패 학습장으로 쓰다 최근 폐쇄했다.
현장을 안내한 관계자는 "3년 전쯤 정부가 반부패 학습장 공개를 중지하면서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창싱이 캐나다에서 송환돼 재판을 받고 있지만 샤먼시에서 만난 리씨처럼 제2의 라이창싱 신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다.
지난 10일 푸젠성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인 닝더(寧德)라는 어촌을 방문했다. 이곳은 지난 1988년 시진핑 부주석이 공산당 서기로 부임했던 지역이고 그가 푸젠성장 재임 당시 수상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등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아오장(鰲江)촌 공산당 지부위원회사무실에서 만난 거주민들은 시진핑의 선행을 기억하기보다는 현재 생활수준이 개선되지 않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았다.
시진핑은 푸젠성에서 17년 동안 근무하면서 부패척결에 나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시진핑은 대대적인 조사를 통해 길거리에 널려 있는 부패를 척결했고, 이 사실이 인민일보를 통해 보도돼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시진핑이 푸젠성장으로 재직할 때 중국 역사상 최대의 부패사건인 위안화사건이 터져 800여 명이 조사를 받고 84명이 재판에 회부돼 이 중 14명이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는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푸저우시 정부 관계자 P씨(55세)는 "시진핑이 푸저우시에서 일할 때 부패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평가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고 말했다.
시진핑은 '진화한 태자당'으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 혁명 2·3세대의 상당수는 기득권을 나눠 먹는 거대한 이익집단을 형성하고 있다.
위키리크스 통해 공개된 주중 미 대사관 2009년 전문에 따르면 한 중국 내부인사는 주중 미국대사관 관계자에게 "공산당은 이익집단의 집합체로 봐야 하고 당 내부에 개혁파는 없다"고 밝혔다.
그는 "최고지도부 역시 경제적 파이(pie) 혹은 기득권을 나눠 먹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해왔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될 소지가 있는 개혁에는 미온적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런 내용들은 주중 미국대사관이 2009년 7월 23일 본국에 보낸 '합의제로 운영되는 최고지도부의 역학관계'라는 외교전문에 등장한다.
◆장쩌민 아들은 중국 제1의 부패관리 = 전문에 나온 인사는 구체적으로 '이익집단'의 실체를 거론했다. 예를 들어 리펑(李鵬) 전 총리와 그 일가는 전력 분야를, 공안분야 책임자인 저우융캉(周永康) 정치국 상무위원과 그 측근들은 석유분야를 각각 관리해왔다는 것이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천윈(陳雲)의 일가는 금융분야를 담당했고,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은 베이징 지역의 부동산 개발 이익을 챙겨왔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사위가 대형 포털 시나닷컴을 운영하고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의 부인이 중국의 보석업계를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이 인사는 주장했다.
특히 상하이방의 좌장인 장쩌민 전 주석의 경우 여전히 인사와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 그의 아들 장멘헝은 중국 제1의 부패관리로 알려져 있다. 장멘헝은 전 중국과학원 부원장으로 상하이에서 발생한 대형 횡령사건에 대부분 연루됐다.
중국에서 반부패는 권력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때 잠깐 거론될 뿐이다. 지난 2006년 8월 후진타오 주석은 '장쩌민 문선'을 출판해 당 전체가 이를 학습할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며 장쩌민을 치켜세웠다. 장쩌민 문선에는 많은 반부패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사건이 누구까지 미치든 불문하고 반드시 해내야 하고, 절대로 사정을 봐주어서는 안 되며, 특히 자기의 가족들을 비호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후진타오는 '장 주석의 지시를 진지하게 학습하여 상하이의 반부패 업무를 철저히 하자'고 호소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뒤 40여일만에 장쩌민의 심복이며 상하이방의 핵심인물인 천량위를 부패혐의로 처단했다. 그야말로 상대방의 창으로 상대방의 방패를 공격하는(以子之矛,攻子之盾) 것이고, 한손으로 장쩌민 문선을 학습하면서 찬양하고, 다른 한손으로는 부패를 반대해 장쩌민으로 하여금 아무런 손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재산공개 요구 시위 등 분노 폭발 직전 = 지난 8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택시기사는 "주룽지 총리를 가장 존경한다"며 다른 지도자들은 부패척결 의지가 없다고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보시라이든 누구든 반부패 척결을 주장한다면 무조건 환영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패에 대한 중국인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고 속시원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 지도부에 대한 불만은 폭발직전이었다.
지난달 광저우시에서 시위대가 "후진타오 주석은 재산을 공개하는 데 앞장서 달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인 것도 이러한 불만을 표출한 것이다.
최근 실각한 중국 스타 정치인 보시라이(薄熙來ㆍ62) 전 충칭(重慶)시 서기가 집권한 기간 관리들이 자살하고 수십명의 정적들이 구금되거나 침묵을 강요당했으며, 도시 재정이 파탄지경에 이른 악몽의 기간이었다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17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중국의 정치파벌의 하나인 태자당(공산당 혁명원로 자제) 대표 주자였던 보시라이는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 독살사건으로 중국 최고 지도부에서 축출되면서 그의 행각이 폭로되고 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2009년 9월 충칭시 과학위원회 부서기를 지낸 셰다쥔(謝大軍)의 자살도 보시라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보시라이가 중국 혁명가요인 ‘홍가(紅歌) 부르기’ 운동을 강하게 밀어붙이는데 반대하다 정신적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2010년엔 허젠민 충칭시 과기대 부학장이 자살했고, 은퇴한 수이정콴(稅正寬) 전 충칭시 인민대표대회 부주임도 최근 사망했다.
하지만 충칭의 대표 기업가인 장밍위 충칭 퉁촹(同創)그룹 회장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를 통해 수이정콴 전 부주임이 자살했다고 폭로하면서 자살 의혹을 받았다.
특히 보시라이는 자신의 귄위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과거 문화혁명 시기에 잘 악용됐던 권력과 공포의 정치를 휘둘렀고, 범죄조직 단속을 빌미로 종교인, 기업가, 정치적 라이벌들을 구속하고 재산을 몰수했다는 증언이 속속 나오고 있다. 심지어 방해가 되는 반대측 변호인을 구금시키는 횡포를 부리기도 했다고 텔레그래프는 보도했다.
이밖에 보시라이 부부는 다롄 TV 유명 여성앵커 장웨이제(張偉傑) 실종 사건, 전 다롄시 부시장 위안센첸(袁憲千)의 딸 자살 사건과 깊이 관련됐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장웨이제는 다롄 시장이었던 보시라이의 정부(情婦)로 소문이 났었다.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을 지낸 뒤 2007년 말 충칭시 서기로 좌천당한 후 ‘창훙다헤이(唱紅打黑·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범죄를 척결한다)’ 운동을 벌이며 중앙무대 재진입을 노려왔다.
이같은 범죄척결 운동은 서민들에게 지지를 얻었지만 지성인들에게는 재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의 부인인 구카이라이 사주로 독살된 것으로 알려진 영국인 닐 헤이우드가 구카이라이와
사업상 파트너일 뿐 아니라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다는 주장이 영국 언론에 의해 제기됐다. 이런 보도가 사실이라면 보시라이가 헤이우드 살해에 관여됐을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더욱 신빙성을 얻을 전망이다. 보시라이가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벌써부터 제기되고 있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구카이라이와 헤이우드가 단순한 금전거래 관계를 넘어서 `핑크빛` 연인 사이였다고 18일 주장했다.
해외에서 운영되는 반체제 중문 웹사이트들도 이미 두 사람의 불륜 가능성을 보도했지만 추측성 기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더타임스는 영국과 중국 소식통의 증언을 생생하게 인용해 사실감을 더하고 있다.
보시라이 측근들과 접촉이 많았던 충칭시 학자 왕강은 "두 사람 사이에 확실히 로맨틱한 관계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보시라이 부부는 완벽한 가족으로 보이길 좋아했으나 진실한 감정은 없었다"며 "때문에 헤이우드가 나타나자 구카이라이와 자연스럽게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헤이우드와 구카이라이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잘 모른다"고 말했다.
구카이라이가 영국에 살 때 잘 알고 지냈던 다른 지인도 "구카이라이가 본모스 바닷가 인근 평범한 아파트에서 헤이우드와 동거하는 것 같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뒤에서 여자를 건드리거나 계단을 올라갈 때 모습을 보면 분명히 친구 이상이었다"고 덧붙였다.
거주기록에 따르면 구카이라이는 2001년 3월부터 2002년 1월까지 본모스 소재 키스톤 하우스에 살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소식통은 또한 헤이우드가 아침에 구카이라이의 아들 보과과와 함께 아파트를 나서는 장면도 종종 목격했다고 전했다. 이 아파트의 오른쪽 첫 번째 방에 머물던 헤이우드는 아침이면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경우가 많았고, 구카이라이는 거의 주방에 있었다고 이 소식통은 덧붙였다.
다른 소식통은 구카이라이가 최근 몇 년 새 점점 더 변덕스런 행동과 편집증적 행태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이런 비정상적 행동은 보시라이와 원만하지 못한 결혼 생활 때문이었다고 왕강은 분석했다. 보시라이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알았기 때문에 헤이우드 독살에 적극 관여했거나 적어도 방조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반체제 중문 사이트 보쉰닷컴은 이미 보시라이 지시로 그의 집사인 장샤오쥔이 헤이우드 살해 사건을 총지휘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장샤오쥔 지시에 따라 실제 독극물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 샤더량 전 충칭시 난안구 당서기가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이날 보도했다.
난안구는 헤이우드가 숨진 난샨 리징 홀리데이호텔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중국 정가에서는 보시라이가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가 지난 17일자 1면에 공산당 간부의 청렴성을 강조한 기사에서 류칭산과 장쯔산을 언급한 것이 보시라이의 사형을 암시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국공내전 유공자였던 이들은 톈진시 당 간부를 지내던 1952년 직권남용과 공금횡령 혐의로 사형 처분을 받았다.
후싱더우 베이징과학기술대 교수는 "부패 혐의에 더해 살인사건까지 연루됐다면 사형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중국과 영국은 이번 사건 조사에 협력하기로 했다. 리창춘 중국 상무위원(권력서열 5위)은 17일 영국 런던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회담을 갖고 헤이우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완전히 법에 따라 사법당국의 조사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캐머런 총리는 이에 "영국도 조사에 필요한 어떤 도움이라도 제공하겠다"고 화답했다.
낙마 후에도 끝없는 의혹이 쏟아지고 있는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重慶) 서기가 국무원 부총리로 선임될 뻔 했으나 우이(吳義ㆍ74ㆍ여) 전 부총리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홍콩 싱다오르바오는 보시라이 전 서기가 2004년 중국 공산당 17대에서 상무부장 재직시절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우이 부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됐지만, 그의 야심만만하고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던 우 전 부총리가 퇴짜를 놨다고 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보 전 서기는 상무부장에 오른 후 우이 전 부총리가 상무부의 전신인 대외경제무역부 부장 시절 중용했던 인물을 모두 교체했다. 점잖고 실용적인 스타일로 유명한 우 전 부총리는 인사로 인해 잡음을 내며 요란하게 일하는 보 서기의 업무 스타일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우 전 부총리는 보 서기를 평가하기를 “자신이 반드시 1인자가 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할 줄 모른다. 권력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 업무에 손해를 입히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 전 부총리는 특히 보 전 서기가 외교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고 외교상 위험한 발언을 쏟아내 국격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캐나다에 망명 중인 전 원후이바오 다롄(大連) 주재기자 장웨이핑(姜維平)도 미국의 중국어 신문 둬웨이왕과의 인터뷰에서 “우이 전 총리와의 반목 때문에 보시라이가 충칭으로 쫒겨 났다는 말을 상무부 고위 관료에게 전해들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우이 부총리는 2008년 정년 만기로 물러날 때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는 완벽한 은퇴를 원했다. 그는 “나를 완전히 잊어주는 게 내 희망사항이다”고 말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보시라이를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것을 유일한 전제사항으로 내걸었다고 싱다오르바오는 전했다.
보시라이는 실제로 상무부장으로 한참 잘나가다가 돌연 충칭이라는 변방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마오저둥(毛澤東)식 공산주의 이념으로 돌아가자는 ‘홍색 캠페인’을 벌이면서 대내외적인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싱다오르바오는 보 서기가 이같은 이미지 정치에는 성공했지만 편향된 성격과 야심 때문에 결국 정치적 사망을 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중국 보시라이(薄熙來·63) 전 충칭(重慶)시 서기 부부는 재산 해외 밀반출 혐의로 공산당의 감시 대상에 올라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는 보시라이 부부와 가까운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41)가 지난해 11월 사망하기 전부터 보시라이와 그의 부인인 구카이라이(谷開來·52), 왕리쥔(王立軍·53) 전 충칭시 부시장 모두가 공산당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당 중앙기율검사위의 조사 대상에 올라 있었다고 중국 공산당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왕리쥔의 미국 망명 시도 같은 돌발 사건이 없었더라도 세력을 불려가던 보시라이를 견제하기 위해 공산당 지도부가 언제든 활용할 수 있는 카드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신문은 왕리쥔이 중앙기율검사위원회에 2통의 편지를 보내 구카이라이가 수백만달러 규모의 재산을 중국 밖으로 반출하려 하고 있다고 제보했다고 전했다.
헤이우드가 보시라이 부부 재산 밀반출을 둘러싼 갈등을 빚기 전부터 왕리쥔이 보시라이 가족의 재산 밀반출 낌새를 알아챘으며, 이를 기율검사위에 보고한 것으로 관측된다. 앞서 로이터통신은 헤이우드가 구카이라이에게 재산 해외 밀반출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가 독살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기율검사위는 왕리쥔의 편지를 받은 뒤에도 공식적으로 조사에 착수하지 않았지만 이후 보시라이와 왕리쥔 간에 피 튀기는 복수혈전이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중앙기율검사위 서기는 서열 8위인 허궈창(賀國强·69) 정치국 상무위원이 맡고 있다. 그는 충칭시 서기를 지낸 바 있고 보시라이가 조폭과의 전쟁으로 사형시켰던 원창(文强) 전 충칭시 사법국장이 그의 측근이었다.
보시라이는 왕리쥔의 망명 시도 이후 정치적 위기를 맞았지만 이처럼 갑작스레 몰락할 줄은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달 중순 보시라이가 충칭시 서기에서 해임되기 직전 그와 전화통화를 했다는 중국 소식통은 “보시라이가 부패와 다른 범법행위에 대한 조사를 견뎌낼 수 있다고 자신했다”고 전했다.
보시라이는 “그들이 내가 계속 일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일을 계속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해도 빅딜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이 소식통은 덧붙였다.
성공의 연금술사는?운명상담과 자기계발교육프로그램이 있는 2004년에서 2012년까지 8년 역사를 가진 카페입니다.
첫댓글 보시라이 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