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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2장 주석
사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권면(누가복음 12:1-12)
Ⅰ.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설교를 듣기 위해 운집한 청중을 보게 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하고 그에게 가해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편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기에 여전히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그를 따라 다니며 그를 존귀하게 여겼다. 그 동안에(1절)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함정에 빠뜨릴려고 기회를 노리는 자들과 논쟁하시며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 동안에 백성들은 오후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 있었다. 그것은 식후 즉 바리새인과의 식사 후에 하신 설교였다. 그는 그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리가 모였던(11:29) 아침 설교에서는 표적을 구하는 악한 세대라고 호되게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 가까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들은 바리새인들보다 책망을 훨씬 더 잘 참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백성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떼 놓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더욱 많은 무리가 모였다. 여기서는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 그들은 기를 쓰고 맨 앞에 나와 들으려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처럼 적극적으로 말씀을 들으려 하고 자기 영혼을 위한 기회를 놓치느니 보다 차라리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것은 흐뭇한 광경이다. 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오는 것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뇨? (사 60:8) 그토록 많은 고기가 있는 곳에 그물을 던질 때는 얼마라도 잡히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Ⅱ. 그는 이 청중이 듣는 데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교훈을 내리셨다.
1. 그는 먼저 외식에 대한 경계로써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는 제일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대상은 열두 제자거나 아니면 칠십 인의 제자였을 것이다. 이들은 보다 특수한 보호를 받는 그의 가족이요 생도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하듯 특별히 그들에게 경고하셨다. 그들은 남들보다 신앙 고백을 많이 했고 그 점에서 위선은 그들이 극히 위험시하는 죄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설교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만약 말씀을 얼버무려 와전시키며 거짓되이 취급한다면 그들의 위선은 남들보다 더 악할 것이다. 더욱이, 그들 가운데에는 유다라는 위선자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점을 아셨기에 이로써 그를 경악시키시거나 변명의 여지가 없도록 하려고 하셨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선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위선을 조심하라고 주의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큰 무리가 듣는 데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그가 제자들만 있을 때 은밀히 말씀하시지 않으신 것은 그 주의의 비중을 더 크게 하시며 그가 자기 제자들의 위선조차 묵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세상 사람에게 알리시기 위함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시는 죄가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1]그것은 누룩이다. 그것은 누룩처럼 퍼지며 건전한 사람과 그의 모든 행동에도 교묘히 들어간다. 그것은 누룩처럼 부풀며 시게 만든다. 그것은 교만으로써 사람을 으쓱거리게 하고 악의로 사람을 쓰게 만들며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그것은 대다수의 바리새인에게서 발견되는 죄다. 그들을 모방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너희는 그들의 정신에 동화되지 말아라. 그들이 유대교의 탈을 쓰고 행동하듯 너희는 기독교로 위장하는 자가 되지 말아라. 너희는 그들 바리새인처럼 너희 종교를 악의의 엄폐물로 삼지 말아라."
(2) 그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나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 3절), 가장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조만간 진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거짓 혀는 눈 깜짝일 동안만 있을 뿐이다(잠 12:19). 너희가 만일 너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과 너희의 신앙 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어두운 데서 말한다면 그것은 광명한 데서 들릴 것이다. 그것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발각될 것이며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할 것이어서"(전 10:20) 너희의 어리석음과 허위는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경건으로 가장된 악은 아마 유다나 시몬 마구스의 경우처럼 이 세상에서 발각될 것이고 멀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저 큰 날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전 12:14; 롬 2:16). 만약 사람들의 신앙이 자기 마음의 악을 극복하고 치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한갓 허울에 불과하며 그 허울은 반드시 벗겨질 것이다. 위선자들이 자기 무화과 잎사귀를 벗기게 되는 그 날은 오고 있다.
2.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받은 바 신뢰에 충실한 것이며 비겁이나 불안으로 말미암아 받은 바 신뢰를 배신하지 말하는 부탁을 덧붙여 말씀하셨다. 혹자는 2, 3절의 해석을 달리한다. 즉 예수께서는 그들이 교훈 받고 세상에 공포하도록 고용된 바로 그 일들을 숨기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런 경고를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용납하거나 말거나 그들에게 진리, 온전한 진리를 말해 주며 진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너희가 들었던 것과 은밀히 골방에서 너희끼리 말했던 그것을 널리 전파하라. 누가 역정을 내든 너희는 그것을 광고하라. 왜냐하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종도 아니요 그를 기쁘게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갈 1:10).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다. 복음 전파는 결코 멸망의 빌미는 되지 않더라도 고난받기 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용기로 자기 무장을 해야 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 사업에 대한 거룩한 결의로 강철같이 단련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논증을 들려주고 계신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네 원수들의 권세는 제한된 권세이다"(4절). "내가 내 친구(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친구이다. 그는 제자들을 부르시며 우정에 찬 충고를 하고 계신다) 너희에게 말하노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인간의 권세와 노여움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에 떨지 말라." 그리스도께 친구로 인정받는 자들은 어떤 대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몸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 조롱자들과 심지어 살인자들의 권세에 눌려 너희 사업에서 손을 떼지 말아라. 왜냐하면 사망에 대한 승리를 터득한 너희는 그들에게 최악의 경우를 당한다고 해도 그후에는 능히 더 못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멸의 영혼은 살아 있으며 복되며 자신과 그 하나님을 향유하며 그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다." 몸만 죽일 수 있을 뿐 더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실질적인 해를 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보다 빨리 안식처로 보낼 뿐이며 영혼을 희락 속으로 돌아가게 할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2) 하나님은 지극히 강한 인간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절) 이는 너희로 사람을 덜 두려워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분께 시선을 돌림으로써 바로 왕의 분노에 대한 자기의 두려움을 극복한다. 너희는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분노를 살지도 모른다. 인간의 분노는 고작 너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밖에 없다(그나마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들은 너희를 죽일 수도 없다). 그러나 너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거절하면 너희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며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저항해 볼 도리도 없다. 이제 두 가지 재앙 중에서 너희가 취할 것은 피해가 작은 쪽이고 두려워해야 할 자는 권세가 더 큰 쪽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그를 두려워하라고 이르노라." 복된 순교자 후퍼 감독은 "실로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고 영원한 적은 더욱 쓰다"라고 말했다.
(3) 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살핌 하에 있다(6, 7절). 우리는 환란과 위험의 시기에 자신의 용기를 복돋우기 위하여 우리의 제 1 원리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 제 1원리들을 기초로 신앙을 쌓아가야 한다. 이제 하나님의 우주적 보편 섭리의 가르침에 대한 굳은 신앙만 있으며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의무의 길에서 하나님을 신뢰할 용기가 생길 것이다. [1] 하나님은 참새 같은 지극히 하찮은 미물조차도 인식하고 계신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릴 정도로 참새가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는 바 되지 않고 하나님은 참새의 먹이를 제공하시며 그 죽음도 눈여겨보신다. "이제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비록 투옥되며 추방당하고 친구들에게 잊혀진 바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잊혀진 바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 하물며 여호와 보시기에는 참새의 죽음보다 성도의 죽음이야 얼마나 더 귀하겠는가!"
[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속한 제자들의 극히 작은 이해관계도 인지하신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세신 바 되었다(7절). 하물며 너희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흘리는 핏방울까지도 세신 바 되지 않을랴! 너희가 입은 모든 손실은 장부에 기록되어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하실 것이며 틀림없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하게 보상될 것이다."
(4) "너희는 현재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저 큰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시인이나 부인을 받을 것이다"(8, 9절).
[1] 그리스도를 지금 시인하는 자들은 저 큰 날에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의 시인을 얻을 것이며 이는 그들의 영원한 안락과 명예가 될 것이다. 이 점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목적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일편단심 때문에 어떤 수난과 손실을 입든지 간에 또 그것이 어떤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든지간에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그들을 위해 고난 당하셨음과 그들이 그 고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임을 시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수난 당했고 땅 위에서의 그리스도 왕국의 권세가 그들의 수난으로 증진되었다는 것도 시인하실 것이다. 이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2]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반하는 자들은 결국 대실패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생명 그 자체를 얻는다고 해도, 비록 그리스도를 배반함으로써 천하를 획득한다 해도, 결국 대상실자가 될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가르치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못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진리와 행사를 비겁하게 유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배반자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이며, 시인하지 않으실 것이고 그들에게 아무런 호의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부인은 그들의 영원한 공포와 멸시로 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받거나 부인당한다는 본문의 강조점으로 보아서는 영화로움을 입은 성도들이 거룩한 천사들의 공경을 받으며 당당히 고고히 서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행복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천사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이라면 그들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시인할 것이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은 동료 종들이며 천사들로부터 친구로 간주될 것이다. 이에 반해 천사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천사들이 그들의 수치와 불행을 고소하게 바라보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저주받은 죄인의 불행의 상당한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 앞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며(계 14:10) 천사는 그들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5) 그들은 곧 하나님의 심부름을 가게 될 것인 바 그 심부름은 세상 사람들에게 외고의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10절). 그들은 복음 전파에 담대해야 했다. 왜냐하면 현재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반대하는 자들보다(최후의 수단인 성령이 쏟아진 뒤) 이들을 배척하는 자의 운명은 한층 쓰라리고 엄중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 너희 안에 계신 성령의 은사와 역사를 모독하는 자의 형벌은 더욱 크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고 그의 초라한 외모에 실족하여 그를 험담하고 악의에 찬 말을 하면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구실이라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강림하고 그리스도께서 영화로우심을 받고 나신 뒤(행 2:33; 5:32) 성령을 모독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모독하고 심술궂게 반대하는 자에게는 죄사함의 특권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의한 혜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행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며 구제불능의 사람으로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와 죄사유를 베푸시기 위해 들리움을 받으셨고 너희는 그것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위탁받았으나 그런 자들에게는 바로 그 회개와 죄사유가 몰수된다." 그 죄는 한층 무엄한 죄였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성령의 비상한 은사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에 그를 모독하는 것은 더욱 절망적 죄였다. 성령의 은사나 역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었다(고전 14:22). 비록 처음에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성령을 흠모하는 자는 소망이라도 있었으나 성령을 거스려 말하는 자는 완전히 버림을 받았다.
(6) 그들은 어떤 시험에 부름을 받더라도 감당할 만한 충분한 힘을 제공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11, 12절).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충성된 순교자에게는 겪어야 할 고난뿐만 아니라 증언 곧 증거의 선한 고백도 준비되어 있어서 그는 그 역할을 잘 해내는 데만 신경을 쓴다. 그래서 그는 비록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지만 그리스도의 명분은 고난 당하지 않게 한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소관사라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할 것이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교회의 치리자들과 유대 법정, 그리고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자와 이방 통치자 앞에 끌고 가서 너희 교리가 무엇이며 그 증거가 무엇인지 심문하려고 하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인지 염려치 말라."
[1]"너희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너희 재판관을 무슨 기술과 변론으로 달래야 하며 율법상의 사술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인지 궁리하지 말라. 너희의 석방이 하나님의 뜻이고 너희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그 일을 효과적으로 해내실 것이다."
[2]"너희 주인을 섬기기 위하여 이것을 의중에 두고 당황하지 말아라. 지혜의 영되신 성령께서 마땅히 할 말과 말하는 방법을 너희에게 가르치사 하나님의 명예와 그 명분을 위하도록 하실 것이다."
세상을 향한 마음(누가복음 12:13-21)
우리가 여기에서 대하게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무리 중 한 사람이 재산 상속 문제로 예수님께 매우 부적절한 청을 드리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그와 그 형제 사이에 중재자가 되어 주시기를 원했던 것이다(13절). 그는 이런 의미의 청을 하고 있다. "선생님, 내 형에게 명하소서. 선지자로서 명하소서. 왕으로서 명령하소서. 권세로 명하소서. 그는 선생님의 말씀을 존중할 것입니다. 그에게 유업을 나와 나누라고 명하소서.
1. 혹자는 그의 형이 그에게 부당한 처우를 했기에 그가 그리스도께 바로 잡아 주시기를 호소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이 값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그의 형은 유대인들이 일컫는 대로 자기 몫의 유산뿐만 아니라 동생 몫의 재산도 삼켜버리고 동생에게 손도 대지 못하게 강압하는 Ben hamesen-즉 강포의 아들이다. 이 세상에는 그런 형제들이 있다. 그런 자들은 자연이 베푸는 공평함이나 혈육간의 우애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마땅히 애호해야 할 자들을 먹이로 삼는다. 그러나 그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호소하러 갈 대상 곧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압제받고 학대받는 자들을 위해 공평과 정의 곧 심판을 행하실 것이다.
2. 또 다른 자들은 이 사람이 자기형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경우, 율법은 장자에게 두 배의 몫을 주도록 규정하고 있고 아버지라도 자기 소유일망정 그 규례를 어겨가며 처분할 수는 없었기에(신 2:16, 17 참조), 이 자는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변개하사 자기형으로 하여금 그와 유산을 반분하도록 명령해 주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의 형은 아마 그리스도의 추종자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힘을 빌어 50대 50으로 꼭 같이 재산 분배를 받으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후자의 견해가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이 경우를 당하자 외려 pleonexi,a-즉 탐심,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할당해 주신 것 이상으로 "더욱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대해 경계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경계하신 것은 자신의 소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합법적 열망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 이상의 것을 획득하고자 하는 죄스러운 욕망이었다.
Ⅱ.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사로운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신다(14절).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종류의 일에 있어서는 정해진 상속법을 고치는 입법권이나 상속상의 분쟁을 결정하는 사법권을 행사하려 들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사의 직분을 행하셨듯 재판장이나 법률가의 직분을 행할 수도 있으셨다. 그는 질병을 치료하셨듯이 송사도 원만하게 수습하실 수가 있으셨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행치 않으신 것은 맡은 바 일이 아니었던 때문이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아마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으로 모세가 애굽에서 그 동포에게 받은 수모를 암시하셨을 것이다. 스데반은 이 일로 유대인을 질책하고 있다(행 7:27, 35).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만약 내가 이 일을 행하겠다고 나선다면 너희는 모세에게 행한 것처럼 나를 위협하러 들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의 잘못을 시정하실 뿐 그의 호소를 용납하려고 하진 않으신다. 그 일은 coram non judice-즉 온당한 재판장 앞에 내세울 일이 못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셨다. 만약 그 사람이 하늘의 유업을 추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원하여 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조력을 아끼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재산 나누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셨기에 거절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칭하지 않으셨다는데 주목하자.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것 외에는 명예나 권세도 스스로 취하지 않으셨다(히 5:5). 그는 어떤 일을 행하시든지 무슨 권세로 그 일을 행하시며 누가 그 권세를 주었는지 말씀하시면서 행하실 수 있으셨다. 이제 이 말씀은 그리스도 왕국의 속성과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신령한 나라이다.
1. 그 나라는 세속 권력에 간섭하지 않으며 스스로 군왕의 권세를 취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세속 권력에 관한 사물을 본 그대로 놓아둔다.
2. 그 나라는 세속의 권리에 대해 참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정해진 공평의 법대로 정직히 행하게 한다. 통치권은 은혜 속에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3. 그 나라는 신앙을 수단으로 세상 이익에 대한 우리의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이 사람이 장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가 이 점을 참작하사 자기형의 재산을 자기에게 주실 것으로 기대했다면 그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받는 상급은 이와 성질이 다르다.
4. 그 나라는 우리 형제와의 경쟁이나 고자세의 권리 주장을 사주하지 않고 오히려 화평을 위해 우리 권리의 양보를 권면 한다.
5. 그 나라는 사역자들에게 이 생의 일에 얽매이는 것(딤후 2:4)과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행 6:2)을 허용치 아니한다.
Ⅲ.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빙자하여 청중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하신다. 그리스도는 인간들의 재산 분배자가 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물질에 대한 인간 양심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자에게 부패한 원리를 품지 않도록 하라고 주의를 시키신다. 그 부패한 원리는 그들이 타인 속에서 발견한 일만 악의 뿌리 곧 탐욕인 것이다.
1. 경고. "삼가 모든 o`ra/te -즉 탐심을 물리 치라(15절). 너희 자신을 살피고 탐욕이 너희 마음에 몰래 들지 않도록 너희 마음을 지켜보며 자신을 살피고 탐욕이 너희 마음에 몰래 들지 않도록 너희 마음을 지켜보며 자신을 fmla,ssesqe -즉 보존하라. 탐욕스런 원리가 너희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굳게 네 마음을 장악하라." 탐심은 우리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자주 경고 받아야 할 죄다.
2. 경고의 이유, 또는 이 경고를 시행하기 위한 논증.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의 행복과 안락은 이 세상 재물의 소유에 달려 있지 않다."
(1) 사람의 영혼이 재물에 의존하지 않음은 명약관화하며 영혼은 곧 사람이다. 세상 재물은 영혼의 본성과 부합하지 않으며 영혼의 필요를 공급하지도 못하고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하며 영혼만큼 오래 지속하지도 않는다.
(2) 뿐만 아니라 신체의 생명과 행복도 세상 재물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왜냐하면 적은 재물을 갖고도 만족스럽게 생활하며 편안히 세상을 살아가는 자도 많기 때문이다(거룩한 사랑이 있으면 나물 반찬만 있어도 기름진 것이 가득한 잔치상보다 낫다). 반면에 굉장히 세상 재물을 많이 갖고도 매우 불행하게 사는 자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들은 굉장히 풍부한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위안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전 4:8). 아합이나 하만처럼 넉넉하게 소유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는 자도 많다. 그렇다면 그들의 넉넉함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는가?
3. 비유를 통한 설명. 비유의 요점은 세상 속물들이 사는 동안에 연출하는 어리석음과 죽을 때 노출시키는 불행을 나타내는 데 있다. 이 비유에는 다른 세계 및 자기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이 재산에 대한 생각만 갖고 그리스도께 나아온 자를 억제하기 위한 목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필요한 경계의 시행을 강조하는 데도 목적이 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자의 삶과 죽음을 통해 과연 그가 행복한 자였는지를 판단하게 해 준다.
(1) 여기에는 부자의 풍부한 세상 재물에 관한 설명이 나온다(6절).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밭은 cw,ra -regio -즉 지방이란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는 한 지방을 소유했으며 지방의 주인 즉 소군주였다. 그의 재물의 대부분은 땅의 소출에 있었다는데 주목하자. 왕도 밭의 소산을 받기 때문이다(전 5:9). 그는 매우 많은 밭을 소유했고 그의 밭은 소출이 풍성했다. 밭이 많으면 소출도 더 많을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더 많은 땅을 소유할 수 있었다. 땅의 소출이 풍성함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흔히 악인에게 주시는 축복이며 악인에게는 그런 것이 오히려 올무가 된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앞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나 미움을 판단하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해서다.
(2) 여기에는 부자의 마음의 움직임이 묘사되고 있다. "심중에 생각하였다"(17절).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중에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알고 관찰하시며 우리는 하나님께 그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진다. 하나님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고 심판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만약 우리 생각이 자유롭게 감추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부자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자기 밭의 소출이 굉장함을 보자 하나님게 감사하거나 보다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기회을 기뻐하기는커녕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힌다. 그는 마치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 어찌 할꼬?" 한끼의 끼니를 어디서 떼워야 할지 모르는 그 지방에서 제일 가난한 거지라도 이보다 걱정스러운 말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안한 염려와 걱정은 이 세상의 풍부한 재물에 공통적으로 따라 다니는 열매이며 풍부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에게 공통되는 결점이다. 사람이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번민도 더욱 많으며 소유의 보존과 증식에 더욱 애쓰게 되며 어떻게 절약하고 어떻게 소비해야 할지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부자가 아무리 넉넉해도 그 넉넉한 것이 편안한 잠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생각하느라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는 한숨을 쉬면서 "어찌 할꼬?"하고 말하는 것 같다. 만약 여러분이 "왜 그러시오? 무엇이 문제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재물이 넉넉하여 쌓을 장소를 원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문제는 그것이 전부였다.
[2]그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인가? 이것 역시 그의 걱정하는 결과로써 이루어진 것인데 그가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것이었다(18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내 곡간이 너무 적으니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그러면 나는 안심해도 될 것이다." 이제 그의 어리석음을 고찰해 보자.
첫째, 땅의 소산을 "자기의 곡식과 물건이라고 부른 것이 어리석은 짓이다. 그는 내 곡식, 내 물건이란 점에 특히 강조점을 두고 즐겨할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라고 "빌려 주신" 것이므로 그 소유권은 아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물건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주님의 토지를 경작하는 소작인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은 "내 곡식"이며 "내 포도주"라 하신다(호 2:8, 9).
둘째,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쌓아 두고" 생각하기를 "잘 보관해 두었다"고 한 것이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나는 거기에다 "모든 것"을 쌓아 놓겠다. 가나한 자나 자기 가족, 성직자나 이방인, "아비 없는 자나 과부"를 위해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거대한 창고 안에 쌓아 두려 하였다.
셋째, 이와 같이 만족스런 "조건"으로 그의 "마음"도 흥분된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자기의 땅이 평소보다 많은 소출을 내자 내년에도 이보다 더 많은 소출을 낼 줄 알고 더 풍성한 수확을 걷으리라 여겨 지금보다 더 큰 창고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애굽의 예와 같이 보통 풍년이 온 다음엔 흉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흉년을 대비해 얼마나마 "저장"해 두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었다.
넷째, 새 창고를 지으면 자기 근심이 덜어질 줄 알았던 것이 또 한 어리석은 점이었다. 왜냐하면 창고를 지으면 오히려 그의 걱정이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집을 짓는 자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무절제한 근심을 치료하는 하나님의 비방은 언제나 그 효과를 나타내지만 세상적인 비방은 언제나 그 근심을 더할 뿐이다. 오히려 세상적인 방법을 씀으로 해서 다른 근심이 닥치게 된다. 곡간이 크면 클수록 근심은 커지게 된다(전 5:10).
다섯째, 이 이 일을 궁리하고 결심하는데 "반성도 없이" "성급하게 한 것이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내 이 이 일을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큰 것을 지으리라. 내가 그 일을 이루리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리라"(약 4:13-15)와 같은 조건일랑 염두에 둘 필요도 없다고 한다. 독단적인 계획은 어리석은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시간이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으로써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3]그를 이런 계획에 만족하게 만든 그의 "즐거운 희망"과 "기대"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든 상관없이 내가 이룬 안전 대책에 의지하여 내 영혼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이 곡간에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절). 그가 자기의 부(富)를 얻으려 애쓴 것이 어리석었던 것처럼 이제 그 얻은 부를 즐기는 데에도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 있다. 첫째, 풍요로써 얻은 위안을 그 풍요와 관계된 계획을 실행할 때까지 연기한 것이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더 큰 곡간을 짓고 그곳을 가득 채운 후에야(그 동안 상당한 시간이 흘렀으리라) 그는 "안심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왜 그 위안을 얻을 수 없었던가? 그로티우스(Grotius)는 여기서 파이루스(Pyrrhus)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파이루스는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한 대가로 시실리, 아프리카 등 많은 지역의 통치자가 될 예정이었다. 가의 친구 사이네아스(Cyneas)가 물었다. "좋아요, 그런 후에 우린 무얼 해야 하지요?" 그가 대답했다. Postea vivemus-즉 그리고 나서 살아야지 그러자 사이네아스는 At hoc jam licet-즉 우리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을텐데 하였다 한다.
둘째, 새로 지은 큰 곡간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더 "안전한"것 인줄 믿고 이젠 자기 물건들이 "여러 해 동안 비축될" 수 있다고 여긴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번갯불같이 막을 수 없는 불로 인해 곡간과 곡간 안에 쌓아 둔 물건들이 순식간에 타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수년이전 기간 동안이면 상당한 변화가 있기 마련이다. "곰팡이와 녹이 쓸 것이며 도둑이 들어 훔쳐 갈 것이다."
셋째, 이 세상의 풍성한 재물을 쌓아 두고 "안심"한 것아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세상의 풍요한 재물 속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이 많음을 깨닫지 못하였다. 한 마리의 죽은 파리가 값비싼 향수를 망가뜨릴 수 있으며 깃털 속의 가시 하나로 침대 전체의 깃털을 긁어 낼 수도 있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질병, 친척간의 불화, 특히 양심의 가책 등으로 사람은 불안에 빠지게 되며 그런 자들은 늘 이 세상의 재물을 탐하며 사는 자들이다.
넷째, 자기가 가진 재물로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외엔 다른 용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 또한 어리석었다. 그 재물을 가지고 남에게 선을 행하여 하나님과 그의 세대를 섬기는 일에 보다 충실하려는 생각은 없이 그저 육적인 데에 매달려 정욕의 욕구를 만족시키는데 그친다. 마치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인간의 행복을 최대의 정욕 충족에다 두고 사는 것처럼 지낸다.
다섯째, 게다가 이런 얘기를 자기 "영혼"에다 한 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이있다. "내 몸아, 편안히 지내자. 너는 수년 동안 재물을 쌓느라 고생하였다"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육체와 상관없는 영원 불멸의 영혼에게 말했다. 영혼이란 아무리 곡식이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 창고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전혀 상관할 바 없는 것이다. "돼지의 영혼"을 지녔다면 "먹고 마시는" 만족감에 충만하여 그것을 기뻐할 것이나 이런 만족을 통하여는 살찌워질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지닌 그가 이런 식으로 즐길 수 있을까? 세상의 자녀들이 범하는 가장 위험한 죄는 이 세상의 부(富)와 정욕의 만족 등으로 영혼의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다.
(3)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 그의 심판은 진리에 따른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부자는 스스로 이르기를 "내 영혼아 편안히 쉬자" 하였다. 하나님께서도 그처럼 말씀하셨더라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영혼이 편안하도록 지켜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그의 심판에 따라 우리가 서든지 쓰러지든지 하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고전 2:3, 4). 친구들도 축복하고(시 10:3)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이 칭찬할지라도(시 49:18)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쁘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즉, 그의 양심이나 어떤 깨달음의 섭리를 통해 그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알려 주신 것이다. 이 말씀은 그가 "충만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들려졌다(욥 20:22). 침대에서 일어나면서부터 곡간을 늘일 걱정과 계획으로 눈코 뜰새 없이 지내던 때였다. 있는 건물에다 헛간 한두 개 정도 증축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렇게 했더라면 적당한 판단을 받았을 것이다) 완전히 허물어버리고 더 큰 것을 지을 심산이었다. 이는 그의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계획이었다. 이 모든 계획을 마음속에 그리며 하나씩 실천에 옮겨가면서 앞으로 수년간 누릴 이와 같은 풍요를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던 "그 때" 하나님께선 그에게 이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벨사살(Belshazzar)도 이같이 희희낙락하던 중에 벽에 쓰여진 손글씨에 의해 충격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고찰해 보자.
[1] 그에게 붙여진 명칭. "어리석은 자여" 하였다. 나발(nabal)의 이야기를 암시하면서 "나발 같은 자여"라고 부르신다. 나발은 양털을 많이 깎았다고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세상의 육적인 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임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여"하고 부르시며 그들도 서로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게 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
[2] 그에게 내린 판결. 그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오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는 자기 재물을 수년 동안은 그의 소유로 지니게 되리라 생각했었으나 "그날 밤" 그 재물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그 재물로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자기도 모르는 엉뚱한 작자에게 그 즐거움이 넘겨지게 되었다. 육적인 세상 재물들을 잃는 것은 그 자체가 불행일 뿐 아니라 두렵게 느껴짐을 유의하자.
첫째, 그것은 "폭력"이고 "강제"였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의 "영혼을 거두어 감"은 두려운 사건이다. 좀 더 나은데 쓸 수도 있었는데 그 귀한 영혼으로 무엇을 했느냐? 네 영혼을 "거두어" 가리라. 이 말씀은 그가 영혼을 잃기를 심히 두려워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세상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선한 자들을 죽음의 순간에 기꺼이 자기 영혼을 내주어 하늘에 오르도록 기다린다. 그러나 세상적인 사람은 강제로 그에게서 "뺏어가기"까지 버틴다. 이 세상을 떠난다는 사실이 그에겐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 영혼을 거두어 가리라."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거두실 것이다. 그 영혼의 업적을 거두실 것이다. "인간들아, 너희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그 성과를 내 보이라." "그들이 거두어 갈 것이다." 즉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을 수행할 약한 천사들이 거두어 갈 것이다. 은혜 입은 영혼은 선한 천사들이 받들어 기쁨으로 인도하듯 약한 영혼은 약한 천사들이 받아들여 시련의 곳으로 안내한다. 죄지은 영혼은 형벌을 받아야 하기에 그들은 그 영혼을 "거두어 갈" 것이다. 악마는 당신의 영혼도 자기의 것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자기 소유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은 "전혀 뜻밖의" "놀랄 수밖에 없는" 강제집행이다. "밤"중에 그 일은 일어난다. 밤중에 생기는 공포는 무엇보다 두렵다. 선한 사람에겐 죽음의 시간이 낮 시간이다. 그 시간은 이제 그에겐 새 아침이 된다. 그러나 세상재물에 매인 자들에겐 그 시간은 밤이다. 아주 깜깜한 밤이 된다. 그는 "슬픔 속에 눕게 된다." 바로 "오늘 밤." 연기되지 않는 지금 "이 밤"인 것이다. 보석을 받거나 하루쯤 연기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다. 앞으로 다가올 수년을 약속하던 바로 오늘 밤 그대는 죽을 것이며 심판을 받으러 가야만 할 것이다. 수많은 날들의 기쁨과 수많은 밤의 즐거움, 기쁨의 축제를 생각하며 쾌락을 누릴 것이나 바로 이 모든 생각 중에 종말이 다가온다(사 21:4).
셋째, 지금까지 수많은 수고와 근심으로 앞날을 위해 "예비하였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떠나야 한다. 그들의 행복을 심었고, 희망을 걸었으며 큰 기대를 걸었던 이 모든 것들을 뒤에 두고 떠나야만 한다.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사 49:17). 그들은 이 세상에 왔을 때의 모습 그대로 벌거벗은 채로 세상을 떠나야 하며 지금까지 세상에 쌓아 놓은 것으로 죽음이나 심판이나 영원히 살아야 할 그 세상에서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
넷째,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남겨 주어야 한다.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네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네가 원하는 자들, 네 자녀나 친척들에게 제대로 쓰여지게 될지 그 여부조차 알 수 없다. 그들이 슬기로운지 어리석은지조차 알 수 없으며(전 2:18, 19) 그 재물로 너를 기억하며 고맙게 여길지 아니면 오히려 너를 저주할지 알 수 없으며, 네 가족에게 유익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도 알 수 없으며, 그들에게 남겨 준 그 재물을 가지고 선을 행할지 아니면 해로운 일을 할지 알지 못하며, 네 재산을 유지해나갈지 아니면 낭비할지조차 알 수 없다. 반면에 네가 네 재물을 유산으로 넘겨주고자 생각하고 있는 자가 그 재물로 기쁨을 얻지 못하게 되며 오히려 별로 생각지도 않았던 자가 네 재물로 큰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을 알게 된다. 네가 그 재물을 넘겨 줄 자는 알 수 있지만 그 재물이 다시 누구에게 넘어 갈지는 알 수 없으며 결국엔 누구의 손으로 들어갈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인간이 만약 자기가 죽은 후에 자기의 집이 누구에게 넘어갈지 알 수만 있다면 그집을 아름답게 꾸미기 보다는 오히려 불을 지르려 할 것이다.
다섯째, 그의 어리석음이 밝히 들어났다. 육적인 세상 재물을 탐하는 자들은 생명이 붙어 있는 동안은 "어리석은 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다"(시 49:13). 그런데 그들이 죽고 난 후 그들의 어리석음은 가장 밝히 드러나게 된다.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왜냐하면 죽고 나면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고생하며 쌓아 논 재물들을 죽는 순간 허둥지둥 떠나면서 가야 할 그 세상에는 아무 것도 쌓을 재주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비유를 통한 교훈을 하신다(21절). "자기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그는 어리석은 자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어리석은 자이다. 이것이 그와 같은 자가 가야 할 길이며 그 결과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a. 세상적인 사람에 대한 묘사. 그는 "자기를 위하여," 몸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과 대항하여 자신을 위하여, 부정되어야만 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이다.
(a) 자기의, 마치 몸을 인간으로 오해하듯 육체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 것이 그의 과오이다. "자아"를 올바로 이해하고 대우한다면 그것은 오직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며 "유익한 지혜를 소유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만 가능하다.
(b)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다고 하면서 실지로는 "육만을 위하여 쌓는 데"만 전념한 것이 그의 과오이다. 그의 모든 노력은 "자기 입을 위한 것이며"(전 6:7) 육을 위해 예비하는 것뿐이다.
(c) 이처럼 세상과 육체와 현재의 생활을 위하여 "쌓아 둔" 재물들을 자기의 "보화"로 여긴 것이 또한 그의 과오이다. 이 재물들을 신뢰했고 낭비했으며 그것에 자신의 애정을 쏟았다.
(d) 무엇보다 가장 큰 잘못은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일에 부요치 못했고, 우리를 부요케 하시는 그 하나님(계 2:9)께 부요치 못했으며, "하나님의 사업과 신앙"에 부요치 못했고(약 2:5) "선행"에 부요치 못했고 "의로운 열매"에 부요치 못했으며(딤전 6:18), 은혜, 평강과 영적인 은사에 부요치 못했다. 세상의 재물을 탐하는 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부요케 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케 하고 영원한 세계에 부요케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b. 세상적인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행도 "이와 같으니라." 사물의 마지막을 아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와 같은 자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여기에 말씀해 주셨다. 저 세상의 부요보다 이 세상의 재물에 온 맘을 기울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음임을 명심하자. 영혼이나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살 시간을 걱정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무절제한 근심 걱정을 꾸짖으심(누가복음 12:22-40)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 몇 가지를 일러주신다. 전에도 이에 대해 수 차례 말씀하신 바 있었으며, 이후에도 자주 강조해 주지시키셨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겐 "교훈에 교훈을, 경계에 경계를 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재물에 대한 무절제한 탐욕과 애착으로 생겨지는 불행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자들아 이 점을 명심하라."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딤전 6:11). 그리고 너 세상의 사람아 너도 이것들을 피하라.
Ⅰ.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먹고 살 필요한 것들에 대해 근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신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22절). 앞서 들려 준 비유를 통하여 그는 우리에게 세상의 부자들이 빠지기 쉬운 탐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치셨다. 즉, 이 세상 재물의 풍부함으로 "육적인 만족"에 빠지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이런 위험에 빠질 염려가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즐길 만한 재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또다른 빠지기 쉬운 오류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이 세상 재물이라곤 거의 가진 바 없는 그들로서 빠지기 쉬운 오류를 경계하셨으니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떠난 저희들이 매일 먹을 양식 때문에 "조바심하며 걱정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위태로울지라도 목숨을 유지하기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음식이든 의복이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목숨을 유지할 방법으로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은 마태복음 6장 25절 등에서 중요하게 여기며 주의했던 내용이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되는 설명 방법도 대동소이한 것이어서 우리의 모든 구실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세상 걱정을 버리고 "안심하며 살 수 있는 바른 길"임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이제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우리를 위하여 큰 일도 해 주신 하나님께서 보다 작은 일도 맡아 해결해 주실 것이다. 그는 우리가 걱정하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도 우리에게 "생명"과 "몸"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양식"과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그에게 의지해도 좋을 것이다.
2. 보잘 것 없은 피조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돌봐 주실 것이다. "먹을 것이라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까마귀도 기르시는 분이다(24절).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어떻게 지낼까 미리 근심하거나 수고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굶어 죽게 버려 두시는 일이 없다.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한가 생각해 보라. 입을 것이라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백합도 입히시는 분이다(27, 28절). 백합은 어떤 옷을 입을까 준비함이 없다.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며 땅에 묻힌 뿌리는 발가벗겨 아무 치장한 것도 없으나 꽃이 되면 참으로 아름답게 옷을 입히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있다가 없어질 것들도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네게 썩 잘 어울리는 옷으로, 현재 지니고 있는 너의 본성에 꼭 맞는 옷으로 너를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이실 때 그는 또한 그들의 입을 것도 마련해 주셨다. 새옷으로 갈아입히시지는 않았지만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입은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해 주셨다(신 8:4).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도 또한 이렇게 입히실 것이다. 그때에 믿음 없는 자처럼 되지 말도록 하자. 무절제한 근심은 믿음이 약한 때문임을 명심하자. 모든 것이 풍성한 하나님,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와 맺은 계약의 관계, 그리고 특별히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삶과 관련되어 약속된 그의 섭리에 대한 강하고 확실한 믿음은 이와 같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모든 불안의 장벽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무너뜨릴 수 있도록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3.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쓸모없고, 효과없고 별로 중요성이 없는 것이므로 그 안에 몰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걱정한다고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으므로 오히려 우리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25절).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를 더 할 수 있느냐? 한 치라도 더 할 수 있으랴? 나이를 한 살 더 할 수 있겠느냐? 한 시간이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이처럼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히 못하거든, 네 신체조건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네게 없거든 어찌 다른일로 염려하느냐? 네 능력 밖의 것으로 어찌 염려하느냐? 그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우리의 "신체적 조건" 뿐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에서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후회나 조바심, 걱정과 근심을 한다고 없는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 아무리 필수적인 물건이라 할지라도 그 세상 재물에 대해 무절제한 탐욕을 가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겐 해를 끼치는 일이 된다(29, 30절).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게 하든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라. 번거로운 걱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끊임없이 닥쳐오는 근심거리로 약해지지 말라. 다윗의 적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이리저리 방황하듯(시 59:15), 혹은 멀리 있는 먹이를 찾는 독수리같이 (욥 39:29),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이 먹을 음식을 구하지 말고 다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하리라. 믿음이 적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mh. metewri,zresqe-즉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공중의 유성과 같지 말 것이며, 유성과 같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인생이 되지 말고 너희 자신을 굳게 지키라. 끈기있고 침착하게, 네 마음을 단단히 가지라. 근심하는 초조함으로 살지 말라. 괴로운 순간이 닥칠지라도 희망과 절망 기운도서 헤매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면 불안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런 걱정을 하면 세상의 자녀들과 같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다(30절). 그들은 오직 자기 몸만 걱정하고 자기 영혼은 돌보지 않으며,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저 세상에는 눈도 돌리지 않으며, 먹고 마시는 것 외엔 전혀 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거나 그 안에서 위로를 구하지 못하는 관계로 그들은 항상 이런 것들에 대해 조바심을 가지고 걱정 속에 살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이 너희에게 마땅한 것이 안 된다.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너희일진대 이처럼 이 세상에서 위안을 구하며 이 백성들의 길로 가려는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사 8:11, 12). 걷잡을 수 없는 세상 걱정이 너희를 덮는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가 세례 받은 자인가 아닌가? 세례 받았다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방인들과 같이 되어 그들이 구하는 것을 함께 구해서야 되겠는가?"고 반문해 보도록 하라.
(2)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근심한다고 해결된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며 또한 근심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고 인정해 주시며 영광 중에 있는 그의 부요하신 은혜에 의하여 너희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너희 아버지시며 너희가 이와 같은 것들로 살아가도록 만드신 분이므로 그에 따라 맞는 방도도 마련해 주실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를 키우시며, 교육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유업을 마련하시며 너희가 선한 일을 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당하실 너희 아버지이시다."
(3)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그들이 걱정하고 추구해야 할 보다 값진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31절).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제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자들이다. 너희 사명에 너희 온 정성을 기울여라. 어떻게 하면 이 사명을 잘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온 마음을 쏟으라. 그렇게 되면 이와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세상 걱정으로부터 네 고민이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영혼을 지닌 자들에겐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일러주어라. 그 곳에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라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자격을 갖추고 그리고 전진하라. 그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하여 은혜의 나라를 구하라. 그 나라 임금이 되기 위하여 영광의 나라를 구하라. 그렇게 되면 거기에다 이 모든 것이 더하여 질 것이다. 부지런히 그리고 신중하게 너희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라. 그리고 다른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 맡기라."
(4)하나님의 자녀들에겐 그들이 기대하고 바랄 더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하지 말라"(32절). 걷잡을 수 없었던 근심이 사라졌으니 두려움도 사라질 수밖에, 무언가 불행이 닥쳐올 것이 예상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피할 수 있을까 하여 노심초사하게 된다. 결국 그것이 한낱 우리의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판결되기까지는 늘 걱정된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끝까지 지켜보라"고 한다. 왜냐하면 "너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는 것이야말로 너희 아버지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선 이와 같은 위안의 말씀을 읽어보질 못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의 무리는 "적은 무리"이다. 그의 양떼는 적고 힘없다.
이 세상의 황야에 비교할 때 교회는 포도밭이며, 등산이며 작은 풀밭에 지나지 않는다. "아람 사람들이 땅에 가득 차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잘 것 없은 양떼처럼 지낸 것과 비교될 수 있다(왕상 20:27).
[2] 비록 그 적보다 숫자적으로 "열세"이며 따라서 적에게 "정복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적은 무리가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의 보호와 보살핌 아래 있음을 깨닫고 편안히 있으라."
[3]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에 속한 자들을 위해 "세상의 임금이나 제왕들"의 어떤 보화보다도 귀한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권세의 보좌(계 3:21), 측량할 수 없는 부요와 "한나라를" 예비해 놓으셨다. "오른편에 있던 양들은" 불리워 "그 나라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하신다. 이제 그 나라는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된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4] 그 나라는 아버지의 "기뻐하심"에 따라 주어진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빌려주는 것이 아니며 은혜, 값없이 주시는 은혜, 최상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심은 너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그 나라는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겠는가?
[5] 그 나라를 믿고 기대하며 그 나라에 대해 소망을 두게 됨으로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가 이 세상에서 가졌던 걱정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 걱정도 말아라. 근심이 생기더라도 그 근심이 너와 그 나라를 이간시키지는 못하리라. 그 나라는 확실한 것이고 또 가까웠기 때문이다"(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것 그것 자체는 악이 아니다). "네게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너희 아버지께서 기뻐하신다면 너희는 그것에 대해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그것에 너희 모든 것을 맡기기만 하면 된다."
Ⅱ.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그들의 보화를 쌓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일을 하도록 분부하셨다(33, 34절). 이런 일에 소홀하지 않은 사람은 언제 종말이 닥칠지라도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1. "이 세상과 이 세상 안에 있는 너희 소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두지 말아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 즉 "진짜로 너희에게 꼭 있어야 할 것으로 구제하라는 말이 아니라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너희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 외에 남는 여분을 팔아 그것을 가난한 이에게 주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섬기는데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팔아라. 예수를 증거 했다는 이유로 벌금을 물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배척을 받은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비록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너희 소유를 팔아야만 한다. 돈을 쌓아 두거나 비상시에 쓸 수 있도록 비축해 두기 위해 소유를 파는 것이 아니라 팔아서 구제해야 한다. 정당한 방법으로 구제한 것으로 너희는 가장 확실한 보장 속에 가장 유익한 저축을 한 셈이 된다."
2. "너희의 마음을 다른 세상에 두라.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비거나 돈으로 채운 주머니가 아니라 삶 속에 쌓아 온 선행과 정성으로 이루어 온 은혜로 채우라. 이런 주머니야말로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을 영혼 속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한 선행도 우리를 따를 것이니 하나님께선 그것을 잊어버리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원히 우리를 부요케 만들 "하늘나라의 보화"인 것이다.
(1) 그것은 "소멸해" 없어지지 않을 보화이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가서 그것을 쓰게 될 것이나 그것은 전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바닥이 드러날 걱정 같은 것은 안해도 될 것이다.
(2) 도둑맞을 걱정은 안해도 될 보화이다. 왜냐하면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쌓아 놓은 보물은 적들도 어쩔 수 없다.
(3) 그것은 "쌓아 놓아서 상할 것"도 아니고 "쓴다고 마멸될 것"도 아닌 보물이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의복들처럼 "좀도 먹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이곳에 살지만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알 때, 하늘나라에 더 신경을 쓰고 주목하고 있음을 걱정하며 항상 그 희망 속에 살면서 깨어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늘에 우리의 보화를 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34절). 반면, 너희 마음이 땅과 땅의 재물에 있다면 땅에 있는 너희의 재물과 지위로 두려워할 것이며 이 세상을 떠날 때 너희는 너희 재물에 대해 아무 손도 못쓰게 될 것이다.
Ⅲ.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분부하신다. 그가 오실 때엔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둔 자만이 그 나라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35절 이하).
1.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들"이다. 단순히 "일하는" 종들이 아니라 또한 그를 "기다리는" 종들이다. 그 "기다리며," 그의 분부를 대기하며 그의 영광을 위해 일할 준비 갖춘 종들이다. "나를 섬기려는 자들은 나를 따를지어다." 어린양이 어디를 가든 그 뒤를 따를지어다. 그러나 이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를 기다리며," 그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그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 우리는 "주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있어야 한다. 그들은 아무리 밤이 늦었다 하더라도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자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2. 그리스도는 지금은 비록 "우리를 떠나셨으나 다시 돌아오실" 우리의 주인이시다. 해외에 있었던 결혼식을 축하하고 이제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결혼"을 완전히 이루려고 돌아오실 주인이시다. 그리스도의 종들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자기의 주인이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를 고대하며" 그 "영광스런 출현"에 합당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는 "오셔서" 자기 종들이 한 일을 살펴보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은 "심판의 날"이기 때문에 그날에 나타난 그들의 형편에 따라 혹은 그와 함께 머물고 혹은 문 밖으로 내쫓기움을 당할 것이다.
3. 우리 주님이 돌아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치 않다. 그 때는 "밤중"일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다 지쳤고, 이미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훨씬 지난" 어느 날 한밤중일 것이다. 자정 바로 전인 "이경"이나 아니면 자정 바로 후인 "삼경"일 것이다(38절). 그가 우리에게 오실 때는 불확실하며 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는 생각하지 않은 때에" 전혀 예고도 없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40절). 이 말씀은 그가 오실 때의 불확실성을 말할 뿐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 비밀로 붙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은 나타난 재림의 징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던 관계로 그가 오실 때는 "그들이 생각지 않은 때"일 수밖에 없다.
4. 주인이 종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바는 그가 언제 오더라도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다(36절). 즉 언제나 그를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영접을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는 것이다. 주인은 그의 종들이 문을 열었을 때 주인이 보내는 곳이면 어디라도 가며 주인이 시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도록 긴 도포자락(사실 긴 옷은 일하는데 방해가 될 것이다)을 자르고 종의 신분에 맞게 "띠를 띄고" 있으며, 주인을 집안으로 인도해 그의 방으로 모실 수 있도록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5. 주님이 오셨을 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종들은 행복할 것이다(37절). 오랫동안 기다렸음에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첫번 문을 두드릴 때 알고 맞이하러 나가는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고 또한 그 때는 그들이 승진하는 때가 될 것이므로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38절)." 세상 사람들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영광이 이제 그들에게 내릴 것이다. "주인이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을 들리라." 신부가 신랑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것은 별 이상한 일이 못되나 주인이 종들의 시종을 드는 것은 "인간사가 아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수도께선 제자들 가운데서 "수종드는 본"을 보이셨으니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그는 "띠를 띄고 그들의 수종을 들어 그의 겸손을 나타내셨다(요 13:4, 5). 이것은 먼저 가신 "주 예수께서" 그의 종들을 위해 마련할 그들의 받을 하늘나라의 기쁨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그의 "아버지"께서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요 12:26).
6.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오실 때가 불확실할지라도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공격이 언제 시작될지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가 그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 별로 자랑거리는 되지 못한다. "집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부주의한 자라 할지라도 "깨어 있다가" 도적을 물리칠 것이다(39절). 그러나 우리는 언제 경계 신호가 울릴지 알지 못하는 고로 경계하고 있어 주의 흐트러서는 안 된다. 또한 이 말씀은 부주의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 마지막 날에 당할 불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집주인이" 만일 어느 날 밤에 도적이 침입할 것이라는 눈치를 챘다면 조심하고 그의 집을 지킬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숨어있는 죄인들을 멸망시키시려고 "밤중에 도적처럼" 주의 날이 임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준비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 집에 대해 이렇게 하지만 어찌 우리는 우리 영혼을 위해 이처럼 현명하지 못한 것인가!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고" 대비하듯 "너희도 이처럼 준비하고 있으라."
근면을 가르치심(누가복음 12:41-53)
위 구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베드로가 위에서 들려주신 비유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질문하였다(41절). "주께서 이 비유를 항상 당신을 따르고 있는 우리에게, 목회자인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 오는 모든 사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전에는 종종 그랬듯이 여기서도 제자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나서서 사람들의 입장을 밝혀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런 직분을 즐겨 가지는 자들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시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가 앞서 인용한 비유의 촛점이 무엇인지 밝혀 주시길 바라고 있다. 그는 그 말씀을 "비유"라 부르고 있다. 이는 그 말씀이 추상적일 뿐 아니라 무게 있고 뭔가 중요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주여, 이 말씀은 "우리"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이것이 베드로의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간단하게 대답하셨다(막 13: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그런데 여기에선 제자들이 우선 그 말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을 지시하시려는 듯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우리를 위해 그 말씀을 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도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아니 바로 저게 하심이니이까? 말씀하소서 주여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이라면 내 심중에 말씀하시어 깨닫게 해 주소서"라고 말해야 한다.
Ⅱ. 베드로와 그 외의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대답. 그리스도께서 앞서 하신 말씀이 특별히 제자들에게만 국한하여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항상 깨어 "주님의 종"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실 날을 기도하고 있는 모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신 말씀이라면 그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의 집에서 "청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을 살펴 보라.
1. "청지기"로서 그들이 가질 "의무"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
(1) 그들은 하나님의 집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 아래서 "그의 집 종들을 맡을 자"가 되었다. 목회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성례를 집행하며 은혜의 계약을 선포할 자격을 그리스도로부터 얻었다.
(2)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에게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일이다. 분수에 맞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Suum cuique-즉 모든 사람에게 각자 그 분수대로 이것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다(딤후 2:15).
(3) "때를 따라" 주어야 한다. 즉 양식을 받을 자들의 성질과 형편에 맞는 시기와 방법에 따라 주어야 한다. "약한 가운데 있는" 자에게 "적시에" 말씀을 전해야 한다.
(4) 이렇게 함으로 그들은 자연히 "지혜 있고 진실한" 종들이 되어 간다. 그들의 주인에게 "진실해"진다. 그로 인하여 이와 같이 막중한 신임이 그들에게 내려졌으며 동료들에게도 신임을 얻게 되었다. 주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위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인에게 영광을 돌리며 가정에서 주인을 섬기는 일을 할 때 기회를 잃지 않고 유용할 수 있도록 "지혜롭게" 되어간다. 목회자라면 명실공히 "재치 있고 진실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이 진실하고 지혜롭게 되었을 때 얻어지는 행복(43절).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1) 그 종은 "행하는" 종이다. 어리석거나 태만에 빠진 종이 아니다. 집안의 종을 부리는 자일지라도 "행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 "모든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2) 그 종은 마땅히 해야 할 방식대로 행하는 종이다. 대중설교와 개별적인 훈계를 통하여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이다.
(3) 그 종은 주님이 오셨을 때에도 그렇게 행하고 있음을 "보여 주게" 된다. 그는 도중에 만나는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 나갔다. 이제 그의 행복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일에 충성한 종이 승진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에겐 보다 크고 중요한 자리로 승진하게 될 것이다(44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이는 바로의 궁전에서 요셉이 승진하던 것과 비교된다. 주님으로부터 진실했다는 인정을 받은 목회자들은 마지막 주님의 날엔 그들의 충성의 보상을 풍성히 받게 될 것임을 명심하자.
3. 만약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불성실했을 때 당해야 할 무서운 형벌은 무엇일까?(45, 46절) 만일 그 종이 처음부터 속이고 말썽만 부리는 식으로 시작했다면 결국 그 대가대로 보상을 받아 지독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미 마태복음에서 이와 같은 경우에 받는 벌의 내용에 대해선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다음 몇 가지 사실만 지적하고 넘어가자.
(1) 그리스도의 재림을 건 미래에 생길 일로 여김으로 인해 이와 같은 우리에게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생활의 불성실이 생겨나게 된다. "그는 스스로 자기 마음에 말하기를 우리 주님께서 오실 날을 미루고 계신다 하도다." 그리스도께서 "미루시는" 중에 나타나는 그의 "인내"는 그의 백성들에겐 "실망적인"것이 된다. 그리고 그의 적들에겐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2)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은 보통 방심과 환락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들은 "도시 수사가 곤경에 처해 있음도 잊은 채 앉아 마시고 있다" 하만과 왕들처럼 자신의 죄나 이웃의 고통엔 관심도 없이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된다." 그들은 이처럼 술 취함으로 자신의 양심에 폭탄을 던져 산산조각을 내버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양심이 고개를 쳐들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3) 악한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죽음과 심판은 무시무시할 것이다. 악한 목회자에게는 더할 것이다. 그 심판은 그들에게 굉장한 두려움이 될 것이다.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임할 것이다. 끝없는 불행이 그들에게 선포될 것이다. 그들은 갈기 갈기 찢겨져 "불신자"와 함께 처분 당할 것이다.
4.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은 죄의 결과를 얻을 형벌은 어떤 것일까(47, 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보다 지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앞의 종에 비해선 적게 맞으리로다." 이것을 보면 무지해서 지은 죄와 의도적인 죄를 구분해서 벌하는 율법(레 5:15 이하; 민 15:29, 30)을 암시하는 것 같고 또한 그 죄의 질에 따라 죄수에게 태형을 가하는 율법(신 25:2)도 암시하는 것 같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책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면 죄가 다소 경감된다. 무관심했거나 무지해서 "주의 뜻을 알지 못해서" 주의 뜻을 알고 있던 다른 자들이 얻을 수 있는 선행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또 매 "맞을 일을 한" 자도 맞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도록 노력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게 맞을 것이다." 몰랐다는 것이 어느 정도 구실은 되지만 전체적으로 탕감을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지함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다(행 3:17; 고전 2:8). 그러나 그리스도께선 그들의 무지를 용서하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못하였다."
(2)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죄를 더 무겁게 만든다. 하나님께선 그가 종에게 주신 지식의 수단을 좀 더 유익한 곳에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곳에 그릇 사용한 종을 더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행위는 극단의 교만을 나타내며 지식을 이용하여 죄를 지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는 외에는 얼마나 또 많은 형벌을 받게 될 것인가! 자녀들아, 이점을 명심하라. 그리고 이런 점에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다"는 말씀이 첨가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에게 맡긴 일에 충실하였다는 평가를 얻을 경우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마음의 능력이 더 큰 자, 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지니 자, 보다 성경 말씀에 가깝고 성경 말씀과 대화를 나누는 자에겐 "더 많이 주어질 것이고" 그에 대한 신임 또한 클 것이 분명하다.
Ⅲ. 이후로 계속된 대화는 예견되는 자신의 고난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당연히 미치게 될 고난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49절)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이다.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복음 전파, 성령 강림, 거룩한 불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스도께선 이 불을 세상에 붙여 그 불로 세상의 찌꺼기를 태우고 쓰레기를 없애기 위해서 오셨으며 "이미 그 불은 붙여졌다." 복음은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강림을 예시하는 말씀으로 읽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불로 태우듯 성경으로 세례를 베푸셨다. 이 성경은 맹렬한 불길로 강림하였다. 그러한 다음에 연결되는 말씀의 문맥으로 보아 이 불은 "박해"의 불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이 불은 선동자, "박해자"들이 지르는 불이지 그리스도가 지르는 불은 아니다. 다만 그 불이 붙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다. 차라리 "불 붙기를 야기시키신다"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법하다. 왜냐하면 그 불은 "박해받는 이"의 "시련"을 통해 "단련시키는" 불이기 때문이다. 이 불은 이미 증오에 찬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붙임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무엇을 원하리오. 너희가 무엇을 하든 빨리 하라. 불이 이미 붙었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 그 불이 꺼지길 기다려야 하겠느냐? 아니라, 그 불은 내게로, 모든 사람에게로 몰려야 할 것이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큰 영광일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 자신도 많은 수난을 당해야만 하였다. 이미 붙은 불 속으로 통과해야만 하였다(50절).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고난은 "불"과 "물"로 비교된다(시 69:1, 2; 66:12). 그는 고난을 "세례"라 칭하고 있다(마 20:22). 이스라엘이 "구름 속에서" 세례 받았던 것처럼 그는 고난으로 세례 받고 적셔졌으며 이스라엘이 "바다속에서" 세례 받듯 그는 고난 속에 빠졌기 때문이다(고전 10:2). 그는 자신의 피와 적대자들의 피로온 몸이 적셔져야 할 것이다(사 63:3).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1) 자기의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의 "예견,"그는 자기가 겪어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 또한 그 고난을 겪어야 할 불가피한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줄이는" 뜻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함몰이 아닌 세례로 부른다. 박해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구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이름은 고난을 "성화"(聖化)시킨다. 세례는 성스런 예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수난을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바쳤으며 나아가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불사르셨다(히 7:27, 28)."
(2) 자신의 수난을 향한 그리스도의 "발걸음."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서 자신의 고난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런 자취를 보게 될 그때가 오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해산하는 여인의 소망과 흡사하였다. 그녀가 당하는 고통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그 고통이 심하고 아플수록 해산은 일찍 끝나고 어린아이의 탄생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영혼의 시련"이었다. 그가 이 고난을 기꺼이 받는 것은 하루바삐 "그의 씨를 보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사 53:10, 11). 이처럼 그의 마음은 인간의 구원과 구속에 몰두하고 있었다.
2. 그리스도는 자기가 겪을 이 고난을 제자들도 함께 겪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51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너희에게 세상에서 편안한 직위와 바깥으로 자랑할 만한 재물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이 말씀을 볼 때, 이미 제자들은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복음이 "전 세계적으로" 승인을 받게 되고 온 민족이 복음을 "너나없이" 받아들이며 그 복음을 배우려 몰려들어 복음의 전도자들은 "편하고" "위대한" 인물이 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허세"와 "권력"은 주시지 않을망정 적어도 그들에게 "화평"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메시야 왕국의 화평에 대해 언급한 구약의 여러 구절들을 읽게 될 때 그들은 외형적인 화평을 얻게 될 것을 기대하여 마지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너희 기대는 어긋날 것이다. 결과는 정반대로 될 것이니 너희는 바보들의 낙원에 빠지지 말라. 너희가 다 알게 되리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1)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열일 것이다." 복음의 목적과 그 일반적인 경향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는 것이며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연 그 결과는 이러할 것이지만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배척까지 하여 복음 전파로 그 마음이 더욱 굳어져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분노를 일으키기도 함으로 복음이 분쟁의 원인은 아니지만 분쟁의 실마리는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선 "강력한 군대가 그의 궁전을 호위하기"만 하면 그의 재산은 안심해도 되게 되어 있었다. 모두가 한 길로만 가니 모두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의 각 파(派)들도,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도 모두 말을 잘 들었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으로 점화되어 사탄의 권세를 떠나 하나님에게 전향한 많은 사람들이 생기자 그들이 방해거리가 되었으며 "소리가 나고 움직이게 되었다(겔 37:7)."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구별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그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다. 사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사소한 일에 대해 이견(異見)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또한 "분쟁"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이것을 허용하셨다(고전 11:18). 그리스도인들은 상호 자제하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롬 14:1, 2)
(2) "이와 같은 분쟁은 각 개인의 가정에까지 미칠 것이다. 복음 전파로 인하여 가까운 친척 가운데서도 분쟁의 실마리가 생겨날 것이다(53절)." 아들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 아버지는 거부하였을 때,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분쟁하리라."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 된 자는 열심히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설득하고 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7:16). 바울도 그가 회심하자마자 "배척받았다(행 9:29)." 불신 속에 계속 머무는 자들은 자신의 불신과 불순종을 책망하고 심판하려는 신앙과 복종 사람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며 분노를 터뜨릴 것이다. 고집과 박해의 영으로 강하다. 강하던 혈육과 친족의 유대관계도 끊어지고 말 것이다(마 10:35; 24:7 참조). "어미와 딸"들도 종교 문제로 갈라설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다른 방면에서 친하고 사랑하던 딸이라 할지라도 일단 믿는 자라면 그들을 박해자의 피묻은 손에 기꺼이 넘겨 줄 정도로 잔인해질 것이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이와 같이 복음이 들어옴으로 "박해자들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 들려지는 것이라면 어느 곳이든 이와 같은 박해가 일어났으며 복음의 길에 대해선 늘 "적잖은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들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질 수가 없다. 그들은 마치 이리떼 가운데 보냄을 받은 양들과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화해(누가복음 12:54-59)
그리스도께선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을 하신 후 이제 "무리"를 향하여 그들에게 합당한 교훈을 하신다(54절). 그는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그는 ad clerum-즉 목회자들에게 설교하셨을 뿐 아니라 ed populum-즉 무리에게도 설교하셨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무리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외형적인 삶에 지혜롭게 사는 것처럼 자신의 영혼의 문제도 지혜롭게 처리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는 특히 두 가지 일을 지적하셨다.
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며" 그에 따라 준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들은 "날씨엔 민감한 자들"이어서 바람이니 구름을 보고서도 "더울지" 혹은 "뜨거운 날씨일지" 알 수 있었다(54, 55절). 그리고 날씨를 예견하면 그에 따라 곡식을 창고에 쌓는다든지 그것을 배로 싣고 나간다든지 아니면 여행을 위해 짐을 꾸린다든지 결정하게 된다. 날씨의 변화에서까지 하나님께선 앞으로 어떤 날씨가 닥칠 것인가 미리 우리에게 경고하신다. 그리고 자연의 날씨 측정하는 방법은 날로 개발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예견"은 계속 반복되는 원인률(原因律) 현상을 고찰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되어진 것"을 보고서 "앞으로 될 것"을 점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의 유익함을 명심하라. "주어진 암시"를 봄으로써 "암시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보고" "배우는"자는 현명하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 실제 예.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히브리인들은 바다에서 일어난다고 하기도 한다) 보면 또는 처음 생긴 구름이 손바닥만한 것을 본다면 소나기가 쏟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증명된다. 또 남풍이 붐을 보면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아프리카 대륙이 유대 남방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과연 그러하리라." 그러나 자연 자체는 그와 같은 틀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 예측이 빗나갈 때도 있다.
2. 그 예를 이용하여 훈계하신 말씀(56절). "외식하는 자여, 너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나(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와 그의 나라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자들이다. 어찌하여 이 시대를 분변치 못하느냐? 구약의 예언 말씀에 나타난 징조를 보면 오늘이 바로 그 때이며 메시야가 나타날 시기이며 그에 대해 묘사한 글을 읽으면 내가 바로 그인 것을 어찌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는 기회를 지금 앞에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느냐? 그 기회는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마냥 너희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지금이야말로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함"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극이며 어리석음이다(전 9:12). "권고 받은 날을 알지 못한 것"(눅 19:44)이 그 세대 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 때와 심판을 분별한다." 이것이 잇사갈 자손이 지니고 있던 지혜였다. 그들은 "시세를 알고 있었다"(대상 12:32). 그리스도는 이에 다시 덧붙여 말씀하신다. "또 어찌하여 이처럼 너희에게 엄청난 경고가 주어졌음에도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57절) 너희는 하늘의 계시에 대한 것들을 무시하고 그것에 둔감하며 너희에게 주어지는 힌트를 무시할 뿐 아니라 판단이나 율법이나 자연에 대해서도 둔감하기만 하다." 기독교는 그 한쪽에 이성과 본능적인 양심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누구든 무엇이 옳은가 분별할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옳으며 그보다 더 받아들일 만한 말씀은 또 없으며 그보다 더 우리에게 합당한 말씀은 없으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보다 더 보람된 일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Ⅱ. 너무 늦기 전에 시간이 있을 때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애쓰라(58,59절). 마태복음 5장 25, 26절에서는 이와는 다른 경우였지만 이와 같은 말씀을 이미 하셨음을 읽었다.
1. 세상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 상대와는 "화해"를 하고 법의 보호권이 박탈당하여 법의 엄격한 심판 앞에 서게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우리의 "적들과 합의"를 보는 것이 현명한 것으로 통하고 있다. "네가 너희를 고소할 자와 함께 너를 심판할 법관에게 갈 때에, 그가 심판에 이길 승산이 있으며 네가 감옥에 던지울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면 너희가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임을 알라. 심판이 네게 내려 법에 의한 형벌이 네게 지워지기 전에 길에서 그에게 용서를 얻고 화해하기를 힘쓰라." 현명한 자들은 자기들의 분쟁을 끝까지 몰고 가지 않으며 적절한 시기에 화해를 시도한다.
2. 우리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같이 처사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 "적"으로 삼았으며 그에게 불쾌한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또한 그는 "권리"와 "권세"를 손안에 소유하고 있다. 그러므로 뭐가 되든 한번 해본다는 식으로 그와 적대관계를 계속 지켜나간다는 것은 무모한 짓일 수밖에 없다.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받으신 그리스도가 심판관이시며 우린 그 앞으로 몰려 나가야 한다. 그의 앞 심판대에 섰을 때, 계속 우리의 정당성만 고집한다면 심판은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어 "심판관"은 우리를 정의의 사자인 "관원"에게 넘겨 줄 것이고 우린 다시 지옥이란 "감옥에 던지우게" 될 것이며 우리가 진 빚은 그곳에서 최대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죄의 대가를 치루는 우리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형벌을 당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비록 짧았으나 그 "대가"는 영원한 것이었다. 충분하지 못한 저주받은 죄인의 죄의 대가를 영원히 보충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는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손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이것은 "길 가는 중에" 해야할 것이므로 가장 시급히 요청되는 행위인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이 바로 "길가는 중"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써 지금까지 행해온 싸움을 더 늦기 전에 종식시켜야 할 그때인 것이다(그리스도는 심판자일 뿐아니라 중개자이심을 알자).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선 "세상을 자기와 화해시키시며 우리와 화해하실 것을 모색하고 계신다." 이와 같은 은혜의 축복을 주시려 벌리신 그리스도의 손을 꼭 붙잡고 "평화를 맛보는" 삶을 영위해 나가자(사 27:4, 5). 우리가 화해하기 전까지는 평화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