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만주 지역은 겨울철은 춥지만, 여름철에는 열대지방을 방불케 할 만큼 기온이 높게 올라가는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여름철에는 더위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여름철 더위를 극복하기 위한 목욕은 시대마다 그 풍습이 달랐다. [주서(周書)] (북주(北周, 557〜581)의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가깝고 먼 사이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냇물에서 같이 목욕을 한다.”고 하였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우리 조상들의 풍습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옛 사서에 고구려의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떼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처럼 삼국과 고려시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우리 겨레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목욕을 매우 즐겼음을 알 수 있다. 황하 물이 더러워 목욕하기 어려운 중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깨끗한 하천에서 목욕을 하는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 특별나게 보였던 것이다.
의관을 갖춰 입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조선시대 선비들은 제사를 준비하며 목욕재계(沐浴齋戒)할 때가 아니면, 몸을 함부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더위가 체면으로 극복될 수는 없는 법. 법도가 지엄한 선비들도 더운 여름철이나 양의 수가 중첩되어 양기가 왕성한 날로 꼽히는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는 인근 산에 올라가 상투머리를 풀어 바람으로 빗질하며 날리고, 바지를 벗고 국부를 태양의 양기 앞에 노출시켜 바람을 쐬게 하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을 즐기기도 했다. 이는 양반 체면 때문에 목욕을 자주 하지 못해 생긴 풍습이었다. 하지만 너무 더울 때는 양반들이라도 웃통을 벗고 몸을 씻기도 했다. 더위가 체면마저 잊게 했던 것이다. |
첫댓글 이제는 피서까지 다루시는 겁니까?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