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고풍스런 아리아 메조소프라노 : Cecilia Bartoli(체칠리아 바르톨리) 피아노 : Gyorgy Fischer(죄르즈 피셔)
|
01 Gia il sole dal Gange-
A. Scarlatti |
|
고풍의 아리아 1880년대에 알렉산드로 파리소티(Alessandro Parisotti)란 인물이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던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친 성악작품들을 발굴, 정리함으로써 현재 성악사들 사이에서 '고풍스런 아리아'(Aria Antiche)로 소개되고 있는 수종의 독창용 레퍼토리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들은 성악가들의 능력의 한계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종종 성악의 테크닉적인 면을 키우는데 이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성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은 이 작품들을 언젠가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 있어서의 전통적인 독창회는 대부분의 경우 한 두 곡의 이 고풍의 아리아가 프로그램에 끼여 있어 이를 부름으로써 그 막을 올리게 되는데 이 때 이들은 연습용 노래로서의 의미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레코드에서는 거의 전부 파리소티의 정리, 편집에 의한 곡들에 치중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일종의 노래 전집으로서 들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마치 파리소티의 업적을 평가해 볼 수 있도록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파리소티는 1853년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태어났다. 생의 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낸 그는 1880년 명문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의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음악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활동하며 상당양의 종교음악에 손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세인트 페터스에 있는 지올리아 합창단의 음악감독에게서 사사받은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의 이름은 단지 리코르디사에서 출판한 그 3권의 아리아집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이 특별한 시대의 작품들을 출판했던 이유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문화적 풍조 때문이었다. 파리소티는 책의 서문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자신의 의도와 그 기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것이 보다 귀해지고 있다면 나는 이와 같은 옛 것이 그대로 다시 부활하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17,8세기의 작곡가들이 써놓은 작품들은 무엇보다도 순수하고 간결하다. 그리고 전곡에 걸쳐서 풍부한 정감과 극도로 달콤한 청량감이 감돌고 있다. 하지만 요즘 나온 노래들은 그와 정반대이다. 이들은 신경질적이며, 변덕스럽고 거친 대비감으로만 잔뜩 무장되어 있을 따름이다."
파리소티가 다루었던 오리지널 작품들 중 상당수가 보칼 멜로디와 장식적인 베이스를 양대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베이스 부분을 피아노 파트로 옮김에 있어서 물론 그가 살던 당시의 음악적 조류를 따랐다. 다시 아까의 서문으로 돌아가, 편곡작업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꽤 흥미로운 구석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이 아리아들을 편곡하는데 있어서 그 어느 것에도 변화를 주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고 대부분의 경우 나는 많은 필사본들이 가장 정확하고 품격 높은 것이 될 수 있도록 매우 신중을 기했었다. 반주부를 쓰고 장식적 베이스를 갖춤에 있어서 나는 내 자신의 의도가 한 치도 개입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가사의 대의에, 작곡된 원래의 상태에 혹은 작곡가의 스타일이나 당시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위대한 살롱 송의 시대에 '국가적' 혹은 '지역적'노래라는 특정한 장르의 노래를 낳을 수 있게 한 것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던 노래나 민요적 전통에 의한 것이었다. 리코르디사의 아리에 안티케가 출판되던 비슷한 시기에 아부르지(1879)로부터 토스티의 편곡이 나왔고 그 후에는 지알디니와 리코르디의 에코 델라 롬바르디아(1880), 프론티니의 에코 델라 시칠리아(1883)등이 나오게 되었다. 파리소티가 이루어 놓은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민요에 관한 객관적인 탐구가 20세기에 행해졌던 것처럼 그와 똑같은 일이 르네상스와 바로크 음악에도 일어났던 것이다. 파리소티의 업적은 작품들을 부활시켜서 감상될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부당하게 잊혀졌던' 음악들에 대한 인식을 깨이게 하는데 있었다.
15세기
말엽에 처음으로 쓰이게 된 '아리아'라는 용어는 다음 세기를 지나면서
점차 '독창곡'이라는 개념을 획득하게 되었다. 1600년경 폴리포니가
퇴조하고 모노딕한 'Stile nuovo'가 등장하자 이 새로운 스타일이 추구하는
표현력있는 레치타티보는 곧 다음의 2가지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대사적
표현을 위한 레치타티보와 음악적 표현의 범위를 넓히기 위한 아리아.
이 레코딩에도 그러한 아리아의 하나가 실려 있는데 키치니의
이
아리아는 세번째의 모음집과 마지막의 모음집에서도 나오는데 이 역시도
전자의 두가지의 성공을 이어가고 있다. 제 1권에는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인상적인 노래의 하나가 들어 있다.그것은 다름아닌 파리소티가
직접 쓰고 페르골레지에게 헌정한
이 음반에 실려 잇는 다른 작품들도 거의가 제 1집과 제 2집에서 나온 것들인데 이들에는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아리아의 일부가 들어있다. 이들이 커버하는 시기는 바로크 전체다. 연대적으로 가장 빠른 작곡가인 카치니는 Nuovo musiche로부너의 아리아에의해서 뿐만아니라 Monodie, Cnzoni e Madrigali a voce sola에서의 솔로 마드리갈로 대표된다. 그리고 중세기에 베니스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던 카발리는 (Il Giasone>(1649)에서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노래는 파리소티의 콜렉션의 첫 부분을 장식하는 곡이기도 하다.) 또한 그와 동시대인인 베네치아의 오페라 작곡가 안토니오 세스티(Antonio Cesti)는
결과적으로 파리소티의 이 선집은 19세기말적인 관점에서 바로크시대의 음악을 조명하는 것이다. 단순미와 직설적인 선율미를 강조함으로써 이들은 편집자가 청중들의 기호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며 앞으로 계속될 연구에 대한 기초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
|
소위 '로시니 여결'(Rossini Heroine) 혹은 '뉴 디바'(New Diva)라 불리는 성악계의 샛별 체칠리아 바르톨리. 그녀는 현재 줄리에타 시묘나토, 크리스타 루드비히, 테레사 베르간자 등으로 대변되는 메조 소프라노의 인맥을 잇는 강력한 개성과 음악성을 지닌 이 시대의 새로운 프리마 돈나로서 세계 각국에서 엄청난 찬사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찬란한 스포트 라이트 속의 주인공이다. 바르톨리는 1966년 이탈리아의 고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직업적인 성악가였던 탓에 어린시절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음악과 친해질 수 있었던 그녀는 특히 실바나 바조니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어머니에게서 벨칸도 창법의 기초를 닦는 등 성악가로서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들을 전수받고 불과 8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푸치니의 '토스카'에 양치기 소년으로 출연함으로써 생애 첫 데뷔 무대를 장식했었다. 이후 성악의 산실인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 진학,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후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나서게 된 것인데, 그녀의 이름이 무명에서 벗어나 급속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오늘날과 같이 자리잡게 되는데는 동향의 대 선배들인 바리톤 레오 누치와 소프라노 카티아 리치아렐리의 힘이 컸다. 일찍이 바르톨리의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간파했던 이들은 성악의 전진기지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서 오랫동안 뛰어난 메조가 배출되지 못했던 수모(?)를 자국 출신의 이 나이 어린 후배가 깨끗이 씻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녀를 유럽 각국으로 위성방송될 특집 TV프로에 자신들과 함께 출연토록 주선했고, 여기서 이들과 함께 오펜바하의 <뱃노래>,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이중창>등을 완벽하게 불러낸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그 빼어난 천재를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불과 19살 때의 일이었다. 이때 이 방송을 눈여겨 본 유럽 굴지의 오페라단에선 오디션도 없이 그녀를 초청하겠다고 제안해 나섰고 바렌보임, 아르농쿠르 등의 유명 인사들도 그녀에게 함께 작업할 것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는데 단 몇 차례의 노래로, 그것도 실연이 아닌 TV방송으로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은 선뜩 납득하기 힘든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성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와같이 쇄도한 요청 가운데서 그녀가 특히 기억에 남는 하나로 꼽고 있는 것은 1989년 파리 오페라좌에서 열린 '마리아 칼라스 추모 음악제'다. 여기서 그녀는 그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는 마음으로 로시니와 모짜르트의 몇몇 아리아를 불러, 만장한 청중들로부터 수십분간에 걸친 기립박수를 받아내게 되었고, 이로써 그녀는 다시 한번 하루 하루 열뛴 성원속에 커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연주회도 역시 TV 전파를 타고 유럽 각국으로 위성중계 되었는데 이를 시청한 거장 카라얀이 그녀를 직접 전화로 초대해, 1990년 가을 짤스부르크 페스티벌에 올리기로 계획한 바하의 에 참여토록 할만큼 대단한 반향을 자아냈다. 비록, 이 계획은 카라얀의 급작스런 서거로 말미암아 성사되진 못했지만 훗날 바르톨리는 그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음악가로서 잊어서는 안될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고한다. 이와같이 남다른 성공의 길을 달려온 바르톨리의 최상의 특기로 내세울 수 있는 역은 무엇보다도 로시니의 최대 히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여주인공인 로지나이다. 이역을 제대로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연기력도 연기력이려니와 막힘없이 잘 뻗어 올라가는 고음을 구사할 수 있는 완벽한 기교와 함께 앳되고 서정적인 기품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바르톨리는 마치 이역을 위해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이상적인 가창을 들려 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바르톨리가 들려주는 음악들은 어느 것하나 그녀의 진가를 확인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가창을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 중평이다. |
|
첫댓글 에스더님...저는 성악은 잘 모르지만 에스더님 께서 열시미 올려주시는 글, 음악 잘 듣고 있습니다...또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구여...항상 감사 드립니다...!
성악공부조금했는데아쉬워요 더하고싶은데환경과여건이안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