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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회원님 여러분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문운이 활짝 트이어 기쁜 일로만 바쁘신 한 해를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해들을 돌아보며> 은평구 갈현동 사람이었던 나 은평사랑
지금은 행정구역이 용산구 서계동이 되어버린, 옛 중구 만리동에서 살다가, 은평구 갈현동 507-3호로 둥지를 옮긴 것은 1982년이다.
1980년대 초에 친구의 초대를 받아, 그가 손수 지었다는 응암동 집에 집구경을 갔었다. 친구는 자기가 지은 집이 온갖 생활여건을 다 고려해서 가장 쓸모 있게 지은 집이라고 자랑하면서, 은평구가 살기 좋은 곳이니 날더러 이사해오라고 은근히 내 마음을 흔들었다.
그래서 세뇌가 되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앞으로 살아갈 집이 은평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은평구에서 몇 날 며칠씩 헤맨 끝에, 바로 그 번지의 집터를 마음에 들이게 되었다.
은평의 땅이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 채 실감하기도 전에, 그리고 이사해온 후로 단 한 번도 친구네와 왕래를 해보지도 못한 채, 이삿짐을 풀기가 무섭게 낡은 집을 보수하는데 많은 나날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친구는 이미 분당으로 떠나버린 참이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당황”이 아니라 아마 “황당”이라는 말이리라. 짝 잃은 거위처럼, 친구를 잃어버린 나는 이웃들을 친구로 사귀는데 30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은평’(恩平)은 그 의미가 “평화를 사랑한다”라는 말 풀이처럼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이름 부르는 데도 또한 그다지 까다롭지 않고 아름답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은평’이라는 말은 여러 차례 구역변경을 거쳐 1914년 연은방(延恩坊)과 상평방(常平坊)이 경기도 고양군의 한 면으로 통합되면서 연은방의 ‘은’과 상평방의 ‘평’을 따서 은평(恩平)면이 되었다고 한다. 1949년 해방 이후 서대문구 관할의 은평 출장소가 설치되면서 은평면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1973년에는 은평 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9년 은평 출장소가 폐지되고 지금의 은평구(恩平區)가 신설되었다고 한다.
내가 살게 된 동네 갈현동은, 원래 그 일대에 갈포(葛布)의 원료인 칡(葛)넝쿨이 많아서 ‘칡고개’, ‘갈고개’, ‘가루게’라 불리던 것인데, 이를 한자로 기록하면서 갈현(葛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은평을 떠난 그 친구 대신에 나의 ‘칡 고개’ 동네를 사랑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친구 집을 방문한 것이 은평구의 첫 대면은 아니었다. 내가 막 대학에 입학하던 1960년 봄 친구와 함께 찾아온 곳이 바로 갈현동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선정학교 자리 산자락에 친구의 매형이 지었다는 집이 딱 두 채가 있었고, 그 아래로는 다랑논들과 밭뙈기가 보였는데 그 밭에 어떤 작물이 있었는지는 눈여겨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훗날 새로운 주소 만들기를 한다면서 갈현동 사무소에서는 이 지역에 “수수밭 길”이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지금은 도로명이 갈현로 19길이다. 이사해온 것이 바로 그 자리이니 감회가 새롭다.
또 하나, 기억을 되살리자면, 내가 1970년대 초에 프랑스 대사관에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불루이(Boulouis)라는 대사 비서도 갈현동에 살았고, 내 선배 직원도 갈현동 맞은편 구산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고양시로 통하는 큰길 아래쪽으로는 온통 논이어서 큰길을 사이에 두고 새로 지은 집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곳에 이사해오던 때의 우리 집을 되돌아보면, 할 얘기도 많다. 우리 집은 1960년대에 지은 구식 집이었는데 기초가 헐어 주춧돌 밑이 거의 공중에 떠 있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런 문젯거리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은 김원일의 소설 제목처럼, 모양 그대로 말하면 진짜 “마당 깊은 집”이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콘크리트 계단을 서너 계단 올라서야 대문을 열고 나갈 수가 있었다.
이사해온 이듬해 어느 여름날이었다. 휴일이어서 밤늦도록 텔레비전 영화를 시청하느라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었는데, 현관문을 긁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침실에서 거실을 거쳐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 보니 현관 입구에 물이 스며들어 거실 마룻바닥까지 차올라와 있었다. 물에 발을 담그며 현관문을 열었더니, 마당을 지키는 삽살개 ‘복실’이가 마치 강물에서처럼 헤엄을 치고 있었다. 온 마당이 물바다가 되어 있고, 꽤 큰 화분들이 나룻배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집 바깥 도로의 하수구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넘쳐 ‘마당 깊은 집’안의 집수구(集水口)로 역류해서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겪은 ‘마당 깊은 집’의 추억이었다. 그런 후로 집 앞길의 좁은 하수관이 대형 하수관으로 교체되어 그 이듬해 여름에는 다시 ‘은평’의 이름을 되찾았다.
"마당 깊은 집"의 이름을 지우게 된 것은 그로부터 여덟 해가 지나 지하 한 층에 지상 2층을 올리고 나서부터이다.
이런 추억이 얽힌 이곳 갈현동에 정붙이기, 그리고 친구 사귀기로 30여 년을 지내다 보니, 집 앞에 세탁소, 건너편에 목욕탕, 그 옆에 버스 터미널, 은행, 우체국, 시장, 정비소, 초·중·고등학교, 지하철, 한 집 걸러 음식점, 크고 작은 문화시설, 소·중·대형 상점들…. 그래서 이곳에 살거나, 이곳을 거쳐 간 사람이면 누구나 앞다투어 은평 자랑을 하리라. 그리고 산세(山勢)는 또 얼마나 아름답고, 공기는 얼마나 신선한지! 다 자랑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이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내 주변 여건이 나를 종로구 사람이 되게 했다. 그것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새로운 이웃과 사귀고, 또 종로구를 은평구처럼 정붙이고 자랑을 하게 되려면 아마도 또 30여 년은 걸려야겠지? |
첫댓글 한골 선생님 반갑습니다. 비록 몸은 종로구민이시지만 영혼은 은평에 있으시잖아요!!
은협행사 시 꼭 왕림하시와 뵙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