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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왕산-백악산 종주기 ]
행복했던 3월 어느 하루의 日記
―――― 시간의 벽을 넘어, 공간의 벽을 넘어
서 동 익
인왕산 정상을 향해 꾸불꾸불하게 축성된 서울성곽 모습
[일기․1]
지난 1968년 12월, 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들어온 이후 서울과 인천에서 4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나는 아직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일상생활에 쫓기듯 지난 40여 년 동안 서울 장안을 수없이 돌아다니면서도 서울이 어떻게 우리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또 어떤 사연과 역사를 지니며 오늘의 서울이 존재하는지를 나는 늘 방관자처럼 관심 한번 가져보지 않은 채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지난 40여 년 동안 인천과 서울을 실질적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아왔으면서도 1960년대 지방에서 상경한 나 같은 사람들을 <굴러온 돌>이라고 폄하하며 텃세를 부리던 이곳 사람들의 안태고향(安胎故鄕) 의식에 떠밀려 환갑이 넘은 이 나이까지 부평초 같은 삶을 살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또 지난 1976년 문단 등단 이후 33년간 문학인이네, 소설가입네 하고 무슨 벼슬이라도 한 양 제 잘난 멋에 취해 살아왔을 뿐 정작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시민이나 문학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 같은 것도 한번 생각해 볼 겨를 없이 살아왔다는 부끄러움이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오늘은 정말 제대로 한번 살펴보고 와야지…….
이런 다짐을 하면서 앞을 바라보니 간석5거리 쪽으로 나가는 538번 마을버스가 금방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내 앞에 서 있다. 나는 황급히 버스에 오르면서 오늘은 몇 명이나 나올까 하고 <인산문학회> 회원들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김학수 선생은 구례로 내려갔으니 나오지 못할 테고, 김재덕 선생님은 사모님 수발 들며 곁에 계셔야 하니까 역시 못 나오실 테고, 김문호 씨도 회사 일로 못 나오겠다고 했고, 조성범 산행부장과 최제형 관장님은 어떻게 나올 수 있을까 하면서 부평역 1호선 플랫폼에 도착해 모일 시간까지 기다려 보았으나 역시 그 분들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오전 8시가 가까워오자 임평모 박사님, 노기태 전 인천종합문화회관 관장님, 한상준 교장선생님, 양승근 부회장, 임노순 전 회장님, 이담하 선생님, 나, 이렇게 7명이 모였다. 나는 반갑게 그 분들과 수인사를 나누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는데 임동숙 총무한테서 전화가 온다. 송내역에서 승차할 테니까 기다리지 말고 약속시간에 출발하라는 전갈이다. 나는 오늘 등산은 8명이 하게 되는구나 하고 8시 8분에 도착한 소요산행 1호선 전철을 승차했는데 송내역에 도착하니까 생각지도 않던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임동숙 총무의 외아들 윤정웅 군과 또 임동숙 총무의 친구 분이라는 한혜영 님, 그리고 그 분의 아들이라는 박제윤 군이 합류해 인산문학회 3월 첫 일요일 정기산행 참석자는 모두 11명이 되었다.
1호선 지하철은 50분만에 일행 11명을 종로3가역에 도착시켜주었다. 우리는 계획대로 오전 9시에 종로3가역에서 내려 3호선으로 바꿔 타고 경복궁역으로 향했다. 안국역을 경유해 경복궁역에 도착해도 시간은 오전 9시 10분이다. 우리는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사직터널 방향으로 뻗은 대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문득 <서울 定都 600년> 행사가 있던 1994년 10월의 신문 기사 내용들이 떠오른다. 그해 서울시는 각계 각층의 시민, 전문가, 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한양 천도일인 10월 28일을 <서울 시민의 날>로 정하기로 결정하고, 시의회 의결을 거쳐 1994년 10월 25일 조례 제3121호로 공포하였다.
그 무렵 국내의 주요 일간 신문들은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은 한자어에서 유래된 말인가, 아니면 순수한 우리말인가? 또 무슨 뜻을 담고 있으며 언제부터 그렇게 불러왔는가를 특집으로 꾸며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때 나는 인천남동신보사 대표 겸 편집인으로 재직하며 15일에 한번씩 블랭키트판 12면짜리 <남동신보>를 발행하고 있었다. 15일에 한 번씩 12면을 발행하는 인천 남동구 지역신문이지만 광고부 직원 2명, 총무부 직원 1명, 그리고 집사람과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기획, 편집, 광고 수주, 배포 사설 집필 업무까지 다 전담하며 신문을 만들어 낼 때라 정말 <서울 定都 600년>이라는 주제는 내 안사람 가슴골처럼 쳐다보고 또 쳐다봐도 또 다시 보고 싶을 만큼 내 의식을 붙들어 매는 주제였지만 나는 쓴 입맛을 다시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는 한정된 5명의 인원으로 15일에 한번씩 12면짜리 남동신보를 발행하며 일본의 어느 재일교포가 운영하는 출판사로부터 <인민이 사는 모습 1, 2권> 집필을 청탁받고 거의 밤을 세우다시피 집필에 매달릴 때라 그 어마어마한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런 유혹과 아픔을 참으면서 지나쳐 온 <서울 定都 600년>이라는 주제는 10년 넘게 앓아온 그 지독한 풍치의 통증처럼 내 의식을 괴롭혀왔고,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늘 그런 지적갈증에 시달리며 살아오다 또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1993년부터 김영삼 정부의 언론정책에 시달려오다 끝내는 견딜 수 없어 인천남동신보를 휴간해 놓고 <자료원출판사>를 전국적인 출판사로 확장시키면서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인물을 좀더 깊이 연구해 시리즈물 도서로 펴내기 위해 <형산인물연구소>를 도서출판 자료원 부설 기구로 신설해 인물연구에 들어갔던 것이다.
인천재능대학 문예창작과 우수 졸업생 4명을 특채해 초․중․고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인물 1,500여 명의 기초자료들을 샅샅이 훑어오다 나는 그만 <자금부족>이라는 현실적 장벽에 막혀 주저앉고 말았다. 묵은 원고뭉치처럼 A4 용지 3,000여 매에 달하는 <인물자료 정리 원고>를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이 나를 괴롭혀 그것을 묵은 잡지책 버리듯 폐지 통에 처넣을 수가 없었다.
그런 쓰라린 아픔과 미련을 간직한 채 살아오던 나는 또 다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필생의 사업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인물을 좀더 깊이 연구하면서 아울러 우리나라 각계각처를 이끌어 가는 생존 인물들의 행장기(行狀記)를 깊이 연구해 볼 생각으로 2007년 9월 15일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인터넷신문 <온라인인물뉴스> 창간 기념식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는 내 집필실 책장 밑에 고이 간직해 둔 인물조사 자료들을 꺼내 다시 또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처음 안 일이지만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은 한자어 徐울(천천히 서, 무성할 울:초두(┼ ┼ ) 밑에 宛 )에서 유래된 말이다. 한국고서연구회 김시한(金時漢․당시 69세․경안서점 대표) 이사는 2000년 1월 30일 서울중랑구 중랑문화원에서 열린 서울문화사학회 주최 학술발표회에서 "서울 관련 고문헌들을 조사한 결과 서울의 한자표기는 徐울(초두(┼ ┼ ) 밑에 宛)"이라고 주장하고 그동안 자신이 수집한 <徐울(초두(┼ ┼ ) 밑에 宛)> 한자표기 관련 고문헌 12종을 공개한 적이 있었다.
이때 김씨가 공개한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조 정조 때 학자 유득공(柳得恭)이 단군조선에서 고려 때까지의 고도(古都) 21곳을 시로 회고한 21도(都) 회고시(懷古詩)이다. 이 시집의 신라 편에서 유득공은ꡒ문헌비고에 이르기를 신라의 국호 <서야벌>을 훗날 사람들이 도읍지를 지칭하는 <서벌>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서울이 되었다(徐울(초두(┼ ┼ ) 밑에 宛) 文獻備考 新羅國號徐耶伐 後人稱凡京都曰 徐伐 轉爲 徐울(초두(┼ ┼ ) 밑에 宛))ꡓ면서 <徐울(초두(┼ ┼ ) 밑에 宛)>에 대한 기록의 근거를 밝혔다. 이 발표가 있기 전에는 서울은 한자로 표기할 수 없는, 순한글 지명으로 알려져 왔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지해서 국민 대다수가 오류를 범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이란 명칭은 그 유래가 어디에서 연유된 것이며 그 발음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연구자들은 대부분 삼국시대 신라 초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근거로서《삼국사기》권 1 신라본기 혁거세조(赫居世條)와 《삼국유사》기이(紀異) 제2권 신라시조 혁거세왕조를 들고 있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이 6부 백성들의 추대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또는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 했는데 이런 이름들이 국호이자 도읍지의 명칭으로 변전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가 서벌(徐伐) 또는 서라벌(徐羅伐), 서야벌(徐那伐)'이란 명칭에서 오늘날 서울로 변천된 과정을 국어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문헌에서 경주는 서라벌(徐羅伐), 서나벌(徐那伐), 서벌(徐伐), 사로(斯盧), 서야벌(徐耶伐), 소벌(蘇伐) 등으로 음차되어 나타나고 그것이 지증왕(智證王)때 정식 국호인 신라(新羅)로 정해졌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이렇듯 <서울>의 연원은 서라벌, 사로, 신라 등이라 할 수 있는데, 결국 서라벌(또는 사로, 신라)은 <경주>만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고, 국가의 수도이면 모두 그 명칭을 쓸 수 있다는 조건이 부여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서라벌, 서벌>을 서울의 어원으로 보고 <서>의 의미는 沙, 所, 東, 徐, 쇠(鐵), 斯, 新, 소(牛), 首 등이고, <벌>은 , 곧 頭, 明, 白, 太陽에 연원을 둔 말로서 그 의미는 <野, 平>을 뜻하며, 다른 한자표기로선 伐, 火, 發, 弗, 夫里, 夫餘(부여), 沸流(비류) 등으로 나타난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 견해이다.(출처 : 이병도《한국고대사연구》, 1987, 596쪽 / 이병선《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1988, 163~166쪽)
이렇게 <서울(徐울(초두(┼ ┼ ) 밑에 宛))>이란 한자어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우리들은 서울이 마치 순수한 우리말인 양 한자어 표기법조차 잊고 살아왔는데 그렇다면 삼국시대 이후 서울의 지명(地名)은 어떻게 호칭하며 표기해 왔을까?
<서울 定都 600년사>에 따르면, 서울은 [위례성(慰禮城 : 백제 온조왕 1년(B.C.18년)] → [북한산(北漢山) : 백제 때 정한 이름 -지금의 북한산을 이 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북한산(北漢山)은 산이 아니고 땅 이름] → [북한성(北漢城)] → [북한산군(北漢山郡) :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시대 이후] → [남평양(南平壤) : 장수왕(長壽王) 63년(475년)] → [신주(新州) : 신라 24代 진흥왕(眞興王) 15년(554년)] → [북한산주(北漢山州) : 진흥왕(眞興王) 18년(557년)] → [남천주(南川州) : 진흥왕(眞興王) 29년(568년)] → [한주(漢州) : 신라 35代 경덕왕(景德王) 16년(757년)] → [양주(楊州) : 신라 52代 효공왕(孝恭王) 8년(904년)] → [남경(南京) : 고려 11代 문종(文宗) 21년(1067년)] → [한양부(漢陽府) : 고려 25代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 등으로 바뀌며 고려말기까지 내려오다 조선왕조가 한강변에 도읍을 정한 후부터 500여 년간 서울은 <한강의 북쪽>이란 뜻에서 <한양(漢陽)>이라 불려왔다.
그렇다면 그 이전 단계인 <남경(南京)>이나 <한양부(漢陽府)> 시절 지금의 개성공단이 들어서 있는 북한의 개성, 즉 고려의 사경(四京 : 中京․東京․西京․南京) 중 중경(中京)으로 불리던 송도의 정치상황은 어떠했을까?
인왕산 선바위
[일기․2]
대한민국 수도로 지칭되고 있는 <서울>의 지명이 <한양부(漢陽府)>로 불리던 시절은 고려 25대 충렬왕 34년인 1308년부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친 1395년 5월까지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30여 년간 항몽전쟁을 벌여온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제24대 원종이 원나라의 고려 복속정책에 완전히 무릎을 꿇은 채 고려 왕조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제25대 충렬왕부터 제30대 충정왕까지 모두 원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으며 고려의 임금은 좋든 싫든 원나라의 왕실과 혼인을 해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아 원나라의 사위나라, 즉 부마국으로만 존재해야 했던 치욕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역사학자들은 고려 왕조의 <원 간섭기>라 한다.
이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원나라 배척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을 전개해 온 왕이 제31대 공민왕이다. 고려왕조는 이 공민왕 외에도 제32대 우왕, 제33대 창왕, 제34대 공양왕까지, 그러니까 1392년 7월까지 이어지는데 이 시기를 우리들은 통칭 <고려말기>라 지칭한다.
이 시기, <송도의 정치상황>을 단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는 <외세간섭>과 <토지문제>라고 답변할 것이다. 이 두 개의 키워드 중 <외세 간섭> 정황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고 싶어 역사책을 뒤적거리다 보면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철령 이북의 땅>, <요양행성>, <정동행성>, <위화도회군> 같은 하위 키워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의 <토지문제>와 관련된 대내외 정황을 알고 싶어 역사책을 뒤적거리다 보면 <사전(賜田)>, <급전(給田)>, <탈점(奪占)>, <추쇄(推刷)>, <환본(還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유망(流亡)>, <투탁(投託)>, <전호화(佃戶化)> 같은 하위 키워드를 만나게 된다.
이런 역사적 키워드나 어떤 사물을 접하면서 인간이 내면적으로 느끼는 감성이나 정서를 아름답고 고운 언어나 순수한 우리말로 즐겨 표현하며 어떤 형상으로 이미지화하는 시나 소설, 수필작품 등을 쓰는 문인들에게는 내가 본보기로 제시한 역사 속의 행정용어나 경제용어를 쳐다보면 우선 의식의 한쪽 구석이 어딘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부터 먼저 느낄 것이다. 그래도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철령 이북의 땅>, <요양행성>, <정동행성>, <위화도회군> 같은 어휘는 어디서 몇 번 듣거나 본 듯해서 이질감이 좀 덜 밀려온다.
그러나 <탈점(奪占)>, <추쇄(推刷)>, <환본(還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유망(流亡)>, <투탁(投託)>, <전호화(佃戶化)> 같은 어휘는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말인지, 우리나라 역사책에 나오는 말인지 도무지 낯설기 그지없고, 그 중에서도 <탈점(奪占)>, <추쇄(推刷)>, <투탁(投託)> 같은 어휘는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해 놓았는데도 "대충 무슨 뜻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말"처럼 느껴져 우선 소외감부터 느끼게 한다.
아니, 무슨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물려주려고 우리의 선조들은 이런 케케묵고 골 때리는 어휘들로 실록을 작성했을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어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과 <브리테니카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같은 해묵은 전문사전들을 모두 끄집어 내놓고 하나하나 말뜻부터 파악하다 보니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실록을 작성했던 당시 사관들의 언어적 감각과 길고 긴 사연들을 두서너 자의 문자로 압축해내는 연금술이 기가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북한 당국이 힘을 합쳐 오는 2013년에 발간할 예정인, 30만 단어가 수록될 <겨레말큰사전>을 채울 30만 단어의 출처가 대부분 우리 선조들이 남긴 왕조실록이나 사기, 경국대전, 사대부들의 개인 문집 등에서 나온 말을 하나 하나 모아놓은 것이 우리의 <국어사전>이고 <전문사전>이구나 하는 큰 깨달을 얻고 난 뒤부터 나는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머리를 쳤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할 때도 그랬지만 나는 사실 내 나름의 <리얼리티>가 풍기면서도 좀 투박하고 강건해 보이는 문체를 간직하기 위해 인간 내면의 말초적 감각에 호소하는 감각적인 문체의 작품이나 국내작가의 문체도 아니고 외국작가의 문체도 아닌 번역작품은 잘 읽지 않았다. 그런 문체의 작품들을 자주 읽다보면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번역체 문체에 길들여지고 휘둘려 내 스타일의 문체를 잃어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습작 초기에는 1930년대 작가들의 작품을 즐겨 읽었고, 나와 같은 시대를 몇 년 앞서 살아가는 선배 작가들의 작품은 이문구 선생이나 황석영 선생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습작기를 보냈다. 그리고 소설공간 속에 남북한 지역을 같은 시간대 위에 올려놓는 작품을 쓰기 위해 최근에는 북한 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즐겨 읽으며 문학작품 창작에 동원할 수 있는 어휘의 작품당 절대 개체수를 널리려고 남다른 가슴앓이를 해왔는데 근래 들어와 조선조 사대부들의 개인문집 번역본이나 왕조실록, 경서 같은 번역본을 읽다 보니 내가 여태 엉뚱한 곳을 헤매고 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욱 가슴이 쓰라렸다.
그런 뉘우침 때문에 고려 말기 송도의 정치상황을 엿볼 수 있는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철령 이북의 땅>, <요양행성>, <정동행성>, <위화도회군>, <사전(賜田)>, <급전(給田)>, <탈점(奪占)>, <추쇄(推刷)>, <환본(還本)>,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유망(流亡)>, <투탁(投託)>, <전호화(佃戶化)> 같은 하위 키워드의 말뜻을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알아보았는데 그 내용을 다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눈앞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파악한 하위 키워드 중 <쌍성총관부>는 고려 후기 원나라가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 지역에 설치했던 원나라 행정관청을 말한다. <동녕부>는 황해도 북부지역과 평안도지역에 설치했던 원나라의 관청이다. <탐라총관부>는 전략물자 이동과 다른 나라 정복에 기동성을 확보해 주는 말 사육을 위해 원나라가 제주도에 설치했던 관청을 말하고, <철령>은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선을 말하는데 그 이북의 땅이란 결국 함경도 북부지역을 의미한다. <요양행성>은 현재의 중국 동북3성 지역에 거처하는 원나라 유민이나 고려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이민하거나 야반도주하듯 슬그머니 옮겨가 거리를 배회하며 살길을 찾는 고려 사람들을 한 곳으로 정착시켜 노예화하기 위해 설치한 원나라의 관아를 말한다. 그리고 <정동행성>은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의 합포(경남 마산)에 설치한 원나라의 관아를 말한다.
아니, 아무리 부마국이라 하지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위었기 때문에 그 부정의 갈증을 장인어른의 사랑을 통해서 보상받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남달리 장인어른을 존경하고 장인어른으로부터 자기 권속과 피붙이를 지극한 사랑으로 거두는 법을 배워 내 자식들과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내 장인어른이 당신의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내 가정과 일터, 그리고 사회영역 속에다 원나라처럼 사업상 필요한 관리사무소를 설치한다고 해도 나는 그저 그 불편함을 다 참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당신의 고명딸과 결혼하는 것까지 허락해 주신 장인어른이라 할지라도 만약 내 장인어른이 사위라는 혈육관계를 내세우며 나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훼손한다면 나는 분명히 "어떤 선을 그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며 <토지문제>와 관련된 하위 키워드의 말뜻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 하위 키워드 중 <사전(賜田)>은 고려시대 임금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왕족이나 벼슬아치에게 내려준 땅을 말하며 사패전이라고도 한다. <급전(給田)>은 중앙정부가 각 관아에 나누어주어 그 소출로 관아 운영경비를 충당하도록 한 논밭을 말한다. <탈점(奪占)>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하거나 점령하는 것을 말하고 단어의 앞뒤를 바꿔 <점탈>이라고도 사용한다. <추쇄(推刷)>는 도망한 노비나 부역, 병역 따위를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이나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환본(還本)>은 떠도는 백성이나 도망한 노비를 찾아내어 본역(本役)에 돌려보내는 것을 말한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은 고려 말기, 토지와 노비를 정리하려고 설치한 임시 관아를 말하며 권력을 가진 중신들과 권문세족들의 토지 겸병에 뒤따르는 농민들의 노비화를 막기 위하여 한시적으로 설치하는 극빈계층 구제기구이나 권문세족들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유망(流亡)>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행적이 묘연해진 사람을 말하며, <투탁(投託)>은 영락(零落)하거나 파산한 농민이 토호나 지주의 노비가 되던 일을 말한다. <전호화(佃戶化)>는 고려말기 지주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은 후에 소작료를 치르며 끼니를 이어가는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극빈계층을 말한다.
결국 앞에서 나열한 어휘의 말뜻을 다 파악하고 보면 <고려>라는 나라는 <원나라>라는 대국의 감시와 간섭에 시달려 임금의 이름자마저 제 뜻대로 쓸 수가 없고, 그런 임금 밑에서 죽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반 백성들은 권세 있고 왕성한 권문세족들에게 가지고 있던 땅뙈기마저 다 탈점당해, 하루하루 살아나갈 방책이 막막해져 자신의 몸뚱이마저 "될 대로 되어라" 하고 권문세족들에게 팔아넘기며 스스로 노비의 길로 들어선다. 요사이 중국을 떠도는 북한 탈북 여성과 남성들처럼.
거기다 또 다른 한 무리들은 이 거리 저 거리 유리걸식하다 고구려 시절 우리의 선조들이 연고를 만들어 놓은 요동 땅으로 건너가 원나라 관아의 통제를 받으면서 하루하루 목숨을 이어가는 고려 국의 백성이 되기를 아예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공민왕은 이런 백성들을 하루라도 빨리 구제하기 위해 어명을 내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한다. 그렇지만 권문세족들이 저희들끼리만 호위 호식하려고 똘똘 뭉쳐 임금의 극빈계층 구제정책마저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려 말기에는 대략 8차례나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다.
이런 역사 속의 암담한 정황 때문일까? 문득 내 의식 속으로 중국이란 나라는 어떤 나라이며,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 나타난 실체처럼 우리 미래의 역사 속에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를 간섭하고 복속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밀려왔다. 그러면서 성결대학교 부총장으로 재직하다 정년 퇴임한 이강선 박사와 상지대 조종식 교수의 중국연구 논문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지난해, 내가 부소장으로 적을 두고 있는 <사단법인 북방문제연구소>에서는 연례행사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때 상지대 조종식 교수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침략> 문제를 연구해 발표했고, 이강선 박사는 북한의 식량배급이 중단된 1995년 이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북 3성을 떠돌고 다니는 현대판 고려 유망민이 비공식 수치지만 20만-30만 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이 세미나에서 조종식 교수는 중국이 북한에서 변고가 발생했을 경우, 그 이론적 명분을 내세워 지난 역사 속의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던 철령 이북과 동녕부가 설치되었던 평안도 양강도를 지역을 과거 원나라 시절처럼 지배하기 위해 고구려의 역사를 신라․백제의 역사와 분리해 중국의 변방 역사 속에 포함시키는 이른바 <동북공정> 정책을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해 펼치고 있다고 그 실상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강선 박사는 이 세미나에서 중국이 김일성 사후 북한의 돌발적인 변고에 대비해 북한의 압록강과 두만강 변경 지역에 종래에는 17개 사단 병력을 주둔해 놓고 있었는데 근래 들어와 8개 사단을 증원해 현재는 25개 사단을 배치해 놓고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이강선 박사는 "이같이 증원된 병력은 북한에서 돌발적인 사태가 발생할 경우 러시아군이나 미군이 북한으로 들어오기 전에 먼저 북한지역으로 진주해 현재의 북한의 김정일 정권으로부터 중국 정부나 민간기업이 30년에서 50년 기한으로 사들인 북한의 지하자원 채굴권과 재산권을 보호하며 사실상의 점령군 역할을 할 공산이 명명백백해 보인다고 말했다.
거기다 <국가정보론>과 <정보소비론>을 집필한 우정 박사는 북한에서 어떤 변고가 발생해 무정부 상태가 온다면 대략 북한 전체 인구의 20%-25% 정도가 유망민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현재의 북한 인구를 2300만 명으로 잡고 20%면 460만 명이 북한을 탈출해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떠도는 유망민이 될 것이라는 진단이다.
지난 1950년 6․25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이주 가족이 500만 명에 이르기 때문에 남북으로 갈려서 사는 이산 가족을 우리는 <1천만 이산가족>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북한에서 만약 무정부상태가 온다면 460만 명-500만 명의 북한 탈북 유망민이 동남아시아 각국으로 달아나기 위해 압록강․두만강․휴전선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치가 있는데 중국은 이 같은 미지의 앞날에 닥쳐올 그런 사태를 실패 없이 잘 다독거리기 위해 현재 25개 사단 병력을 동북3성 변경지역에다 상주시켜 놓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고 보니 중국은 지난날의 역사를 되짚으며 참으로 야무지게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역사를 통해 이해한 공민왕의 당시 고민과 절박성에 대해서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이런 외세 간섭과 토지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해 중신들과 권문세족들의 눈치를 살피며 승려 신돈을 발탁해 당시 고려 사회의 최극빈 계층의 구휼정책을 맡기고, 30년간의 <항몽전쟁>과 100년간의 <원 간섭기>에소진된 국력을 다시 모아 원나라가 자국 관리를 파견해 운영하는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를 다 없애버리며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절박한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역사비판론자들은 "극빈계층에 속하는 백성들의 식의주 문제와 국가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민왕이 최영 장군과 승려 신돈을 불러 <요동정벌>과 <토지개혁>을 당장 실시하라고 어명을 내린 조치는 그런 정책을 추진할 내부적 기반도 없이 너무 성급했다"고 결과론만 가지고 떠벌려댔지만 내 개인적 견해로는 "자신이 일국의 국왕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제왕이라면 그 정도의 조치는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전후 사정을 다 제쳐두고라도 공민왕을 받들며 방어막이 되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어렵고 복잡한 시기에, 정말 기가 막힌 사연을 안은 채 공민왕이 시해된다. 역사책을 펴놓고 보면. 뒤이어 승려 신돈도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다. 이어 제32대 우왕과 제33대 창왕이 죽임을 당하고 최영 장군마저 죽임을 당한다. 뿐만 아니라 고려 궁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목은 이색>과 그의 문하생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정몽주와 함께 목은 선생 밑에서 동문수학한 삼봉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이 밤하늘의 불꽃처럼 찬란한 빛을 내며 타오른다.
역성혁명이라는 게 도대체 무언가? 문자 그대로 뜻을 풀어보면 임금의 성을 바꾸는 혁명인데 이 말은 결국 고려 국왕의 성을 <왕씨>에서 <이씨>로 바꾼다는 말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될 법한 일인가? 그런데도 당시의 고려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야심 찬 신진 사대부들은 대다수가 삼봉 정도전이 주장하는 역성혁명론에 동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는 그럼 현상이 하도 이상해 <역성혁명>이라는 말이 언제, 어디서 생겨났는지를 알아보니까 <맹자 양해왕편(7)>에 그 말이 나온다.
도대체 맹자님 말씀은 <연어>도 아닌데 시대의 강을 몇 년이나 거슬러 올라왔단 말인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나는 맹자(孟子)의 생몰 연대부터 알아보았다. 백과사전에는 기원전 372년에서 기원전 289년까지 사시다 유명을 달리 하신 유학자로 정리되어 있고 전국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거기다 맹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회고하며 가르침을 준 말들을 집대성한 문집이 <맹자>라는 저술이라는 말이 있으니 삼봉 정도전이 <역성혁명론>을 찬양하던 시절을 1390년이라고 가정할 때 기원전 289년에 1390년을 더하면 대략 <맹자 양해왕편(7)>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말씀은 1680년 정도 시대의 강을 거슬러 올라온 셈이 되고, 그것이 또 2009년도를 살고있는 나한테까지 전달되었으니 2009년에다 329년을 더하면 시대의 강을 대략 2300년 정도 거슬러 올라온 셈이 된다.
정말 대단한 저술이구나.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맹자에 관한 하위의 자료들을 더 살펴보았다.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며 공자의 사상을 이어 유학을 발전시킨 학자로 분류되어 있다. 특히 그가 남긴 저술 중 <맹자>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 할 만큼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아래 인용한 내용은 백미이다.
맹자(孟子)에게 제선왕(劑宣王)이 묻기를 "탕(湯)왕은 걸(桀)을 추방(追放)하고 무(武)왕은 주(紂)를 쳤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이 있습니까?(齊宣王 問曰湯放桀 武王伐紂)"
맹자가 대답하기를,"전하는 말에 의하면 경전(經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孟子對曰於傳 有之)"
왕이 말하기를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는 것이 가합니까?(曰臣弑其君 可乎)"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을 해친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잔(殘)이라고 하며,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를 일부(一夫)라고 합니다. 일부인 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曰賊仁者 謂之賊 賊義者를謂之殘 殘賊之人 謂之一夫 聞誅一夫紂矣 未聞弑君也)."
위의 인용 내용 중 주(紂)는 은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달기>라는 요녀(妖女)를 사랑했으며, 포악(暴惡)한 정치를 일삼다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게 멸망해 목숨을 잃었고, 하(夏)나라의 걸왕과 더불어 걸주라는 폭군의 대명사(代名詞)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맹자 양해왕편(7)>에 나오는 이 말은 결국 맹자가 민본주의(民本主義)에 입각(立脚)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시인(是認)한 말이다. 맹자는 이 글에서 제선왕에게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줄 모르는 정치를 해선 안 된다고 강조(强調)하며 무릇 모든 통치자(統治者)들은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정치를 베풀어야 함을 강조했다. 만일 이 같은 점을 망각하고 개인의 이익추구(利益追求)만을 위해서 포악한 정치를 했다가는 민심의 이반(離叛)으로 고립(孤立)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고 아울러 역성혁명을 불러오게 될 것임을 경계(警戒)하라고 일러준 것이라고 주를 달아 놓았다.
이런 이론적 바탕과 동조자들의 세력에 휘둘려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은 아무런 대항도 못한 채 왕위를 이성계에게 물려주고 물러나 유배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된다. 공양왕이 죽게 됨으로써 고려는 개국한 지 474년 만에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다.
인왕산 정상에서 자하문 쪽으로 내려가며 비탈지게 축성된 서울성곽
[일기․3]
역성혁명론자들의 추대로 1392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일찍부터 수도(首都)를 옮기려고 부심했다. 그 이유는 개성의 지기(地氣)가 쇠하였고 더구나 송도(松都)는 폐군신지지(廢君臣之地)라는 음양설(陰陽說)이 있었으며, 고려왕조의 구세력이 많아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뿐만 아니라 신왕조(新王朝)의 개창과 함께 도읍지를 옮겨 군신상하(君臣上下)의 심기일전(心機一轉)을 꾀하기 위해서도 천도를 더욱 서둘러야만 했던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새 도읍지를 찾아 천도를 할 것을 공론화했지만 당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이하 정도전, 이방원, 무학대사, 하륜 등의 정책 결정자들과 그들을 따르던 실세들은 새 도읍지의 위치를 어디로 잡아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송도의 옛 고려왕조가 세운 수창궁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다 1393년(태조 2년) 1월 18일, 태조 이성계는 송도의 수창궁을 출발해 3일 후인 1월 21일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있는 회암사에 도착한다. 당시 회암사에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무학대사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는데 태조는 무학대사의 대접을 받으며 며칠 쉬었다가 2월 8일 무학대사를 동반하고 양광도(1395년부터 충청도로 개칭된다) 계룡산으로 올라간다.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동반하고 계룡산으로 올라간 것은 정감록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도선비결(道詵秘訣) 때문이다. 풍수지리설의 원조로 평가받는 신라 말기의 선승(禪僧) 도선의 저작이 바로 도선비결인데, 태조 이성계는 도선이 정감록을 통해 전달했다는 "정씨가 세 이웃의 도움을 받아 세 아들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에 도읍한다"는 전설을 따라 자신의 사부인 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 정상까지 올라가 산하의 지형지세를 직접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당시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 정상에서 금강의 강줄기를 따라 발달한 산하의 지형지세를 살핀 다음, 신도안(新都內)을 새 도읍지로 결정하고 전국 각지 고을로 파발을 보낸다. 요역(부역) 동원령을 내려 새 도읍지로 정한 신도안 일대의 토목공사와 왕궁 축성공사를 수행할 장정들을 강제 동원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해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2월까지 10개월 동안 왕궁 축성공사를 상당부문 진척시킨다.
이렇게 새 도읍지가 결정되어 축성공사를 추진하고 있는데도 당시 풍수지리에 밝았던 하륜은 태조 이성계에게 "산이 건방(서북방)으로부터 뻗쳤고 물은 손방(동남방)으로 빠져나갔으니(山自乾來, 水流巽去), 이는 수파장생(水破長生)․쇠패립지(衰敗立至)의 땅이라서 건도에 적합치 못합니다(不宜建都).ꡓ하며 남경, 즉 한양을 강력히 천거한다. 무학대사와 삼봉 정도전도 계룡산 밑 신도안보다는 남경이 더 적합하다며 한강 이북의 한양을 새 도읍지로 강력히 천거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하륜의 지적은 풍수론에 있어서 물 흐름과 방위의 길흉(吉凶)이 거꾸로 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도올은 "그 논의의 타당성을 떠나, 이 지역은 계룡산의 명당(明堂) 면적이 한 나라의 수도가 들어앉기에는 너무 협애하며, 지리적으로도 남쪽에 치우쳐 한반도 도리(道里)의 균형을 얻지 못한 곳이며, 해안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대하(大河)가 없어 수송과 용수(用水)가 불편한 곳임에는 틀림이 없었다"며 당시 한양 천도를 거듭 권유한 정도전, 하륜, 무학대사의 판단이 옳았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양천도론자(漢陽遷都論者)들이 주장한 한양의 수도로서의 적격성은, 첫째 풍수지리상으로 송악(개성) 다음 가는 훌륭한 자리이고, 둘째 수운(水運)이 편리하여 물자수송에 유리하고, 셋째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어상에 유리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중앙집권체제에 편리한 여건을 갖춘 점이었다.
이런 충언들을 뿌리칠 수가 없어 태조 이성계는 10개월 이상 추진된 신도안의 토목공사를 어쩔 수 없이 중단시킨다. 그리고는 <한양>을 제2의 새 도읍지로 결정한 뒤, 무학대사와 하륜, 정도전 등과 머리를 맞대고 한양 어디에다 왕궁을 앉힐 것인가를 고민하다 삼각산(북한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일만 가지의 경관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만경대 위에서 산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한양 땅의 지형지세를 유심히 살펴본다. 과연 계룡산 밑 신도안보다는 났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태조의 머리 속에는 또 다시 고민이 생긴다. 삼각산 만경대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아래 어디쯤에다 새 왕궁을 축성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이때 무학대사는 인왕산 주산론을, 정도전은 북악산주산론을, 하륜은 무악산주산론을 주장한다.
하륜이 제시한 무악산주산론은 주산을 무악산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연세대 자리가 궁궐터가 되었을 것이고 신촌일대가 명당이 되었을 것이다. 또 무학대사가 주장한 인왕산주산론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산과 남산을 좌청룡․우백호로 삼아 도읍을 동향(東向),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앉히자는 주장이다. 이런 무학대사의 주장을 삼봉 정도전은 정면으로 반대한다.ꡒ자고로 제왕은 모두 남면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법식이거늘 동향이란 들어본 바가 없소이다(自古帝王皆南面而治, 未聞東向也).ꡓ하면서 정도전은 궁궐은 반드시 남향,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해야 할 것을 주장하며 북악산주산론을 끝까지 주장한다.
이 두 안은 태조 이성계가 최종안을 낙점하기 전 까지는 팽팽할 정도로 분명한 논리를 안고 있었다. 인왕산주산론을 펼친 무학대사는 태조가 만약 북악산 아래에다 궁을 앉히면 백악산과 마주 보는 <외4산>의 관악산이 화기를 내 품는 산이기 때문에 조선왕조 내내 궁궐에 화기의 피해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둘째는 백악산(북악산)이 바윗덩어리의 골산이기 때문에 이 산 아래에다 궁을 앉히면 왕위를 향한 골육간 싸움과 피비린내가 멈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저것 생각하며 휘둘리지 말고 인왕산 아래에다 궁궐을 앉혀라 하고 태조 이성계를 설득한다.
그러나 조선왕조 개국의 총체적 마스터플랜을 설계한 정도전은 인왕산 아래에다 왕궁을 앉히는 인왕산주산론은 마포나루와 신촌의 더 넓은 평지가 왕궁이 앉을 입지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만 최대의 단점은 동쪽을 바라보게 왕궁을 앉혀야 되는데 중국의 전 왕조를 살펴봐도 임금이 정사를 펼치던 왕궁은 모두 남쪽을 바라보도록 앉혔지 동쪽을 바라보도록 앉힌 왕궁은 없었다면서 역사의 가르침대로 백악산 아래에다 남쪽을 향해 왕궁을 앉히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며 무학대사의 인왕산주산론을 강력히 배척한다.
조선왕조 개국의 총체적 마스터플랜 설계권을 가지고 있는 정도전의 정치적 입지와 태조의 신임에 밀려 왕사 역할을 했던 무학대사도 결국은 정도전의 주장에 떠밀려 인왕산주산론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태조와 정도전이 보는 앞에서 "네가 천지만물의 생성원리와 풍수지리를 알면서도 끝까지 백악산주산론을 고집하면 국태민안과 왕실의 안녕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두고 보라. 200년 후면 이 왕궁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며 그 전에는 골육상쟁으로 왕궁 안이 피비린내로 점철되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하며 세속과 인연을 끊듯 태조의 왕사(王師) 직과 그 직책과 연관된 부귀영화까지 다 버린 채 산 속으로 들어 가버린다.
태조 이성계는 깊은 시름에 잠겨 고민하다 결국은 삼봉 정도전의 건의를 최종안으로 채택한다. 이렇게 갑론을박을 거듭한 끝에 북악산주산론이 최종안으로 결정되자 태조는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계획을 삼봉 정도전에게 하명한다. 이어서 10월에 천도를 결행하고 11월에는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하여 허허벌판이었던 북악산 밑에다 종묘와 궁궐, 관청들의 터 파기 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인 새 수도 건설을 시작한다. 그리고 천도 다음해인 1395년 1월에는 대신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주택을 건설할 대지를 나누어준다. 이 때 허허벌판이었던 세종로, 광화문, 종로 일대가 본격적인 도시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해 6월 태조는 새 수도의 명칭을 한양부(漢陽府)에서 한성부(漢城府)로 승격하는 행정명령을 내린다. 아울러 새 수도를 5부 52방의 구역으로 분할하여 행정구역도 확정짓는다. 그때 한성부는 도성 내부와 그 주변의 십리구역(十里區域), 다시 말해「성저십리(城底十里)」로 획정되어 행정구역상의 이원적 체제가 확립되었고, 도성 내를 5부(部)로 나누고 그 밑에 방(防)을 두었다. 뒤이어 같은 해 9월에 종묘와 경복궁도 완성한다.
천도와 동시에 시행하려 하였던 성곽의 축조는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이라는 성곽수축을 전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을 쌓을 자리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하고, 다음 해인 1396년 1월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두 차례의 공사 끝에 완성한다.
그래서 도성 성곽에는 4방위에 맞추어 남쪽에 숭례문, 동쪽에 흥인문, 서쪽에 돈의문, 북쪽에 숙청문의 4대문을 건축한다. 그리고 4대문 사이에 동남쪽에 광희문, 서남쪽에 소덕문, 서북쪽에 창의문, 동북쪽에 홍화문의 4소문을 세워 오늘의 서울이 있도록 기반을 닦아놓는다.
이런 역사 기록물과 설화 기록물 그리고 1840년대 고산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首善全圖 : 목판본 한양지도) 등을 최근인 2007년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한번 정독한 나로서는 이것이 진실인지 허구인지 정확히 확인할 길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학대사가 정도전을 향해 한 마지막 쓴 소리가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네가 천지만물의 생성원리와 풍수지리를 알면서도 끝까지 백악산주산론을 고집하면 국태민안과 왕실의 안녕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두고 보라. 200년 후면 이 왕궁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며 그 전에는 골육상쟁으로 왕궁 안이 피비린내로 점철되며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이나 결과론에 무게를 싣는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무학대사가 정도전에게 한 이 말은 공교롭게도 다 맞아떨어졌다. 무학대사가 태조 이성계의 왕사직마저 내놓고 산속으로 들어 가버린 이후 얼마 있지 않아 발생한 1, 2차 왕자의 난,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임진왜란과 명성 왕후 시해사건 등은 마치 짜 맞추듯 무학대사의 경고를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다.
만약 조선왕조 개국 총체적 마스터플랜 설계권을 가지고 있던 정도전이 무학대사의 권고대로 인왕산주산론을 받아들였다면 정확히 조선왕조 개국 200년 후에 다가온 임진왜란 때 경복궁은 불타지 않았을까? 또 그 이후 명성황후는 그 궁궐 안에서 왜국의 자객들에게 시해되지 않았을까? 또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조선조 초의, 동생이 형을 죽이고 삼촌이 조카를 죽이는 혈육간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은 없었을까?
우리의 조선왕조 역사에 대한 가슴 아픈 장면들을 혼자 떠올리며 말없이 일행의 뒤를 따르다 보니 오전 9시 30분에 사직공원에 도착했다. 나는 그동안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처음 들어와 보는 사직공원 내부를 관심 깊게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사직공원(社稷公園)은 인왕산 남쪽 기슭, 즉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48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 공원은 사적 제121호로 태조가 한양 천도 이후 첫 사업으로 <우사좌묘의 원칙>, 즉 경복궁의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짓고 왼쪽에는 종묘를 짓는다는 원칙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사직단과 종묘를 건립한 것이다.
연혁을 보면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사직단이 사적으로 지정되고, 경성부로 이관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 경성부는 이곳을 조선왕조의 성지로 정해 잡인의 근접을 막았고, 1897년 고종황제가 사직단 정문(보물 제177호)을 태사(太社)․태직(太稷)이라 높여 부르게 했던 사직단의 격을 교묘히 낮추며 이곳에 순환도로와 정자․벤치 등을 설치해 1924년 5월부터 공원화한다.
그러다 1940년 3월 정식으로 서울의 도시공원으로 지정한다. 그러다 88 서울올림픽이 있던 1988년 서울시에서 사직단을 새롭게 단장․복원한다. 현재의 공원 내를 산책해 보면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 모자의 동상과 김동인 문학비가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각종 공원시설을 비롯해 어린이 놀이터, 수영장 등도 볼 수 있다. 공원의 북쪽에는 서울시립 종로도서관이 있으며, 도서관 뒤로 조금 더 올라가면 조선 국궁(國弓)의 활터로 유명한 황학정(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5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사직공원 입구에 있는 사직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단군성전으로 올라갔다. 경내는 조용했다. 임평모 박사를 비롯해 몇몇 분이 참배했다. 나는 양승근 부회장에게 단군 성전의 내부를 카메라에 다 담아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모두들 단군성전 앞마당에 모여 기념촬영을 마친 뒤 그 옆으로 난 인왕산길(인왕산스카이웨이) 을 따라 한 10여 분 정도 걸어 올라가 오전 9시 50분 경부터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울성곽 인왕산 들머리 계단 옆에 서 있는 안내판의 기록에 따르면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 18.2㎞)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했던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정도전은 태조의 어명을 받아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이라는 성곽수축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을 쌓을 자리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4산, 즉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한 뒤 다음 해인 1396년 1,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8,000 명을 요역(부역)원들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 9월 49일 동안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역사적 정사 기록을 읽고 난 뒤 우리들은 인왕산 능선을 따라 켜켜이 이어져 올라간 서울성곽을 쳐다보며 인왕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한 20여 분 정도 능선을 따라 오르자 서울성곽 밖으로 선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선바위는 매우 잘 알려진 인왕산 기도터이다.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무학대사와 이성계 그리고 정도전에 관한 설화도 많이 안고 있는, 정말 신비스러운 외양과 영험한 기운이 넘쳐흐르는 바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바위는 우선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할 때마다 모양이 달라진다는 신비스러운 바위이다. 특히 우측의 바위는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서 참선을 하고 있는 모양을 닮은 데서 <선(禪)> 자를 따서 선바위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다른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라는 설화도 있고 또 다른 일설에는 태조 이성계의 부부 상이라는 말도 전해져 내려온다.
어쨌든 선바위는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어명을 받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다니다가 현재의 한양 땅을 찾았으나 그 수명이 길지 않음을 한탄하여 이곳 선바위에서 1000일기도를 올렸다는 전설을 전해주고 있는 바위이다.
이후 갑론을박 끝에 한양에다 새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종묘 사직과 왕궁을 완성한 뒤 그 종묘 사직과 왕궁을 외침으로부터 보호할 성곽을 축성하고자 했을 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정도전, 하륜 등 개국 공신들에게 직접적으로 고민을 안겨준 과제는 어디서, 무엇을 기준으로 도성을 쌓을 것이며, 그 도성을 들어오고 나가는 출입문을 어디에다 설치할 것인가가 정도전 이하 실무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시급히 단안을 내려야 할 실무적인 과제였다. 이 때 재미있게 전해지는 설화가 <택리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서울신문 2004년 3월 6일자 12면 이상일 논설위원의 [씨줄날줄] 기사를 읽다보면 <서울>은 600여 년 전 어느 겨울 아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밤에 내린 눈이 다 녹았는데도 북악산, 인왕산, 남산을 잇는 능선에는 그대로 눈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새 도읍지의 성곽을 어떻게 쌓을까 고심하던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하얀 능선을 보자 무릎을 쳤다는 것이다.ꡒ이것이야말로 하늘의 계시ꡓ라고 생각한 그는 태조 이성계에게 그 자연현상을 보고한 뒤 능선을 따라 도성을 쌓았다고 한다. 그때 서울성곽을 "눈으로 된 울타리"라고 해서 <설울(雪城)>이라고 불렀고 이것이 오늘날의 <서울>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빙성이 낮지만 조선시대 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地)>에 나오는 서울의 어원이라는 것이 이상일 논설위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와 더불어 또 하나 전해지는 전설은 인왕산 서쪽 기슭에 있는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어 축성할 것인가, 아니면 밖으로 내놓으면서 성곽을 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불거진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 있었던 <서울성곽> 축성노선 대립이다. 당시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서울성곽 안으로 넣어 축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정도전은 이 바위를 성곽 밖으로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태조 이성계에게 고하기를 "이 바위가 성 안으로 들어오면 불교가 왕성하고, 성 바깥으로 내놓으면 유교가 왕성한다"고 고했다는 것이다. 태조가 이 보고를 받고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며 서울성곽을 선바위에서 불과 몇 미터 안쪽으로 쌓게 하명하는 것을 본 무학대사는 "앞으로 중이 선비의 책 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며 시중 들 신세가 되겠다"고 한탄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은 결국 개국공신 정도전은 바위의 영험함에 불교가 성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 밖에 두고자 하였고, 반대로 왕사인 무학대사는 도성 안으로 두기를 희망하였다는 이야기를 후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조는 두 인물의 주장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심하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그때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새 도읍지로 결정한 도성 전역에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는데 선바위 안쪽으로는 눈이 녹은 것을 보고 선바위를 서울성곽 바깥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서울시는 이런 전설과 설화를 품고 있는 선바위를 <서울시 지정문화재 민속자료 4호>로 지정해놓고 있다.
나는 이런 전설과 사료들을 더듬으며 또 다시 한 10여 분 정도 능선을 타고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 그때 서울 성곽 안쪽으로 치마바위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치마 바위는 맞은편인 효자동 쪽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면 정상 바로 아래쪽 옥인동 지역에 높이 80미터 가량의 주름진 바위가 가파르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치마바위에도 가슴 아픈 역사적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연산군 12년(1506년) 훈신계열인 박원종․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이 조선왕조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아우인 중종을 즉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 때의 일이다. 1506년 9월, 박원종․유순정(柳順汀)․성희안(成希顔) 등은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과 함께 무사들을 모아 궁금 세력의 대표자인 임사홍(任士洪)․신수근(愼守勤) 등을 제거한 다음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허락을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등극시킨다.
왕위에 오르기 전 중종은 부인 신씨와 남달리 부부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은 신씨의 부친 신수근을 죄인으로 몰아 사사하였기 때문에 죄인의 딸을 왕비로 모실 수가 없다는 논리를 펴며 신씨를 사가로 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이 결정으로 인해 신씨는 날벼락을 맞듯 그 날로 인왕산 기슭의 친정 집으로 쫓겨간다.
그렇지만 중종은 궁중에 있으면서 부인 신씨와의 10여 년 간의 정분을 잊지 못해 늘 경복궁 경회루에 올라가 신씨가 있는 인왕산 기슭을 바라보곤 하였다는 것이다. 부인 신씨도 중종과 생이별한 후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상감께서 자신을 잊지 못해 경회루에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본다는 소문을 듣고는 아침 일찍 인왕산으로 올라가 자신이 자주 입던 치마를 경회루에 잘 보이도록 바위 위에 널어놓았다 저녁이면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신씨가 치마를 널어놓은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 치마바위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한상준 교장선생님이 무겁게 지고온 요쿠르트를 각자 앞에 두 개씩 나누어 주시자 노기태 선생님이 배두 개와 사과를 내놓으신다. 우리들은 덩달아 지고온 등산배낭에서 음료를 꺼내 나누어 마시며 땀을 식혔다. 임평모 박사님은 오늘의 이 휴식시간을 위해 티베트 지역을 여행하며 구입한 놋쇠요강 같이 생긴 악기와 스타벅스에서 만든 초클릿을 꺼내 놓으시며 일행을 즐겁게 해주신다. 우리들은 임평모 박사님이 연주해 주시는 악기 소리를 들으며 배를 깎아 몇 점씩 나눠 먹었다. 뒤이어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까지 나눠 마시며 한참을 쉬었다 싶었는데도 시간은 10시 30분이다.
우리는 멈춘 듯한 시간을 일깨우듯 10시 50분경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빤히 보이는 인왕산 정상을 향해 다시 올라갔다. 불과 30여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는 땀을 식히며 마치 우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듯한 사각형 목재식탁과 식탁과 일체형으로 고정된 의자에 빙 둘러앉아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배낭 속의 도시락을 다 꺼냈다. 임노순 전 회장이 소성막걸리를 두 병이나 준비해 오고 이담하 선생이 오곡밥과 닭발복음 요리를 엄청 많이 준비해 왔다. 거기다 양승근 부회장이 손수 담근 와인과 상치 쌈과 쌈장, 메밥으 보온 도시락에 넉넉하게 준비해 와서 산행 참석자 11명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오찬을 즐겼다.
백악산으로 올라가는 자하문 앞에 서 있는 개천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표지석
[일기․4]
오찬을 끝내고 기념촬영을 끝마쳐도 시간은 12시밖에 안 되었다. 우리는 인왕상 정상 바위 곁으로 다가가 단체사진 촬영을 끝낸 뒤 바로 창의문을 향해 인왕산 정상을 내려갔다.
서울성곽은 동서남북에 <4대문>을 내고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彰義門)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소문이다. 그러나 창의문은 현재까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으며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검정 근처에 있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는 창의문이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창의문의 <옳을 의(義)> 자는 오행상으로 금(金)을 나타내고 서쪽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의 이름을 나타내는 <창의(彰義)>는 서쪽을 빛나게 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성곽 4소문의 문들과는 달리 창의문 지붕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이다. 이는 창의문 밖의 지세가 마치 지네 모양이기 때문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조각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기 위한 <풍수의 비보책>이라는 말이 있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쌓을 때 돌로 쌓은 홍예(虹霓)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 구조의 문루가 있다. 4대문 중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등 북쪽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문을 거쳐서 왕래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 때 능양군을 비롯한 의군(義軍)이 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 반정을 성공시킨 유래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누문 다락에는 인조반정 때의 공신의 명단을 적은 게판(揭板)이 걸려 있다.
나는 창의문의 문루로 올라가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공신의 명단이 적혀 있는 게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임노순 전 회장과 함께 잠시 마루바닥에 앉아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나눠 마시며 땀을 식히다 내려와 고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 앞으로 다가갔다.
최규식 경무관은 1968년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과 정부요인 암살지령을 받고 한국군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한 청와대 기습사건 당시 서울특별시 종로경찰서 서장으로 재직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청와대로 진입하던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을 가로막고 검문을 벌이다 공비들로부터 총격을 당해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했다.
이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우리는 30여 년간 이 앞길을 거닐 수 있는 통행권이 제한당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고 역사적 의미가 깊은 북악산을 등산할 수 있는 행복추구권도 제한당했다. 그러다 2007년 4월 5일 39년 만에 북악산이 서울 시민들에게 다시 개방되었다. 우리는 최규식 경무관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다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육탄으로 124군부대원들을 막아내다 순국한 정종수 경사의 순직비 곁으로 다가가 121사태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더듬어보다 청계천 발원지를 알려주는 표지석 앞으로 나왔다.
서울의 내4산을 살펴보면서 나는 정말 예사로 보아 넘길 표지석 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연구한 논문들을 살펴보다 처음 들은 이야기인데 서울의 <외4산>과 <내4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하천이 저마다의 발원지를 가지면서 한강으로 흘러내린다. 그런데 조선의 크고 작은 모든 하천들은 모두 동쪽에서 발원, 출발하여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동출서류(東出西流) 하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의 이름이 개천(開川)인 이 청계천만은 이곳 창의문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150미터 지점에 있는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약수터가 있는데 이곳이 천계천의 발원지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발원한 청계천, 즉 개천은 서울의 모든 하천 중에서 유일하게 서출동류(西出東流)하는 역수(逆數)를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으뜸가는 명당수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천은 우리가 39년 동안이나 가보지 못했던 북악산 중턱 샘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다 수락산․도봉산과 우이동 계곡으로부터 발원하여 도도히 남진하는 중랑천(中浪川, 中梁川)과 현재의 한양대 동편에서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천물을 받은 한강은 또 다시 서울의 외명당을 감싸 도는 객수(客水)로서, 한양을 북으로 환포(環抱)하여 남을 지나 다시 북서진(北西進)해 입해(入海)하는 일대 곡류하천(曲流下川)으로서 서울 시민의 젖줄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북악산 아래 건축된 경복궁과 서울 <내4산>의 남쪽산인 목멱산, 즉 남산과 <외4산>의 남쪽산인 관악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므로 해서 관악산의 화기가 경복궁을 덮쳐 조선왕조 임금이 거처하는 왕궁은 골육상쟁과 병화가 끊어질 날이 없어 광화문 옆에다 불기운을 삼키는 해태 상을 조각해 관악산에서 뻗혀 오는 화기를 삼키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그 화기를 다 감당할 수 없어 경복궁 옆 평지에다 인공 연못을 파서 <경회루>를 짓고 개천(開川)에서 내려오는 물을 저장해 궁궐로 달려드는 화기를 다스리고, 또 그 인공연못에서 나온 흙은 지세가 약한 동쪽 낙타산(낙산) 쪽을 보강하였다는 설화도 나에게는 여간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서울성곽 4대문 중 동쪽문인 동대문의 명칭을 <흥인문>이라 일컫지 않고 풍수지리적으로 지세가 약한 것을 보완하듯 <흥인지문>이라고 한 글자를 더 보태어 명명했다는 기록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역사적 기록들과 일화를 다시 들추어보게 만드는 것이다.
이건 결국 무슨 말인가 하면 한양을 새 도읍지를 결정할 때 <도참비기>에 조예가 깊었던 하륜이나 정도전 역시 무학대사가 일갈한 북악산주산론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다 알면서도 중국 역사상 왕궁이 동쪽을 향한 실례는 한 곳도 없었다는 기록을 엄중히 여겨 신라 말기부터 고려왕조 내내 우리 선조들의 의식세계를 지배해 온 도참비기를 정책 결정을 할 때는 부정했다는 사실이 새롭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새 수도의 왕궁은 풍수지리적 측면에서는 다소의 결함을 지니더라도 당시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남쪽을 향해 앉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풍수지리학적인 불행은 인간의 의지와 단결된 국력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새 왕조의 가치관과 나라를 바로 세워 보고자 하는 공신들의 건국이념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뜻 깊은 견학이었다.
우리는 다시 창의문 쉼터까지 걸어나와 북악산 탐방 안내문을 선 채로 읽어보았다. 북악산이 1968년 121사태 이후 39년 만에 서울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해도 그 후유증은 아직도 큰 듯했다. 북악산을 오르려면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 출입신청서>를 작성해 관리사무소에 주민등록증과 함께 제출해야만 출입증이 나오고 또 그 출입증을 목에 걸어야만 <紫北正道>, 즉 자하문 북쪽으로 향하는 바른 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월요일은 매주 휴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울성곽 해설을 담은 팸플릿을 한 부씩 가져갈 수 있게끔 인쇄물을 준비해 두어서 우리는 그 팸플릿을 한 부씩 들고 나와 서울성곽 안내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역시 이 안내문에도 인왕산 들머리 옆에 서 있던 안내판에서 보았던 것처럼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 18.2㎞)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정도전은 태조의 어명을 받아 궁궐과 종묘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이라는 성곽수축을 담당할 기관을 설치하여, 총 59,500척(尺)에 이르는 성을 쌓을 자리를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4산, 즉 백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따라 실측․결정한 뒤 다음 해인 1396년 1,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8,000 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가을 농한기인 8, 9월 49일 동안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 덧붙여 중간쯤 행간에 이 서울성곽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가 872명에 이른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오전에 인왕산을 오를 때 안내판을 통해 1396년 1,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8,000 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 9월 49일 동안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성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을 보면서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심한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전화도 없고, 자동차도 없던, 서기 1396년 1월에, 그 혹한의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계절에 전국에서 체계적인 훈련도 되지 않은 민간인 118,000명을 어떻게 동원할 수 있었으며, 그 민간인 118,000명은 각자 중앙정부인 한양 왕궁으로부터 요역(부역) 동원령을 받은 이후 어떻게, 이 서울성곽 축성공사 현장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때가지도 풀리지 않았다.
그들은 필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오던 당시의 유생들처럼 두 다리로 걸어왔을 것 같다. 그런데 걸어오다가 날이 어두워지거나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악천후가 계속될 때는 어디서 눈비와 추위를 피하며 체력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 한양 성곽 축성공사 현장에 도착해서는 118,000명이라는 그 많은 인원이 어디서 먹고, 자면서 지정된 구역으로 시간 맞추어 나가 할당된 일일 작업량을 완수하면서 하루의 작업을 끝냈으며, 또 어디서 고단한 몸을 뉘어 피로를 풀며 휴식을 취하다 다음날 또 성곽 축성공사 현장으로 나가 할당된 작업량을 마치면서 49일 동안 같은 일과를 반복했을까 하는 문제가 풀리지 않아 몇 며칠 동안 지난 시절 내가 읽은 책들을 뒤적이며 고민을 했다.
그러다 나는 최근 30여 만원이 넘는 거액을 주고 구입한 12권짜리 <신증동국여지승람> 번역본을 뒤적이다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초의 <역참제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역참이란 조선시대의 교통 통신 기관이며, 나라의 명령과 공문서를 전달하기도 하고, 변경지방에 급한 군사적 사태가 발생할 때는 이를 전달하기도 하고, 외국 사신이 오면 영접하기도 했다. 또 물자의 전송을 담당하기도 했다.
원래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고려왕조에 강요한 <원 간섭기>에 원나라의 참적(站赤)제도라는 것을 본 따 참(站)을 만들었다. 그때 육지에는 육참(陸站), 해상이나 강변에는 수참(水站)을 설치했다. 이렇게 역참을 설치해 놓은 뒤 이 역참을 운영해 나가는 재정은 마위전, 혹은 마전(馬田)이라는 세금을 내지 않는 경작지를 급전 형식으로 지급해 자체적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위전은 역에 소속된 마호가 경작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고려 전역에 역참을 만들어 놓은 뒤, 원나라는 지금의 경남 마산에다 일본을 정복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해 <정동행성>이라는 원나라 관아를 설치해 고려를 100년 동안이나 간섭하며 자국의 국익을 도모했던 것이다.
삼봉 정도전이 기틀을 잡아놓은 <경국대전>의 기록에 따르면 대마는 7결(結), 중마는 5결 50부(負), 소마는 4결이 주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불법으로 마위전이 매매되기도 하였고, 이에 따라 역참의 운영에 재정적인 타격이 가해져 역참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경우도 많았단다.
역참제는 서기 1885년(고종 32)에 폐지되었다. 역참의 최고위직은 찰방(察訪)이다. 찰방은 종6품의 관료로 중앙에서 파견되었는데, 조선 초기에는 찰방의 역할이 커서 주변 수령에 대한 감찰의 역할까지 맡았단다.
역참에 소속된 말들은 마적(馬籍)에 기록하였는데, 매월 보름마다 건강상태를 조사하였단다. 그러다 만약 역마의 관리를 소홀히 하였을 때는 벌을 받았단다. 역마의 사용은 마패를 소지한 관리들만 가능했다. 다시 말해, 마패는 원래 암행어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방에 나가는 관리들이 역참의 역마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증명서 같은 것이란다.
마패는 병조에서 마문(馬文)을 발급하여 상서원(尙瑞院)에서 받을 수 있었단다. 지방의 경우에는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마패를 발급할 수 있었단다. 마패의 상징인 말 그림은 빌릴 수 있는 말의 수로서 5마패까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암행어사에게 발급된 마패는 2마패가 많았단다.
1398년(태조 7) 2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의 역참에는 사리(司吏) 2명, 일수양반(日守兩班) 5명, 관부(館夫) 5명, 급주인(急走人) 5명, 마부(馬夫) 15명 등을 두게 하였단다. 이것이 후대 역참 조직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현종대에 지방제도의 정비 및 지방관의 파견이 이루어지면서 역참제도가 정비되어 22역도(驛道) 525역(驛)의 역참제가 완성되었단다.
조선시대 역참제의 개괄적인 모습은 <경국대전>에서 41역도 516역의 전국 <역로망체제>로 완성되었단다. 그 후에는 큰 변화 없이 그 체제가 한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고 봉수제(熢燧制)․파발제(擺撥制) 등이 운영되어 상호 보완되게 하였단다.
그렇다면 일개 역참과 역참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 되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10권 334쪽> 강원도 횡성현의 조선왕조 초기의 기록을 보면 "역원(驛과院)은 오원역은 현의 동쪽 35리에 있다. 안흥역은 현의 동쪽 67리에 있다. 갈풍역은 현의 서쪽 6리에 있다. 창복역은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대비원(大悲院)은 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실미원(實美院)은 현의 50리에 있다. 홍안원(弘安院)은 현의 북족 2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역(驛)이란 파발이 경유하는, 요사이 역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원(院)이란 요사이 여인숙이나 민박집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다. 조선왕조에서 사용한 거리 단위의 리(里)는 대충 요사이 4㎞를 10리로 호칭했으므로 현의 북쪽 40리란 현의 북쪽 16㎞ 정도의 거리를 의미한다.
요사이 건장한 남자들이 시간당 평균 5㎞ 정도 걸으니까 조선왕조 초기 한양성곽 축성공사에 요역(부역) 동원령을 받고 지방에서 올라온 장정들은 하루 평균 10시간 정도 걷는다고 가정할 때 부산에서 한양까지 오려면 작아도 10여일 앞서 집에서 출발해야 하며, 오는 도중에 10번 정도는 원(院)에서 잠자리와 끼니를 제공받아야만 한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서기 1396년 1월과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8,000 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성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월과 9월 49일 동안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골격을 완성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실제 일한 날짜는 100일 정도 되지만 동원된 장정들이 한양 성곽 축성공사 현장까지 오고간 시간까지 합하면 약 120일 동원 국가와 수도와 국왕의 안전보장을 위해 자신의 귀중한 노동력을 자기부담으로 제공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북악산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길 한 계단 한 계단이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계단이라는 것을 인왕산 - 북악산 종주산행을 통해 어렵사리 느낄 수 있었다.
이날 우리는 12시 40분 경 창의문을 출발해 돌고래쉼터(13:10) → 백악마루(북악산 정상 / 13 : 45) → 청운대 → 곡장(14 : 50) → 촛대바위 → 숙정문 → 말바위쉼터로 내려와 14시 40분 경에 목에 걸고 올라간 패찰을 반납했다. 그리고 15시 20분 경에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110-8번지에 있는 마을버스 정류소에서 3번 버스를 타고 한성대 입구 4번 출구 앞에서 내렸다. 그리고 15시 40분 경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동대문역까지 와서 1호선 지하철을 바꿔 타고 인천으로 내려왔다.
인천 간석5거리 지하철역에 도착하니까 17시 10분 정도 되었다. 우리는 약간 피로했지만 임노순 전 회장이 잘 안다는 <육해공 퓨젼 뷔페>로 걸어가 17시 30분부터 회식에 들어갔다. 돼지갈비와 쇠고기도 굽고, 오리고기와 쭈꾸미도 굽고, 각종 해산물과 야채류도 접시마다 가득 담아와 자기 자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는 음료수와 소주로 자기 앞에 놓인 술잔을 채운 뒤 아무 사고 없이 즐겁고 신나게 3월 정기산행을 마치고 무사히 인천까지 귀환한 것을 경축했다.
회장의 <위하여> 건배사 제청과 함께 산행을 함께 한 회원 전체가 "인산!" 하고 크게 외치며 앞으로도 단합과 친목을 돈독히 해 나갈 것을 약속하며 높이 든 술잔을 마주쳤다. 쨍그랑 소리를 낸 뒤 쭉 들이키는 술맛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우리는 정말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휩싸여 거푸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산행 뒷풀이 의식을 즐기다 19시 10분 경 4월의 도봉산 정기산행을 기약하며 해산했다. 즐겁고 의미 깊은 산행을 마친 행복한 주말 하루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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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말]
처음 이 산행기를 구상할 때는 <위화도회군>이라는 키워드에다 고려말 조선초 송도 궁궐 내의 인적구성과 그들의 권력투쟁 양상까지 그리며 당시를 살았던 수창궁 궁궐 내부 권문세족들의 인간관계까지 더듬어 볼 계획이었으나 3월 들어 갑자기 개인적으로 바쁘게 책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급한 일이 불거져 인물이야기는 이 종주기에서 삽입하지 못했습니다.
차후 더 보강해서 중편소설 형식으로 재집필해 인산문학회가 종주한 <서울성곽> 기념사진과 함께 기록물로 남겨놓을 계획이오니 이 종주기를 읽는 분들은 나름대로 조언도 해주시고 가지고 계신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있다면 잠시라도 제가 열람할 수 있도록 보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서울>의 <울>자가 희귀 한자여서 이 카페 프로그램에서는 나오지 않아 <울(초두(┼ ┼ ) 밑에 宛)>으로 표현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9년 3월 19일 형산 드림
첫댓글 온갖 자료까지 찾으시며 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서울을 중심으로한 역사에 대해 새롭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토록 역사적 자료가 담긴 훌륭한 산행기를 읽는 맛은 함께 산행해 보지 않고 산행기만 읽는 것으로 가히 어찌 그 참 맛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인 듯합니다. 산행기 내용에 동참했다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그리고 항상 열정에 넘치시는 활동, 조금이라도 닮아 보고 싶지만 그릇이 못되어 그리 하지도 못함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산행기 아닌 논문()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헉헉!! 읽느라고 숨넘어가는 줄 알았음다. 이 참새는 어찌 써야 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