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직후 응급치료를 마치고 기차편으로 상경하는 김대중 후보와 권노갑 당시 비서등 그의 일행.
김대중에게 위기가 닥쳤다. 전국 지구당을 한 바퀴 순회하면서 유세 지원을 하고, 마지막 순서로 목포를 들러 서울과 수원에서 지원 강연을 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선거 하루전인 5월 24일 상경길에 목포와 광주 사이(무안)에서 ‘사고’가 벌어졌다.
갑자기 앞을 가로 막은 트럭을 피하려다 승용차가 전복되어 부상 입원,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다. 사고 현장의 정황으로 보아 의혹이 짙은 사건이었다. 직접 그의 육성을 통해 사건의 내막을 들어보자.
71년 5월24일 사고경위를 설명하고 있는 김대중 후보.
광주, 목포 간 도로의 중간지점인 무안군 지점에 들어 설 때였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내 차와 뒤의 경호차 사이에 끼어들었다. 택시안에는 앞좌석에 3명, 뒷좌석에 3명이 타고 있었다. 신혼부부인 그들은 날 보더니 반가워서 아는 체를 하려고 끼어든 것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렇게 경호차, 내 차, 택시, 그리고 또 한 대 경호차가 일렬이 되어 포장된 길로 광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앞에서 14톤 대형 트럭이 맞은 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내 차와 맞닥뜨리게 된 순간, 그 대형트럭은 반대편 차선에서 내 차를 향해 거의 직각으로 급커브를 틀어 돌진해 왔다. 시야에 꽉 차게 돌진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몸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부딪치겠구나, 틀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우리차 운전수가 브레이크를 밟는 대신 순간적으로 액셀레이터를 밟아 맹렬한 스피드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 덕분에 정면충돌은 면했지만 내 차 뒷부분 5분의 1정도가 부딪쳐 파손되었다. 조금 더 앞부분이 부딪쳤더라면, 나는 즉사했을 것이다. 이것은 눈 깜짝한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 1초의 10분의 1 정도 사이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 차는 내 차에 부딪친 뒤, 뒤에서 달리던 택시와 정면 충돌했다. 뒤의 택시도 빨리 피했으면 괜찮았겠지만, 그럴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다. 그 결과 택시에 타고 있던 세 명은 현장에서 즉사, 나머지 세 명은 중상을 입었다.
내 차는 충돌한 순간, 트럭에 튕겨져서 잠시 공중에 떴다가 논바닥에 그대로 떨어졌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받쳐준 것 같은 안전한 착지였다. 함께 타고 있던 경호책임자는 중상을 입었지만, 나는 손깎지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양 손목의 정맥이 끊어져 출혈만 있었다. 거기서 불과 30미터 앞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만약 거기에서 물속으로 떨어졌더라면 모두 익사했을 것이다. 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의 가호였다고 할 수 있다….
트럭 주인은 공화당의 유력자인 변호사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비례대표제의 전국구 제8위에 올라 당선이 확실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잡힌 운전사는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그 조사에 있어 기소를 결정한 검사는 모두 좌천되고, 바뀐 검사는 이 일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부는 그 뉴스 보도를 막았다. 이 사건은 나를 제거하기 위해 중앙정보부가 계획한 음모였다. 이것은 나에게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처형될 뻔한 일에 이어, 두 번째 죽음의 늪에서 탈출한 사건이었다. (주석 6)
기브스 한채로 영등포 역전에서 유세하는 모습
‘죽음의 늪’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김대중은 응급치료를 받고 기차로 서울로 올라와 수원 유세는 시간 관계로 포기하고, 예정된 서울 영등포역 광장을 비롯하여 서울의 몇 지역을 돌며 지원연설을 강행하였다. 오른손 팔목에 깁스를 한 불편한 몸이었지만 마지막 날의 지원 강연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김대중이 뒷날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리를 절게된 것은 이때 입은 다리의 고관절 부상 때문이었다.
선거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현상으로 나타났다. 여야는 물론 국민도 함께 놀란 결과였다. 모두 204명의 의원 중 공화당 지역구 86석에 전국구 27석, 신민당 지역구 65석에 전국구 24석, 국민당 1석, 민중당 1석으로 신민당이 무려 89석을 차지한 것이다. 여당의 113석과 야당의 89석이라는 의석수는 의정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신민당은 개헌저지선 69석에서 20석을 더 확보한 셈이었다. 산술적으로는 여당의 승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야당의 대단한 약진이었다. 진산파동이라는 미증유의 적전내분을 겪으면서, 더욱이 총선을 지휘할 당수조차 부재한 상황에서 신민당의 약진은 대단한 성과로 나타났다. 김대중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득표율에 있어서도 야당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총 유권자 1,561만 258명 가운데 73%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공화당의 득표율은 52.26%이고, 신민당의 득표율은 47.64%였다. 이 선거는 여야 균형국회를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행정부에 대한 견제세력을 부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권자들이 장기집권에 들어선 박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가 작용된 것으로 풀이되었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어김없이 갖가지 부정이 자행되었다.
신민당은 정부 여당의 원천적 부정선거로 규정하면서 그 이유를 ① 선거인 명부의 이중등재 ② 전입ㆍ전출을 이용한 주민등록조작 ③ 공무원을 근무지소속 투표구로 전입 ④ 직권말소 등에 의한 선거권 박탈 등을 들었다.
또 표면적인 부정으로는 ① 경찰의 야당유세 방해 ② 야당후보 및 운동원에 대한 폭행 및 협박 ③ 야당참관인 매수 ④ 공무원의 선거운동 ⑤ 사전 기표용지 배포 등을 제시하였다.
71년 교통사고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국회 회의장에서 사고당시 함께 변을 당했던 자신의 운전기사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김상현 전 의원)
서울에서는 진산파동의 계기가 된 영등포갑구를 제외한 전지역을 신민당이 석권했으며, 부산ㆍ대구에서도 여당은 1석 씩밖에 당선시키지 못했다. 32개 도시의 64개 선거구에서 공화당은 17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으나 신민당은 47석을 차지해 두드러진 ‘야도현상’을 나타냈다. 김대중도 당선되어 4선 의원이 되었다.
총선에서 예상 외의 성과를 얻은 신민당은 곧 이어 당권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그 중심에는 진산파동으로 당권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유진산의 롤백 움직임이 작용하였다. 멀리는 구민주당의 신ㆍ구파 계보, 가까이는 대통령후보 지명 관련과 진산파동의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일어난 신민당의 분란이었다. 당시 신민당은 유진산을 정점으로 김영삼ㆍ이철승의 진산파와 김대중ㆍ김홍일ㆍ양일동의 반진산파로 갈라져 있었다.
신민당은 이른바 진산파동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진산의 전국구로 후보를 변경 및 결정에 대한 책임으로 유진산ㆍ김대중 두 사람에게 공동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7월 3일 열린 진산파동의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소집된 중앙위원회에서는 격론 끝에 김대중이 공개사과를 하고 유진산과 화해하였다. 유진산의 돌연한 지역구 포기와 전국구 1번 등록으로 야기된 ‘진산파동’에 김대중이 중앙위원회의에서 사과를 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진산 계열에서는 김 후보(김대중)와 사전에 상의한 일이었다고 비판하고, 김대중은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고 반박하였다.
신민당의 주류측에서는 전격적으로 당기위원회를 열어 김대중계를 징계 조처했다. 정일형ㆍ홍익표ㆍ고흥문 의원 등이 2년 징계를 받고, 이윤수ㆍ김약산 등은 제명되었다.
신민당의 양대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7월 24일 전당대회에서 김대중과 중도계의 지원을 받은 김홍일이 총재에 선출되었다. 독립운동가인 김홍일은 4성 장군 출신으로 한일굴욕회담을 반대하는 등, 반박정희 노선의, 흔치 않는 인물로서 야당에 참여해 왔다.
상식적으로라면 대선에서 선전하고, 총선에서 사력을 다해 좋은 성과를 얻은 김대중이 총재가 되어 대여 투쟁을 벌이면서 정권교체를 위한 역량을 축적해야 하는 데도, 신민당의 사정은 이런 상식과는 너무 달랐다. 집권 세력과 싸울 때는 그처럼 온순하던 사람들이 당내 투쟁에는 사활을 건 모습을 보였다.
첫댓글 사진이 엑박이에요/..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