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아주까리기름 : 피마자 열매의 씨로 짠 기름.
* 지심 : 밭에 난 잡초, 김.
<해설> 이 시는 이상화 시인이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한 시이다. 1951년 편집 출간된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도 수록되어있다.
총11연으로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와 같이 첫 연과 마지막 연의 대응적인 반복행을 제외하고 나머지 2~10연까지는 3행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기 시에서 볼 수 있는 난삽한 한자 어휘를 피하여 순한글로 시어를 구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연의 시행(詩行)을 순차로 길게 한 것은 의도적인 것이며 이 시의 형식적인 특색이다.
이 시는 한때 신경향파문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식민치하의 민족적 상황의식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응결된 저항정신을 표출하고 있다기보다는 비탄(悲嘆)과 허무(虛無), 저항과 영탄(詠嘆)의 사이를 왕복하고 있다는 박두진(朴斗鎭)의 말과도 같이, 남(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지언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은 우리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 이 시의 간추린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민족혼을 일깨워 줄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강한 저항의식을 기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하고 굶주림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 아낙네들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과 그 소박한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말없는 비애가 있는가 하면, 진한 동족애와 식민치하의 상황의식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강한 의지력과 저항의식이 표출되어 있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 시는 ‘지금’과 ‘미래’의 역설적 의미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남에게 강제로 국토를 빼앗겼지만, 언젠가는 국토를 회복시킬 봄은 찾아온다는 식으로 실의(失意)와 희망을 교차시키고 있는 것이다.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에서 빚어진 영탄과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을 형상화한 것으로 가락이 힘차고 거센 격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이 시는 일제 강점하의 비참한 현실과 봄을 맞은 국토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화자의 비애와 설움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1연과 마지막 연은 질문과 대답의 형식이며, 2-10연은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조국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드러난다. 어김없이 찾아온 봄을 맞으면서도 제 것으로 누릴 수 없는 현실상황,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절망감이 드러나고 있다. (한권에 잡히는 현대시)
<이상화(李相和): 1901 - 1943 >
* 1901년 대구에서 출생.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 1917년 대구에서 [거화(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 활동(詩作活動)을 시작.
* 1918년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 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
*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 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 1920년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 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 1927년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 1937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 1940년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 1943년 43세에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 문단 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邕嘆)〉(1922), 〈단조(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가 있다. 그외 <몽환병 夢幻病>, <비음 緋音>, <이별(離別)을 하느니>, <조소(嘲笑)>, 등이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 이상화 시비, 시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경북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직지문화공원 이상화 시비, 시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시 수성구 수성못 뒤편 이상화 시비, 시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계산동 이상화 고택의 이상화시비, 시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현대시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1926년 ‘개벽’ 70호에 실린 이상화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다. 그는 이 작품에서 민족의 암담한 현실적 비애와 그러한 현실에서 오는 슬픔과 무기력을 자연친화적·민족적 정서의 표현을 통해 극복하려는 저항의식을 나타냈다.
이 작품은 식민치하에서 현실감각의 날카로움과 뜨거운 정열이 결합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이 말하듯, ‘빼앗긴 들’에 과연 참다운 삶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고 있다. 제1연에서 물음을 던지고, 마지막 11연에서 답을 하고 있다. 이 시의 처음과 끝은 각각 질문과 대답 형식이다. 그 사이에 있는 아홉 연은 이러한 대답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시를 통해 화자는 일제치하에서 조국의 국토에 대한 강한 애정과 이에 대한 상실감을 보여주고 있다.
4~6연은 그의 눈앞에 아름다운 봄의 들판이 전개된다. 싱싱하고 활기찬 봄의 모습이다. 제7∼8연에서는 화자의 절실한 욕구가 나타난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사랑하며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제9~10연에서는 그동안의 모든 환상을 깨뜨리면서 현실로 돌아온다. 어김없이 자연의 봄은 돌아왔지만,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없도록 모든 것을 박탈당한 식민지 상황의 절망을 깨닫는다. 마지막 연,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는 괴로운 확인이었던 것이다.
이상화(李相和 1901~1943)의 호는 상화(尙火), 대구에서 출생했다. 1915년 한문 수학 후 상경해 중앙학교에 입학, 1918년 3월 25일에 수료했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등을 발표했다. 이후 도일해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 1923년 3월 수료했다. 그러나 9월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에서 본 일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해 귀국했다.
‘백조’ 3호에 ‘나의 침실로’ 등 초기에는 탐미적 경향의 시를 썼으나, 1926년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해 ‘개벽’지는 판매 금치 처분을 당했다. 이 시기를 고비로 식민치하의 민족 현실을 바탕으로 한 저항정신과 향토적 세계를 노래해 그는 암흑기의 민족시인, 저항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린다. 독립운동과 관련해 여러 차례 감금 생활을 했다. 1943년 대구에서 숙환으로 운명했다. (김민정/시인, 국방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