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 다리 밟기(2)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으므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고,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이 오갔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유산이었다.
현재 청계천에는 서울시가 2005년에 청계천을 복원할 때 가설한 22개의 다리가 놓여 있다.
⑮ 맑은내다리 : 종로구 창신동 동대문B동 신발도매상가~중구 신당동 동평화패션타운 동평화상가 앞
-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꾼 다리 명칭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5번째의 이 다리는 맑은내다리 이름은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꾼 이름으로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다리 명칭이다.
이 다리 구조물은 마치 나비의 날개처럼 생겼다. 다리 주변이 의류 상권이기에 패션 중심 거리를 나타냄과 동시에 의류 시장이 힘차게 도약하길 바라는 의미로 설계했다.
2005년 9월 30일,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하여 준공했다.
⑯ 다산교 : 종로구 지봉로(창신동)∼ 중구 다산로(흥인동)를 잇는 곳
- 다산 정약용의 호를 따온 다산로가 지남에 따라 붙여진 다리 명칭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6번째 다리이다.
다산교 이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의 호인 '다산'에서 따온 도로 다산로가 지나는 데에서 유래했다.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로, GS건설과 현대산업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이 다리의 특징은 주탑을 세우고 상판을 주탑(柱塔)에 케이블로 달아놓은 사장교(斜張橋) 형식이다. 주탑은 인도와 차도 가운데에 각각 하나씩 세웠으며, 두 개의 주탑이 모두 다리 북쪽에 있다. 주탑의 모양은 풀잎 모양으로 만들어 친자연적인 이미지를 반영했다.
⑰ 영도교 (永渡橋) : 숭인동 234번지~상왕십리 748번지
- 단종이 영월로 귀양 갈 때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했다고하던 전해오는 다리
영도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7번째 다리이다.
이 다리는 양녕대군이 폐세자(廢世子)된 후에 경기도 광주로 귀양 갈 때 이 다리를 건넜다고 전한다
또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을 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永離別橋)’, 영미교(永尾橋) 혹은 ‘영영 건너던 다리’라고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교량명이다.
일본 강점기에 발행된 <경성부 지도>를 보면 영미교로 표기되어 있다.
단종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후 정순왕후 송씨는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금의 청룡사 새절 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이 다리를 영도교(永渡橋)라고도 칭하는데 이는 성종 때 영도사(개운사)의 중을 동원하여 돌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동묘(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이 다리는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교통량이 매우 많았다. 그리하여 조선 초에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箭串橋)와 함께 이곳의 돌다리를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석재로 쓰기 위해 헐어갔다고 전한다. 그 뒤 나무다리를 대신 놓았으나 가끔 떠내려갔으므로 개천 바닥에 돌을 띄엄띄엄 놓은 ‘띄움 돌’을 놓아서 사람들이 이 돌을 밟고 건너다니던 때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에 나무다리를 헐고 콘크리트로 새로 지었으나 1960년대 청계천 복개공사 때 사라졌다. 지금 다리는 서울시에서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것으로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이 다리는 전통의 대청 양식을 도입한 무지개다리이다.
⑱ 황학교 : 난계로(청계8가)에 놓인 다리
- 황학동 도깨비시장의 공간특성을 반영한 다리
황학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8번째 다리로 다리 위로 난계로가 지나간다..
황학동 도깨비시장의 공간특성을 반영한 다리로 옛날 이곳 논밭에 황학(黃鶴)이 날아왔다는 전설에서 비롯되어 황학동이 존재하므로 동명을 따라 다리 이름을 붙였다.
이 다리의 특징은 황학동 도깨비시장의 공간특성을 반영하였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던 이 다리는 2000년대에 서울특별시에서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가설한 다리이다.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⑲ 비우당교(庇雨堂橋) : 동대문구 신설동 100번지~성동구 상왕십리동 12번지
- 다리 근처에 조선 초의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하정(夏亭) 유관(柳觀) 선생 집이 위치하여 붙여진 명칭.
비우당교(庇雨堂橋)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19번째 다리이다.
조선초 세종 때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진 하정(夏亭) 유관(柳觀) 선생 집이 이 다리 근처였는데, 그의 청렴함은 비가 오는 날에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비를 피했을 정도였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집을 '우산각(雨傘閣)'으로 부르고, 그 동네를 '우산각골'이라 불렀다.
그후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수광이 그 뜻을 살려 우산각 자리에 작은 집을 짓고 ‘비(雨)만 피한다(庇)’라는 뜻의 ‘비우당(庇雨堂)’이라 이름 붙였다. 후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류관의 청빈 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다리의 특징은 뉴타운의 미래지향적 이미지를 반영하였다.
⑳ 무학교 : 동대문구 용두제2동 255번지~성동구 하왕십리동 596번지
- 조선 초의 고승 무학대사를 도로명으로 정한 무학로의 이름을 인용한 다리 명칭.
무학교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0번째 다리이다. 조선 개국초에 이 도로의 종점 지역인 왕십리 벌 지역에 도읍을 정하려고 태조 이성계를 따라 명당을 보러 다니던 고승 무학대사에서 유래한 무학로의 이름을 인용하였다.
이 다리의 특징은 햇살의 이미지를 모티브로 반영하였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했으며, 2005년 9월 30일에 준공했다.
㉑ 두물다리 (청혼의 벽) : 동대문구 용두제2동 129번지~성동구 마장동 527번지
- 청계천 본류와 지류인 정릉천 두 개의 물이 만나는 곳에 설치된 다리
두물다리는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1번째 다리이다.
이 다리의 위치가 청계천과 청계천 지류(정릉천)가 합류되는 지점으로 두 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의미이며, 다리 모양도 서로 만나는 형상으로 되어있다.
이 다리는 상판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이다. 그리고 두 상판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서 마치 두 회오리가 만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두 물(청계천, 정릉천)이 만나는 지점이기에 상판도 서로 만나는 모습으로 지은 것이라 한다. 청계천의 다리 중에서 유일하게 대칭을 이루는 사장교이다
청계천 두물다리 변에 있는 청계천 청혼의 벽에서는 행인들의 부러움과 축복을 받으면서 공개 프러포즈를 할 수 있다. 이 다리 북서쪽 29번 계단 옆에 ‘청혼의 벽’이 있다.
이 벽은 물과 첨단 디지털 영상기법을 활용해 만든 청혼의 명소로, 청혼자가 두물다리를 건너 청혼 무대로 걸어와 하트모양의 '시작' 버튼을 누르면 사진과 메시지가 담긴 동영상이 벽에 달린 스크린 위로 뜬다.
청혼을 받는 사람은 '승낙' 또는 '거절' 버튼을 누를 수 있다. '승낙'을 누르는 순간 반짝이는 조명과 함께 축하 영상 메시지가 스크린에 등장하고, 낭만적인 조명 분수가 춤을 춘다. 연인들은 청혼 자전거를 타고, '자물쇠 존'과 '언약의 동판 존'으로 이동해 사진을 찍으며 영원한 사랑을 다짐하게 된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건립한 다리이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했으며, 2004년 5월 31일에 청계천 복원공사로 지은 22개 다리 중 가장 먼저 개통되었다.
㉒ 고산자교 : 동대문구 용두동 34번지~성동구 마장동 470번지
-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은 다리
청계광장 기준으로 청계천의 22번째 다리이다. 다리 위로 고산자로가 지난다.
청계천의 마지막 교량인 폭 43.2m, 연장 88.0m의 고산자교는 조선시대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호를 따서 지은 다리로, 인근에 같은 이름의 도로인 '고산자로'와 연관되어 붙여졌다.
이 다리의 특징은 하천 층 경관에서 녹지의 단절 이미지를 극복하였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는 없었고., 2000년대에 청계천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지은 다리이다. 현대건설에서 시공했으며 2004년 5월 31일에 청계천 복원공사로 지은 22개 다리 중에서 두물다리와 함께 가장 먼저 개통되었다.
길이 88m, 폭 43.2m 규모이다. 왕복 6차로로 가운데에 중앙분리대가 있고 다리 양옆에 인도가 있다. 주도로와 서쪽 인도 사이에 1차로 차도가 하나 더 있는데 U턴할 수 있도록 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