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나트랑에서
달랏 가는길.....
나트랑을 출발
버스로 3시간 30분 동안
고불고불 산악지대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달랏진입 마지막 고갯마루에
다다른 순간
고갯마루 아래 거대한
하얀 물결이 춤을 춥니다
바로 비닐 하우스 입니다
뜻밖의
거대한 비닐하우스를
만나는 순간 마침 고등학교
친구가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
비닐하우스 설치 사업을 하고
있어 유심히 살펴 봤습니다
비닐하우스....
정말 거대 합니다
1년에 4모작하는 베트남에
비닐하우스라??
정말 의아 했습니다
달랏 도시 전체를 덮을 정도의
이 거대한 하얀 물결은
한국인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또한 번
놀랐습니다
바로 한국인
김진국 교수 이십니다~~~
▶달랏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고 있는
비닐하우스 아버지 대한민국
김진국 교수를 알고자
인터넷을 모두 뒤져 힘겹게
알아낸 정보를 공개합니다~~
▶베트남 달랏은
해발 1,500m 고원 도시다
1년 평균 기온이 15~25도로
선선한 달랏는 유명한 관광지이자
베트남의 대표적 화훼 지대다.
인구 30만명의 이 도시에
‘파파 김(金)’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한국 할아버지가 있다.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큰
달랏대학에서 농업선구자로서
농업기술을 가르키는 김 진국
교수님 이시다
김진국 교수는
달랏대의 원예학과 석좌교수로서
달랏 일대에서 희귀 자생란
1,155종을 찾아내 베트남
최고의 난(蘭) 연구가로 꼽힌다.
김진국 교수는
1994년 베트남 정부에 정식으로
투자 신청을 해 회사를 설립,
1만5000평의 농장에서 안개꽃 등
고소득 품종을 길러내는 유명
사업체로 성장시켰다.
바로 화훼류를 생산·
판매하는 ‘㈜농산’의 회장이다.
김교수는
현지 농민들에게 비닐하우스
기술을 보급, 소득을 높이는 데
기여해 현지에서 ‘농업의 대부’로
불린다.
김 교수는 1993년 대구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
원예학과 교수직에서 물러나고
63세 때인 1994년 달랏으로
떠났다. 어릴 적부터 원예에
관심이 많았던 김 교수는 동아대
원예학과에 입학했고,
우장춘 박사가 운영하던 국립
원예시험장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교수 퇴직 이후
외국에서 연구를 하며
남은 인생을 보낼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연구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던 그가 베트남과 인연을
갖게 된 것은 1992년 일본에서
열린 난 연구세미나에서
호치민 대학의 한 교수를
만나면서 부터였다.
동남아 자생란을 연구하던
김 교수는 호치민대 교수의
안내로 1993년 달랏 지역을
찾았다.
달랏는 전 세계적으로 동양란과
서양란이 함께 대규모로
자생하는 거의 유일한 지역이다.
“처음에는 연구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 곳의 가난한
농민들을 보니까 우리가
빚진 것 (베트남전)을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해야겠다고
결심했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했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
1994년 혼자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죽기 전 무엇인가 남기고
떠나겠다’는 생각과 난· 원예에
대한 애착이 전부였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교수 자격을 얻어 달랏대의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베트남
정부와 투자 협상을 하고 재산의
대부분을 털어 회사를 세웠다.
베트남 현지 직원 10명을
고용하고 달랏 산골로 들어갔다.
“달랏는 천혜의 화훼 지대였지만
현지 농민들은 좋은 조건을
살리지 못했어. 어떻게 소득을
높여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내가 먼저 실천하기로 한 거지.
”산을 개간해 농장을 만들었다.
바위는 호미로 직접 깼다.
1994년부터 1년 동안 농장을
조성하고 비닐하우스 3개를
세웠다.
비닐하우스의 틀은 현지에 많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베트남은
우기와 건기로 나뉘는데
우기 때는 수분이 많아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김 교수는 비닐하우스를
세워 비를 가려주면 우기 때에도
꽃과 채소가 잘 자라 평상시보다
높은 값을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기후와 토양의 특성을 분석하고,
현지에서 잘 자랄 수 있는 품종을
연구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장미 12종
2만주와 안개꽃, 거베라 등을
심었다.
농장에 텐트를 치고
된장국에 밥을 해 먹으며 지냈다.
하지만 그는
현지인들의 냉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에서 온 노인이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의심의
눈으로 김 교수를 쳐다봤다고
한다.
농장에 필요한 물 공급을
끊는가 하면 장미 500~600주씩을
뽑아가기도 했다.
결국 장미는 포기해야 했다.
심지어 스테인리스 수저까지
없어졌다. 현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동네에 경조사가
있으면 가장 많은 액수의
부조금을 냈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외로움은 커져 갔다.
당시 달랏에는 김 교수 외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없었고
베트남어를 전혀 못했던 그는
더듬더듬 영어를 하는 회사
직원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한국말을 하고 싶어 산 밑
골프장이나 호텔 주변을
서성이다 한국인을 만나
농장으로 초대하면 사람들은
초라한 그의 생활을 보자마자
떠나버렸다.
어쩌다 한국인들과 술을
마시게 되면 눈물과 함께
외로움을 쏟아냈다.
그는 “이 나이에 무슨 고생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 ‘시련은 이걸로
끝내달라’는 기도를 매일
올렸다”고 말했다.
1996년 첫 수확 후 현지인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김 교수가 비닐하우스로 재배한
안개꽃이 10배 비싼 값으로
팔렸던 것이다.
그동안 우기에는 꽃이 나오지
않았는데 김 교수의 농장에서는
탐스러운 꽃이 많이 생산됐다.
또한 김 교수의 비닐하우스는
2모작 밖에 못하던 농사를
4모작이 가능하게 했다.
하나둘씩 김 교수에게 비닐하우스
기술을 배워갔다. 현재 달랏은
비닐하우스 숲을 이루고 있다
달랏 농민들은
부농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김 교수에게 농사를 배운 이후
수입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한국의 종자를 들여와
시험 재배를 거친 후 30여 농가에
위탁재배를 하고 있다.
농민들은 ‘검증된’ 품종으로
생산량을 늘리고, 영농법을
배울 수 있어 일석 이조다.
김 교수는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 새마을운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내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깨닫기 시작한 거지.
베트남 사람들이 얼마나 정이
많은데. 어른 공경할 줄도 알고.
이제 감 열리면 감도 따오고,
배추 몇 포기도 가져와.”
텐트 생활 5년 만인 1999년
조그마한 통나무집을 지을 때에도
이웃들이 도와줬다.
김 교수는 자신의 농장에서 거둔
이익으로 매달 30여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같은 공로로
베트남 정부는 김 교수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준(準) 외교관 비자도 내줬다.
그는 15만평 규모의 제2농장을
계획 중이다. 이보다 더 큰 꿈은
100만평 규모의 동양 최대
원예연구소를 세우는 일.
베트남은 물론
아시아 저개발국가에 도움이 되는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김 교수는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다.
그가 달랏 일대에서 찾은
희귀 자생란 1155종을 정리한
연구물은 베트남 정부가
유출을 우려할 정도의 큰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 기업이 거액을 제시하며
공동 사업을 제의해 오기도 했다.
달랏대학 교수 13명에게 한국의
농업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2002년에는
8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부인이
숙명여대 교수직에서 퇴직하고
베트남 생활에 합류했다.
그는 이민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절대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김 교수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맨 손으로 돌 깰 의지가 없으면
이민 와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생활 10년이 지났지만
그는 아직 베트남어를 할 줄
모르고 앞으로도 배울 계획이
없다고 했다.
“베트남 말을 하게 되면
혹시라도 불필요한 마찰이
생길까봐 안 배워.
한국인에 대한 나쁜 감정이 많이
사라지기는 했지만 내 역할이
중요하겠더라고.
베트남 사람들이
나를 통해 한국을 볼테니까.”
“한 분야에서 대접받는 삶을
살면 성공한 인생 아닐까?
칠십살 늙은이도 이렇게
사는데, 젊은 ‘사오정’ ‘오륙도’
힘 좀 냈으면 좋겠어.”
(김승범 주간조선 기자/
sbkim@chosun.com)
//////
<2009.10.29. 01:48>
▶달랏대학교
김진국 석좌교수
국민훈장석류장 수상
달랏대 원예학과 김진국(76)
석좌교수가 지난 5일 하노이에서
제 3회 세계한인의 날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을 대신해
임홍재 주베트남 대사로 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제고하고 한국과 베트남간의
관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달랏에 정착해
농업선구자로서 한국의 선진
농업기술을 가르쳐온 김교수는
베트남 최고의
난(蘭)연구가이자 70이 훨씬
넘은 고령에도 학생을 가르치는
현역교수다.
또한,
그는 화훼류를 생산. 판매하는
'㈜농산'의 회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교수가
달랏 사람들에게까지
파파킴으로 불리며 존경을
받는 이유는 현지 농민들에게
비닐하우스 기술을 보급,
소득을 급성장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학생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달랏대와 한국의
여러 대학을 연결시켜 한-베
학술교류를 활성화 시키고
베트남을 한국에 알리는
'베트남 전도사'로도 유명하다.
부산고와 동아대를 졸업한
김교수는 63세 때인 지난
1994년 대구가톨릭대
원예학과 교수직에서 물러나
달랏에 들어왔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보급에
나선지 15년. 거기서 시작된
비닐하우스가 이제는 달랏
일대에서 숲을 이루고 있다.
베트남 정부도
그의 공로를 인정, 김 교수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준 외교관 비자도 내줬다.
<출처:호치민 코참 홈페이지>
<참고 : 김진국 교수님의
최근 근황 또는 생존여부
확인코져 인티넷 거의 검색
했으나 발견치 못함,>
카페 게시글
해외여행(등산)사진
베트남 달랏 비닐하우스
최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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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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