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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생경 개작 <96화. 기름 바루의 전생 이야기>
토왕 이야기
권영주
옛날 범여왕이 바라나시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라나시 변두리 숲에는 일천 마리의 산토끼들이 왕국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토끼나라 왕에게는 50명의 왕자들이 있었습니다. 50번째의 막내 토끼는 성질이 너그럽고 지혜도 있고, 자비심도 있고, 거기다 용기와 결단력도 지니고 있어 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덕망을 지니고 있었으나, 위로 형들이 많아 왕좌에 오를 기회는 없어 보였습니다.
어느 날 막내 토끼왕자인 토왕의 스승이 조용히 불러 말했습니다. 그 스승은 현명한 도사로 모든 국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토왕님, 내 그대의 재질을 아껴서 하는 말입니다. 이제 그만큼 장성하셨으니, 여기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심이 옳을 것입니다.”
마침 토왕도 모험을 하고 싶던 터였습니다.
“그러고 싶습니다마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숲을 벗어나 400킬로미터를 가시면 건타라국 득차시라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도 토국이 있는데, 아무 탈 없이 도착하기만 하면 왕자님은 훌륭한 왕이 되어 뜻을 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가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가시는 도중에는 숲 가운데 <귀신의 길>이 있는데, 거기에는 우리들을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야차 늑대들이 와글거립니다. 그들은 온갖 둔갑술로 몸을 바꾸어 지나가는 이들을 유혹하여 잡아먹습니다. 거기에 걸려들면 목숨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도착한 토끼는 이제까지 내가 알기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토왕은 겁이 나기는커녕 한번 도전해서 꼭 성공하겠다는 의욕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꼭 성공해서 스승님을 찾아오겠습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좋습니다. 무사히 숲을 지나가는 데 명심할 사항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길을 가는데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인가 성취하는 삶을 살려면 반드시 유념해야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눈에 좋은 것, 듣기 좋은 말, 좋은 냄새, 맛있는 것, 감촉이 좋은 것 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것들에 빠져 혼자 독차지하려고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오감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집착하면 자신의 삶을 망쳐서 헛된 일생을 보내고 맙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인연이 소중한데 행복하고 보람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토왕께서는 내 말을 명심해서 지키면 꼭 성공하실 것입니다.”
궁으로 돌아와서 토왕이 당장 길 떠날 차비를 하니, 시중들던 이들이 같이 따라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스승의 말을 전하고 혼자 가겠다고 했으나 막무가내로 우겨,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100킬로미터 쯤 가니 나무가 욱어져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해 어두컴컴한 숲 한가운데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길은 습기 차 눅진눅진 하여 깡충깡충 걷기가 불편하였습니다. 음침하여 어디선가 정말로 야차 늑대들이 튀어나와 덮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토왕은 늠름한 자세로 스승의 말씀을 마음속에 되새기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똑 바로 뜨고, 입은 꼭 다물고, 코도 바로 세우고, 몸의 감관을 냉철히 하고 가니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같이 따라 나선 시중들은 숲의 분위기에 기가 질렸는지 쭈뼛쭈뼛 두리번두리번 몸놀림이 불안했습니다.
어디쯤 가자 토끼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시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좀 쉬어가자고 졸랐습니다. 토왕이 보기에는 어딘가 수상쩍은 면이 있었습니다, 집들이 너무 깨끗하고, 꽃이 만발했지만 오히려 꾸밈이 어설퍼 보였습니다. 거기다가 예쁘게 치장한 토끼 여인들이 뛰어나와 애교스러운 말투로 토왕의 손을 잡아끌며 자기 집에 가자고 졸랐습니다.
“아니야, 그냥 지나가자.”
토왕은 그들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마을을 벗어나서 돌아보니, 시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냥하고 예쁜 토끼녀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간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면 야차 늑대가 토기를 유인하여 잡아먹으려고 둔갑술로 몸을 바꾸어 하늘 선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길로 그는 영영 토왕 곁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 동네는 야차 늑대들이 토왕 일행을 잡아먹으려고 만들어 놓은 함정이었던 것입니다.
얼마쯤 가니 이번에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또 주민들이 나와 토왕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며 자기 집에서 요기를 하고 놀다가라고 친절하게 굴었습니다.
“처음 대하는 이에게 지나친 친절은 반드시 꿍꿍이속이 있을 수 있으니 그냥 가는 게 좋겠다. 절대로 따라가면 안 돼.”
토왕이 일렀지만 맛있는 것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시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다음 마을에 이르니, 흥겨운 노랫소리에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차려입은 여인이 일행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어디를 가세요. 우리 주인어른의 환갑잔치 날입니다. 이렇게 온 동네가 축제 분위기입니다. 잠시 들러 잔치 음식도 드시고 춤도 추시며 쉬었다 가시지요.”
시중들은 그 말에 좋아라 맞장구를 쳤습니다.
“토왕님, 목도 축이고, 다리도 쉴 겸 들렀다 가시지요.”
“고마운 말씀입니다마는 갈 길이 바빠서 떠나야 합니다. 애들아 가자!”
한사코 붙잡았으나 뿌리치고 걸음을 빨리하여 벗어나고 보니, 놀기 좋아하는 시중 하나가 또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두 명이 남았습니다. 토왕은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일렀건만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여 유혹에 넘어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목숨은 본인이 지켜야지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은 두 시중에게 누누이 당부했습니다.
숲 안전한 곳에서 며칠을 자고, 쉬며 갔습니다. 아직도 숲을 벗어나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수상한 마을은 나오지 않아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어서 힘은 들지 않았습니다.
야차 늑대 무리들 중에 암놈 한 마리가 토왕을 보자마자 잘생긴 외모와 늠름한 자태에 한눈에 반해, 어떻게 해서든지 유혹해서 자기 손안에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궁리한 끝에 숲의 끝자락에 조촐한 찻집을 한 채 지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토왕의 성품을 알고 이번에는 요란하지 않게 수수하면서도 품위 있게 겉모양을 하고, 그대신 안으로 들어가면 아늑하면서도 호화롭게 꾸몄습니다.
토왕이 가징 좋아하는 꽃과 쥐똥나무를 심어 그 향기가 집안 가득 풍기게 하고, 안방에는 금빛 침대에 새하얀 구름 빛 이부자리를 펴 놓았습니다. 감촉은 또 어찌나 부드럽던지 봄바람이 뺨에 닿는 것 같았습니다.
야차 늑대가 이번에는 문 밖에서 유혹하지 않고, 집안에서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온 숲에서 활짝 핀 쥐똥나무의 꽃향기가 진동했습니다. 그 향기는 어머니 몸에서 풍기던 분 냄새 같이 달콤했습니다. 문득 어머니가 그리웠습니다. 지금쯤 나를 찾으시고 계실 것입니다.
토왕은 그 향기의 진원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조금 더 가니 길가에 조촐한 집 한 채가 나타났습니다.
토왕의 발길이 자기도 모르게 집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쏙 들어오는 토끼 여인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반가운 표정으로 “어서 오세요.” 하며 자리로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토왕이 자리에 앉자, 하늘 선녀 같이 예쁜 주인은 돌아서 차를 가지러 들어가는데 의기 양양으로 벌어진 입 안에 날카로운 어금니를 본 듯했습니다.
문득, 그제야 토왕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 스승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시중을 재촉하여 그 집에서 나와 재빨리 몸을 숨기고 있으니 여인이 뒤따라 나와 아까운 포로를 놓친 것이 분하여 사나운 본래 모습을 드러내며 으르릉 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야차 늑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앞질러 가서 미끼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아주 호화로운 집을 짓고, 동료들을 더 데려와 왁짝왁짝 흥겨운 무대까지 마련해 놓았습니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몸도 지쳐 있었습니다. 시중이 간청했습니다.
“토왕님, 여기는 우리 편이 많으니 야차는 얼씬도 못할 것입니다. 쉬었다 가십시다.”
“목적지가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 그냥 가자. 이틀만 고생하면 된다. 방심하면 안 돼!”
토왕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걸음을 빨리하여 지나갔습니다. 두 시중은 토왕이 자기네 청을 들어주지 않으니, 조금 뒤쳐져서 소근거리기를 ‘우리 둘이 잠시 저곳에 들러 차나 한 잔 마시고 빨리 주인님 뒤따라가자’ 하며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우루루 야차 늑대들이 몰려나와,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잡아먹히고 말았습니다.
“여보게, 저기 희뿌옇게 빛이 보이지 않은가? 숲이 끝나고 있네.”
토왕이 말을 걸며 뒤돌아보니 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토왕은 숲을 지나오며 시중 다섯을 모두 잃고 비통한 마음으로 홀로 득차시라에 도착했습니다. 거기 토끼나라는 떠나온 고국보다 더 풍요로워 보였습니다. 한 집에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비로소 안정을 얻게 되었습니다.
토왕을 잡아먹지 못한 야차 늑대는 ‘저 토끼는 참으로 의지가 강하다. 나는 반드시 이놈을 잡아먹고 말겠다.’고 결심하고, 득차시라까지 따라와서 천상의 토끼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토왕이 있는 집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토왕의 위력에 눌려 감히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 했습니다. 숲을 지나는 동안에 토왕은 마음이 더 견고해져서 나쁜 기운은 침범하지 못하는 경지를 얻었던 것입니다.
야차가 토왕이 집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득차시라의 국왕이 동산으로 놀러 나가는 도중에 황금빛 털을 가진 눈부신 그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 데려오라고 명했습니다. 국왕은 정사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사치를 즐기며 예쁜 여자를 보면 그냥 보내지 않아 토국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그대는 남편이 있는가?”
“예, 저 집 안에 있는 분이 제 남편입니다.”
국왕은 토왕을 불러와서 물었습니다.
“내 아내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적인 야차 늑대로서 내 일행 다섯이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국왕은 토왕의 말을 앞에 것만 믿고, 뒤에 것은 믿지 않았습니다.
“주인 없는 것은 모두 왕의 소유에 속한다.”
하고 궁으로 데려와 자기의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며칠을 후궁과 같이 지내면서 천상 선녀와 같은 촉감에 푹 빠져 정신을 놓아 버렸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 울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너는 왜 우느냐?”
“대왕님, 이 왕궁 안에는 많은 여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마치 적 가운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를 보고 당신은 길 가에서 발견되어 데려 온 자라지요? 할 때마다 목덜미를 눌리는 것처럼 부끄럽습니다. 대왕님, 이 궁중에 있는 이들에게 내 권위가 행해지도록 그 명령권을 주십시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왕비여, 좋다. 이 궁중에 있는 자에 대한 명령권을 나는 너에게 준다. 너는 그들에 대해 너의 권위를 행사하라.”
야차 늑대는 왕이 잠든 틈을 타서 가만히 야차의 소굴로 가서 동료들을 불러 모아 데리고 돌아와 제 손으로 왕을 죽여 뼈만 남기고 모두 먹어 버렸습니다. 다른 야차들은 궁전 안에 있는 것을 닭과 개를 비롯하여 토끼들을 모두 잡아먹고 뼈만 남기었습니다.
야차녀는 자기가 잡아먹고 싶었던 토왕은 도저히 유혹할 수 없음을 알고 단념하고, 무리들과 본 소굴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토끼나라 주민들은 궁문이 닫힌 채로 있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궁중에 뼈만 흩어져 있는 것을 보고
‘과연 그가 이것은 내 아내가 아니고, 둔갑한 야차 늑대라고 한 말이 진실이었구나. 그런데 왕은 그런 줄도 모르고 궁중에 데려와 왕비로 삼은 것이다. 야차 무리를 데리고 와서 모두 잡아먹고 가버린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주민들은 궁전의 구석구석을 깨끗이 청소하고, 푸른 나뭇잎을 깔고 그 위에 향을 바른 뒤에 꽃을 뿌리고 하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누군지는 모르나 하늘 토끼로 변해 온갖 교태를 부리는 야차를 보면서도 자기의 감관을 어지럽히지 않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면, 그는 용기와 지혜를 갖춘 위대한 존재다. 만일 그가 나랏일을 맡는다면 나라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자를 왕으로 모시자.”
그리하여 대신과 백성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토왕에게 나아가
“대왕님, 이 나라의 정치를 맡아 주십시오.”
하고 그를 맞이해, 온갖 구슬과 보석으로 만든 수레에 태워 궁중으로 데려와 관정식(灌頂式)을 행하고 득차시라 토끼 왕국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토왕은 왕으로서 지켜야할 법을 깨뜨리지 않고, 정의로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을 위한 복지 정책을 펴서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생각 키우기>
일찍이 가보지 못한 곳
거기까지 가려는 이는
기름이 가득한 바루(그릇)를 든 것처럼
그렇게 그 마음을 지켜야 하네.
부처님이 게송으로 남기신 가르침입니다.
기름이 가득 담긴 그릇을 들고 가려면 한 눈 팔지 말고, 앞만 보고 똑 바로 걸어야 기름을 쏟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즈음같이 온갖 오락거리- 게임, 핸드폰, 인터넷 등-가 넘쳐나는 환경에서 우리어린이들이 오직 공부에만 매진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도 이 <토왕 이야기>를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
권영주 프로필
고향: 경남 합천
고등학교 교사 역임
2009년 2월 월간 <한비문학> 동시 등단
첫 동시집 <발맞추어 둥둥둥>2012년 12월 발간
한국한비문학회 동시분과회장
한국동시문학회 회원
한국불교아동문학회 회원
대구현대불교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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