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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야스나야 폴랴나 원문보기 글쓴이: foreest
■ 기획연재 / 비무장지대를 가다(1) | |||||||||||||||||||||||||||||||||||||||||||
냉전이 낳은 ‘괴이한 생태계’ DMZ 공유해야 할 문화·역사도 양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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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첫 회담이 열린 이래 2년 넘게 끌어온 정전회담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이다. 이 순간을 미국의 페렌바르크라는 역사학자는 그의 책 ‘어떤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다음과 같이 세밀하고 그려놓았다. “1953년 7월 27일 월요일, UN군 사령부의 윌리엄 K 해리슨 중장과 북한의 남일이 1952년 휴회 기간에 공산측이 건립한 목조 건물로 들어갔다. 10시 1분, 그들은 쌍방이 준비한 18개 문서 중의 첫 번째 문서에 서명했다. 그들이 모든 문서에 서명하는 데 12분이 걸렸다. 서명이 끝나자 그들은 각각 일어서서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나왔다.” 이후 총성은 멎었으며 협정문 1조에 명시된 바에 따라 유엔군과 조선인민군 사령관은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남북 2㎞ 지점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 표지를 세우게 되었다. 서해에 접한 임진강 하구에서부터 동해에 이르는 폭 4km, 길이 248km의 긴 띠가 바로 DMZ(Demiliterized Zone), 즉 비무장지대이다. 이 지역에 대해서는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 민사행정이나 구제사업을 위하여 군인이나 민간인이 비무장지대에 들어가려면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 경우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총 인원은 1000명을 넘지 못하며 무기를 휴대할 수 없다. 또한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군사분계선을 넘지 못한다.
◇ 인류 역사 다시 쓴 전곡리 선사유적 한강변을 끼고 자유로를 달리다 파주를 거쳐 경기도 연천에서부터 본격적인 DMZ 탐사가 시작됐다. (사)한국DMZ연구소 함광복 소장이 3박 4일간 여정을 함께 하며 상세한 해설을 해주었다. 그는 강원일보 기자 시절 DMZ 취재로 한국기자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였으며 2002년 <30년간의 DMZ 기행>을 펴내 DMZ의 실상을 알리고 현재는 DMZ의 평화적이용관리를 위한 전략 수립에 골몰하고 있는 DMZ에 관한 최고 전문가이다. 일본인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 그는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으로 있으면서 1981년 미야기(宮城)현의 자자라기(座散亂木) 일대에서 4만년 전 구석기 유물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선사시대 유물을 계속 찾아내면서 일본에서 최초 인류가 70만 년 전 출현했다는 그의 학설이 역사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그가 발굴한 자자라기유적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가 발굴에 관여했던 유적은 홋카이도(北海道) 소신후도자카 유적에서부터 간토지방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여 곳에 달했다. 그러나 2003년 5월 일본 고고학회는 ‘신의 손’이라 불리는 후지무라가 발굴에 관여했던 총 162개 전·중기 구석기 유적 4천여 점의 유물이 모두 날조됐다고 발표했다. 즉 일본 인류역사가 70만 년이라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모두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구석기 문화가 없다. 이러한 일본은 조선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는 구석기 선사유적이 단 한군데도 발견된 곳이 없다. 공주 금강변 석장리에서 한 미국인 대학원생이 우연히 구석기 문화층을 발견한 것처럼 전곡리 구석기 유적도 한 미군 병사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1978년 4월 연천군 한탄강변의 전곡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돌조각을 발견하였고 고고학과 출신인 그는 스승에게 사진을 찍어보냈다.
이듬해 1979년부터 서울대학교 김원용 교수팀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발굴을 시작했다. 30만년전 의 구석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올해까지 30년에 걸쳐 발굴된 구석기 유물은 6천여점에 달했다. 서구의 고고학자들은 아프리카와 유럽지역은 주먹도끼 제작기술이 발달했고, 동아시아 지역은 찍개 제작기술이 발달했다고 주장하며 세계의 구석기 문화를 석기제작 기술로 양분하여 설명하였다. 다시 말해 전곡리선사유적지의 발견이 있기 전까지는 동아시아에서는 주먹도끼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한반도에서의 고인류의 흔적 또한 확신할 수 없으며 따라서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다는 설로 발전했다.
올해로 발견 30주년을 맞이한 전곡리선사유적지는 799,022㎡(약24만평)라는 넓은 대지에 마치 원시대로 되돌아온 듯한 공원으로 정비화 되었다. 한편 이 유적지를 배경으로 매년 개최되는 ‘연천 전곡리 구석기축제’는 올해로 벌써 17회를 맞이하고 있다.
◇ 경주 아닌 곳의 신라왕릉 경순왕릉 신라 천년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임진강 바로 북쪽에 있다. 경순왕릉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가 조선 영조 때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군웅이 할거하던 후삼국 시대, 더 이상 백성들이 전쟁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에 귀부했던 경순왕. 그는 고려 조정에서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 정략결혼을 하여 낳은 4번째 아들이 김은열로 대안군(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7대 후손이 전주김씨의 시조이며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그의 32대손이라고 한다. 전주 모악산에 전주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다. 그런데 경순왕의 묘가 경주 근처에 있지 않고 외딴 연천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왕건이 궁예를 배반하며 통일을 이루었으나 민심을 일시에 안정시키는 길은 멀고 험했다. 도처에서 이반의 조짐들이 나타났다. 경순왕을 중심으로 한 경주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건은 후환을 염려하여 특별 명령을 내렸다. 경순왕의 묘를 개성에서 100리 안에 두도록 한 것이다. 경순왕릉에서 개성까지는 80리이다. 묘에는 12지신의 동물 중 오직 양(羊)석만 있다. 이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
◇ 왕건의 영령이 깃든 숭의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은 서쪽으로 개성 방면으로 흘러가는 임진강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시대 국가에 큰 공헌을 한 16공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조선조 태조 6년(1397년)에 고려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앙암사 터에 창건되었으며 정종대에 태조와 혜종, 성종, 헌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의 여덟 임금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후 문종대에 이르러 숭의전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조선조의 종묘에서는 5왕을 모시는데 고려조 묘전에서 8왕을 모시는 것은 합당치 않다 하여 4왕만 모시게 되었다 한다. 초기 건물은 1950년 6.25 전쟁으로 전소되었고 1973년 현재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숭의전은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비무장지대를 눈앞에 두고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개성, 평양, 대동강, 청천강, 묘향산 등지에는 얼마나 많은 우리 조상들의 문화 유산이 있는가. DMZ는 남북이 공유해야 할 문화와 역사마저 갈라놓고 있음을 실감했다.
<경기도 연천/허정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