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8시즌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의 객원지휘자, 솔리스트, 투어, 음원 작업 등과 주요 연주곡을 참고자료로
제시합니다. 카페회원 여러분께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각 오케스트라의 공식 사이트 바로 가기를
해 놓았습니다. 이들 오케스트라를 관찰하시면 지휘자와 솔리스트의 동향과 연주곡의 변화 등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움직임을 느끼실 수 있고 이것을 통하여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이 가야 할 방향이 어떤 것인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참고자료들은 2018년 7월 시즌 종료 전까지 계속 자료들이 upgrade 될 것입니다. 2017/18 시즌부터는 각
오케스트라의 독자적인 자료를 제공합니다. 관심을 둔 오케스트라의 자료를 반복적으로 체크 하시면 upgrade된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17年 10月 26日. franciscopaik.
서울시립교향악단(Seoul Philharmonic Orchestra)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이다.
1945년 10월에 창단된 고려교향악단이 그 모체였으나 3년 뒤 해산되었고, 1948년 말에 고려교향악단과 서울
관현악단 단원들로 새로 구성한 서울교향악단이 발족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다시 해산되었고, 이때
악기와 악보 상당수가 소실되고 일부 단원들은 월북 혹은 납북됐다.
1950년 11월에 생존 단원들을 중심으로 해군 측의 주선 아래 해군정훈음악대라는 명칭으로 재건되었으며,
종전 후인 1954년에는 해군교향악단으로 개명되었다. 해군교향악단은 1957년 8월에 서울시로 이관되어 민간
관현악단이 되었고, 현재 명칭으로 바뀌었다. 1975년에는 단원을 대폭 증원해 4관 편성의 대규모 관현악단으로
확대했으며, 1978년에는 악단 운영권을 서울시 측에서 세종문화회관 측으로 이관했다. 1999년 재단법인이
된 세종문화회관 측의 전속 악단이 되어 서울시 교향악단으로 개명되기도 했으나, 운영권과 단원 오디션 문제
등으로 인해 세종문화회관 측과 갈등을 빚어 파업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설 관현악단인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구 뉴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는 영문 명칭의 동일함을 이유로 법정 소송이 빚어지기도 했다.
2005년 6월에 악단 자체가 재단법인화 되면서 다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다.
주요 공연장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며, 이외에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롯데콘서트홀에서도 공연하고 있다.
악장은 현재 공석 중이며 상주 작곡가(composer-in-residence)로 진은숙이 활동하고 있다. 정명훈 취임
이후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이 마스터피스 시리즈, 익스플로러 시리즈, 명협주곡 시리즈, 아르스 노바, 실내악
시리즈로 세분화되었다. 2006년에 베토벤 시리즈, 2007년에 브람스 시리즈, 2010년부터 2011년에 걸쳐
말러 시리즈로 주요 교향악 작곡가들의 교향곡 전곡을 연주하고 있다.
해군교향악단이었던 1957년에 구 남베트남과 중화민국, 홍콩 등지에서 순회 공연을 가졌으며, 민간 악단이 된
뒤에는 동남아시아(1977), 미국(1982 & 1986), 유럽(1988, 2010, 2011) 순회 공연을 가졌다.
2004년 10월에는 아시아 오케스트라 위크에 한국 대표 관현악단으로 참가, 도쿄와 오사카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역대 상임 지휘자는 김생려(1948-1961), 김만복(1961-1969), 원경수(1970-1971 & 1994-1996),
정재동(1974-1990), 박은성(1990-1991), 마르크 에름레르(2000-2002), 곽승(2003-2005),
정명훈(2006-2015)등이 맡았으며, 현재 마르쿠스 슈텐츠, 티에리 피셔 등이 수석객원지휘자로 발탁되어 활동
하고 있다. 이외에도 임원식, 정치용, 로린 마젤, 샤를르 뒤투아, 요엘 레비, 장-클로드 카자드슈, 제임스 저드,
헤수스 로페스-코보스, 유카-페카 사라스테, 엘리아후 인발,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안토니 위트, 오스모 벤스케,
미코 프랑크, 마크 위글스워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등의 외국 지휘자들도 객원으로 지휘한 바 있다.
출처: 위키페디아.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 신군부는 1981년 국립 교향악단을 KBS 방송국에 편입시키고 이강숙을 총감독으로
지명하여 악단의 명칭도 KBS 교향악단으로 바꾸고 全面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오케스트라로 출발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세계에 내세울 만한 오케스트라는 서울 시향과 국립 교향악단이 있었을 뿐이었다.
KBS 교향악단의 오디션은 4관 편성으로 단원을 조직하였고 당시 우리나라 클래식 연주자의 인프라로 볼 때 가장
뛰어난 단원으로 조직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후 이 오케스트라를 몇 번 객원 지휘한 정명훈은
1999년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어 오케스트라를 점검해 본 결과 전면 개편이 없이는 도저히 자기 뜻대로 악단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 시즌 후 계약을 포기한다. 그렇다면 1981년 세계 메이저급 오케스트라로의
도약을 꿈꾸고 무리하게 전면 오디션까지 실행한 KBS 오케스트라에서 20년 가까이 지난 후 오케스트라가 어떻게
변화하여 지휘자 정명훈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되었나를 살펴보기로 하자.
전면 오디션을 통해 4관 편성을 갖춘 오케스트라를 출범시켰지만, 오디션 이전의 단원들에 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단원이었지 세계 오케스트라의 기준으로 볼 때 준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에도 못 미칠 수준이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운영진은 미국에서 오디션 공고를 내고 외국인 단원을 영입했지만 정작 필요로 하는 비올라, 첼로, 콘트라바스,
플륫, 오보에, 바순파트에서는 단원 충원이 이루어 지지 않았고 혼, 트럼펫, 팀파니의 충원에 긍정적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마저 외국인 단원들은 자신의 발전에 필요한 지휘자 부재와 약속된 조건의 불이행, 당시 외국인 체류
환경의 열악함에 2-3년 이내에 모두 계약을 포기하고 자국으로 돌아간다. 독일 출신 지휘자 발터 길레센을 수석
객원 지휘자로 지명하여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맡겼지만, 사생활의 문제를 들어내 조기 퇴진하고, 재 창단 때 부터
전임 지휘자로 임명된 금난새는 능력에 비해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기회를 오케스트라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하면서
수석 지휘자가 없었던 기간에 오케스트라 앙상블의 停滯로 낭비한다. 거기에 교수직과 겸직이 허용되지 않아 많은
단원이 교수직으로 이동하고 1990년대 늘어난 지방 오케스트라의 업그레이드된 포지션으로 자리를 옮겨 많은
주요 단원들의 손실을 겪지만, 세대교체에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다. 재창단 후 거의 주요 단원의 50%
가량의 이동이 있었던 1999년 정명훈이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80년대 초 유학의 자율화로 많은 음악도의
유학이 이루어졌고 2,000년대 들어서 급속도로 클래식 연주자의 인프라가 확장된다. 그러나 한 번의 전면
오디션으로 커다란 상처와 진통을 겪은 KBS 오케스트라에서 정명훈이 단원의 개혁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전면
오디션 카드를 쓸 수는 없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결국 이 카드는 지휘자 정명훈이 2005년 서울 시향 음악
감독에 임명되어 전권을 위임받고 개혁함으로 1981년 KBS 교향악단의 데자뷰(Déjà Vu)를 보는듯한 일이
벌어진다.
2005년 서울 시향의 전면 개편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兩存한다. 당시 서울 시향 단원중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세계 준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에서도 충분히 통하는 단원들이 존재했었다. 이들 대다수가 개혁에 반대
하여 오디션을 보이콧한다. 이것은 1981년 있었던 KBS 교향악단의 개혁과는 차이를 보였다. 물론 그 당시에도
수는 극히 적지만 우수단원의 보이콧이 있었고 대다수의 단원이 재평가에서 탈락하였지만 서울 시향 단원의
오디션 거부는 그 폭이 훨씬 크고 좋은 단원의 손실 역시 범위가 넓었다. 오디션 후 서울 시향의 모습은 테크닉
부분으로 볼 때 많은 단원의 수준이 세계 준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갖추었지만 앙상블 적으로는 초보의
수준으로 개편 후 1-2년간의 오케스트라 앙상블은 unbalance, 어택의 불일치, 음악적 공감력 괴리 등 최악의
수준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중심 단원을 포용해서 개혁을 이뤘다면 더 깊고 넓은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휘자 정명훈은 외국인 단원을 보강을 통해 오케스트라의 취약점을 보강했지만, 정식 보강이
아닌 라디오 필 프랑스에서 차입한 단원으로 한계를 드러내고 정명훈이 퇴임하자 사적인 관계로 인해 서울 시향에
머무르고 있는 트럼펫의 알렉상드르 바티를 제외한 단원들의 계약 거부와 중심 단원의 교수직 이직은 필자가
우려했던 KBS의 데자뷔를 보는 것 같아 큰 우려를 낳고 있다. 물론 지난 KBS 교향악단과 지금의 서울 시향은
넓어진 양질 연주자의 인프라, 10여 년간지휘자 정명훈이 이룩한 단단한 앙상블, 세계 준 메이저급 오케스트라에
근접한 다양한 국내 오케스트라 등 여건의 차이가 지난 KBS 교향악단의 몰락까지는 가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간 정명훈을 중심으로 음원 작업, 투어, 베토벤, 브라함스, 말러 교향곡 Zyklus 작업 등 계획성 있게 이루어 놓은
오케스트라 앙상블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상임 지휘자가 없는 서울 시향은
위기가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발전의 위한 개혁을 해야한다. 우선 국내 오케스트라들과 단원
교류를 통해 세대교체와 넓어진 인프라 활용에 신경을 썼으면 한다.
베를린 필은 BRSO 혼 수석 Eric Terwilliger, Carsten Duffin을 자신의 공연에 초대하여 같이 연주한다.
Gürzenich-Orchester, WDR Sinfonieorchester 등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교류를 통해 연주해 보고
자신들과 같은 칼라의 연주인이라면 단원으로 영입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들도 서로의 단원 교류를
통해 세대교체와 앙상블 발전을 이루기를 기대해 본다. 세계 음악계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우리의 4세대
음악도들을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 것은 서울 시향의 커다란 숙제이자 세대교체를 위한 가장 좋은 방편으로 다양한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서울 시향에 합류했던 혼의 김홍박과 클라리넷의 조인혁을 거두지 못하고
오슬로 필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부수석, 수석으로 이적하게 한 것은 그들의 개인적으로는
축하해 주어야 할 기쁜일이지만 서울 시향으로써는 매우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인구 550만 명의 나라 핀란드는 크고 작은 직업 오케스트라가 30여 개로 헬싱키 필하모니, 핀란드 방송교향악단,
라흐티 심포니 등 세계적 오케스트라를 통해 자국 지휘자들이 젊은 시절부터 이력을 쌓아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지휘자를 수출? 하는 국가로 자리를 잡는다. 시벨리우스 음악원 지휘과 교수 Jorma Panula의 지도로
Esa-Pekka Salon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