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酒) 의 옛글자는 유(酉) 인데, 본래 뾰족한 항아리에서 나온 상형문자로서 이 항아리에서 술을 발효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후 유자는 "닭, 별, 서쪽, 익는다" 등의 뜻으로도 쓰이게 되고 酉에다 물수변을 붙여 술을 가리키게 되었다.
술의 본래말은 수블/수불 이었는데, 조선시대 문헌의 기록을 보면 수울/수을 로 되어 있 는 것으로 보아 수블은 "수블 →수울 →수을 →술" 로 변해왔음직 하다.
2. 전통주의 역사
■ 고구려의 술
부여, 진한, 마한, 고구려의 무천, 영고, 동맹 등 제천행사가 '주야음주가무'하였다는 삼국 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발효의 나라라 할만큼 훌륭한 술과 앞선 장담그기 기술이 발달했다.
이때 이미 술누룩酒鞠과 穀芽로 술을 빚는 방법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러한 고구려의 주조기술은 중국으로 건너가 곡아주라는 명주를 잉태하고 고구려의 양조기술 을 이어받은 낙랑주법이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려 신라주가 당대 운사들에게 애용되었다.
■ 백제의 술
일본에서 酒神으로 모시는 백제인 수수보리가 일본에 누룩과 술 빚는 법을 전함으로써 비 로소 일본에 술다운 술이 생겼다고 한다.
일본고사기 중권 응신천황조에 응신천황이 수수보 리가 빚어 올린 술을 마시고 부른 노래의 가사가 전한다.
양조기술자인 수수보리는 이름의 뜻이 '술 거르는 이'로 이때 이미 백제에서는 발전된 양조법으로 술을 빚어진 것이다. 백제 술의 자세한 기록이 없어 말하기 어려우나 일본에 남아있는 기록과 술빚기 기술로 보아 고 구려의 술빚기에 비해 그리 못하지 않은 것이었을 것이다.
■ 신라와 통일신라의 술
당대 시인들이 칭송하던 신라주의 명성은 고구려로부터 전해진 듯하다.
삼국 중 비교적 늦은 시기에 국가의 체계를 갖춘 신라는 술빚기에서도 가장 낙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 른 문화와 함께 고구려로부터 양조기술이 전해진 이후, 국력과 함께 말로 발전하여 "지봉유 설"에 전하듯이 당대시인 이상은의 시조 "한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스러질까 두럽 구나"하는 정도로 성장하였으며 해동역사에 나오는 고려주가 바로 신라주라 하였다.
삼국유 사에 의하면 태종무열왕은 식량으로 하루에 쌀 3말, 꿩 10마리가 소요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면 양조곡주들이 다양하게 개발되고 상류사회에서는 청주류의 음용이 성행하게 되었다.
■ 고려시대의 술
고려시대가 되면 전대의 곡주류 양조법은 이미 완성되어 고려전기 중에 청주류, 중양주류, 탁주류, 재주류, 감주류 등의 양조기술가 종류가 심화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송과 빈번한 교 류가 있었고 사원에서는 여관업을 겸하여 술을 빚어 팔기도 했다.
한편 궁중의 양온서(궁중 에서 술을 빚던 관청, 후에 장예서, 사온서로 명칭이 바뀜)에서도 국가의식용 술을 빚었다. 송나라 서긍의 고려도경에 의하면 '고려에는 찹쌀이 없어 멥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는다', ' 술의 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일반적으로 고려사람은 술을 즐긴다. 그러나 서 민들은 양온서에서 빚는 그러한 좋은 술을 먹기 어려워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것을 마신 다'고 고려의 술이 묘사되어 있다.
양온서에서 빚는 술은 ‘법대로 빚는다’해서 법주라고 하였는데, 요즘의 법주와는 전혀 다른 술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종묘제사에 관용으로 쓰 는 중양주였을 것이다.
또 고려시대에 비로소 소주가 전래되었는데 동의보감과 본초강목에 의하면 소주는 원나라 때 아라비아와 원,만주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소주가 유입된 시기는 대체로 고려 충렬왕 3년이며 소주 음용시기는 충숙왕에서 충혜왕 사이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고려시대는 우리나라 술의 3대 분류인 탁주, 약주, 소주의 기본형태가 완성된 시 대였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 술빚기의 특징은 중양주류가 발달하고 양조원료도 멥쌀 일색에서 찹쌀이 점차 늘어난다는 점과 腐本, 즉 술밑을 사용하여 효모를 증식시키는 기법이 발전하였다는 점 등 이다.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술은 무려 3백 여 가지에 이르나 그 중에서도 백하주, 삼해주, 이화주, 청감주, 부의주, 향온주와 약산춘, 호산춘, 노산춘 등의 春酒類를 들 수 있다.
소주도 날로 소비가 늘어 다산 정약용이 전국의 소주고리를 거두어 들여 식량난을 예방하고자 상소 하기도 할 정도였다.
유명한 소주로 감홍로, 죽력고, 이강고 등이 있고 조선후기에 들어서서 는 合酒類와 過夏酒類가 출현하여 탁주,약주, 소주 외에 혼양주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 일제시대
우리의 뿌리깊은 명주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때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주세법을 시행하면서 가양주를 밀조로 단속하고 일본식 청주인 정종과 일본소주를 장려하면서부터다.
총독부의 단속이전 우리나라에는 소주 양조장만 무려 2만8천여군데가 있었으나 10년후에는 1천3백3개소로 줄어들고 말았다.
대형화한 일본인 양조장에 견디지 못한 각지방의 특산 소 주공장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일본소주에 세제특혜까지 주면서 한국술을 차 별했고 중-일전쟁과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는 식량난을 이유로 순곡소주 제조를 금지하고 주정을 물에 탄 희석식 소주만을 보급했다.
■ 해방이후
해방의 감격에도 불구하고, 오랜 수탈에 이어진 6.25전략으로 인한 경제적 곤궁과 해방후 청 산되지 못한 일본식 제도의 자재에 의해 우리 전통술은 오히려 일제하 보다도 더욱 더 피폐 해졌다.
탁주가 75년을 정점으로 한때 양적 팽창을 보았고, 희석식 소주가 아직 큰 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등 외형적인 모습은 왜곡된 채로 발전하였다 하더라도 일제하와 해방후 현재까지 계속 된 정부의 보이지 않은 소외정책으로 우리의 진정한 전통술은 거의 명맥이 끊어져 버렸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부터 불합리한 규제와 제약이 조금씩 해소되어 잊혀진 전통술 50여종 이 재현되었으나 대부분 영세하고 전문 조양기슬의 부재와 영업력 부재로 우리의 찬란했던 전통가양주 문화가 복원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실정이다.
뒤늦게 1995년 부터 술을 개인이 빚어 마시는 것이 허용되어 90년간의 가양주문화 단절을 극복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