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지키다 간 시인 동기 이경순 시인(5)
동기 시인이 남긴 시집으로는 '삼인집三人集'(1952,조진대 이경순 설창수 공저, 영남문학회), '태양이 미끄러진 빙판'(1968, 문화당), '역사'(1976, 학예사) 3권이다. 돌아간 뒤 진주신문사가 발행한 '동기 이경순전집(시)' (1992, 자유사상사)이 있는데 이것은 진주신문(당시 대표이사 김영기) 관계자들의 아름다운 마음과 박노정 시인의 성심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것이었다.
시집 '역사'는 문예진흥기금을 받아서 낸 것이지만 이명길 최용호 등이 앞장 서서 판매 노력을 기울여 진주시내 기관장급들은 다 한 권씩 사게 되었다. 이때의 적은 수익금은 동기 시인 댁에 상수도 시설을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밖에 없는 수준이었다.
그 후에도 이명길 최용호 두 시인의 주선으로 동기 시인의 생계를 보태고자 '동기 시화전'을 연 일이 있었다.1980년 윤양병원 뒤에 있었던 녹지다방에서였다. 그 당시 다방에서 시화전을 열면 기관장이나 진주의 모모 재력가나 다방 단골들은 다른 다방으로 휴식처를 옮기는 것이 예사였다.하도 시화전이나 유사 전시회를 자주 열어 괴롭히니까 잠시 피난을 가는 것이었다. 피난을 가다가 붙들려 폭격을 당하는 수가 있으니까 아주 낮은 포복을 감행해야 했으리라.
그러나 '동기 시화전'을 연다고 하니까 이구동성으로 피난 가는 일은 자중해야겠다는 덕담이 덕담을 만들어 가고 있었으리라.(이것은 필자의 상상) 가난하게 사는 시인이지만 궁색을 궁색으로 드러낸 일이 없는 한복 선비에게 적어도 미소를 보내주는 것이 예술도시 진주인들의 긍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때 통장에 들어온 돈이 180만원이었는데 통장채로 동기 시인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시화전이 열리고 있던 어느날 밤에 필자는 문인들을 기다리며 녹지다방 구석진 곳에 앉아 있었다.그때 농협조합장 K씨가 들어와서는 필자를 보더니 "이런 어른이라면 내가 쌀 한 가마니는 내어 놓을 수 있어요. 이렇게 순수하고 이렇게 고고한 문인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어요? "하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었다.뒤에 들어온 진주 예총 한동렬 국장이 이 말을 듣고는 "분위기가 괜찮은데......"하고 미소를 띄었다.
한동렬 국장은 예총 사무국장 20년에 문화원 사무국장,산악회 사무국장직도 오랫동안 하고 있었다. 사무국장을 특허낸 사람으로 두루 인정을 받고 있었다. 눈이 워낙 나빠서 출장을 가 여관에 들면 옷을 벗어 걸기 위해 벽에 있는 못을 더듬는데 시간을 제법 허비하는 사람이었다.경남도청이 창원으로 결정이 나는 날 저녁, 진주의 하늘은 조기(弔旗)의 빛깔을 띄고 있었다.중소기업 뒷골목 '옥이집'에는 한국장을 포함한 열혈 시민들이 정종을 비우면서 탁자를 치고 울분을 토로하고 있었다. 진주는 이렇게 꺼지는가, 이렇게 주저 앉는가.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하면서 여러 제안들이 나왔을 때 한국장은 그 두꺼운 안경을 벗었다 끼었다 하면서 연신 울먹였다.
그 다음날도 날은 밝았다. 동기 시인과 필자가 무슨 일이었던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중앙로터리를 돌아가고 있는데 한국장이 우리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동기는 대뜸 "창원이 무신 소리고 ? 대처를 어찌한 것고 !" 하면서 죄없는 한국장에게 마음 안에 있는 울분을 드러내었다.동기는 진주의 모든 일은 한국장으로 통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일까? 하여간에 도청이 창원으로 가게 된 것이 어찌 일부 지도자들만의 일이고 그들만이 책임질 일인가. 진주 사람들은 그냥 아무나 붙들고 '아무말'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기도 진주 사람이었다.
시화전 이야기 하다가 한국장 이야기로 뛰었는데 어쨌거나 동기는 진주를 사랑했다.
"충렬한 단심이야 이제도 푸른 오열로 흘러가고
비봉산 머리에 노을이 탄다
때로는 검푸른 풍진이 지상을 휘날려도
우리는 문화와 예술을 창조하는
진주의 건아(健兒) !
--동기 <진주의 맥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