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과 독립기념관이 연해주·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유적지 탐방단을 모집할 때부터 참여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독립이라는 ‘혁명’을 위해 자신의 안온함을 기꺼이 던져버리던 투사의 삶을 접하고 싶었다. 훈수 두는 지식인이 아니라 가슴에 열정을 지닌 실천가의 삶을 흠모한다. 절대로 닮을 자신이 없기에 동경하는 마음이 강한 탓일 게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지만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업에 매여 있다보니 휴가를 쓸 작정을 하고 일반인 자격으로 신청접수했다. 그러다가 당초 취재 기자가 다른 일정때문에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취재기자로 ‘등극’할 수 있엇다. 7월11일자 지면에 실린 기사 제목은 쓸쓸한 ‘독립운동 성지’… 우린 언제 이 빚을 다 갚을까‘였다.
여기서는 기사에 담지 못했던 소회와 이곳에 여행계획을 세운 분들을 위한 정보를 중심으로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역사의 땅 연해주…(1)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는 역사의 땅이다. 고구려는 물론 발해에 이르기까지 그 유물이 여전히 출토되고 있다. 그 연해주는 그러나 폭정과 흉년에 목숨을 걸고 두만강 너머로 삶을 개척하던 들판이다. 조선 후기 1863년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이주하면서 고려인의 이주역사가 본격화됐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전후부터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망명, 항일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가장 큰 한인 주거지로 1910년대 항일운동의 구심점이 된 곳이다. 1863년 시작된 한인의 이주는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이후까지 계속된다.
제1기(1863~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등 러시아의 우호적 태도에 한인의 이주 계속, 2기(84~93년)일제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한 시기로 한인의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자 러시아의 제한정책이 시작됐고, 3기(1893~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전후 독립운동을 위해 애국지사들의 망명 이주가 크게 늘어난 시기, 1910년 이후에는 일제에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동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고려인들은 터전에서 다시 쫒겨났다. 고대의 영광보다는 근대의 아품이 서린 곳이다.
사람들이 그려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쫒겨가고 숨어들고 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은 두만강을 ‘천치의 강’이라고 불렀다.(작가 김훈 ‘강의 노래’③두만강에서 중 중앙일보 7월9일자)
■독수리 전망대와 조명희 문학비
지난달 19일 인천공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직항편에 올랐다. 비행시간은 2시간15분이다. 동방(보스톡)을 정복한다(블라디)라는 뜻을 가진 이곳은 1862년 베이징조약으로 청나라로부터 러시아가 빼앗은 곳이다. 원래는 만주에 속한 땅이다. 산세나 풍광이 낮익다. 러시아 극동함대 사령부가 자리잡은 군사도시같지 않게 한적하다. 가이드가 처음 안내한 곳은 독수리 전망대. 독수리 전망대는 해발고도 214m로 블라디보스톡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얻기위해 남진정책의 요새로 키운 곳이자만 고즈넉한 초여름 햇살이 도시를 덮었다. 키릴문자를 만든 키릴 형제의 동상 앞으로 금각교는 이 도시의 상징처럼 보였다.
독수리 전망대 계단을 조금 내려오니 조명희 문학비가 보였다. 포석 조명희선생(1894~1938)은 1925년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창립 멤버로 독립운동가이자 연해주 동포 사회에서 ‘세익스피어’로 통한다. 이 당시 그의 작품 주제는 생활고나 지식인의 가정생활에 대한 환멸, 식민지 농민들의 가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1927년 발표한 <낙동강>이 그의 대표작이다.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우수리스크 육성촌을 거쳐 하바로프스크에 머물며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이 창립되자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37년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강제이주를 당했고 다음해 ‘일제의 간첩’이란 죄목으로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독립기념관 해외사적지팀 김도형 팀장은 “당초 순수문학을 하던 선생은 20대 사회주의 문학으로 전환했지만, 이는 민족의 해방을 위한 차원”이라며 “37년 한인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은 한인지식인의 숙청으로 이어졌고, 당시 대표적 지식인이던 조명희 선생은 그 희생의 대표적 사례”라고 말했다.
■개척리 숙소인 아지무트 블라디보스톡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은 시내 중심부에 가깝다. 특히 해안공원이 주변에 있어 북태평양 바다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의 감각이 드넓은 세계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협소하지만 말이다. 김 팀장의 안내를 받아 개척리를 방문했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니까 개척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가인 셈이다. 지금은 왕복 4차선의 도로에 고전이 깃든 건물과 초록빛 가지가 무성한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이 살길을 찾아 강을 건너온 선조들의 생명력을 흔적없이 투명하게 날려보냈다. 1863년 두만강 국경을 처음 넘어 지신허 마을을 형성한 한인들은 1870년대부터 그 무대를 블라디보스톡까지 확장했다. 이 때 제정러시아는 이곳을 군항도시로 건설하기 시작했고, 군항 건설과 시베리아 철도부설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정부는 콜레라예방을 이유로 개척리 주민을 북쪽으로 내몰고 이땅을 차지했다. 그러나 한인들은 신한촌에서 다시 그 생명력을 이어갔다.
■신한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크라스키노로 떠나는 3일째날(21일) 오전에 신한촌에 들렀다. 블라디보스톡 최초의 한인 집단 거주구역인 개척리가 폐쇄되면서 1911년 건설된 신한촌은 개척리의 정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 강점 초기 해외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권업회 본부를 비롯해 한민학교 권업신문사들이 여기에서 탄생했다. 그 힘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 수립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한적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어 당시 모습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1999년 세워진 신한촌 기념비가 그 흔적을 지키고 있을 따름이었다. 기념비 오른편에 권업회 건물은 아파트였다. 마을 입구에 있었다는 독립문은 그 위치를 기억하는 사람도 사라지고 있다. 이곳은 1920년 일본군의 만행으로 수만명이 숨진 ‘4월 참변’의 주요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해외 이주민들의 한, 그 한이 서렸던 시간을 붙들어 둘 지표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개인의 삶이나 나라의 역사가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겠고, 치욕과 수난을 또한 감당해야할 터 있다.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편인 것도 아니고 강자가 못할 것이 없듯이 약자도 살아남기 위해 못할일이 없을진대 영은문을 향해서 뒤늦게 통곡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했다.(김훈, 강(江)의 노래 중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역 숙소인 아지무트 호텔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이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이자 시발역이지만 웅장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1900년대 초반 모습 그대로 역사는 역사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1일 이곳 블라디스토크역세서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했다. 1937년 스탈린 치하에서 고려인들은 여기서 강제 이주의 계단을 밟았다. 죽음으로 향하는 정거장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사진 속에서만 재연될 뿐 지금은 수많은 관광객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들이기 바쁘다. 역사를 둘러본 뒤 플랫폼에 서서 잠시 회상에 잠길 찰라 기다란 열차 행렬이 정적을 흔들었다.
■아르세니예프 박물관 연해주 정부청사 대각선 건너편에는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입구가 바로 앞에 있는 이 박물관은 1층은 자연사박물관, 2층은 연해주 유물, 3층은 생활사를 알 수 있는 전시물들이 진열돼 있었다. 특히 2층에는 발해 유물도 전시돼 있었다. 대부분이 금나라 것임을 알려주는 표시와 유물들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잠수함 박물관과 개선문 여행가이드가 여행객들을 안내하는 주요 관광지다. 당시 그 일대에서 2시간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실제 잠수함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해양 공원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기도 했다. 잠수함 박물관과 개선문은 걸어서 3분 거리였다. 파리의 개선문에 비할 바 없는 규모이지만, 낮설은 건축물임에는 틀림없다.
■푸쉬킨 극장 푸쉬킨 거리 10번지에 자리잡은 푸쉬킨 극장은 1917년 한러중일 기독교전도회가 개최했던 곳으로 현재도 같은 이름의 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당시에 이동휘, 김학준, 윤능효 등 저명한 독립운동가들도 참여했다고 한다.
김도형 팀장은 “현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러시아정교로 개종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들은 대한인정교회를 창립하고, 대한인정교보도 발행했는데, 겉으로는 종교단체였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단체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