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유학 1세대의 현주소]
기업 인사담당자가 본 유학생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 최우선 어젠다로 내걸었다. 무역장벽이 낮아지면서 영어가 안 되고 해외 사정에 어두운 토종 인재들이 무더기로 평가절하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수많은 부모와 학생이 "영어만 건져도 남는다"는 판단으로 조기유학을 택했다. 조기유학 1세대들이 돌아온 2009년 현재, 과연 한국 기업의 '영어 프리미엄'은 어느 정도일까.
본지가 취업 포털 인크루트와 함께 국내 기업과 외국계 기업 인사담당자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조직 내에 영어 프리미엄이 존재한다'는 의견이 절반(51%)을 약간 넘었다.
대부분의 인사담당자들은 "채용 단계에서 유학생들을 별도로 구분해 선발하지는 않는다"(89%)고 했지만, 면접단계에서 유학생 출신 구직자에게 "매우 큰 관심을 갖거나" (13%), "한 번 더 눈여겨본다"(40%)고 했다.
A금융그룹 인사담당자는 "그룹 차원의 공채에는 영어 프리미엄이 없지만, 개별 상시 채용으로 이뤄지는 IB(투자은행)의 경우 영어 능력이 1차 관문"이라고 했다. 실제로 해당그룹 계열 투자은행은 전체사원 160명 중 30%가 해외에서 대학을 마쳤거나 MBA 학위를 딴 유학파 경력사원이었다.
반면, "영어 프리미엄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영어 프리미엄이 존재하지만 줄고 있다"(24%),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아 특별히 프리미엄이 없다"(22%)는 응답도 많았다. "영어 프리미엄이 늘고 있다"는 응답은 소수(3%)에 그쳤다.
인사담당자들은 조기유학 1세대만의 강점으로 '영어실력'(28%)보다는 '현지 문화나 환경에 대한 이해'(44%)를 꼽았다.
B 증권사 인사부장은 "우리가 조기유학생에게 바라는 것은 사실 영어능력이라기보다는 이중언어 구사능력"이라며 "막상 뽑아놓고 보면 국어 실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한국어와 영어가 둘 다 된다는 강점이 없다면 차라리 외국인을 채용하는 게 낫다"고 했다.
입력 : 2009.06.24 03:09
[조기유학 1세대의 현주소]
감자(減資)… 전환사채… 상향등… 이게 뭔 소리?
본지 취재에 응한 조기유학 1세대 100명은 거의 전원이 일상생활에서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막상 "스스로 평가하는 한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최상급"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34%에 불과했다.
조기유학 1세대 중 절반은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으나 어른들이 쓰는 말이나 한자어는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다"고 대답했다.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 졸업까지 10년간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국내 대기업에 취직한 박모(25)씨는 "유학 기간 동안 한국말은 거의 친구들하고만 사용해서 높임말과 전문 용어가 서툴다"며 "회사에서 상사들과 대화할 때 적합한 단어를 잘 몰라 애를 먹는다"고 했다.
"선배와 얘기하다 실수할까 봐 자주 머뭇거립니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줄까 봐 걱정돼요. '그렇게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은 간단한 말도 '그렇게 하도록, 어,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더듬고요."
박씨는 "장부를 보다 '감자(減資), 채권, 전환사채'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는데 나중에 보니 미국에서 다 배운 것이었다"며 "시간 쪼개서 다시 공부하려니까 허탈했다"고 했다.
천모(여·26)씨는 미국에서 16살부터 운전을 해왔는데도 한국 운전면허 시험에 계속 떨어졌다.
"운전, 교통 용어가 다 생소한 한자어라 아예 필기시험 문제를 이해 못했어요. '상향등을 켜야 하는 상황' 관련 문제가 나왔는데 상향등이 도대체 뭔가 했죠. 집에 와서 사전 찾아보고 '하이빔'(high beam)이라는 영어 뜻을 보니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헤드헌팅업체 '하이드릭 앤 스트러글스' 김기욱 이사는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는 외국계 컨설팅업체의 경우 10년 전만 해도 '영어'를 얼마나 잘 구사하느냐가 관건이었지만 최근에는 한국 중견기업까지 고객층이 넓어지면서 '능통한 영어'와 함께 '숙달된 한국어'가 중요한 입사 조건이 됐다"고 말했다.
역시 중학교 때 유학을 떠났던 김모(26·은행원)씨도 자신의 국어 실력을 "유학을 떠난 당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평가했다. 김씨는 "군 복무하면서 그리고 회사 들어와서 많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중·상급 정도 실력"이라며 "신문을 읽거나 한글로 된 자료를 분석할 때 반드시 컴퓨터를 켜놓고 모르는 단어를 '네이버'로 검색해가며 읽는다"고 했다.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오고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준비 중인 한신애(여·29)씨도 "영어 수업에 익숙해 있다가 어느 날 한글로 쓴 논문을 읽으려니 어렵다"고 했다.
국내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조기유학생들의 모국어 실력에 대해 "국내파만큼은 못해도 업무에 지장은 없다"며 대체로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완벽한 한국어 구사능력에 흡족하다"는 응답은 29%뿐이었다. "한국어 능력이 떨어진다"는 응답(7%)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