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누에라는 벌레 하나가
최부는 도저소에서 왜인으로 오인되어 어디론가 끌려갈 때 누에고치처럼 다리가 퉁퉁 부었다는 표현을 썼다. 우리는 이 말이 생경할지 모르나 아마도 당시는 흔한 말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뽕나무 밭이 흔했으면 상전벽해라는 말이 고릿적부터 나왔을까. 벌레로부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신비, 아마 명주실 타래가 빚어낸 환상에 반해 인간을 빚은 조물주도 스스로 놀랐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신기한 그야말로 인류의 기가 막힌 창출이다. 사기를 쓴 사마천,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소주, 그리고 중국 명나라를 좌지우지한 환관. 이들의 공통점은 무얼까.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는데 바로 (蠶室)잠실이다. 잠실은 누에고치를 기르는 방이다. 환관이 되려면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이 있다. 거세 수술이 끝나면 납으로 만든 나무못으로 소변을 막는데, 3일 금식 이후 첫 소변이 나오지 않으면 죽게 된다. 이후에도 100일 동안 누에고치 기르는 방인 잠실(蠶室)에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생활하며 세균감염을 막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에 대한 집착? 성공에 대한 의지? 환관은 본능적 욕구를 포기한 대신 관직이라는 사회적 욕구를 충족한 셈이다. 권력 탐닉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그래서 명나라 때 최고조로 작동을 한 것인지 모른다. 사마천은 진시황제 때 노족으로 귀순한 장군을 옹호 했다는 처벌로 잠실 형을 언도받아 거세되어 수염이 나지 않은 치욕을 당한 채 그 유명한 사기를 썼다. 당시 잠실은 형벌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비단이 서방 왕 서방, 명월이 한 테 반한 왕 서방은 조선 후기 비단이 널이 보급되면서 인천을 통해 산동성 비단이 들어오고 항저우(杭州)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 비단이 부산을 통해서 팔리면서 명성을 얻은 위인이다. 제물포에는 지금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도 양잠업이 일찍이 들어왔고 조선시대는 태종 초부터 궁에 뽕나무를 심었는데, 주나라 성왕 때 주공 단이 낙읍(洛邑)에다 서울을 정했던 시대부터 만든 공상(公桑)을 본뜬 것이었다. 옛날 천자와 제후는 공상(公桑)과 잠실(蠶室)을 가지고 있어서, 궁실의 부인들은 반드시 공상에 뽕나무를 심어 잠실에서 누에를 쳐서 옷감을 짜는 일을 의무적으로 했다고 한다. 즉, 양잠을 왕실에서 직접 관장했다는 이야기인데,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지은 이궁에 잠실을 설치했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연희궁(서대문구 연희동)에 서잠실, 지금의 송파구 잠실동과 신천동을 아우르는 지역에 동잠실이 있었고, 성종 때는 현재의 잠원동에 신잠실이 추가되기도 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 안에 있던 잠실은 내잠실로, 서잠실과 동잠실을 외잠실로 부르기도 했다. 최부가 누에고치처럼 다리가 퉁퉁 부었다는 표현은 그러니까 일상적인 표현인 것이다.
지금도 소주는 뽕밭이 많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실크로드의 본산지로서 잠실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충남 태안군 남면 양잠리는 소주 가씨(蘇州賈氏)의 집성촌이 있다. 소주가 고향인 가씨라는 사람이 동네를 일구는데 양잠리라고 한 것이다. 그들의 시조라 할 가유약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의 장수였다. 그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일본과 싸우기 위해 남의나라 전쟁터에 왔고 결국 아들과 함께 부산에서 전사했다. 손자 가침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시신을 울산 땅에 묻고서 부모 곁을 지키기 위해 조선에 남았다. 태안인근은 지금까지도 소주 가씨의 중요한 집성촌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전설적 요순시대부터 지금의 산서성 황토고원이 뽕나무가 잘 자라는 토양으로 양잠이 성했다고 한다. 뽕나무는 실은 중국 북부지방이 원산지이다. 우리나라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웠다는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누에를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하면서 길러 왔기 때문에 명칭도 다양하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묘, 검은 털을 벗지 못한 새끼를 의자(蟻子), 세 번째 잠자는 누에는 삼유(三幼), 27일 된 것을 잠노(蠶老), 늙은 것을 홍잠(紅蠶), 번데기를 용(踊), 성체를 아(蛾), 고치를 견(繭), 똥을 잠사(蠶砂)라 하였다고 한다.
꽤 오래된 연혁으로 보아 중국각지에 오래전부터 잠실이 퍼져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유비. 유비의 고향은 탁군 탁현이다. 지금의 허베이성 줘저우시. 탁현의 누상촌(樓桑村)이 유비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누상촌은 누각처럼 큰 뽕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누상촌의 유비가 살던 집 울타리 옆에는 아주 커다란 뽕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은 비단 절강성 뿐 아니라 하북성 산동성 등등 따질 것 없이 전 지역에서 잠실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뽕나무가 나오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다.’는 얘기가 있을 만큼 중국인들은 뽕나무를 좋아한다. 우리도 한 때 뽕나무 하나로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낸다는 말이 있었다.
그들은 내적으로는 수나라 때 운하가 개설되어 부의 충족과 균형발전이 시작되었고 외적으로는 바로 이 누에로부터 비단을 뽑아 부가 축적이 되었다. 실크 즉 ‘스’를 통해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서양에 알려졌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역사’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소개했다. 그는 중국을 실크로 이해하여 ‘세레스(seres 실크를 만드는 나라)’라고 불렀다. 세레스가 라틴어에서 세리카(serica)로 바뀌고 영어의 실크(silk)는 세리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대 중국의 최대 발명품이자 기반산업인 실크가 유럽으로 건너가 로마의 귀족들이 즐겨 입는 최고급 옷감이 되었다. 실크는 프로테인(蛋白質)이 주성분인 생사로 만들어져 윤기가 흐르고 따뜻하다. 몸에 걸쳤을 때 가벼우면서 그 흐름이 몸의 곡선을 감추지 않아서 사치에 빠진 로마 귀족이 앞 다투어 수입하여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황제는 황금의 가치와 막 먹는 중국의 실크 착용을 금하는 칙령을 발표하였다.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실크는 밀무역으로 조달되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자 자국 생산 노력이 시작되었다. 7세기 동로마시대 중국에 진출해 있던 기독교 일파인 네스토리우스파(景敎)의 선교사가 중국 관헌의 눈을 피해 대나무관 속에 누에알을 숨겨 반출하였다. 비교적 따뜻한 시칠리아 왕국에서 누에알을 부화시켜 양잠에 성공하자 양잠은 베니스 등을 통해 이태리 전역에 보급되었다.
이탈리아와 가까운 프랑스 리용에서는 이탈리아 기술자를 불러 실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영국에서는 기후 문제로 양잠이 실패하자 중국으로부터 직수입 하였다. 영국의 실크 수입은 국부(銀)의 유출을 가져 왔고 국부 회수를 위해 인도 산 아편을 중국에 팔게 됨에 따라 아편 전쟁이 일어났다. 아편전쟁은 차보다는 사실 실크가 원인을 제공한 실크전쟁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실크로드. 사실 이 말이 나온 지는 사실 그리 오래지 않다. 독일의 지리학자 탐험가 리히트 호펜(1833-1905)이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저술한 ‘중국’이라는 책에서 처음으로 실크로드를 언급하였다. 그 후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리히트 호펜의 제자였던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이 중앙아시아를 여행한 후 ‘실크로드’라는 책을 저술하여 비로소 실크로드가 정착된 것이다.
총길이 6500km의 비단길, 이 길은 당나라 때 가장 활발했었다. 그런데 북쪽에 위치한 돌궐이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어서 많은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과의 무역에 많은 방해가 되었다. 돌궐이 둘로 나누어지며 서돌궐에 내란이 일어나자 당나라 태종은 군사를 보내서 내란을 가라앉히고 이때 사용된 길은 천산남로와 산맥 북쪽으로 지나가는 천산북로였다. 태종은 서역 지방에 도호부를 두고 천산 남북로를 맡게 해 비단 무역을 비롯해서 동서무역이 비로소 활발히 이루어진다.
소그디아나를 본거지로 사용하는 소그드 상인들(현재의 우즈벡사람들)이 무역상으로 활약을 한다. 그들이 바로 신라 원성왕릉을 지켰던 코쟁이들이다. 9세기에 당나라의 세력이 기울자 북아시아의 위구르족과 이슬람상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시대에는 중국 광주에서 시작하여 스리랑카, 파르티아 홍해를 지나 카이로에 도착하여 다시 시리아로 가는 해상 실크로드가 발전을 한다. 이렇게 해상을 이용하는 무역이 발전을 하면서 중국 실크로드 비단길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하였지만 ‘정관의 치’ 주인공 당 태종 이세민, 그때는 태평치세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나는 당나라가 번영의 극에 오른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이 여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역사 속에는 무려 550명 정도의 황제가 존재하는 데, 이들 중에서 여성은 측천무후 단 한 사람뿐이다. 그녀에 대해서는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인 평가보다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았다. 우선 잔인한 여성 군주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세민 사후 비구니로 있다가 아들인 고종의 후궁으로 운 좋게 들어갔다. 그리고 갓 난 딸을 죽이고, 소생이 없는 왕황후가 시기 때문에 몰래 죽였다고 누명을 씌워 폐위시키고 결국 황후 자리에 올랐다.
자기 소생인 태자가 정적이던 후궁이 낳은 공주들에 대해 측은한 감정을 갖는 것을 보고 독살했다. 권력을 위해 자신의 아들딸도 서슴없이 죽이는 비정한 어머니였다. 황태후로 있으면서 아들 황제(중종)를 폐위시키고 또 다른 아들 황제(예종)에게서 나라를 넘겨받았다. 또 하나는 남자 파트너 운영을 공개적으로 했다는 점이다. 공학부라는 기구를 만들어 미남과 경박한 문인들을 대거 양성했다. 첫 번 째 파트너인 풍소보부터 장역지, 장창종 형제까지 기고만장해 국정에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수만 명 후궁을 가진 황제에 비하면 어떻게 보면 너무나 적은 숫자였다. 그는 밀고 제도를 이용해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동궤라는 구리로 만든 용기에 밀고를 받았다. 모든 고발장은 반드시 무측천이 직접 보고 처리했다. 밀고를 하면 5급 관리에 준하는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여비까지 주었다. 잘못된 내용이 있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조정 내 반대 세력을 축출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였다. 밀고가 들어오면 내준신, 색춘례, 주흥과 같은 고문 전문 관리들이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고발당한 관리들은 감옥에 들어가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살인적인 고문에 없던 사실마저 실토할 정도였다. 신하들은 조정에 나갈 때마다 언제 변을 당할지 몰라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긍정적인 평가도 만만찮다. 무측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돈이 많은 여성이었다. 그녀의 황제 시절 나라는 전 세계 GDP의 22.7%를 차지했다. 영토를 오늘날 중앙아시아까지 넓혀 당시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룩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 차와 비단을 팔아 국민 경제가 크게 번영한 것이다. 그녀가 황후에 오르기 직전인 서기 652년 380만 가구이던 인구는 무측천이 세상을 떠난 해인 705년 615만 가구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만큼 나라 경제가 발달했다. 실제로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 시설 관리에 주력했다.
바로 그녀가 비단 생산을 위해 뽕나무를 많이 기르도록 한 장본인이다. 인재 선발에도 관심이 많았다. 과거 제도를 엄정하게 실시해 문벌 귀족의 발호를 막았다. 무측천은 여성 황제였기 때문에 평가 절하된 측면이 있다고 나는 본다. 당태종 이세민이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대를 이룩했다면 무측천은 이세민을 롤 모델로 삼아 국정운영에 큰 성과를 거두어 <무주의 치>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이후 당현종이 <개원의 치>를 이룩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705년 무측천이 위중했을 때 신하 장간지가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폐위시킨 중종이 다시 황제 자리에 올랐고, 무측천은 세상을 떠났다. 황제가 아니라 황후의 예에 따라 장례를 지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비단이 서방 왕서방이 소주에서 잘 먹고 잘 산 비결은 실크로드 때문이고 이는 무측전이 이루어낸 쾌거이기도 한 셈이다. 요즘은 어떤가. 우리나라 아줌마들 중국산 실크를 사오면 쳐다도 안 본다. 본성처럼 제품의 질을 알아보는 여인들이다. 이탈리아 산 실크, 그 옛날 몰래 누에를 들여간 어느 선교사 덕분으로 시칠리아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눈에 확 돌아온다. 원단은 베트남이나 중국산이지만 제품은 우리나라가 또 세계 최고가 아닌가. 요즘 중국 경제가 어렵다고 하지만 기차길을 이미 유럽까지 연결을 다 해놓았다. 시진핑 주석은 연초부터 중동국가 순방으로 바쁘다. 우리는 그의 행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실크로드(一帶一路)를 통해 중국이 내다 팔 새로운 실크는 무엇일까. 과거 역사, 알고 보니 누에라는 벌레 하나로 세상이 요동을 치고 세상을 또 수천 년 갈랐다.
*** 무례한 부탁인데요...... 제주도에 사신다는 박훈종님... 표해록관련 사진이 필요한데요...혹여... 제주도 관아 /수정사/관덕정/별도포/조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