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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야곱이 제사장이 됨(2)
애굽에 내려간 것은 야곱의 일생의 마지막인데 야곱은 제사장 직무를 행했다. 제사장은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자다. 왕은 하나님의 권위를 백성 앞으로 가져오는 자고 제사장은 사람의 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다.
구약시대에는 이 두 사람에게 기름을 부었다. 기름부음은 위임을 의미한다. 왕은 하나님을 백성에게 분배하도록 위임되었고 제사장은 백성의 사정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위임되었다. 이 위임이 곧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야곱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것이다.
이 기름부음은 귀중한 축복이다. 히브리서는 이 위임을 천사에게 주지 않고 사람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야 사람의 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천사는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는 천사가 모든 것을 다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대신하고 사람을 대신할 자는 오직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다. 천사냐 사람이냐 하는 우주적인 전쟁에서 하나님에게는 사람이 중요하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임할 수 있는 자는 사람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행사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위임을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1장에는 “내가 어느 때에 천사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고 했느냐. 나는 천사를 내 아들이라고 한 일이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신이라고 알기 쉽다. 지금 기독교 안에서 혼란이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는 신이라는 것이고 신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희랍 시대에 논쟁을 하다가 난 결론이 삼위일체라는 것이다. 예수는 분명히 사람인데 그 안에 신성이 있고 본질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인데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 위는 위치, 즉 임무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는 것이 삼위일체다.
예수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 원래 사람인데 이런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감히 예수가 사람이라는 말을 못한다. 아버지 하나님과 동질, 즉 본질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큰 혼란을 가져왔는데 지금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가 하나님을 정의하는 정설로 되어 있다.
이것을 위반하면 이단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세에는 이 문제로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이것 때문에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다가 처형된 사람이 수없이 많다. 이 교리에 위배되면 처형되었으니까 알고 보면 무서운 교리다.
중세에서 가장 유명한 교부이기도 하고 신학자이기도 한 사람이 어거스틴이다. 천주교나 개신교에서 다 존경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한 말이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것이다. 사람의 이성으로 이것을 구분하기 어렵다.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일뿐이다.”라고 결론지어놓았다. 아무리 논쟁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아리우스파와 아다나시우스파가 크게 대립했는데 아리우스는 우리가 잘 아는 안디옥, 에베소 교회의 교부였다. 에베소는 유럽의 가장 중심지였다. 바울이 3년 동안 있었던 곳이 에베소였다. 아리우스는 단성론, 즉 하나님은 셋이 아니라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으로, 신약시대에는 아들로, 교회 시대에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역사했다고 주장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프리카 지역의 알렉산드리아 교부였는데 하나님은 단성이 아니라 삼위가 일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자세히 말하려면 너무나 복잡하고 어려운데 결국은 아다나시우스파가 승리했다. 이 논쟁이 325년에 일어나서 400년까지 이어졌는데 그때 회의를 주재한 사람이 황제였다. 나라가 하나로 통일되었으니 종교도 통일하려고 황제가 신경을 쓴 것인데 그 자리에서 황제가 아다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왜 황제가 아다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주었는가?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으로 말하면 뉴욕이나 워싱턴 같이 세계적으로 가장 크고 현대화되고 문명화된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점령해서 새로 만든 도시다. 한 가지 예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었다. 거기 수십만 권의 책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천 년 전에 알렉산드리아에 그런 도서관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전에 어휘가 얼마나 많으냐 하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한글 사전의 어휘 수와 영어 사전의 어휘 수를 비교하면 영어 사전의 어휘 수가 훨씬 많다. 그만큼 문명이 발달했다는 뜻이다. 문명이 발달하면 어휘가 많아진다. 비문명 국가의 어떤 지역을 가 보면 언어가 몇 개 안된다. 하와이 언어는 단어가 오백 개밖에 안된다고 한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해야 한다. 한 가지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사는 사람이 아니면 그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것이다.
성서를 기록한 히브리어도 마찬가지로 단어 수가 많지 않은 원시 언어다. 그래서 한 단어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희랍어도 마찬가지다. 지금 희랍어는 많은 어휘가 있지만 성서를 기록할 때의 희랍어 코이네(Κοινὴ)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를 통일하고 언어를 통일시키기 위해 새로 만든 언어다. 가장 간결하고 알기 쉽게 만든 언어가 성서 헬라어다. 언어가 단조로우면 그 안에 함축된 사상을 해석하기 어렵다. 그 실재를 모르면 그 말을 들어도 해석이 안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언어들은 별 상관이 없지만 성서 희랍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써 놓은 것으로 간결하고 알기 쉬워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언어를 잘 구사한다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다 표현하기는 어렵다. 어린아이도 한국말을 하지만 어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알아들을 수는 있는데 깊은 뜻을 알기 어렵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이런 면에서 크게 발달되어 있는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아프리카에 있지만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 알렉산더가 새로 만든 도시다.
그래서 성서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성서 헬라어는 단순하니까 배우기는 쉽다. 그런데 그 속에 들어 있는 깊은 뜻을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영어로 번역되어서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요즘은 희랍어를 바로 우리 말로 번역해 놓았다. 성경을 볼 때는 이런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의미가 많기 때문에 문자대로 보면 안된다. 그런데 실재를 알고 읽으면 무슨 말을 했어도 알 수 있다. 내가 살던 데서는 고구마를 보고 감자라고 했다. 고구마와 감자는 다른데 거기서는 구별이 없이 감자라고 해도 다 알아듣는다. 외지 사람이 들으면 모른다. 그렇게 문화적인 차이가 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히브리어로는 메시아라 하고 희랍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반드시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이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와 있다. 제사장은 반드시 사람 중에서 취해야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연약함과 사람의 사정을 알아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제사장은 무슨 일을 하는가? 레위인들이 제사장이 되었는데 왜 그들이 제사장이 되었는가. 그것은 아론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왜 아론이 제사장으로 임명되었는가? 백성들은 아론을 제사장으로 세운다며 모세를 원망했다. 왜 자기의 형을 제사장으로 세우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각 족장의 지팡이들을 가져오라고 해서 지성소 안에 두고 하나님이 누구를 선택하시는지 보자고 했는데 이튿날 보니 아론의 살구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났다. 그래서 아론이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성전 안에서 지성소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 아론밖에 없었다. 같은 레위인이라도 아론의 후손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다른 레위인들은 성막의 안과 밖에서 물을 깃거나 장작 패는 일을 담당했다. 같은 제사장 지파지만 아론의 후손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고 그 사람만 지성소까지 갈 수 있었다.
성막은 어떻게 생겼는가? 처음 바깥에서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번제단이 있는데 번제단은 성막의 모든 기물들을 다 합한 것만큼 컸다. 성막에서 가장 큰 것이 번제단으로 제물을 잡아서 불사를 수 있도록 구조가 되어 있다. 거기서 제물을 잡아서 피는 그릇에 담고 살은 각을 떠서 불살랐고 타고 남은 재는 동편 재 버리는 곳에 버리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번제다. 번제는 신약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물두멍을 지나야 하는데 물두멍은 손을 씻는 곳이다. 성소에 들어가려면 깨끗해야 하기 때문에 물두멍은 정결케 하는 의식에 해당된다.
물두멍을 지나 휘장을 열고 성소 안에 들어가면 그 안에는 떡상과 금등대와 금향단이 있다. 떡상에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떡을 매일 갈아 놓게 되어 있었다. 금등대는 순금으로 만들어졌는데 거기 감람유를 붓고 심지를 담가서 불을 켜게 되어 있다. 성소 안에서 순금으로 되어 있는 것은 등대밖에 없다. 성소의 벽이나 떡상, 금향로는 전부 조각목에 금을 입힌 것이다.
그렇지만 등대도 불을 켜려면 감람유가 필요하고 섬유질의 심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불똥을 제거해야 했다. 옛날에 등불을 켜면 심지가 타서 찌꺼기가 생겼는데 그것을 떼지 않으면 연기가 나고 불빛이 좋지 않았다. 제사장 중에는 불똥을 매일 제거하는 사람이 있고 떡상에 떡을 갈아놓는 사람도 있었다.
금향로는 어떤 것인가? 향을 피우는 곳이 번제단과 금향단 두 군데였다. 번제단에서 제물을 태울 때 냄새가 났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한다. 그에 비해 금향단에는 네 가지 향품을 섞어서 향을 피우도록 되어 있다. 향의 내용은 죽음과 부활,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네 가지 향품이다.
금향단은 성소에서 제일 안쪽에 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기 직전에 있는 모양인데 어떤 경우에는 성소에 있다고 되어 있고 어떤 경우에는 지성소에 있다고 되어 있다. 그로 보아 성소와 지성소의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떡이나 불빛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향기는 들어갈 수 있다.
금향단의 기도는 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린 기도와 같은 기도다. 내 죄를 위한 기도,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도다.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되느냐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다. 번제단은 내 문제로 기도하는 곳이고 금향단은 하나님 문제로 기도하는 곳이다. 이것은 성숙한 사람만 가능한 일이다. 내 문제가 없어야 하나님 문제로 기도하게 된다. “복음이 전파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나를 위한 말이 아니다. 그런 기도가 금향단의 기도다.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기도라야 지성소까지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기도다.
금향단의 향은 번제단에서 가져온 불로 살라야 한다. 다른 불로 하면 안된다. 다른 불로 드리다가 고라 자손이 하루에 이백오십 인이 죽었다. 번제단을 통과해야 되지 번제단을 통과하지 않은 기도는 소용이 없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지만 안되는 것은 번제단이 없이 기도하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다시 휘장을 열고 들어가야 지성소에 이른다. 안에 아무것도 안보이도록 캄캄하게 가려져 있는 두꺼운 휘장, 이것이 지성소의 휘장이다. 그 안에는 법궤가 있다. 법궤는 조각목에 금을 입혀서 만들었다. 그 안에는 모세가 받은 돌비 두 개와 광야에서 먹던 만나를 넣어 둔 금항아리가 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다.
법궤의 뚜껑은 순금으로 만들어졌다. 뚜껑을 보고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의미로 시은소라고도 하고 죄를 사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속죄소라고도 한다. 뚜껑 위에는 천사를 상징하는 그룹들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법궤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와 싹난 지팡이다. 법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순수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다. 대제사장은 번제단에서 받은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법궤의 뚜껑 위에 뿌렸다. 그러면 속죄가 되었다. 속죄의 피라는 말이 그것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이 들어서 다 알 것이다. 그 피로 구속함을 받았다는 말이 그것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죄사함이 없다 하였다(히9:22). 신약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한다는 개념이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까 신약을 이해하려면 성막에서 행한 것을 알아야 한다. 왜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가? 그 말은 구약의 예법에 따라서 설명한 것이다. 그냥 받아들이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 피가 내 피라야 되지 구약에서 양의 피를 드렸으니까 신약에서는 예수의 피를 드렸다고 생각하지만 자기와 별 관계가 없다.
그래서 번제단에서 양을 잡을 때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해야 했다. 의식적으로 나와 동일시 하여 관계를 연결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이기 때문에 항상 새로 드려야 하고 다시 드려야 했다. 사실은 내가 죽어서 내 피가 들어가야 하는데 직접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간접적인 것이었다. 내 피는 곧 내 생명이다. 내 생명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그런 예법을 행했던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죽음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가지고 설명했다. 유대인들이니까 그렇게 했지만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의식으로 여겨지지 실제로 여기기는 어렵다. 지금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해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의식으로만 생각한다. 양보다는 사람이, 양의 피보다는 그리스도의 피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르는 한 도로 의식이 되고 만다.
천주교에는 많은 의식들은 구약의 예법들을 다시 하는 것인데 개신교는 그런 의식을 배제하고 말씀 위주로 나왔다. 하지만 말씀을 아무리 해도 안되니까 성찬식을 하게 된 것이다. 성찬식 때는 몸도 정결하게 하고 옷도 깨끗이 입고 마음을 가다듬고 의식을 행한다. 하지만 그때뿐이지 사실이 그렇게 안된다. 평생 간직이 안된다. 기독교가 이렇게 의식화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자리가 우리가 예수를 만나는 자리다.
내가 예수와 만나서 그분과 내 생명이 서로 연합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 양은 수없이 죽었지만 나와 아무 관계가 안된다. 양은 속죄를 받았는데 나는 속죄를 받지 못한 것이다. 양이 죽은 것이지 내가 죽은 것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을 따르고 본받으려고 노력하지만 절대로 못지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공자님이나 석가모니가 한 말씀과 다르기 때문이다. 공자님 말씀은 배우고 익히면 된다. 학이시습(學而時習)하면 된다. 부처님 말씀도 마찬가지다. 그대로 수도하면 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하려면 안된다. 전혀 다른 생명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될 것 같지만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된다.
사람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를 산상보훈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전 성경의 히말라야 봉 같은 것이라고 하고 황금률이라고 하며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핵심 사상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듣기는 좋지만 하나도 그대로 실행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이 구약의 율법보다 쉽다고 하지만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옛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러저러하게 하라.” 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 리를 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무한히 가라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 된다. 그럴 사람이 있겠는가. 아무도 못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따르고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아무도 따르고 지킬 수 없다. 해 보면 어디까지 해야 되는지 모른다.
구약의 율법은 한계가 있다.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해질 때부터 다음 날 해질 때까지 일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언서를 보면 선지자들이 나와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고 책망했던 것이다. 요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못지킬 것이 있겠는가. 그 시간만 일하지 않으면 되는데 누가 못지키겠는가. 유대인들은 절대로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 선지자들은 그들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책망했다.
안식일을 범하면 어떻게 되는가?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다. 열 가지 계명 중에 가장 무서운 계명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겠다고 했지 반드시 죽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안식일을 범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였다.
왜 안식일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는가. 그것은 여호와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에 심히 좋다 하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고 ‘심히 좋구나.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귀하게 지으셨구나.’ 이렇게 알아야 안식이 되는 것이다. 아직 미완성이면 안식이 되겠는가. 일을 하다 말고 어떻게 잠을 자겠는가.
그래서 나는 저녁에는 전화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전화를 받고 나면 해결이 안되면 어떤 경우에는 잠을 못잘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녁에는 나에게 전화를 하면 안된다. 잘못하면 잠을 못잔다. 하나님도 자기가 하려는 일을 마치고 쉬셨다. 일을 마쳤다는 말은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 창조를 마치셨으므로 안식하시고 이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셨기 때문에 안식하시고 우리도 안식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인생으로 지으신 것이 너무 감사하다. 이렇게 귀할 수 있는가.’라고 알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왜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가?’라며 원망하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에 감사하더라도 죽음 앞에 서면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죽음을 만들어 놓았는가.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는가.” 하며 원망하면 안식이 안지켜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 말은 안식일을 지켰다는 말이다.
히브리서에 사람이라야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말도 같은 말이다. 사람이 제사장이 되고 나면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으니까 여한이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하나님을 만났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것이 연합이다. 왕은 하나님의 권위를 세상 앞에 베푸는 자다. 정말로 왕답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왕, 그런 제사장이 있겠는가. 그래서 아무리 지켜도 안되고 해도 해도 완성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너희는 왜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 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라며 책망했던 것이다.
우리 생각에 유대인들은 고집이 세고 말을 안듣는 사람들인 것 같다. 어려서 교회에서 그렇게 들었고 예수님도 그들에게 가식하고 위선을 행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 갈 때 유대인을 만나고 싶었다. 제일 궁금한 것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자마자 기가 죽었다. 여름인데도 너무나 거룩하게 구렛나루를 기르고 새카만 양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얼마나 잘생기고 거룩하게 생겼는지 쳐다볼 수 없었다. 만나 보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경건하고 정직하고 빈틈없는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을 나쁜 사람이고 수전노라고 알고 있는 것은 세익스피어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상인’을 보면 그들을 그렇게 묘사해 놓았다. 심장 가까운 데서 살 일 파운드를 도려내려고 했다니 얼마나 잔인한가.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정직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이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존경을 받는다. 사회를 위해서 많은 기부를 한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았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왜 사람은 하나님의 위임을 받는가? 원래 창조할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셨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라.” 하셨다. 이것은 사람을 자기 대신이 되게 하겠다는 말이다. 땅 위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 가장 원초적이고 중요한 약속이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다.
인생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이 구절에 있다. 다른 데서는 이렇게 명확한 구절을 찾기 어렵다.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자.” 이것이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다.
성경을 하나님이 쓰셨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이 썼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이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것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인생관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이보다 더 사람에게 복된 말은 없다.
내가 불경을 다 본 것도 아니고 인생을 다 본 것이 아니지만 어디 가도 사람에게 이보다 복된 말은 없다. 지으신 자가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자.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자.” 하셨는데 이 보다 더 좋은 말이 있겠는가!
나는 여기서 내 인생이 이미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축복을 받았다. 이것을 잃어버려서 문제가 된 것이지 이것이 이루어지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제사장과 왕은 형식적이지만 이 실제적인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메시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에게 베풀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적어도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많은 사람이 부자인 것 같지만 실속은 베풀면서 사는 사람이 더 부자다. 남에게 줄 수 있어야 되지 돈이 있어도 남에게 줄 수 없으면 가난한 사람이다. 평생 쥐고 있다가 죽을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이 허망하다. 평생을 고생했지만 누구를 위해서 고생했는가. 자기를 위해서 한 것이니 고생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부자 되려고 애썼는데 누가 칭찬해 주겠는가. 누구를 위해서 일했다면 칭찬을 받겠지만 자기를 위해서 했는데 누가 칭찬하겠는가. 소가 하루 종일 풀을 뜯어 먹고 살지만 수고했다고 하겠는가. 푸주간에서는 풀 잘먹고 잘 커서 좋다고 하겠지만 누가 소보고 풀 많이 뜯어먹었다고 칭찬하겠는가. 인생을 잘 생각해 보면 사는 법이 아주 간단하다.
내가 누구를 위해 살 수 있다면 가치가 있지만 아무도 위하지 않았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누구 보고 원망하겠는가. 적게 가졌어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많이 가졌어도 나누어 먹을 수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제사장의 위임을 받았다는 것은 남을 위해서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축복인 것이다.
야곱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탈취자였다. 장자의 명분을 얻기 위해서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고 라헬을 얻기 위해서 14년을 종살이하면서도 하루같이 지냈다.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보다 놀라운 일이 없다. 원래부터 마음이 좋은 사람이었으면 모르지만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다루어져서 이런 사람이 된 것이다.
바로를 축복하고 나와서 죽을 때는 열두 아들들을 놓고 축복했는데 자세히 말할 수는 없고 창세기 마지막 강해를 참고해 보시기 바란다. 열두 아들들을 일일이 축복했는데 그 축복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축복이라기 보다 제사장이 백성에게 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단에게는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라고 저주를 했다. 아버지가 그런 말을 아들에게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아버지라는 육신적인 세계를 떠난 사람이다.
바로 앞에 섰을 때도 그러했다. 바로가 누군데 그를 축복하겠는가. 자기 육신을 생각하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삭신이 떨릴 자리다. 그런데 거기서 바로를 두 번이나 축복했다. 그는 이미 육신의 어떠함을 넘어선 사람이다. 탈취자의 어떠함을 이미 벗어나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의 직무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제사장의 길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영광이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을 가장 화려하게 만들었다. 옷자락에 석류 모양의 금방울을 달아서 제사장이 지나가면 방울소리가 울렸다. 제사장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표현하려고 그렇게 만들었다.
이것을 본따서 만든 것이 교황의 옷이고 추기경의 망또다. 천주교인들은 그 망토만 봐도 경의를 표한다. 교황은 영광을 상징하기 위해서 머리에 금관을 쓰는데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야 영광스럽지 금관을 쓴다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해서 잠시 동안 고난을 받으셨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쓰셨다고 하였다. 십자가는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이다. 왜 십자가의 고난이 그렇게 중요했는가. 고생했으니까 그런가? 그렇지 않다.그 안에 만유를 포함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는 이 문제를 간과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얼버무려버렸다. 사람들은 그 사랑만 감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렇게 해갖고는 안된다. 내 구속이 없지 않은가!
그가 죽으신 것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는지 몰랐다. 알고 보니 내가 있을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내가 그분과 함께 있을 자리, 하나님과 함께 있을 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겠다고 하셨다. 그 처소가 어딘가? 그곳은 ‘그리스도 안(In Christ)’이다.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인격의 문제다.
이것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안된다. 아무것도 안되고 갈 데도 없다. 그런데 내가 그 자리에서 예수를 만나니까 자연히 그분과 하나가 아닌가. 그것이 나를 위한 죽음이다. 이것은 나에게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죄가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다.
옛날에는 내가 무슨 죄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을까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일이 없는데 성경에는 그렇게 써 있고 또 그렇게 설교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아서 긴 세월 동안 고생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위해 죽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감사가 되겠는가. 나를 위해 죽지 않았는데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8년 동안 한 교회에서 목회를 했지만 한 번도 그런 말을 못했다. 무슨 낯으로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나를 위해 죽은지 모르면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겠는가. 그러니 말씀이 반쪽도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를 알면,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그 사람을 알면 그분과 하나다. 신유길 교수님이 제3 인간이라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이 내가 지금까지 하려던 말이다. 그분을 이런 생각을 안하고 있겠지만 제3의 인간이 참 사람, 원형 인간이다. 그분에게 신학계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분 기억에는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제3 인간을 말한 신학자가 없다. 없는 것이 맞다. 동산을 떠나버렸으니 없는 것이 맞다.
동산 밖에 나온 사람이 아담이다. 아담은 두려워 숨은 사람이다. 그 다음에 거기서 난 사람이 가인과 아벨이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고 그 후손 에녹은 에녹성을 쌓았다. 바벨탑을 쌓은 것처럼 성을 쌓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사람의 길의 결과를 알게 되었다.
아벨은 무엇인가. 죽었으니까 억울한 사람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제단 아래서 신원하고 있다고 하였다.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벨이다. 역사 속에서 계속 고난을 받는 것을 억울하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강자들에게 붙잡혀서 죽었습니다. 언제 이것을 갚아주시겠습니까.”라며 신원하고 있다. 항상 강자와 약자, 이 두 사람이 있다. 세상에는 이 둘밖에 없다. 누구든지 다 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선한 사람이 되려면 아벨처럼 되어야 한다. 그러니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다. ‘나도 참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벨 같은 대우를 받게 된다. 그래서 못하는 것이다.
악을 행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선을 행하고 싶다. 그런데 못한다. 사람은 자기가 살려고 하는 것인데 선을 행하면 자기가 손해를 봐야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순이다. 기독교인들은 다 선을 행하고 싶어한다. 모든 종교인들이 그러하다. 그런데 왜 못하는가? 아벨처럼 되니까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단 아래서 신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제 해결될 것인가? 어린양 예수가 인봉한 책을 뗄 때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쓸 때 해결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은 것이 곧 내가 받은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가 영광을 받지 못하면 나는 아벨이니까 계속해서 제단 밑에서 억울함을 호소할 것 아닌가. 그런데 진짜로 억울한 분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것을 보았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악을 행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래서 내가 이 말을 계속하는 것이다. 어차피 죽은 것인데 왜 내려오지 못했다는 말을 계속 하는가? 어차피 죽었으면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할 때 나와 관계가 된다. 거기 내가 예수와 연합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그분 안에 포함될 수 있다.
이것은 예수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과 나는 다르다. 실력도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과 내가 만나서 연합이 되겠는가. 예수님이 죽으신 그 자리에서만 된다. 내가 예수와 연합한 그 자리에서만 다른 사람과도 연합이 된다. 어떻게 연합이 되는가? 사람만 보니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유가 아니라 그 사람만 보니까 연합이 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사람만 보는 교회다. 사람만 보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 교회다. 그러니 교회는 얼마나 신성한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교회다. 지금 교회들이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 인류의 평화가 있다. 영원한 인류의 평화가 여기 있다. 이것 외에는 어떤 것도 평화가 없다. 다른 것은 다 조건이 있어야 한다. 누구와 친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취미가 맞든지 생각이 맞든지 사상이 맞든지 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맞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예민한 사람이 고독하다. 그냥 적당히 살면 괜찮은데 예민하게 찾으면 자기와 맞는 사람이 없다. 참된 친구가 없다.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이지 똑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왜 세상이 이 모양이냐, 왜 인간들이 다 이 모양이냐’라며 세상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낙락장송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그리고 “그래, 너희는 눈맞고 다 시들어졌지만 나는 독야청청한다.”라며 자랑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살아야 되지 독야청청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자기는 잘났다고 하겠지만 얼마나 외로운 것인가!
제사장은 사람을 포함하는 사람이다. 그냥 피만 받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함하고 그 사람과 함께 아버지께로 가는 사람이다.
피는 생명이다. 한 생명이라야 인도가 되지 한 생명이 아니면 인도가 안된다. 그러니 제사장은 얼마나 존귀하고 성결하고 영화로운 존재인가! 온 인류를 포함한 존재가 제사장이다. 예수님을 보고 대제사장이 되기에 합당하다 하였다. 이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옛날 제사장은 법으로만 했어도 영광스러웠는데 참 제사장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는가!
히브리서를 읽어 보면 이런 말이 나와 있다. 사람들이 잘 안보고 뜻을 잘 몰라서 그렇지 히브리서가 굉장히 중요한 책이다. 새 언약, 신약이 히브리서에 들어 있다. 새 언약은 무엇이고 옛 언약은 무엇인지 구별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옛 언약은 의식적이고 법률적이고 객관적이고, 새 언약은 실제적이고 생명이고 영이다. 이렇게 딱 갈라놓았다.
구약 안에서의 축복은 돈도 많아야 되고 땅도 많아야 되고 자식도 많아야 되고……, 이런 것이 축복이었다. 세상의 일반적인 축복과 비슷하다.
새 언약의 축복은 전혀 그런 것들과 관계없는 축복이다. 만민이 공유할 수 있는 축복이다. 누구라도 다 참여할 수 있는 자리다.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그 자리는 만인이 공유하는 자리다. 누구도 거기서 “나는 자격이 없다.”고 할 사람이 없다. 자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혀 자격이 필요없다.
이 사람이 참 사람이다. 신교수님은 제3 인격이라고 했는데 그 내용은 참 사람, 원형 인간, 동산 안에 있었던 그 사람,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했던 그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이 사람이 없다. 가인과 아벨밖에 없다. 거기서 서로 네가 맞니 내가 맞니 할 뿐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밖에 없기 때문에 네가 옳으면 내가 틀리고, 내가 옳으면 네가 틀리는 것이지 다른 방법이 없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 미련을 두면 안된다. 밥먹고 사는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내 인생의 텃밭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세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같이 살지만 거기서 내 인생의 행복을 찾으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행복하겠지, 저렇게 하면 행복하겠지.’ 하면서 거기서 내 행복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허망한 짓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찾겠는가. 가인과 아벨의 세계에서 누가 행복하겠는가. 안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의 영광은 제사장까지 되는 것이다. 제사장이 바뀌면 왕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 하였다. 예수는 이 둘을 겸한 사람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온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우리를 데리고 아버지께로 간 사람이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실망스러운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하였다. 놀라운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결론이다. 결론만 가지고는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알 수 없다.
성경에 있는 말들은 모두 결론이다. 말씀을 들으면 우선은 좋지만 해설이 없으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알 수 없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하니 좋지 않은가. 그런데 기분은 좋은데 내가 안된다. 해석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복음을 가진 사람이 해석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역이다. 그대로 전하는 것은 사역이 아니다. “성경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다.
왜 밭에 묻힌 보화가 소중한가. 성경은 전체가 밭에 묻힌 보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캐서 먹어 봐야 알지 안먹어 보면 모른다. 그냥 건성으로 믿어서는 아무 맛도 없다. 수박 겉핥기다. 그래서 사람이 안변하는 것이다. 먹어야 변화가 되지 안먹으면 변화가 안된다. 밥을 안먹고 배 부를 방법은 없다. 못먹고 살찔 방법은 없다. 살찐 사람은 물밖에 안먹는데 살이 찐다고 하는데 물만 먹고는 살찔 수 없다. 어차피 많이 먹어야 살찐다.
덩치 있는 사람이 밥 먹는 것을 보면 겁나게 먹는다. 다른 사람의 몇 배를 먹는다. 아틀란타에 있는 이봉균 형제가 옛날에 밥먹는 것을 옆에서 보면 신기했다. 우리 먹는 공기밥은 두 숫갈밖에 안된다. 그것도 꾹꾹 눌러서 한 숫갈에 담아 먹는데 우물우물하면 다 넘어가 버렸다. 옛날에 시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밥그릇에 고봉으로 얹어 주었다. 보리밥이니까 물을 발라서 꾹꾹 눌러담았다. 그래도 두어 번 떠먹으면 봉우리가 없어졌다. 엄청나게 먹었다. 그래도 일을 하니까 살이 안쪘지 요즘 그렇게 먹으면 살이 쪄서 못견딜 것이다. 안먹고 살찌는 방법은 없다. 위가 나쁘면 살찌는 방법은 없다. 빼빼한 사람은 다 위가 나쁘다. 소화력이 모자라니까 살이 찔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먹고 소화가 돼야 살이찐다.
하나님 말씀은 볼수록 신기하고 알수록 더 재미있다. 알수록 깊은 맛이 난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고기를 안먹은 사람은 고기맛을 모른다.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데 고기를 먹는 사람이 고기를 안먹으면 못견딘다. 우리 집 앞에 푸주간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며칠 고기를 못먹으면 생목이 오른다고 했다. 먹다 안먹으니 못견뎠던 것이다.
미국에 갔을 때 가는 데마다 엘에이 갈비를 구워줘서 맛있게 먹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밥상을 보면 한심했다. 먹을 것이 없었다. 고기 한 점이라도 있어야 되지 아무것도 없으면 밥상이 얼마나 초라한가! 하나님 말씀도 먹어 보면 점점 더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