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티-외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2)
들뢰즈와 가타리, 최명관, 민음사, 1994(원 1972) 608쪽.
Deleuze et Guattari, L'Anti-Oedipe: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Minuit, 1972, p. 494.
*
나로서는 한두 번 읽었을 때, 등장인물들을 내력을 찾을 수 없어서 애먹었고, 인물들의 성격 또는 학문적 태도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들뢰즈가 등장시킨 예술가들이 공동체(공산주의까지는 아니라도)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이 정신의학의 의사들이 단순히 프로이트-라깡과 다른 계열이라는 것을 넘어서, 인간을 자연에서 삶을 토대로 본다는 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들에게서 인간의 자연(nature, 본성)을 자연의 일부로 보려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고, 이 자연은 앵글로색슨이 대상화하는 것과 달리 전체라는 것이다.
벩송이 강조하였는데, 전체 속에 부분이지, 부분으로 전체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전체가 자연이며, 자연이 동적이라는 것이다. 박홍규의 논문은 이점을 잘 지적했었는데, 열 번 너머 읽은 것 같은데 잘 보이지 않다가,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을 읽고 난 뒤에야 풀렸다. 저자들은 정신분석학이 내재의식을 원자들처럼 잘라서 대상화 또는 개념화하는 방식으로 환자를 대하는 것이 그들도 모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개념]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들을 조합하는 방법을 따라 간다는 것이다. 이 언어(개념)와 원자들의 조합은 실재성과 아무 연관이 없다고 벩송이 강조했고, 소쉬르도 강조했다.
그럼에도 들뢰즈가 보기에, 프로이트-라깡의 길은 대상화를 해야 인간이 편리와 안정을 유지하며 산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게 착오라는 것이다. 자연을 단위로 잘라서 개념 또는 원자로 다루는 것은 형상의 존재를 먼저 인정하는 것이고, 형상의 존재 인정은 외디푸스(참주)와 크리스토스를 인정하는 것이며, 진리의 선전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참주, 신, 진리라는 세 가지 방식들의 인정이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이며, 인간이 탐만치에 빠져, 자연을 인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공상을 넘어서 망상에 빠진 것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이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나마도 프로이트가 신 또는 절대자로부터 해석하려고 하지 않은 노력에 있다. 그런데도 내재의식을 공간화 된 배치에 의해 해석하는 방식에서 프로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선전제를 끌어들였다. 들뢰즈가 외삽법이라고 하는 것은 벩송이 EC(장조적 진화)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설명이다. 자연이 자기 생성에서 여러 갈래로 또한 열려진 미래에서 무엇을 생산할지 인간으로서도 미리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의 통일성 또는 미래의 가능성을 마치 실재성처럼 다루고 싶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그렇게 다루는 것이 거짓이며, 기만, 오만, 착각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연의 미래가 열렸다고 해서 인간의 목적성으로 투사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당겨서 만들고 있는 이 목적성이 전지구를 황폐하게 하는 주범의 사고일 것이다. 그 주범인 용어들로서 신과 참주, 진리를 비판하면, 아직도 빨갱이나 마남사냥하려 덤벼드는 종족이 바로 후기 중세에서 프란체스코파를 단죄하는 도미니크파의 종교재판을 옮겨놓은 것과 같다. 이 옮겨놓기(전이 tranfer)의 착오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파라독스들 중의 하나라고 하는 자들에 대한 억압뿐만이 아니라, 그 비판자의 가족과 동지에게 빨갱이(악마)를 덮여 씌운다고 겁주어서 스스로 억제하게 만드는 데, 이는 2천년 동안 유일 신앙이 한 짓이라고 니체가 말했다. 억제 그것은 신에 저항하지 못하듯이 사회에 저항하지 못하는 원한, 그리고 그 아들에게 빚지게 만든 원죄를 심는 것이, 국가적 참주 억압의 이전으로 종교권세의 억제였다는 것이다. 가족, 사회, 국가라는 동심원적 사고가 외디푸스적 사고이다. 벩송은 이런 사고를 정태적 종교에서 길게 이야기 했다.
인간은 또는 모든 생명체는 현실에서 기나긴 우주 역사에 시간적으로 최고의 극한에 선 현존이다. 이 현존 다음에는 아무것도 아직 결정된 것이 없고, 다음세대에도 현존 다음이 결정된 것은 없다. 아버지, 할배는 생명학적 후배이며 예수와 공자, 싯달다, 모세도 현존의 먼 후배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대에, 그 인간적 지층에서 무엇을 해냈고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를 재인식하면서, 현재를 인식하고 현실을 차이와 차히를 밝히면서 공동체에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공간화 된 고른 평면에 인간이 홈을 파는 대로 공간이 성립할 것이라는 것은 망상이다. (56WLCD)
* 프로이트의 외디푸스화 진료와는 다른 방식으로 환자들 대하는 정신의학자: 라이히(Reich, 1897-1957), 빈스방거(Binswanger, 1881-1966),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 레잉(Ronald Laing, 1927–1989), 마노니(Maud Mannoni, 1923-1998), 판코프(Pankow, 1914-1998), 베텔하임(Bettelheim, 1903-1990), 망델(Gérard Mendel, 1930-2004) 프로이트-라깡의 정신분석학이 영혼[정신]에 대한 분석이 일방적이고 편향적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이보다 더 훨씬 더 많다. AO 총 인명록에 보면 등장하는 인물들 더 많다. 프로이트-라깡의 분석을 비판하는 형이상학적 토대는 벩송이 분명하다.
* 게다가, 욕망하는 생산에서 정신병은 프로이트의 진단과 다르다는 예로서 작가들 또는 예술가들, 렌츠(Jakob Lenz, 1751-1792), 횔더린(Hölderlin, 1770-1843), 네르발(Nerval, 1808-1855),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1882-1971), 로렌스(D. H. Lawrence, 1885-1930), 셀린(Céline, 1894-1961),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베스(Besse 1921-1999) 등도 여기 나열한 인물들 보다 더 많다.
왜 들뢰즈는 벩송의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라는 용어보다, 칸트의 오류추론을 썼을까? 벩송은 형이상학적으로 현존, 두 질서, 세 실사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기에 악순환의 기원을 밝힌 것인데 비해, 칸트의 오류추론은 자아에 관한 정의 또는 규정에 오류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의 비판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 자연의 이법에 대한 오류 추론으로서 자아 또는 정체성에 맞게, 오류추론이라고 하고, 칸트보다 길게 다섯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오류추론: 영혼은 규정이 아님에도 규정 속에 넣으려 한다. 외삽법, 데우스엑스마키나, 신을 불러들여 해결하기.
둘, 내포적이고 무제한적인 영혼을 배타적이고 제한적으로 한정하려 한다. 전광훈이처럼 내말 들어라고 하는 광기의 목사들과, 전두환의 군사독재와 윤석열의 검찰독재 지배자들이 마치 마남사냥처럼 자기 말 안듣는 자를 빨갱이로 몬다.
셋, 노마드적 다양체의 영혼을 분해 대응적[위계적]으로 적용하려한다. 다른 곳에 가도 안된다. 명령에 따라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구데타에서 자기편만을 들어라는 자들)
넷, 영혼의 유동성을 현실화(신체화)의 형식[형상]에 덧 씌우려하다.
닷, 영혼의 잠재성[권능]을 현실성이란 이름으로 기표[상징계]에 종속시키려 한다.
- 영혼은 흐름이고 현실의 벽을 뚫고 파열시키는 폭발력이다. 이점에서 영혼은 기관없는 신체로서 욕망하는 기계이다. 영혼은 [신학에서] 정신과 대비된다. 영혼의 열기, 폭발성, 혁명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40RLH)(56WKH)]
제1장 욕망하는 기계들 Les machines désirantes 7-59 [몸의 기능] [의식의 역량]
제2장 정신분석학과 가족주의: 신성가족 Psychanalyse et familialisme : La Sainte famille 60-162.
1절 외디푸스 제국주의
2절 프로이트의 세 원문들
3절 생산의 연결적 종합 [참조, 1장 1절] 편집증 기계 – 과정, ...과 ...과
4절 등록의 이접적 종합 [참조, 1장 2절] 기적 기계 – 전유, 이거나 이거나
5절 소비의 연접적 종합 [참조, 1장 3절]독신 기계–적용, 그러므로 ..이다
6절 세 조합의 요약–[세가지 적용의 오류가 권력, 권세, 권위의 카르텔레과 같다.]
7절 억압과 억제 - 세 가지의 구체적 사태들(faits) 넷째 억압을 억제로 이전하는 오류
8절 신경증과 정신병– 다섯째 오류 “나중에”
****
8절 신경증과 정신병 Névrose et psychose 145
[제2장 7절에서 법(즉 권력)의 작동에서 가족에 대한 문제를 삼았다. 그 때 자아는 억압이 문제인데, 가족 속으로 들어와 있는 권력의 대행자 때문에 억제가 등장한다. 7절의 상부관계에 비해, 8절은 하부연관이다. 자아는 실재성과의 연관이나 연쇄에서 그 양상을 드러낸다. 그 기호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
2.8.1. 실재성 La réalité - 145.
프로이트는 1924년에 신경증과 정신병 구별의 간단한 기준을 제시했다.신경증에 있어서 자아는 실재성(réalité)의 요구에 따르며, 그게(ça)의 충동을 억제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감내한다. 반면에 정신병에서 자아는 그게(ça)에게 장악되어 있으며, 실재성(réalité)과 단절에 위험을 감내한다. (145) [프로이트에서 실재성은 현실성에 가깝다. 이점에서 현실성은 상상의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지성)의 표상 단계이다. 신경증은 내재한 심층이 실재성과 연관이 있다. 이 내재성의 실재성은 어떤 규정에 잡히거나 기준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다. 현실(actuel)에서 어떤 사용 용도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험적이다.]
같은 해(즉 1924년)에 까쁘그라(Capgras, 1873-1950)와 까레뜨(Carette, s.d.)는 신통하게 닮은 사람들의 착각(illusion de sosies)을 가진 정신분열증의 사례를 제시한다. 이 사례에서 환자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와 아버지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는데, ... 까쁘그라와 까레뜨는 이것으로부터 억제의 방향이 다음과 같이 거꾸로 되어 있음을 예시하였다. (145-146)
분명히 프로이트는 이 구별의 도식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경증에서 [실재성과] 단절은 억제된 것의 회귀와 함께 발견되며(히스테리의 기억상실, 강박관념적 무화), 정신병에서 실재성의 회복은 망상적 재구축과 더불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는 문제는 프로이트가 이 간단한 구별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46)
그런데 우리에게 흥미있는 것은 이러한 수렴에서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 라깡의 주목에 따르면, 외디푸스가 “발견”된 것은 잠재적(latent)이라고 여겨지는 정신병에서라기보다 오히려 그것이 명백하다(patent)고 여겨지는 신경증에서라는 것이다. (146)
분열증자는 외디푸스에서 또는 한 외디푸스의 병자가 아닐 것이고, ... 반대로 오히려 외디푸스화의 병자일 것이다. (147) [외디푸스화에 거부하거나 잘 안된다는 점에서 병자일 것이다. 즉 분열증자는 다른 차원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0에까지 강도의 추락, 그것은 자폐증(autisme)이다: 외디푸스의 억압-억제의 체계는 분열증자에게 반대하는 울타리를 쳐서, 이 울타리에서 그의 실재성의 모든 투여[공급]를 행하게 하는 다른 수단들이 없다. (147)
레잉(Ronald Laing, 1927–1989)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공급들을 여행에서 중단한다. 이 공급들은 실재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급들을 언제 상실했는가? 여행에서 또는 여행의 중단에서. (147)
2.8.2. 전도된 이유 La raison inverse. 147 -
그러므로 반대 관계로 가능한 다른 정식화가 있다. 두 그룹, 정신병환자와 신경증 환자가 있다. 전자는 외디푸스화를 지탱하지 못하고, 후자는 외디푸스에 기대고, 심지어는 거기에 만족하며, 그 속에서 이리저리 다닌다(évoluer). 전자는 외디푸스화에 각인되지 않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각인된 사람들이다. (147)
“나는 내 친구들이 신시대의 처움에 그룹을 이루어 정말 폭발적인 힘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믿는다. ... 내가 속해 있는 분리된 둘째 그룹은 틀림없이 쇄골의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 나 자신에 관하여 말하자면, 첫째 그룹의 가부장제에 대한 나의 반항이 둘째 해부터 나를 사회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몰아넣어 나를 더욱더 숨막히게 하였다. 그래 당시는 이 두 그룹이 결합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나는 복수심이 강하지 않다. ... 나는 으레 신의 위격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 자기를‥…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에게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148).
두 그룹을 통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창조된 것이 아닌 기관없는 신체 위에 욕망의 등록과, 사회체 위에서 가족의 등록이다. 정신병 속에서 주입된(infuse) 지식이고, 신경증의 실험적 지식이다. ... 욕망하는 기계들이 있고 나르시스적 외디푸스 기계가 있다. (148)
가족의 첫째 기능은 유보(rétention)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족이 욕망하는 생산에서 무엇을 버리려고 하고, 무엇을 유보하려 하고 있는가, 그 자신의 미분화상태(하수구)에 통하는 출구 없는 통로들에 무엇을 인도하려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148)
공명은 숨통이 막히거나 크게 열려지거나 하며,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영광스러운 것이 되는데, 어떠하든 공명/반향(résonance)(거기에는 또한 숨통이 막히거나 크게 열리거나, 부끄러운 것이 되거나 영광스런 것이 되거나)은 가족의둘째 기능이다. (149)
가족은 동시에 유보하는 항문이요, 반향하는 목소리요, 소비하는 입이다. 이 세 가지 종합이 가족에 속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생산의 이미 만들어진 대상들에 관해 욕망을 결부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향들을 얻기 위해, 꽁브레의 마들렌들을 구입하라. (149)
2.8.3. ‘결정할 수 없는’ 오이디푸스: 공명 Oedipe "indécidable" : la résonance 149 -
위에서 말한 두 그룹의 단순한 대립은 신경증을 외디푸스 내의 장애로, 정신증을 외디푸스 외로 도주(fuite)로 규정하게 되는데,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대립에 만족할 수 없다. 이 두 그룹이 “접합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이 그룹들을 직접 식별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149)
외디푸스는 엄밀하게 결정될 수 없다(indécidable). 도처에서 재발견될 수 있는 만큼이나 결정될 수 없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외디부프는 엄밀하게는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49-150)
네르발(Nerval 1808-1855)에서.. 오렐리, 아드리엔느, 어머니. 이 셋은 결국 성처녀((la Vierge)이다. 네르발은 삼각형의 진동의 극한을 찾고 있다. “당신은 하나의 드라마를 찾고 있어요”라고 오렐리는 말한다. 모든 것이 외디푸스 속에 등기된다면, 극한에서 모든 것이 반드시 외디푸스 밖으로 도망간다. 동일시(identification)는 지각의 관점에서 인물들의 동일시가 아니고, 이름들을 강도의 영역에 동일시하는 것이다. (150)
나는 세 번이나 아크론(Acheron gr. Akhron)강을 건넜던 정복자이다. 이리하여 분열증자는 모든 것이 어머니에게로 환원되는 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아무런 중요성도 띠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어머니 밖으로 다시 나가게 하고, 어머니 속에 집어넣어졌던 모든 성처녀들(les Vierges)을 그의 비밀의 사용을 위하여 다시 끄집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150).
2.8.4. 현실적 요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 Ce que vuet dire facteur actuel 150 -
모든 것은 신경증으로 변환되거나 또는 정신병으로 기운다. 그러므로 그렇게 물음이 제기 되어서는 안 된다. 신경증에 대해서는 외디푸스적 해석을 간직하고, 정신병에 대해서는 외디푸스 외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두 그룹이 있는 것도 아니요, 신경증과 정신병 사이에본성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은 욕망하는 생산이기 때문이다. ... 이 원리는 ‘현실적 요인들’(facteurs actuels)의 문제와 연관하여 보면, 그 의미를 온전하게 얻는다.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점들 중의 하나는 이 현실적 요인들의 역할을 평가하는 것이다. (150).
난점은 다양한 측면에 근거한다. 우선, 요인들의 본성/자연(요인들은 신체적, 사회적, 형이상학적 요인의 본성인가? 또는 유명한 ‘생명 문제들’인가?, 즉 ‘이 생명문제에 의해’ 정신분석학 속에 아주 순수하게 탈성적인 관념론이 다시 들어오게 되는 그 생명문제인가?)은 무엇인가 [때문인가]? 둘째로 요인들의 양태는 어떠한가? ... 단순한 욕구불만 때문에 부정적으로 결핍으로 작용하는 것이 문제일 것인가? 마지막[셋째로] 그들의 찰나 즉 시간은 언제인가? .. 현실적 요인은 나중에(par après) 일어나고, 최근에(récent)를 의미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가? (151)
현실적 요인들을 억압적 결핍의, 즉 “성적 응어리”(stase sexuelle)의, 솟아남이라고 ... 옛날의 갈등은 현실적 응어리(stase)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이다.(151)
- [안정된 생활에서는 외디푸스 콤플렉스 같은 것이 혼동을 일으키러 등장하지 않는다. 왜 안정된 생활이 아닌가? 그것은 그의 욕망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가 그 욕망을 잘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그 실재(실체)를 잘 모른다. 그러면 그 실재를 물어 들어가는 방식은 무엇인가? 자신인가 타인에게서 인가? - 우리는 타인에서라고 우선 답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자들로부터... 그러나 현실적 응어리의 자극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서 온다. 그런데 반성은 자신의 주변으로부터 찾는다. 모든 인식은 안으로부터 밖으로이고, 정체성의 자극은 밖으로부터 오며 그 물음을 내부로(심층으로, 생성적으로) 다시 묻는데서 출발한다. 내부의 일반성을 다시 정립하는 것이 그 자아의 인격성이다. 그런데 이 인격성의 형식을 내부(가까운 사람)로부터 정립을 부정하려 하지만 삶의 현실은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또다시 일상의 자아로 돌아가며, 자기 정체성의 물음을 포기한다.(40RLB)]
이 내부의 질적 갈등은 실재성에 의해 금지된 길들만을 막을 뿐만 아니라[억압], 또한 실재성이 열어 놓았던 길마저, 자아가 이번에는 스스로 금지하여, 막아버린다[억제]. (이것이 이중 막다른 골목의 정식[이중구속]이다). (151)
“죄수들이나, 수용소 수용자들이나, 노동에 지친 자들에게서 이런 예가 발견되지 않는가? ... 우리의 체계적 경향성이 목록을 밝히지 않고서, 실재성의 명증한 죄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아주 다른 노선에서 정신분석이 관념론으로 빗나간 것들을 고찰해보면, 거기서 하나의 흥미있는 시도를 볼 수 있다.
융에서, 겉으로 보이는 파라독스에 연결된 두 가지 근심(soucis, 배려) ... 근심의 하나는 눈앞에 있는 즉 현실적인 장애에 육박하여 끝없는 치료를 단축시키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외디푸스보다도 심지어 선외디푸스적인 것보다도 더 멀리 아주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 마치 가장 현실적인 것이 또한 가장 그 기원적인 것이고, 가장 짧은 것이고 가장 먼 것이기도 하다. (152)
‘나중에’(le par-après)가, 융에 의해 제안된 놀라운 배분에 의해, 시간성 속에서 재도입 된다. 가족과 사랑이 문제인 젊은이들에게는 프로이트의 방법을, 사회적 적응이 덜 된 젊은이들에는 아들러(Adler, 1870-1937), 그리고 이상에 관하여 문제인 어른들과 늙은이들에게는 융(Jung, 1875-1961)... (152-153)
프로이트와 융 사이에 공통점은 ... 여전히 무의식은 신화에 의해서 측정되고 . ... 서로 반대되는 두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점이 다르다. 도덕이나 종교가 외디푸스에서 분석적이고 후퇴적인 의미를 발견하는가, 또는 외디푸스가 도덕이나 종교 속에 신비적이고 예견적인 의미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은 결국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153)
2.8.5. 정신분석의 다섯 번째 오류추리: ‘나중에’
- Cinquième paralogisme de la psychanalyse: le par-après. 153 -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신경증이건 정신병이건, 장애의 원인이 언제나 욕망하는 생산 속에 있다는 것이며,... 욕망하는 생산 ... 그것은 현실적 요인(facteur actuel)이다. 또한 이 요인은 결함(privatif)도 장차(ultérieur)도 아니다. (153)
반대로 외디푸스가 이 현실적 요인에 의존하고 있다. ... 현실적(actuel)이란 최근이란 명칭도 아니고, 오래되었거나 어린 시절의 반대의 의미도 아니고, “잠재적인(virtuel”) 것과 다르다 점에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잠재적인 것이 다름 아닌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다. (153)
이런 의미에서 ‘나중에(le par-après)’란 관념이 우리에게 정신분석의 이론과 실행에 있어서 마지막 오류추리로 보였다. (153) [다섯째 오류추리]
결정할 수 없는, 잠재적인, 반작용적 또는 반동적인그러한 것이 외디푸스이다. 그것은 반동적 형성작용일 뿐이다. [외디푸스는] 욕망하는 생산에 반동으로서 형성되는 거시다. 이 형성을 현실적 인자와 떠나서 그 자체로 추상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154)
2.8.6. 욕망하는 생산의 현실성 Actualité de la production désirante.
정신분석학이 실행하는 것, 그것은 정신분석학이 스스로를 외디푸스 속에 가두고, 외디푸스에 따라서, 심지어는 외디푸스와 관련시켜 전진과 후퇴를 규정함으로써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선외디푸스적 퇴행이라는 관념이 생기는데, 이 관념을 통해 정신병을 특징짓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잠수인형(un ludion)과 같다. (154)
욕망하는 생산은 현실로만 현존한다. 점진들과 퇴행들은 잠재성의 효과화일 뿐이다. 이 잠재성은 욕망의 상태들 덕분에 채워질 수 있는 만큼 항상 채워진다. (154)
두 사람(판코프와 베텔하임)이 퇴행 개념을 문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그녀(판코프)는 말하기를, “정신분열자가 갓난아기였던 때에 받지 못했던 보살핌을 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환자에게 자기 신체의 한계를 재인식하게하는 촉각적인 신체 감각작용들과 그 밖의 감각작용들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의식적 욕망에 대한 재인식(reconnaissance)이 중요하지,무의식적 욕망의 만족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154-155)
욕망을 재인식하는 것은 욕망의 생산을 기관없는 신체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고, 그 기관없는 신체에서 분열자는 욕망하는 생산을 침묵하게 하고 질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굴복한다. (155) [욕망의 생산의 문제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재확인 즉 재인식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 재인식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기억이론을 원용하고 있다고 본다.]
욕망의 재인식, 욕망의 제기(position) 즉 신호(ce Signe)는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생산성의 차원(ordre)에 귀착한다. 이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생산성의 질서[차원]은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만족(satisfation, [라깡의 쥬이상스])과 혼동되지 않는다.그리고 이 생산성의 질서는 정지하고 있을 때나 진행 중일 때나, 선오이디푸적 퇴행과도 또한 외디푸스적 전진적 회복과도 구별된다.(155)
(옮5:12, 56WKH) (6:10, 56WLB) (8:11, 56WLE)
**인명***
1751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 참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1770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 시인, 극작가, 엠페도클레스의 죽음(La Mort d'Empédocle, 1826)
1808 네르발(Gérard de Nerval, 1808-1855),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불의 딸 Les filles du feu』(1854), 『오렐리아, 꿈과 인생 Aurélia ou le Rêve et la vie』(1854)
1856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 신경과 의사, 정신분석가.
1870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는 유태인으로서, 프로이트의 제자였으나 이탈하였다. 그는 무의식 개념이 역동성을 인정하였으나, 인격성의 발생 과정에서나 신경증에서 성관심(sexualité)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역할을 축소하였다.
1873 카프그라(Joseph Capgras, 1873-1950), 프랑스 정신과 의사.
카레뜨(P. Carette, s.d..), “Illusion des sosies et complexe d'Oedipe, 1924”(avec Capgras) 이 글 이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875 융(Carl Gustav Jung, 1875-1961) 그는 프로이트 관념의 유물론적인 측면에 반감을 품어, 5년이나 협력관계에 있었지만, 그의 스승과 결별한다[1912(37살)]. 그래서 그는 “분석심리학(psychologie analytique)”이라는 새로운 학파를 세운다.
1884 랑크(Otto Rank, 1884-1939), 오스트리아 출신 심리학자, 정신분석가.
1896 아르또(Antonin Artaud, 1896–1948) 프랑스 작가, 시인, 시각예술가, 수필가, 극장주. 반 고흐 사회의 자살(Van Gogh le suicidé de la société, 1947) (9) Le Pèse-nerfs, 1925
1897 라이히(Wilhelm Reich 1897-1957), 유대계 오스트리아-헝거리 의사, 정신과의사, 정신분석가. 1933년에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당했다. 덴마크에서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했다. 1939년 미국으로. Dialektischer Materialismus und Psychoanalyse, 1929 파시즘의 대중심리학(Massenpsychologie des Faschismus, 1933: Psychologie de mass du fascisme (1933) The Murder of Christ, 1953.
1901 라깡(Jacques Lacan, 1901-1981) 프랑스 정신과 의사, 정신분석학자.
1903 베틀하임(Bruno Bettelheim, 1903-1990) 오스트리아 출신 교육학자, 심리치료자.
1914 판코프(Gisela Pankow, 1914-1998) 독일 출신 프랑스 여성 신경정신과 의사, 정신분석가.
1921 베스(Jacques Besse 1921-1999) 영화 음악과 연극 음악 작곡가. [Jacques Besse, La grande Pâque, 1969. 베스는 1960년 파리에서 정신병 발작으로 소란(bagarre)을 피웠다고 하는데 베스는 이런 이야기를 쓴 것이라 한다.]
1924 라쁠랑쉬(Jean Laplanche, 1924-2012), 프랑스 정신분석가. 뽕탈리스(Jean-Bertrand Pontalis)와 함께 Vocabulaire de la psychanalyse, 1967
1924 뽕탈리스(Jean-Bertrand Lefèvre-Pontalis, 1924-2013) 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가.
1927 레잉(Ronald David Laing, 1927–1989), 영국에서 반정신의학 운동(avec David Cooper, Aaron Esterson) La politique de l'expérience, 1967(tr.fr. Stock, p.106.)
*
아케론(Achéron gr. Ἀχέρων, Akhron), 그리스 전설에서 지옥의 강. 죽은 자들은 하데스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 샤론(Charon)의 배를 타고 이 강을 건너간다(traverser).
(9:18, 56W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