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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정집서(蘭亭集序), 왕희지(王羲之)
독고시사망(讀古詩詞網) 참조
■ 작품소개, 중국 유기백과(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이 작품은 ‘천하제일의 행서(行書)’로 칭한다.
진목종 영화구년(晋穆帝永和九年) 353년 3월초, 왕희지는 아들 왕응지(王凝之), 왕휘지(王徽之), 왕조지(王操之), 왕헌지(王献之)와 손통(孫統), 이충(李充), 손작(孫綽, 사안(謝安), 지둔(支遁), 태원 왕온(太原王蘊), 허순(許詢), 광한 왕빈지(廣漢王彬之), 고평 치담(高平 郗曇), 여요령 사성(餘姚令谢胜) 등 소장군현(少长群贤) 41명과 회계(会稽) 산음(山陰)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난정집회(蘭亭集會)라 부른다. 이 때, 26명이 시 37수를 지었다. 이를 편집하여 「난정시(蘭亭詩)」라 불렀다. 「난정집서(蘭亭集序」는 「난정시」에 쓴 서언이다.
왕희지는 특별히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엄선하여 누에고치 실로 만든 잠견지(蠶繭紙)에 글씨를 썼다. 앞부분은 집회의 성황과 주변 환경을 묘사했다. 그 후에 필봉(笔锋)은 갑자기 돌변하여 격조가 슬프고 애달프게 바뀐다. 인생의 환락시간은 길지 않고, 인생은 짧다고 하며 ”살고 죽는 것이 한가지라는 것이 허망하듯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도 매한가지로 망령된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작품의 언어는 유창하며,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고, 구절과 산문을 결합하여 민첩하고 자유자재로 흐른다. 감히 역대의 명문장이다.
「난정집서」는 모두 324자이다. 중복되는 글자는 모두 서로 같지 않다. 그중 21개 글자는 각각 우아한 자태(풍운 風韻)를 지녔다. 모두 뇌동(雷動)이 없다. 왕희지는 술을 깬 후 여러 날 지나서 원문을 여러 본 썼다. 다만, 난정집회 때 쓴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王羲之以特選的鼠鬚筆和蠶繭紙書寫,首先写聚会盛况,描述环境——“茂林修竹、清流激湍”,“天朗气清,惠风和畅”。之后笔锋突变,格调转为悲伤,写歡樂時光不長久及人生短暂,然而他并不宣扬“及时行乐”,而是斥了庄子的“一死生、齐彭殇”的论调。通篇语言流畅,不勉强藻饰、通俗自然,结合骈句、骈散,灵活自如,堪称历代名篇。
《兰亭集序》共計324字,凡是重複的字都各不相同,其中21个“之”字,各具风韵,皆无雷同。王羲之酒醒之後,過幾天又把原文重寫了好多本,但終究沒有在蘭亭集會時所寫的好。
< 난정집서(蘭亭集序), 신용본(神龍本), 북경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 소장>
■ 원문(原文)
蘭亭集序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於會稽山陰之蘭亭, 修禊事也。羣賢畢至, 少長鹹集。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又有清流激湍, 映帶左右,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敘幽情。
是日也, 天朗氣清,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及其所之既倦, 情隨事遷, 感慨系之矣。向之所欣, 俯仰之間, 已爲陳跡, 猶不能不以之興懷。況修短隨化, 終期於盡。古人云:“死生亦大矣。”豈不痛哉!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喻之於懷。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殤爲妄作。後之視今,亦猶今之視昔。悲夫!故列敘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所以興懷, 其致一也。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 역문(譯文)
영화 구년, 때는 계축년 음력 삼월 초,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여 수계행사를 가졌다. 많은 명사가 모두 모였고, 젊은이도 나이든 이도 두루 모였다. 이곳은 높은 산 빼어난 봉우리에 있는데 무성한 숲을 이뤄 대나무가 높게 뻗었다. 또 맑은 물은 급하게 흐르고, 정자 좌우로 띠처럼 비추고 있다. 물을 끌어들여 굽은 물줄기에 잔을 띄워 흘러가도록 하고 곡수 가에 벌려 앉았다. 비록 죽관악기와 현악기는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수를 읊으니, 역시 그윽한 정이 화락하게 펼쳐지고 참으로 만족스럽다.
바로 오늘은 하늘도 밝고 날씨도 맑다. 따뜻한 바람은 온화하고 우러러보니 하늘은 참으로 크고, 땅을 내려 보니 만물은 풍성하다. 이런 까닭으로 눈으로 두루 살펴보면 감회가 쏟아지고, 보고 듣고 노는 것이 흡족하니, 정말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다.
무릇 사람들은 서로 교류 왕래하고 한 평생 잠깐 사는데, 때로는 뜻과 포부를 갖고 집안 내에서 말을 주고받는다. 또는 애호하는 바에 의지하면서 몸은 얽매이지 않고 생활한다. 비록 좋아하는 것은 천차만별이고, 조용하고 요동치고 그 모양은 같지 않다. 잠시 만나서 흥미를 느끼면 마음이 움직여 얻게 되고, 스스로 만족하여 즐거워하면 늙음이 장차 다가오는 것도 모른다. 그것에 이미 진력이 나면, 마음은 사물이 변하는 것에 따라 변하고, 감동과 슬픔은 여기에 따라온다. 이 즐거운 것은 이전에, 잠깐사이에 이미 지난 자취로 남게 되니, 오히려 이것은 감회가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한 것이다. 하물며 사람의 수명은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기에 끝날 때에 이르면 모두가 사라지는 것이다. 옛사람의 말이 죽고 사는 문제가 역시 큰일인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으랴!
매번 옛사람들이 재밌고 신나했던 이유를 살펴보면 마치 부신처럼 일치하니, 아마도 그 글을 보고 감탄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고, 감동에 파묻혀 이를 깨우칠 수 없게 된다. 본래 살고 죽는 것이 한 가지라는 것이 허망한 것인 줄 안다면,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도 한가지라는 말 역시 망령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이 현재를 보는 것은 역시 지금 우리가 옛사람의 글을 보는 것과 같다. 아 슬프다! 그런 연유로 당시 사람들의 글을 벌려서 한 곳에 기록하여 두면, 가령 세상이 변했을 때 사정은 달라질 터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흥취란 매 한가지인 것이다. 후에 이것을 본 사람은 역시 이 모아놓은 글에 감회를 가질 것이다.
■ 주석(註釋)
영화(永和) : 동진(東晉) 환제 사마담(司馬聃) 진목제(晉穆帝)의 연호(年號). 재위기간 345年~356년간(12년). 영화 9년 삼짇날에
왕희지는 사안(謝安), 손작(孫綽), 지둔(支遁) 등 41명의 국가 최고의 군정 명사들과 난정에서 집회를 가졌다. 계제
사 예를 거행하고 음주와 시부를 즐겼다. 이 행사 후, 1권의 엮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왕희지가 이 작품집의 서문을
쓰고 이 일을 총술하였다. 永和九年上巳節,王羲之與謝安,孫綽,支遁等41位國家頂級軍政明星在蘭亭集會,舉行
禊禮,飲酒賦詩,事後將作品結爲一集,由王羲之寫了這篇序總述其事)
모춘(暮春) : 음력3월
회계(會稽) : 군 이름(郡名). 현재 절강성 소흥(今浙江紹興)
산음(山陰) : 소흥의 월성구(紹興越城區)
수계(修禊):옛 풍습에 음력 삼월 상순의 파일(위魏나라 이후 3월 3일 삼짇날)에 사람들이 물가에 모여, 재밌는 놀이를 하며 제
계하고, 이름 모를 액운을 좇는 푸닥거리를 하였는데, 실제로는 봄놀이 유희활동이었다. 於陰曆三月上旬的巳日(魏
以後定爲三月三日), 人們羣聚於水濱嬉戲洗濯, 以祓除不祥和求福。實際上這是古人的一種遊春活動
군현(羣賢) : 많은 이름난 선비와 유명인(諸多賢士能人).
필지(畢至) : 모두 모이다(全到)
소장(少長) : 왕희지의 아들 왕응지와 왕휘지는 어린 측이고, 사안과 왕희지는 연장자 측이다(如王羲之的兒子王凝之、王徽之是
少;謝安、王羲之等是長)
함(鹹) : 모두
수죽(修竹) : 쭉쭉 높이 뻗은 대나무(高高的竹子)
격단(激湍) : 물줄기가 매우 급하게 흘러가는 모양(流勢很急的水)
유상곡수(流觴曲水):칠한 술잔에 술을 채워, 띄우면 구불구불한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데 도중에 어떤 사람의 앞에 멈추게 되
면 그 사람은 술잔을 들어 마신다. 이는 옛사람들이 음주를 하며 즐기는 놀이 방식이다. (用漆制的酒杯盛酒,放入
彎曲的水道中任其飄流,杯停在某人面前,某人就引杯飲酒。這是古人一種勸酒取樂的方式). 「삼국사기(三國史記」
에서 말하는 927년 신라 경애왕의 경주의 포석정 연회도 이런 방식의 것이다. 이 연회도중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사로잡혔다.
열좌기차(列坐其次) : 곡수의 곁에 벌려 앉다.
사죽관현지성(絲竹管絃之盛) : 음악을 연주하는 성황(演奏音樂的盛況)
일상일영(一觴一詠) : 한잔 술을 마시고 시 한수를 짓다(喝點酒,作點詩)
유정(幽情) : 그윽하고 깊이 내장된 감정(幽深內藏的感情)
혜풍(惠風) : 온화한 바람
품류지성(品類之盛) : 만물이 번다하다.(萬物的繁多)
품류(品類) : 자연계의 만물(自然界的萬物)
신(信) : 실재(實在)
상여(相與) : 상처(相處), 서로 왕래 교류하다.
부앙(俯仰) : 아래를 굽어봄과 위를 쳐다봄. 잠깐 내려 보고 잠깐 올려보는 사이, 시간의 짧음을 표시한다.(一俯一仰之間,表示
時間的短暫)
오언(悟言) : 꾸밈없는 진실한 대화(坦誠交談)
인기소탁(因寄所託) : 자가가 좋아하는 것을 뜻에 따라 아무 구속 없이 자유롭게 사는 것(就着自己所愛好的事物,寄託自己的情
懷,不受約束,放縱無羈的生活). 인(因)→의(依). 기(寄) → 기탁(寄託)
소탁(所託) : 자기가 의지(애호)하는 사물(所愛好的事物)
방랑(放浪) : 방종(放縱), 무구속(無拘束), 즉 얽매이지 않고 생활하다.
형해(形骸) : 신체(身體)
형해지외(形骸之外) : 「육체(肉體)의 외면(外面)」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외모(外貌)ㆍ체력(體力)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취사만수(趣舍萬殊) : 각자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이 제각각이다(各有各的愛好)
만수(萬殊) : 천차만별(千差萬別)
정조(靜躁) : 안정과 요동(安靜與躁動).
부지로지장지(不知老之將至) : 《논어·술이(論語·述而)》편에, 그 사람됨이야, 분발하여 먹는 것을 잊고, 근심을 잊을 정도로 즐거
워하면, 장차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게 된다.(“其爲人也,發憤忘食,樂以忘憂,不知老之將至云爾)
소지기권(所之既倦) : 좋아하고 얻은 것에 염증을 느끼면(所喜愛或得到的事物已經厭倦)
정수사천(情隨事遷) : 감정은 사물이 변하는 것에 따라 변한다.(感情隨着事物的變化而變化)
감개계지(感慨系之) : 감개는 사물의 변화에 따른다(感慨隨着產生).
계(系) : 부착(附着)
향(向) : 과거, 이전
진적(陳跡) : 옛 발자취
이지흥회(以之興懷) : 이것으로 인하여 마음에 일어나는 감촉(因它而引起心中的感觸).
이(以) : 인하여
지(之) : “향지소흔(向之所欣) ~~~~이위진적(以爲陳跡)”
흥(興) : 발생하다, 일어나다.
수단수화(修短隨化) :수명의 장단은 조화에 따르는 것이다.(壽命長短聽憑造化) 化,自然。
기(期) : 이르다(至), 미치다(及)
사생역대의(死生亦大矣) : 《장자·덕충부(莊子·德充符)》에서 나온 글이다.
흥감(興感) : 재미있거나 신나는 느낌. 또는 그런 기분(氣分).
계(契) : 부계(符契), 부신(符信) 어떤 증표(證票)를 찢거나 나누어 서로 지니다가 뒷날 맞추어 증거(證據)로 삼은 물건(物件)
임문차도(臨文嗟悼) : 옛사람의 문장을 읽을 때 슬프고 가슴아파함에 탄식하게 된다.
유(喻) : 깨우치다. 기뻐하다.。
일(一) : 을 ~~~와 한 가지 모양으로 여기다(把……看作一樣)
제(齊) : 을 ~~~ 와 서로 동등하게 여기다(把……看作相等)
허탄(虛誕) : 허망하고 황당한 말(虛妄荒誕的話)
일생사(一生死),제팽상(齊彭殤) : 모두 장자의 설법(都是莊子的看法)이다.
열서시인(列敘時人) : 당시 같이 모여 있는 사람들의 하나하나의 글을 기록해 두다(一個一個記下當時與會的人)
녹기소술(錄其所述) : 다른 사람이 지은 시를 기록해 두다.(錄下他們作的詩)
수세수사이(雖世殊事異) : 가령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정은 같지 않을 것이다(縱使時代變了, 事情不同了)
기치일야(其致一也) : 사람들의 생각과 정취는 매 한가지이다(人們的思想情趣是一樣的)
사문(斯文) : 여기에 모아놓은 시문(這次集會的詩文)
■ 왕희지(王羲之), 307~365
자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왕우군으로 불렀다.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임이현(臨沂縣) 낭야(琅琊) 출신이다. 동진 왕조 건설에 공적이 컸던 왕도(王導)의 조카이고, 왕광(王曠)의 아들이다. 중국 고금(古今)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으며, 그에 못지않은 서예가로 알려진 일곱 번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와 함께 ‘이왕(二王)’ 또는 ‘희헌(羲獻)’이라 불린다. 16세 때 치감(郗鑒:동진의 명신, 서도가)의 요청으로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
처음에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書風)을 배웠고, 뒤에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벼슬길에 나아가 비서랑(秘書郞)으로부터 출발하여 유량(庾亮)의 장사(長史)가 되고, 351년에는 우군장군 및 회계(會稽:浙江省 紹興)의 내사(內史)에 이르렀다. 그는 명문 출신이며, 경세(經世)의 재략이 있어 은호(殷浩)의 북벌을 간(諫)하는 글과 사안(謝安)에게 민정(民政)을 논한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속세를 피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왕술(王述)이 중앙에서 순찰을 오자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355년(永和 11)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경치가 아름다운 회계의 산수에서 사안 ·손작(孫綽) ·이충(李充) ·허순(許詢) ·지둔(支遁) 등과 청담(淸談)을 나누고,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를 따라 채약에 몰두하는 등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한평생을 마쳤다.
그는 내사 재직 중이던 353년(영화 9) 3월에,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있었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모인 41인 명사들의 시를 모아 만든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난정서(蘭亭序)》라는 그의 일대의 걸작이며, 산수문학의 남상(濫觴)이 되었다.
그는 예서(隸書)를 잘 썼고, 당시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던 해·행·초의 3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한 데 그의 가장 큰 공적이 있으며, 현재 그의 필적이라 전해지는 것도 모두 해·행·초의 3체에 한정되어 있다.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의 필적이 전하여온다. 그러나 이것들은 왕희지의 육필(肉筆) 그대로는 아니고 진적(眞跡)과는 많이 다를 것으로 짐작된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왕희지의 글씨를 사랑한 나머지 온 천하에 있는 그의 붓글씨를 모아,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애석히 여겨 죽을 때 자기의 관에 넣어 묻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여오는 필적만 보아도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네이버 지식백과 - 두산백과)
■ 당태종 소릉의 도굴과 난정기 《新五代史·溫韜傳》 < 자료 : 화인백과(華人百科)>
「신오대사·온도전(新五代史·溫韜傳)」에 의하면, 온도가 진(절도사)에 있던 칠 년 동안 당나라의 모든 능이 경내에 있었는데, 남김없이 모두 발굴하여 거기에 소장된 금은보화를 가져갔다. 당태종의 소릉(昭陵)은 가장 견고하였는데 궁실제도가 넓고 화려하여 인간세계와 다름이 없었다. 중앙에는 정침이 있고 동서로 석상이 배열되어 있었는데, 상위의 돌로 된 상자 중에 철갑이 된 곳에 옛날의 서책과 그림이 모두 보관되어 있었다. 종과 왕의 지묵필적은 새 것과 같았다. 온도는 모조리 이를 가져다 민간으로 퍼지게 되었다. 오직 건릉(당 고종과 측천무후의 릉)만이 바람과 비가 내려 도굴이 불가능했다.
「구오대사·온도전(舊五代史·溫韜傳」에, “경내에 있는 당나라 모든 능은 파헤쳐졌다.”고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鑒)」에 역시, “화원의 적수 온도가 사람을 모아 당나라의 거의 모든 왕능을 파헤쳤다.“고 기록하였다.
건릉이 도굴되지 않고 보존된 것은 기이한 날씨 때문인데 이에 감사해야 한다. 송나라 정대창(程大昌)의 「고고편(考古編)」중에, “역사에 온도가 당의 황제릉을 거의 파헤쳤는데, 홀로 건릉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릉 가까이 가면 언제나 비바람이 몰아쳤다.” 이것이 말하는 바는, 건릉 도굴 시에 아주 이상한 날씨현상이 생겼다.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치고 천둥이 울리므로 업보를 당할까 두려워한 온도는 놀라서 도망치게 되었다.
온도가 중국 제왕의 능에 가져온 파괴는 재앙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많은 진귀한 문물이 파괴되었다. 그래서 사학계와 고고학계는 모두 온도가 중국 묘의 도굴 역사상 가장 위험이 큰 도굴꾼으로 천고의 죄가 있다고 인정한다. 당 태종 이세민이 죽은 후 《난정서》 등 많은 진귀한 명가의 서화 진품을 부장품으로 삼아 소릉으로 가져갔다.
흥미로운 것은 문묵(文墨 글과 서도)을 모르는 온도가 소릉 밖으로 비단으로 장식된 서화를 들고 나온 뒤, 보기에 서화작품은 원하던 가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는 수하에게 위에 있는 비단을 모두 떼어내도록 하고 작품은 버렸다. 사학계에서는 왕희지의 『난정서(蘭亭書)』가 사라진 것을 두고 온도(溫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석연찮은 점은 온도가 하나하나 등록한 훔친 보물에는 난정첩이 없다는 것이다.
후대 학자들은 아름다운 소원을 품었는데, 무측천(武則天)의 건릉에 난정서가 있기를 바라는데, 진실이라면 중화문화의 일대 행운일 것이다.
《新五代史·溫韜傳》:“韜在鎮七年,唐諸陵在其境內者,悉發掘之,取其所藏金寶。而昭陵最固,韜從埏道下,見宮室製度閎麗,不異人間。中為正寢,東西廂列石床,床上石函中為鐵匣,悉藏前世圖書。鍾、王紙墨、筆跡如新。韜悉取之,遂傳民間。惟乾陵,風雨不可發。”《舊五代史·溫韜傳》:“唐諸陵在境者悉發。”《資治通鑒》亦載,“華原賊帥溫韜聚眾,唐帝諸陵發之殆遍。”
乾陵保住不被盜掘之身,要感謝奇異的天象。宋人程大昌《考古編》中稱,“史載溫韜概發唐陵,獨乾陵不可近,近之輒有風雨。”就是說,在盜掘乾陵時,出現了極為反常的天象,狂風驟雨閃,電雷鳴,怕遭報應的溫韜被嚇跑了。
溫韜給中國帝王陵帶來的破壞是災難性的,不可逆轉的,許多珍貴的文物讓其給毀了。所以史學界、考古界都認定,溫韜是中國盜墓史上危險最大的一個盜墓者,有千古之罪。唐太宗李世民死後,把《蘭亭序》等眾多珍貴的名家書畫真跡作為陪葬品,帶進了昭陵。
搞笑的是,不通文墨的溫韜在把一批書畫作品帶出昭陵後,看上的卻不是價值連城的書畫作品,而是裝裱在外的華美綢緞。他讓手下將上面的綢緞全部撕下來,而把作品扔了。史學界推測,王羲之的《蘭亭序》真跡從此不再出現,可能就是讓溫韜給撕毀了。但讓人不解的是,在溫韜逐一登記的盜得寶物中,卻無此貼。
後世學者抱著一份美好的心願,希望《蘭亭序》》在武則天的乾陵內,果真如此,真乃中華文化之大幸。
■ 온도(溫韜) : ? ~ 928, 자료 : 유기백과(维基百科,自由的百科全书)
징자오화위안(京兆華原 현 산시성 야오현) 사람. 5대 시대의 도굴범으로, 당나라 소릉을 도굴한 적이 있다. 온도는 소년 때 도둑이 되었고, 후에 이무정(李茂貞) 무리에 들어갔다. 이름을 이언도(李彥韜)라고 개명했다. 주전충((朱全忠))이 이무정을 포위하였다. 온도는 요주로 내려와 후량(後梁)에 투항하였다. 곧바로 이무정에게 돌아갔다. 주전충(朱全忠)이 후량(後梁)을 세우고 온도가 후량(後梁)을 투항한 후 이름을 온소도(溫昭圖)로 바꿨으며, 요주는 숭주(崇州)로 고치고 여전히 절도사(節度使)를 지냈다.
후당(後唐)에 투항 후 이소충(李紹衝)으로 개명했다. 천성 원년(926년), 후당 명종이 낙양에 들어와 온도를 덕주(德州)로 유배하고 또 조서를 보내며 사약을 내렸다.
京兆华原(今陝西耀縣)人。五代時期的盜墓賊,曾盜掘唐昭陵. 溫韜少年為盜,後事李茂貞,易名李彥韜。朱全忠圍李茂貞於鳳翔,溫韜以耀州降梁,不久復叛歸茂貞。朱全忠建立后梁,温韬降后梁,易名温昭图,改耀州为崇州,仍任节度使。投降后唐后改名李紹衝。天成元年(926年)後唐明宗入洛陽,將溫韜流放德州,又下詔賜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