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마저 즐기든지,
연대하든지
한수영은 소설 <공허의 1/4>에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 실타래로
락스와 락스 냄새를 활용합니다.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는 주인공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락스로 죄다 문대 버리거나
칵 마셔 버리고 싶은--.
소설 속 주인공은 아파트 경비실에서
경리 일을 하며 어머니와 단 둘이 힘겹게 살고 있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어머니는
늘 약장수 꼬임에 넘어가
쓸데없는 물건을 사다 놓곤 합니다.
그런 어머니가 싫고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인해 수시로 찾아오는 통증을 견디기 힘든 주인공에게 이 세상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보기 싫은 얼룩을 지워 내는 락스는
다른 한편 독극물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이 락스에 천착하는 것은
그 두 가지 효능을 잘 알 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인 정희성은 <불망기(不忘記)>에서
시대의 아픔과 친구의 죽음을
포르말린 냄새로 회억(回憶)합니다.
나는 안다
우리들 잠 속의 포르말린 냄새를•••
영화감독 봉준호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갑니다.
미군이 한강에 방류한 건 37퍼센트짜리 포르말린수가 아닌
독극물 포름알데히드였고,
그래서 한강에 <괴물>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괴물들은 도대체 뭘까요?
2011년 한겨레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장편소설 <표백>에 그 답이 있습니다.
바로 20대가 그들입니다.
소설은 포르말린과 락스,
포름알데히드로 완전히 표백되어 버린 현실을 견뎌야 하는 20대의 괴로움과 고통을 오롯이 담아냈습니다.
이른바 '표백세대'입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독재 타도나
민주화 같은 시대적 담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춘에게 주어진 현실은 청년 실업이 100만 명이라느니 한 해 대학 등록금이 1천만 원에 육박한다는
등의 무겁고 어두운 얘기들뿐입니다.
선배세대들에 의해
이미 세상은 하얗게 표백되어 버렸으니,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에게 작가는
표백세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몇해 전, 한 청년이
대형 할인 마트인 이마트에서 일하다
질식사 한 사건이있었습니다.
한번은 그 청년의 어머니가 쓴
편지를 읽다가 그만 눈물을 삼키고
만 적이 있습니다.
편지에서 어머니는,
군대에서도 돈을 모아 어머니께 주던 아들,
휴가 나와서도 알바를 해야 했고,
제대 다음날 일을 나갔다
결국 주검으로 돌아온 아들을 그리워합니다.
장례식장에서 아들의 친구들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검정고시 출신인데다
학비 번다고 일만 하다 죽은 아들에겐
친구가 없었다고 마음 아파합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청춘도 청춘일까요?
친구를 사귈 수도 없는 대학생활이
과연 대학생활인 걸까요?
우리 청춘들의 자화상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88만원 세대'이니, '3포세대'이니, '표백세대'이니 하며
여럿 갖다 이름을 붙입니다.
하지만 청년의 어머니의 편지가
새삼 일깨워 준 건,
이들이 '외로운 세대'라는 것입니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이 무겁다무거운 현실의 짐을
온몸으로 견디려
발버둥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로운 세대가
어디 청춘뿐이겠습니까?
입시에 찌든 청소년부터
정년이 점점 빨라지는 중년,
대책 없이 노후를 맞는 노년까지,
출구 없는 경쟁 속에 모두가 외로워합니다.
하염없는 외로움이
우리 시대의 사화상입니다.
소설가 공지영은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외로움은 당하는 것이지만
고독은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굳이 혼자 있게 되었을 땐
외로움보다 고독을 선택하라는 건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닐 듯합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외로움마저 즐기든지,
외로운 사람끼리 연대하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