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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등불을 지키는 시인들
―김윤환 시집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시와에세이, 2010)
―박부민 시집 『등불이 있는 마을』(시와문화, 2010)
―강경보 시집 『우주물고기』(종려나무, 2010)
김효은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김윤환
우리는 반성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본논리에 의한 경제 성장과 무분별한 개발에만 혈안이 되어 앞만 보고 질주하는, ‘효용’과 ‘효율’이 가장 큰 미덕이 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종교마저 세속화되고, 대형화, 기업화된 지 오래이다. 얼마 전 읽은 기사에선 강남에 2100억 원짜리 거대한 교회가 들어선다고 한다. 2100억 원짜리 신전에서 목회자는 아마도 대통령이나 기업의 총수 대접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신보다 신격화된 인간 앞에서 굽신거리며, 온갖 정치와 로비활동을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은 어느덧 바벨탑으로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반성이 반성을 반성하지 않는 반성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시인이라는 천명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있어, 그들은 김수영의 시 한 구절처럼,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딴 데서 오”는 “바람”과 “예기치 않은 순간에”도 언젠가 오고야 말 “구원”(김수영,「절망」)의 날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개인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성찰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여기, 시대와 역사에까지 각성과 반성을 촉구하는 시편들이 있다. 목회자이면서 시인인 김윤환의 두 번째 시집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가 바로 그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했던가. 시집의 구성을 봐도, 1, 2부에 실린 시편들은 대부분 시인 자신에 대한 지나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일상에서 깨닫게 된 작은 성찰들을 담고 있다. 이어 3, 4부에 오면 시인의 시각은 확대되어 사회문제에 대한 첨예한 현실 비판과 기독교적인 반성의 시편들이 주를 이룬다. 먼저, 이 시집의 서시이기도 한, 수신(修身)의 시편들을 보자.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보았다 발바닥의 지문보다 구두의 뒷굽이 더 선명했다 이승의 벌판을 두루 헤매다 불현듯 부딪힌 돌부리에 부딪혀 마침내 신을 벗는다 감싸던 또 하나의 껍질이 벗겨질 때 비로소 피맺힌 맨발을 본다 잃어버린 발가락의 지문을 찾게 되었다 촘촘히 문양을 그린 발 지문에서 내 안의 우주를 본다 광야에 새로 새길 발바닥을 본다 상처 난 돌부리가 생의 반환점이 되었다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상처는 아름답고 발자국은 더욱 선명해졌다
― 「발자국」 전문
시인은 문득 지나온 발자국을 돌아본다. “구두의 뒷굽”만이 선명하게 찍혀있을 뿐, “발바닥의 지문”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발바닥의 지문”은 시인 자신이 스스로 걸어온 ‘과거의 길’이기도 하고,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할 ‘미래의 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이정표와 사명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이정표와 사명은 함부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돌부리에 부딪히고, 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지문의 형태로 “피맺힌 맨발”에 새겨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지문 안에서 시인은 우주를 본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거친 광야의 길에 선명하게 새로 새겨질 발자국은 피투성이에 상처뿐이겠지만, 그래도 신을 향해 걸어가는 발자국이기에, 아프지만 신성하고 아름답다.
삶에 대한 반성은 작은 일상에서 찾아지기도 한다. 시인은 “매운 것들로 빈틈없이 여물어”가는 “마늘 육쪽의 눈물 알갱이”(「마늘 밭에서」)에서 세상을 열어 보이는 힘을 보며, 「깨어 있다는 것」에서는 양계장에 밤새 켜진 백열등을 보고 “깨어 있어야 생명을 낳는다는” “가혹하면서도 경이로운” 진실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은 살아있음이란 부단히 깨어 “불면의 가혹함을 견뎌”낼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있으며, 또 ‘깨어있음’이 바로 ‘살아있음’의 전제조건이라고 일깨워준다. 그런가하면 그는 「서울역 방향제」에서 방향제가 사람보다 공평하고 성실하다고 역설한다. 외모, 직업, 나이, 성별, 재산에 상관없이 묵묵히 제 향기를 대가없이 아무에게나 나눠주는 방향제 하나도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또한 그에 의하면, 진주 역시 몸속에 들어온 모래가 무조건 값진 보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진 고통 끝에 그냥 죽어버리는 조개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진주의 핵은 모래가 아니라 “고통을 이겨낸 침묵의 진약/죽음을 몰아낸 결정체”(「보석이 된다는 것」)라는 인식의 깨달음에 이른다. 이 외에도 「현기증」이라는 시에서는 “날마다 같은 거짓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지, “거짓말에도 이자가 붙어 삶의 원금을 다 갉아 먹은 것은” 아닌지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현기증을 느낄 때마다, 그래도 시인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살고 싶다고” 외롭고 고단하게 외친다.
이상 1, 2부에 실린 작품들을 소략하게 살펴보았다. 3, 4부에 오면 시인의 눈은 보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사회와 역사를 비판하는 데 이른다. 인권운동가 에바디에게 헌정하는 작품(「시린 에바디를 위한 변명」)에서부터, 용산참사(「신바벨탑」)와 아프가니스탄 파병문제를 다룬 시(「해방의 조건」), 노무현 대통령(「노란 나비」)과 김대중 대통령에 관한 시(「김대중 눈물샘」), 분단의식을 보여주는 시(「자유로 유령」) 등 이번 시집에서 보여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지대하다. 그는 그러나 현실 비판에만 그치고 있지 않다. 세상을 비판과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그치면 그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 거기에 실천과 모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기독교적인 사랑과 포용의 눈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더불어 현실적인 대안을 절실하게 찾아 역동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을 강조한다. 그의 표제시이기도 한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를 읽어보자.
달력도 없고 신문도 없는/까띠뿌난 마을에/손톱에 때를 묻히며 그는 서 있다//십자가도 초라한 예배당 모퉁이에/뽀얀 살의 내가 부끄러이 고개 숙이니/곱슬머리 맑은 눈의 그가/잘 왔다 인사한다//…중략…//물소 달구지를 타고/도시로 떠나는 형제를 향하여/손 흔드는 까띠뿌난의 예수//다시 보자/거룩한 손 오늘도 흔들고 있다
―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부분
필자는 이 시를 읽고 성경 한 구절을 떠올렸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태복음 25:40』)가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예수는 어디에 있을까.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자동차에 으리으리한 궁궐 같은 성전에 임재할까? 앞서 말한 2100억 원짜리 교회당에 귀족처럼 성좌에 앉아계실까? 아니다. 그는 까띠뿌난과 같은 가난하고 궁핍한 곳에 있다. 그는 우리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서 허름하게 누더기진 옷과 병든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찾아간 까띠뿌난이란 곳은 필리핀의 오지마을로 아직 문명의 영향이 거의 없는 미개의 가난한 시골이다. 그곳에서 시인은 “내가 기다리던 그”, “나를 기다리던 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다. “달력도 없고 신문도 없는” 오지의 마을에 “손톱에 때”가 낀 까만 피부에 곱슬머리를 한 그는 맑은 눈으로 ‘나’에게 잘 왔다고 인사한다. 그런가하면 그는 도시로 떠나는 형제에게도 잘 가라고 다시 보자고 “거룩한 손”을 흔든다. 그들은 가진 것은 없지만 한 목소리로 함께 노래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도 “사랑으로 불을 밝”힌다. 그래서 그들의 마을은 세상 어느 곳보다, “환한 웃음”으로 눈물겹고 밝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제 화려하고 편안한 곳에 안주하지 말고, “사랑한다면 머물지 말고 떠나라/사랑한다면 말하지 말고 먹이라”(「중인」)고 “변화된 몸, 변화된 마음”을 보이라고 증인의 삶을 살 것을, 독자들에게 그에게서 온 편지의 형식을 빌어, 메시지를 담아 전하고 있다. 그는 시집 후기에서 이십프로의 열정으로 쓴 시라는 후배의 개탄에 어느 것에도 100퍼센트의 삶을 살지 못한 불완전한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반성하고 있지만, 그는 시인으로서도 목회자로서도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누구보다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기실 어차피 온전한 100퍼센트란 처음부터 신(神)만의 것이 아니었던가.
『등불이 있는 마을』, 박부민
박부민의 시는 향토적이다. 그의 시에는 유년이 있고, 고향이 있고, 등불이 켜진 작은 마을,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박한 가족들이 둘러앉아 피우는 사람의 향기가 있다. 그래서 그의 시편들에는 도시의 공해나, 오염된 정치, 대중 문화적 경향이나 비판, 분열적 증후나 화려한 수사(修辭)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은은하게 배어있는 묵향과 고향의 색채들은 따뜻한 온기마저 품고 있어 훈훈하기 그지없다. 그가 시인이기 이전에 목회자의 삶을 살고 있음에 유의하여 작품들을 읽어봐도, 기독교적 색채가 두드러진다거나, 종교적 성향에 기대어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따뜻하고 작은 것들을 소중히 세심하게 관찰하고, 거기에 기대어 시골 마을에서의 소박하지만 정겨운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그만 조그만 일에 감사할 때/나는 詩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나는 詩人입니다/나의 하루가 詩입니다”(「詩」)라고 고백하는가 하면 “노을에/댓잎 버무려/詩 김치”를 담아 “눈발 치기 전/힘내어/뒤꼍에 항아리”(「김장」)에 잘 묻어두기도 하는 ‘시의 김장’을 잘 담는 토속적인 시인이다. 거대한 담론을 품고 있어야 꼭 좋은 시는 아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혹은 이 시대에 사라져가는 풍경들을 사진을 찍듯, 이미지를 잘 포착하거나, 혹은 거기에 융화된 삶 자체를 형상화하여 은근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그 역시 살아 있는, 삶에 가까운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쩔렁쩔렁 순록의 방울 소리가 요란하게 문 앞에서 멈출 때 등불을 켠 눈부신 금빛 썰매는 도착했다 천지에 쏟아져 내리는 흰 눈송이들을 헤치며 형과 나는 새로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품고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따뜻한 나라로 세월처럼 날아갔다
― 「크리스마스 카드」 부분
박부민 시인은 이번 시집의 자서(自書)에서 그에게 시 쓰기는 이웃을 깨우는 “서늘한 등불”이자 “그리움의 등불”이며 이 작은 ‘시의 등불’을 마을과 이웃에 밝히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이 작은 불빛의 시작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위의 작품을 살펴보면 그 불꽃이 유년에서 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눈이 쌀밥처럼 내리던” 가난하고 배고프고 춥던 어린 시절 밤새 성탄절 카드를 만들면서, 카드 위에 그렸던 “정갈한 나라”와 “따뜻한 나라”로 시인은 어느덧 지금 “세월처럼 날아왔다” 그리고 어린 시절 꿈꾸던 그 작지만 평온한 나라에 교회당을 짓고, 목회를 하면서 농사를 짓듯,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유년의 배고프고 춥던 겨울은 지나고, 시인은 따뜻하고 환한 봄날 한 가운데 서 있다.
겨울을 온전히 바래다주지 못한 아픔은
바람에 뼈를 부비며 애써 늙고 있지만
잔정이 새순처럼 돋아나
누구든 연초록에 미리 젖고 말겠다
억새풀 비벼 넣어 황토밥 쪄 먹고
송천댁 가마솥 연기로 세수하고 나면
천황봉이 눈 묻은 어깨를 툴툴 털고
껄껄대며 내려온다. 여기가 봄이다
― 「월남리」 부분
화자는 봄날 “연초록”의 기쁨과 설렘에 젖어 있지만, “겨울을 온전히 바래다주지 못한 아픔”이 아직 가슴 한 켠에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유년의 아픈 겨울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고, 지금도 남아 “바람에 뼈를 부비며” 화자의 삶과 함께 같이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더 이상 아프기보다는 “넉넉한 느티나무 한 그루”와 “냇물”, “동백숲”과 “설록”과 “천황봉” 등 자연의 품에서 “눈 묻은 어깨를 툴툴 털고” 자연과 동화된 삶을 훈훈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간혹 유년의 “아픔”은 팥죽처럼 끓어오르기도 한다. “아궁이에 꽃불을 낳던/바람을 등에 꽂은/눅눅한 아버지/곁에 흐린 어머니/산비탈에 찍어둔 발자국들이/한 솥에 몰래 들어와 끓고 있었다”(「팥죽」)에서 볼 수 있듯, “허연 고향”에 눅눅하고 흐릿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마그마의 붉은 영혼”처럼 헐떡거리며, 그에게 불티로 살아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별들이 세수하고 뜬금없이 나들이 나온/하얀 대낮 벌컥벌컥 항아리째 생수를 들이켜는 그런/눈부시게 목마른 날”(「중앙선 열차」) 그에게 그 불티는 방금 세수한 별처럼 따뜻하고 깨끗하게 세상을 밝혀주기도 하지만, 반면 하얀 대낮의 타는 듯한 갈증처럼 시인의 심지에 남아 어쩌면 계속 시의 등불을 밝히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기도 하리라.
사람 사는 마을에 아직 등불이 있다
등불이 있는 골목에 바람이 분다
바람 부는 지상에
내 빛나는 영성(靈性)의 별떨기들이
그 청청한 눈망울들이 쏴아쏴아
흐르고 내리고 깊어지는
이 설야(雪夜)의 순결의 끄트머리에서 떨며 밤을 지새우나니
내가 지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새벽까지 눈꽃의 등불을 지켜주어야만 한다
― 「등불」 부분
끝으로 이번 시집 『등불이 있는 마을』의 표제시에 해당하는 작품을 읽어보았다. 시인은 “지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밤새 등불을 지켜야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그의 밤이 “설야의 순결”과 “빛나는 영성의 별떨기들”로 환하게 밝혀지길, 더불어 그가 “온갖 불빛 거느리고 벅차게 달려가”(「전라선」) 승리하기를, 진심어린 건투를 빈다.
『우주물고기』, 강경보
우주선(宇宙船), 우주를 운행하는 배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부터 사람들은 우주를 거대한 바다로 여겼음에 분명하다. 비행기(飛行機)나 기차(汽車)처럼 기계(機)나 차(車)가 아니라 배(船)라고 불렀으니 말이다. 이처럼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바다에 비유한다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물고기나, 수생식물쯤으로 여겨도 비약은 아닐 것이다. 여기,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물고기”와, “수생의 푸른 꿈”을 꾸는 시인이 있다. 시집 『우주물고기』의 강경보 시인이 바로 그다. 그는 ‘우포늪 왕버들’과도 통신하고 교감하는가 하면, ‘우포늪의 말’을 알아듣기도 한다. 그는 “왕버들 뿌리 끝에 달린 이동통신기지국”에서 쏘아 올리는 “물젖은 전파”를 통해 라디오인 양, “추억의 소리”를 전해 듣기도 한다. 인용한 시의 일부를 보자.
저 왕버들 뿌리를 만져본 적 있니?
일억년도 넘은 우포늪이 말을 다 한다는데
말이 샘물처럼 고여서 이제는 아예
제 몸이 말이라고 그냥 그런 줄 알라고
그때부터 마음의 생각들 어린 물풀로 올린다는데
왕버들 뿌리 끝에는 이동통신기지국이 있어서
어젯밤부터 물젖은 전파를 내 가슴에 쏘고 있다
마름풀 가느다란 줄기가 팽팽하게 진동하면
나는 겨드랑이 어디쯤서 추억의 소리 듣는데
가려움은 피돌기를 따라 발끝까지 흐르는구나
그래 알겠다,
가시연 생이가래 개구리밥처럼 나도 한때는
수생의 푸른 꿈 꾸었는지 몰라
― 「우포늪 통신」 부분
한편 “왕버들 뿌리 같은 어머니에게서 뻗어나”온 그는 간혹 어머니에게 “아직은 잘 살고 있습니다”라고 소식을 전송하기도 한다. 또한 “가시연 생이가래 개구리밥처럼” “수생의 푸른 꿈”을 꾸던 그는 아직도 몸에서 “자각자각自覺自覺 무심무심無心無心/물소리가 나”기도 한다고, 그리하여 그의 태생이 우포늪의 왕버들과 다르지 않음을 자각하는 생태학적 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장례식장 울타리 밖 플라타너스”를 보고 “나무들처럼/나도 쇄골 아래쯤에 번지番地 하나 새기고 싶다”고 그리하여 “가렵고 향내나는 물관부 땅에 접붙이고”(「봄의 장례식장」) 가슴에 새들을 위한 문패하나 달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하는가 하면, “어찌 아니랴, 오래전부터 나는/검둥오리사촌의 사촌이었으니”(「검둥오리사촌에 관한 사유」)라고 하는 등, 모든 유기체가 실은 하나의 네크워크로 친족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끓는 물에 데쳐 그늘에 오래도록 말렸을 국화차 알갱이가
내 상처를 닮았다
상처 난 자리에 노랗게 오글오글 눌러붙은 딱지
손톱만한 가려움이 온몸을 헤엄치게 하는 날
― 「국화차 한 잔이」 부분
위의 시에게 화자인 “나”의 상처는 “국화차 알갱이”의 그것처럼 식물을 닮기도 했고, “온몸을 헤엄치”는 물고기의 그것처럼 동물을 닮기도 했다. 식물성과 동물성이 그의 몸 안에 공존하며 상처처럼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의 유전자지도에 처음부터 입력된 것들이리라. 그 상처의 “아릿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달빛 노란 밤”에 시인은 “그냥 되다만 것 아직은 붉은 것”을 괜히 열어봤다며, “아릿하게 눈뜨고 있는” 그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한편, 이 같은 상처는 욕창처럼 곪아있기도 하는데, 상처의 바로 위 기억의 상류에는 육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
국수나무 줄기 골속을 벗기면 꼭 어머니 허리 같은 하루가 나온다 어머니 허리에 매달린 작살나무 가늘고 뾰족한 손가락 흔들며 설렁설렁 먼 산길 가리키면 저기 뚝 떨어진 산길 한켠에 쓴 얼굴 소태나무 아버지 헛헛 뒷짐 지고 서 계신다
― 「수락산 국수나무 작살나무 소태나무 가족은,」 부분
상처는 다만, 아버지의 몸에 왔다 가는 것이려니
몸은 상처의 집이라
…중략…
상처가 늘 가장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닮아 곪아 터진다는 것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 후에 알았다
…중략…
어느 날 아침 저 혼자 분출하여 흥건해진
내 등의 활화산,
용암은 아직 끓고 있다
― 「욕창」 부분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상처를 지닌다. 어머니의 양수 안에서 격리되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의 첫 고통과 몸의 탯줄을 자르는 고통이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꼽은 가장 원시의 상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와의 격리로부터 온 가시(可視)적 상처의 흔적이 ‘배꼽’이라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내면적 상처는 아마도 힘겨운 생의 무게를 이어받아 짊어져야 하는 ‘등의 상처’가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이처럼 몸을 “상처의 집”이라고 정의한다. 상처들이 살고 있는 집, 그 무수한 상처들은 또한 “가장 그리운 사람의 마음을 닮아 곪아 터진”다고 하니, 상처는 그리움의 흔적이자, 한 송이의 꽃으로, 혹은 활화산의 용암처럼 평생 동안 끓어오르는 것이리라. 이는 추하거나 더러운 것이 아니라, 생을 빛나게 하는 혹은 뜨겁게 달구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다른 시편 “알겠네, 삶이란 죽음이 꽃피는 일이며 빛이란 어둠이 꽃피는 일임을”(「홍련암」)에서 알 수 있듯, 상처가 상처 아닌 몸과 인접해 있는 것처럼, 삶 또한 죽음과 나란히 인접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무늬, 문양이며 굳이 이름붙이자면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에게 어느 날 여섯 살 난 아이의 사랑에 관한 물음은 화두가 되어 가슴 깊이 날아온다. 그리고 시인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같은 화두를 툭 하고 건넨다. “사랑은 에너지가 아니지?/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지?/마음에 있는 거지?/마음은 사람 몸에 있지?/마음이 몸 밖에 있으면 다 날아가지?” (「화두話頭」)라고.
김효은
경기도 안양 출생. 2010년 『시에』로 등단.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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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더욱 주목 받은 시집, 더욱 사랑 받는 시인들이 되시기를!
정말, 등불 같으신 분들의 시집입니다!.. 목사님과 목사님과 목사님 같으신 분..ㅋ
엇...??? 이주언 시인 댓글이 맞네요..^^
목사님 같은 사람..... ㅋ^^~ 열대야에 정말 잠도 안오는 나날입니다. 다들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김효은 선생님 수고하셨고, 이미지와 행간에 숨은 의미들을 잡아올려 요리하는 솜씨가 일품이군요. 더 좋은 평론가로 도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운 공간, 참 보기 좋습니다.
김효은 선생님처럼 맑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