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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1장 3-5절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저들에 대하여 흩어진 나그네로 표현합니다. 6절에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되는 내용을 말하지만 베드로 당시 유대인들의 경우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자기가 살던 유대 지역을 떠나 이방 땅으로 흩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을 ‘diasporav’[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 일차적으로 흩어진 나그네라 할 때 이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할 때 거기에 유대인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여 흩어진 나그네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히브리서 1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는 측면에서, 또한 하늘에 있는 도성을 사모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산다는 차원에서 흩어진 나그네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할 때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소개합니다. 물론 유형교회 안에 반드시 택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곡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도 있을 수 있습니다. 택자만이 아니라 유기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택자인지, 누가 유기자인지는 알 수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이 말씀을 편지로써 흩어진 나그네에게 보낸다고 할 때 분명 유형교회를 향해 보냅니다. 말씀을 받아 보는 대상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성도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효력은 누구에게만 있는가? 택자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효력이 중도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나타날 수 있는 대상도 누구에게만 있는가? 택자입니다.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면서 저들에 대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이런 말씀의 효력까지를 염두 해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택자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난 자요,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이란 예지인데, 이 예지는 인간에게 원인과 조건을 둘 수 있다는 의미의 예지가 아니라 작정하실 바를 예지하신다, 혹은 작정과 같은 의미에서의 예지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누구는 영생으로 선택하셨는데, 그것을 미리 아셨다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인간에게 있는 어떤 원인과 조건에 따라 택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본래는 순종할 수 없는 자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게 하시고, 중생 이후에도 사람 스스로가 아니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해 결국 순종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신자를 향해 은혜와 평강이 있되 더욱 많기를 기원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이 모든 일의 주체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3절 상반부를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일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때 삼위는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되어 우리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삼위라고 해서 또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되었다고 해서 권능과 영광에 있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신성 안에 삼위로 계시지만 세 위격은 본질상 동일하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 성부로 계시되는 분이 계시고, 또한 성자로 계시되는 분이 계시고, 성령으로 계시되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이때 성부, 성자, 성령은 한분 하나님이 어떤 때는 성부로 계시되시고, 어떤 때는 성자로 계시되시고, 어떤 때는 성령으로 계시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가 아닌 분으로 계십니다. 성부는 오직 성부이시며, 성자는 오직 성자이시며, 성령은 오직 성령이신 분으로 계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각 위격의 고유성이라고 하는데, 성경에 계신 된 바에 의하면 성부는 누구로부터 났다(발생), 혹은 누구로부터 나오신다(발출)는 표현이 없습니다. 반면 성자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났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는 전 신성의 근원으로서 성부와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로 표현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로부터 나오셨다는 표현과 함께 성자로부터 나오셨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의 영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성자의 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요, 성자의 근원은 성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근원을 말한다고 해서 성자가 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 성령이 나오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삼위는 한 분 하나님으로서 동일하게 영원하시며 무한하시면 불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할 때 이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누군가? 위격 상호간의 관계를 따라서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무조건 성부 하나님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는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는 피조물의 근원으로서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를, 나아가 성령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야 9장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이 말씀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의 이름을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내용에서 그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와 동등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명확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성부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 즉 성부시란 겁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인데, 이때 찬송을 받으신 하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으로만 제한되는 것인가? 문자적으로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조금 더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하지 않은 채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분명 성부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찬송의 이유는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신 주체는 누구신가? 성부 하나님이시기에 성부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 성부 하나님만의 일인가? 거기에 성자는 관여하지 않으시고, 성령 또한 관여하지 않으신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으로써 분리되지 않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로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는 오늘 본문처럼 계시하시지만 성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 성자와 성령은 제외된 체 일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가 일하신 곳에는 성자도 함께 일하시고 성령도 함께 일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누군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부에게 돌려지는 본문의 찬송은 형식은 성부 하나님께 찬송한다고 되어 있지만 성자와 성령을 제외한 성부에게만 돌려지는 내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계시된 내용으로써는 성부에게 돌릴지라도, 성부와 분리할 수 없는 성자에게 또한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성령에게,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 이 찬송이 돌려지고 있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말했지만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3절 하반부부터 5절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2절에서 설명한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인데, 우선 3절 하반부에 보시면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는 3절 상반부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때도 성부 하나님만이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 계신가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성부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지만 성자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성령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긍휼을 성부에게 돌리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특히 그의 많으신 긍휼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거듭남 혹은 중생의 유효적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많다’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에베소서 2장 4절에서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많은 긍휼, 풍성한 긍휼 혹은 그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어떤 공로의 작은 부분도 거듭남에 이바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어떤 방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의를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유효적 원인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질료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질료, 재료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가? 언젠가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과 방편으로 정해졌다는 의미에서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선택의 수단입니다.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을 선택하셨다고 할 때 그들은 누구를 통해서 구원 받도록 정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도록 정하셨습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이처럼 그리스도는 선택의 수단이라는 차원에서, 혹 원인으로 돌리고자 한다면 구원을 위한 매개체요 방편이라는 차원에서 질료적 원인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거듭남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로 말미암은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 긍휼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할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지난주 본문 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우리는 어떤 자들인가? 에베소서 2장 3절에서 표현하는 것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녀입니다.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고,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되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것으로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고, 그가 죽을 때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죽게 하셨던 겁니다. 영적인 죽음, 다시 말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바로 그 허물과 죄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행한 작은 일이라도 있는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만으로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고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는 너무나도 마땅히 돌려야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궁극적인 목적, 다시 말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간혹 교회 사역에 있어 궁극적인 목적을 사람의 구원에 두는 경우들이 있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사역에 있어 사람의 구원에만 목적을 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이해로 하자면 인간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바빙크의 평가에 따르면 루터주의에 머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인간의 구원에만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구원을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말하고 믿음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자신의 영광에 이르느냐에 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이르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자신의 영광에 이르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는 인간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구원사를 중심으로 더 깊이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거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역사 안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으로까지 올라가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뜻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만족하기까지 결코 쉬지 않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아!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거듭났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듭났구나!”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만을 찬송하는 것, 무엇보다 거듭남에 있어 우리가 행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줄 알고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시는 것이 합당한 줄 알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긍휼을 베푸시고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자들로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3절 하반부를 보시면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했다고 할 때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이 있도록 했다고 말합니다. 이 산 소망에 대해 설명하기를 4절에 보시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하늘에 간직한 것이 우리의 살아 있는 소망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고 설명합니다. 매튜 풀 주석은 썩지 않는 것에 대하여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것, 그것은 한 번 받으면 빼앗길 수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양도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더럽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그 자체로 정결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더럽히지도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쇠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의 생명력과 상쾌함이 항상 살아 있는,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는 자는 결코 그것으로 인해 질리지도 않고 물리지도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둘 것을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마6:19-20 참조). 보물을 땅에 쌓아 두면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 할 수 있지만, 하늘에 쌓아 두면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을 때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소망을 두신 것은 재물로 대표되는 것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말한 것처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골3:2). 골로새서 3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는 말씀도 하는데, 우리의 모든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말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택들, 그것만의 우리의 산 소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들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썩는 것, 더럽혀지는 것, 쇠하게 되는 것을 찾고 구하면서 소망한다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기의 영광을 구하되,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누릴 그 영광을 더욱 사모하는 모습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산 소망은 결코 이 땅에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하여 너희를 위하여 간직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은택들을 누리고 있지만 완전체로 다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것으로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것은 바로 부분적으로만 누리던 것을 온전하게 누리는 거기에 있습니다. 몸 된 교회의 완성, 성도라고 불리지만 성도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성화되는 것, 그리고 부활체를 입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는 것, 이것이 우리가 소망해야 할 영생의 유업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일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5절을 보시면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보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예비해 두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놓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셨고, 그렇게 산 구원의 완성을 지금은 주실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까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으르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백성을 반드시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야지만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을 다시 보시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다음 주에 살피겠지만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라고 말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라고 할 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본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 세상은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시험이 우리를 잠깐이지만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곤란한 일들 때문에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언제까지냐?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을 때까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견인의 은총이라고 합니다.
보통 견인(堅忍)이라고 할 때 한자나 영어나 ‘인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견고하게 하고 인내하는 것, 이것이 견인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성도의 견인이라고 할 때 성도가 견고하게 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하지만, 신학에서 견인이란 말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영원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인의 은총이라고 하는 겁니다. 은총이라는 말 자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일도 하나님의 전적인 일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 이하를 보면 이런 견인의 은총이 무엇인지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이 부분만 확인하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8:35-36) 이 땅에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일 가운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위로를 얻고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왜 우리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가? 내 능력이 강해서인가? 내 인내가 끈질겨서인가? 아니면 베드로전서 1장 6절에서 말하는 시험이 그렇게 힘든 시험은 아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시험 외에는 주시는 일이 없지만, 감당할 수 있다고 해서 항상 쉬운 시험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시험이기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사탄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내기 위해 끊임없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면서 우리를 겁박하는 것입니다(벧전5:8).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넘어가지 않는 이유, 잠시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금 서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힘도, 우리의 끈질김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베드로는 성도가 어떤 자인지 지난주에 이어 다시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게 될 때 그 소망은 결국 마지막 때 우리에게 주어질 내용으로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반드시 주어질 수밖에 없는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견인의 은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 견인의 은총으로 역사하실 때 나타나는 외형이 무엇입니까? 인내요, 견딤입니다. 이것 때문에 마치 우리에게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견딜 수 있는 실력이 있어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붙드시기 때문에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비록 시험이 있는 이 땅에 살지만, 그리고 그런 시험 속에서 자주 넘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견인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런 시험 속에서도 산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에 대하여 우리의 마땅한 바는 무엇입니까? 사도 베드로는 마땅히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성도는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받고 있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 받고 있고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행하고 계신 하나님만을 영원토록 찬송해야 할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